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됐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의 힘으로 막으려던 교섭이 틀어진 뒤 탄압으로 돌아섰습니다.
배경
천주교는 18세기 말 조선에 들어와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같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교세를 넓혔습니다. 1860년대에는 프랑스 선교사 12명이 몰래 들어와 활동했고 신자 수는 2만 명 안팎이었다고 합니다. 대원군 주변에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었고,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크게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60년대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해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 등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영국·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를 막자고 대원군에게 건의했습니다.
전개
1866년 2월 말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서 붙잡혔고, 3월 7일(양력)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와 함께 한강 새남터에서 처형됐습니다. 3월 30일에는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위앵 신부가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됐습니다.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리델·페롱·칼레 세 신부만 살아남았습니다.
교섭은 선교사들과의 만남이 늦어지면서 흐지부지됐고, 그사이 러시아의 위협도 누그러졌습니다. 한편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조정 안에서 천주교와 가까이한다는 비판이 나오자, 대원군은 1866년 음력 1월 대대적인 탄압으로 돌아섰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붙잡혀 처형됐고, 남종삼 등 조선인 신자도 잇따라 처형됐습니다. 탄압은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거치며 더 거세졌고 1871년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처형된 신자는 흔히 8천여 명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 천주교 역사상 가장 큰 박해였습니다.
살아남은 선교사 3명 가운데 리델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 프랑스 극동 함대에 소식을 알렸고, 이것이 1866년 가을 병인양요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남종삼1817~1866
베르뇌 주교1814~1866
다블뤼 주교1818~1866
더 알아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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