우리가 쓰는 휘발유·플라스틱·의약품·화장품은 거의 다 검은 원유에서 갈라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 원유를 나누는 방식은 100년 넘게 거의 그대로입니다 — 거대한 증류탑에서 350~400℃로 펄펄 끓였다가 다시 식히는 것. 단순하지만 막대한 열·냉각수를 먹고 이산화탄소를 뿜죠.
카이스트 고동연 교수 팀은 조지아텍 라이언 라이블리 교수팀과 함께 “끓이지 않고 거를 순 없을까”라는 물음에 도전했습니다. 그 답은 머리카락보다 얇은 막이었고, 이 연구를 Nature(2026-06-24)에 실었습니다(제1저자 최지훈·서혁준 박사). 뉴스 한 줄 뒤의 과학을 하나씩 만져봅니다.
왜 원유는 ‘끓여서’ 나눴나
원유는 가벼운 가스부터 무거운 아스팔트까지 끓는점이 다른 수천 종의 분자가 섞인 국물입니다. 증류탑은 이 국물을 끓여, 낮은 온도에서 먼저 증발하는 가벼운 것(나프타·휘발유)부터 층층이 뽑아냅니다. 잘 되지만, 그 많은 양을 전부 끓이느라 에너지를 가장 많이 먹는 공정중 하나가 됐죠.
국을 통째로 팔팔 끓여 김을 받아 나누는 셈입니다. 나누긴 잘 되지만 불값이 엄청나게 듭니다.
크기의 역설 — 구멍이 분자보다 큰데 왜 걸릴까
연구진은 코팅 없는 값싼 다공성 막(폴리아크릴로나이트릴, PAN)에 원유를 그냥 흘려봤습니다. 이 막의 구멍은 15~18nm, 원유 분자는 2nm 이하. 구멍이 분자보다 7~9배나 큰데도 원유가 술술 빠지지 않고 걸러졌어요. 예상과 정반대의 이 결과가 연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비밀은 ‘원유가 스스로 만든 채’
긴 사슬의 무거운 성분(탄소 17개 이상 파라핀)이 구멍 입구에 한쪽씩 달라붙어 상온에서 스스로 굳으면서, 큰 구멍이 조금씩 좁아지다가 원유를 거르기 딱 좋은 약 2nm에서 멈춥니다. 사람이 코팅한 게 아니라 원유가 제 몸으로 나노 채를 짜낸 셈이죠. 아래에서 시간을 밀어보세요.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진 채는 오히려 특수 코팅막보다 오래버텨서, 실험실에서 28일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기존 최첨단 막보다 약 23배 빠른 투과를 보였습니다.
통념을 뒤집다 — 받침이 주인공이었다
지금까지 분리막 연구는 맨 위 비싼 선택층이 분리를 다 한다고 믿고, 아래 다공성 지지층은 그냥 받침 취급했어요. 이번 연구는 그 받침만으로도원유가 갈라진다는 걸 보였습니다. Nature 편집자가 “반직관적”이라 평한 이유죠.
선택층이 다 한다(통념)
얼마나 아끼나 — 에너지·탄소·비용
증류탑 앞에 이 분리막을 놓아 원유를 먼저 걸러주면, 뒤에서 뜨겁게 끓일 양이 줄어듭니다. 전 공정을 모사한 결과 — 에너지 약 32%, 이산화탄소 약 38%, 냉각수 약 21%, 연간 운영비 약 36%까지 줄었어요. 공정을 바꿔 비교해보세요.
뜯지 않고 ‘배관 하나 더’ — 상용화의 현실
가장 큰 장점은 기존 증류탑을 부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설비는 그대로 두고 앞단에 분리막 유닛 배관 하나를 더해 통과시키면 됩니다. 다만 실제 정유·석유화학 공장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 소재 회사·엔지니어링 회사·정유사가 함께 실증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요.
쓰임새는 원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용매 회수, 의약품 정제처럼 “끓여서 나누던” 여러 공정에 같은 원리를 댈 수 있습니다.
정리
끓여서 나누기 → 걸러서 나누기. 값싼 막에 원유를 흘렸더니, 원유가 스스로 2나노 채를 만들어 가벼운 유분을 걸러냈고, 증류 앞에 두는 것만으로 에너지·탄소·비용을 3분의 1가량 줄였습니다. ‘받침일 뿐’이라 여겼던 곳에서 답을 찾은, 상식을 뒤집은 발견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