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허가 없이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해 조선 수비대와 포격전을 벌이고, 영종도에 상륙해 약탈했습니다. 일본은 이 충돌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배경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맡으면서 조선 조정 안에서는 외교 문서 문제로 막혀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메이지 유신 뒤 일본이 보낸 국서에 ‘황(皇)’·‘칙(勅)’ 같은 글자가 들어가 조선이 접수를 거부한 서계 문제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안에서는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자는 정한론이 1873년 한 차례 밀려났지만, 정부는 기회를 보아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습니다. 1854년 미국 페리 함대가 일본을 연 방식, 곧 군함을 앞세운 압박을 그대로 조선에 쓰려 한 것입니다.
그사이 일본은 1874년 타이완에 군대를 보내 무력을 앞세운 대외 정책을 시험했습니다. 1875년 초에는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 시게루가 부산 왜관에 와서 국교 문제를 협상했지만, 문서 형식과 접견 예절을 둘러싼 이견으로 협상이 멈췄습니다. 일본 정부 안에서는 협상으로는 길이 열리지 않으니 군함을 보내 압박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습니다.
전개
1875년 5월 무렵부터 운요호 등 일본 군함이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운요호는 서해안 측량과 식수 보급을 내세워 강화도 초지진 앞까지 작은 배를 보냈고, 조선 수비대가 경고 포격을 하자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운요호는 이튿날 초지진에 포격을 퍼부은 뒤 영종도의 영종진에 군대를 상륙시켰습니다.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에 조선 수비대는 크게 패해 수십 명이 전사했고, 일본군은 성을 불태우고 대포와 무기를 빼앗아 돌아갔습니다.
운요호는 245톤 규모의 군함으로, 9월 12일 나가사키를 떠나 조선 서해안으로 향했습니다. 교전은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졌습니다. 22일 영종진을 공격할 때 조선 측은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일본군은 대포 38문 등 무기와 군수품을 포로들에게 운반하게 한 뒤 풀어 주고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질렀습니다.
결과와 의미
허가 없이 남의 나라 연안에 들어와 먼저 도발한 쪽은 일본이었지만, 일본은 오히려 자기 배가 공격받았다며 책임을 묻는 사절과 함대를 보내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이 충돌은 이듬해 강화도 조약 협상의 구실이 됐습니다.
운요호는 9월 24일 나가사키로 돌아갔고, 일본 해군성은 10월 8일 교전 경위를 발표했습니다. 발표 내용은 식수를 구하러 갔다가 먼저 공격받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항해 기록과는 달라 뒷날 연구자들은 국제법상 문제가 될 부분을 감추려 보고를 고쳐 썼다고 지적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1845~1929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더 알아두기
- ‘식수를 구하러 왔다’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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