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흥선대원군 집권기

신미양요와 대원군 하야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 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서원을 47곳만 남기고 정리하고 호포제를 실시했으며,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났습니다.

기간
1871.1 ~ 1873.12 · 2년 11개월
누가 다스렸나
임금 고종 · 실권 흥선대원군 → 고종 친정(1873.12~)
담긴 것
사건 7 · 영상 47 · 영화·드라마 4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9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해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이긴 전쟁이 맞을까

은근한 잡다한 지식 · 51.8만회 ·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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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두 양요를 조선의 승리로 볼 수 있는지 따져 보는 해설입니다.

1866.10 ~ 1871.7.3 · 서원 대폭 정리 → 광성보 전투

해설·교양 · 해설

제너럴셔먼호 사건 & 신미양요 한번에 다보기

로빈의 역사 기록 · 6.7만회 ·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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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8%추천 ★★★★★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를 이어서 요약한 영상입니다.

1866.8 ~ 1871.7.3 · 서원 대폭 정리 → 광성보 전투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병인박해부터 척화비까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KBS 히스토리 · 4.6만회 ·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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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병인박해부터 척화비까지 쇄국 정책을 순서대로 정리한 짧은 다큐입니다.

1866.2 ~ 1871 · 서원 대폭 정리 → 광성보 전투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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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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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KBS 히스토리 · 95.5만회 ·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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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을 축으로 집권부터 을미사변 무렵까지 다룹니다.

1864.1.21 ~ 1895.10.8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5일차 1교시 — 흥선 대원군

최태성 1TV · 83.2만회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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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집권기 기출 개념을 한 교시에 훑는 한능검 강의입니다.

1864.1.21 ~ 1873.12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고종을 왕으로 만들었을까

tvN D ENT · 74만회 · 2: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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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집권 과정과 정책을 길게 다룬 벌거벗은 한국사입니다.

1864.1.21 ~ 1873.12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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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서원 대폭 정리 →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4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드라마 · 2001· 공식 영상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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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66 ~ 1895.10.8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의 일생을 따라 대원군과의 갈등부터 을미사변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드라맛집]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 몰아보기

KBS Drama Classic · 12.3만회 ·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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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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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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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 제목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배경 1873 ~ 1895.10.8

명성황후와 호위 무사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엮은 영화

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병인박해 (~1871), 청전 유통 (~1874)

  1. 1871

    정치

    서원 대폭 정리

    전국 서원 가운데 47곳만 남기고 모두 없앴습니다. 세금을 피하고 백성을 수탈하던 폐단을 없앤다는 명분이었고, 유생들의 반발이 컸습니다.

    배경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하고 유생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입니다. 16세기 중반 처음 생긴 뒤 늘어나 19세기에는 전국에 수백 곳이 넘었고, 한 인물을 모시는 서원이 여러 곳에 겹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서원은 토지와 노비에 세금 면제 혜택을 받았고,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서원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일부 서원은 지방민에게 돈과 물자를 강요하고 당파의 거점 노릇을 해 폐단이 컸습니다.

    전개

    정리는 단계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대원군은 1864년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했고, 1865년 만동묘를 없앴습니다. 1868년에는 나라에서 이름을 내려 준 사액 서원이 아닌 서원을 정리하고, 서원 토지에도 세금을 매기게 했습니다. 1870년에는 사액 서원이라도 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모시는 경우를 정리하게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를 없앤 데 이어 여러 차례 서원을 정리했습니다. 1871년 음력 3월에는 한 인물에 한 서원만 두고,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모신 47곳을 뺀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유생들은 대궐 앞에 모여 철회를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의 말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결과와 의미

    수백 곳의 서원이 헐리고 그 토지와 노비가 관청에 돌아가면서 국가 재정이 늘었습니다. 양반 유생들이 모여 여론을 만들고 지방을 좌우하던 거점도 크게 줄었습니다.

    반대로 전국 유생들의 반감은 깊어졌고, 이는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는 데 영향을 줬습니다.

    철폐된 서원 자리에는 위패를 묻거나 단을 쌓아 제사를 이어 간 곳도 있었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 유생들의 요구로 만동묘가 다시 세워지는 등 일부 서원은 복설됐지만, 서원이 예전처럼 향촌을 좌우하는 힘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543년주세붕이 풍기에 백운동 서원(뒤의 소수서원)을 세웠습니다. 조선 서원의 시작입니다.
    2. 1864년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3. 1865년노론의 근거지였던 만동묘를 철폐했습니다.
    4. 1868년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을 정리하고 서원 토지에 세금을 매겼습니다.
    5. 1870년한 인물을 여러 서원에서 겹쳐 모시는 경우를 정리하게 했습니다.
    6. 1871년 3월(음력)47곳을 뺀 전국의 서원을 모두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유생들이 대궐 앞에 모여 반대했습니다.
    7. 1873년 11월(음력)최익현이 상소에서 서원 철폐를 비판했고, 대원군이 물러났습니다.

    사료로 읽기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박제형, 『근세조선정감』(1886)에 전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유생들에게 한 말로 전해집니다.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고종실록』 같은 관찬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전국의 서원을 47곳만 남기고 정리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1864~1873년 실권을 쥐었습니다. 서원 정리는 호포제와 함께 양반의 특권을 줄인 대표적인 정책입니다.

    • 최익현1833~1906

      1873년 상소에서 만동묘와 서원 철폐를 비판했습니다.

      이항로의 제자인 유학자입니다. 서원 정리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을 대변한 그의 상소가 대원군 하야의 계기가 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서원 정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폐단 개혁으로 보는 쪽

    서원이 세금을 피하고 백성을 괴롭히며 당파 싸움의 근거지가 된 현실을 바로잡은 과감한 개혁이라고 봅니다. 양반의 특권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늘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부작용과 의도를 함께 보는 쪽

    지방 교육과 학문 전통의 한 축을 너무 한꺼번에 없앴다고 봅니다. 또 개혁의 동기에 백성을 위하는 뜻과 함께 대원군에 비판적인 양반 여론을 누르고 권력을 모으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살아남은 47곳, 그리고 세계유산
    이때 남은 서원 가운데 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옥산서원·도동서원 등은 2019년 다른 서원들과 함께 ‘한국의 서원’ 9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서원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13 흥선대원군의 만동묘와 서원 철폐

    KBS 히스토리 · 2만회 ·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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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만동묘와 서원 철폐의 배경과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당쟁과 비리 이전 서원의 '진짜' 모습 (SUB)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25.9만회 ·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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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서원의 원래 모습을 소개하며 대원군 정리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2. 외교

    척화비 건립

    신미양요 직후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글이 새겨졌습니다.

    배경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통상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습니다. 신미양요에서 미국 함대가 협상 없이 물러가자 조정은 이 방침이 옳았다고 여겼습니다.

    조정 안에서도 서양과 교역하자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항로·기정진 같은 유학자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 성리학의 질서가 무너진다며 통상에 반대하는 척사론을 폈고, 이 주장은 병인양요 때부터 조정의 방침을 뒷받침했습니다.

    전개

    1871년 신미양요 직후 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비석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곧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졌습니다.

    옆에는 작은 글씨로 ‘우리 자손 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는 글이 새겨졌습니다. 글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에 짓고 비석은 1871년에 세웠다는 뜻입니다.

    척화비는 사람이 많이 오가는 도성 안 큰길과 각 지방의 관아 근처, 나루터 같은 교통 요지에 세워졌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오가며 보도록 한 일종의 나라의 공고문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척화비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나라 안에 널리 알리는 상징이 됐습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뒤 이 방침은 뒤집혔고, 1882년 임오군란 뒤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자 조정은 척화비를 뽑아 없애게 했습니다.

    척화비의 문구는 오늘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인용되는 사료입니다. 비석의 크기와 모양은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새긴 글은 같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6년병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척화비에 새긴 글도 이해에 지었다고 비석에 적혀 있습니다.
    2. 1868년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3. 1871년 6~7월신미양요 뒤 미국 함대가 물러가자 서울 종로 네거리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4. 1876년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을 열었습니다.
    5. 1882년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임오군란 뒤 조정은 척화비를 뽑아 없애게 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척화비 비문(1871)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 척화비 비문 옆 작은 글씨(1871)우리 자손 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운다.

    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신미양요 직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1864~1873년 실권을 쥐었습니다. 두 차례 양요를 겪으며 통상 수교 거부를 나라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 고종1852~1919

      1882년 서양과 수교한 뒤 척화비를 뽑아 없애게 했습니다.

      1873년 친정 뒤 개항과 개화 정책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서양과의 수교를 알리면서 척화비 철거를 명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지금 남아 있는 척화비
    철거된 비석 가운데 일부가 땅속에서 발견되거나 옮겨져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종로에 있던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강화·부산·경주 등지에도 남아 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위정척사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20 신미양요와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KBS 히스토리 · 7,747회 ·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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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신미양요 전개와 이후 척화비 건립까지 짧게 정리합니다.

    창작 · 드라마

    대하드라마 풍운 하이라이트 2편 — 쇄국의 여울목

    KBS 같이삽시다 · 8.7만회 · 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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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그린 대하드라마 하이라이트입니다.

    1871 ·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막으며 쇄국을 굳혀 가는 시기를 묶은 하이라이트입니다.드라마 「풍운」(1982)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척화비

    역사의 강 · 5,869회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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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설명 없이 척화비만 짧게 소개하는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3. 경제

    호포제 실시

    사람 단위로 걷던 군포를 집집마다 걷는 호포제로 바꿔, 그동안 면제받던 양반 집안에도 군포를 물렸습니다.

    배경

    조선의 양인 남성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군포)을 내는 군역을 졌습니다. 영조 때 균역법으로 부담을 1년 2필에서 1필로 줄였지만, 양반은 군역에서 빠졌고 돈 있는 사람들은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고쳐 군역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남은 가난한 농민에게 부담이 몰렸습니다.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는 일이 흔해 ‘군정의 문란’으로 불렸습니다.

    군역은 원래 모든 양인 남성이 지는 의무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실제로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내는 것이 일반화돼 군역이 사실상 세금이 됐습니다. 지방마다 걷어야 할 군포의 총액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군역을 피한 사람이 늘수록 남은 사람의 몫이 커졌습니다. 이웃이나 친척의 몫까지 물리는 인징·족징, 죽은 사람에게 매기는 백골징포, 아이에게 매기는 황구첨정 같은 말이 이때 생겼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미 마을 단위로 군포를 함께 내는 동포제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전국으로 넓혀 집마다 군포를 내는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전개

    흥선대원군은 1871년 군포를 사람 단위가 아니라 집(호) 단위로 걷는 호포제를 실시했습니다. 양반 집안도 호마다 군포를 내게 했는데, 양반 체면을 고려해 양반 집은 하인(노비) 이름으로 내도록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양반도 군포를 부담하게 되면서 농민의 부담이 줄고 국가 재정 수입이 늘었습니다. 신분에 따른 세금 면제 특권을 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개혁으로 평가받습니다.

    양반층은 조세에서 신분 구분이 흐려진다며 크게 반발했고, 서원 정리와 함께 대원군에 대한 양반층의 불만을 키웠습니다.

    호포제로 양반 집안도 군포를 냈지만 실제로 군대에 가는 의무를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군포가 신분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매기는 세금에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군역이 조세로 바뀌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 보기도 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750년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해 군포를 1년 2필에서 1필로 줄였습니다.
    2. 19세기 전반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고쳐 군역을 피하는 사람이 늘면서 남은 농민의 부담이 커졌습니다.
    3. 1862년삼정의 문란이 쌓여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4. 1871년흥선대원군이 집 단위로 군포를 걷는 호포제를 시행하고 양반 집안에도 군포를 물렸습니다.
    5. 1873년 이후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호포제는 이어졌습니다.

    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양반 집안에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제를 전국에 시행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1864~1873년 실권을 쥐었습니다. 서원 정리와 함께 양반의 특권을 줄인 대표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군포 부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호포제는 부담을 나눠 지게 한 것이지 없앤 것이 아닙니다. 집 단위로 걷다 보니 식구가 적은 집과 많은 집의 부담 차이, 지역마다 다른 운영 같은 문제도 남았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삼정의 문란조선의 신분제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1단원 21차시│흥선대원군의 개혁│

    워니비 · 6.2만회 ·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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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대원군 개혁 강의 속에서 호포제의 뜻을 따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시대 백성을 헤아린 세법 ‘균역법과 호포법'

    국세청 · 5,439회 ·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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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국세청이 균역법과 호포법을 함께 설명해 호포제는 절반 정도입니다.

  4. 4월

    운동음력 3월

    이필제의 난(영해 봉기)

    이필제가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경북 영해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자는 명분을 내건 첫 동학 관련 봉기로, 곧 진압됐습니다.

    배경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된 뒤 동학은 금지됐지만 경상도 동해안 일대에는 교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교도들은 교조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그 죄를 벗겨 달라는 요구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필제는 충청도 출신의 몰락 양반으로, 1860년대 후반부터 진천·진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변란을 꾀하다 수배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영해 지방 동학 교도들에게 접근해 교조의 원한을 풀자고 설득했습니다.

    이필제는 1869년 충청도 진천에서, 1870년 경상도 진주에서 거사를 꾀하다 계획이 새어 나가 달아났습니다. 그는 이름을 여러 번 바꾸며 숨어 다녔고, 영해에서는 동학 교도들의 불만과 교조 신원 요구를 봉기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최시형은 처음에 봉기를 말렸지만 교도들의 뜻이 강해 결국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전개

    1871년 음력 3월 10일, 최제우가 처형된 날에 맞춰 이필제는 동학 교도 등 수백 명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봉기군은 관아를 점령하고 영해 부사를 죽였습니다.

    관군이 출동하자 봉기군은 곧 흩어졌고 이필제는 달아났습니다. 그는 같은 해 음력 8월 문경 조령에서 다시 봉기를 꾀하다 붙잡혀 처형됐습니다.

    봉기군은 영해 관아를 하룻밤 사이에 점령했지만, 근처 고을에서 관군과 민병이 모여들자 며칠 만에 흩어졌습니다. 이필제는 동학 교도 일부와 함께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사건 뒤 관청은 영해 일대의 동학 교도를 대대적으로 잡아들였고, 교단 조직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시형은 쫓기며 강원도 산간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교조 신원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동학 교도가 무력으로 일어난 첫 사례로, 20여 년 뒤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을 이해하는 데 자주 언급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4년 4월교조 최제우가 대구에서 처형됐습니다.
    2. 1869년이필제가 충청도 진천에서 변란을 꾀하다 발각돼 달아났습니다.
    3. 1870년경상도 진주에서 다시 거사를 모의하다 발각됐습니다.
    4. 1871년 3월 10일(음력) 밤최제우가 처형된 날에 맞춰 동학 교도 수백 명과 함께 영해 관아를 습격해 부사를 죽였습니다.
    5. 며칠 뒤관군이 모이자 봉기군이 흩어지고 이필제는 달아났습니다.
    6. 1871년 봄~여름관청이 영해 일대의 동학 교도를 대대적으로 잡아들였고, 최시형은 강원도 산간으로 숨었습니다.
    7. 1871년 8월(음력)이필제가 문경 조령에서 다시 봉기를 꾀하다 붙잡혔고, 뒤에 처형됐습니다.

    인물

    • 이필제1825~1871

      동학 교도를 이끌고 영해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몰락 양반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 지방에서 이름을 바꿔 가며 봉기를 준비한 인물로, 영해 봉기 뒤 문경 조령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 붙잡혀 처형됐습니다.

    • 최시형1827~1898

      동학 2대 교주로 봉기에 관여했고, 이후 탄압을 피해 숨었습니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었습니다. 영해 봉기로 교단이 큰 피해를 입은 뒤 조직을 다시 세우고 경전을 펴내는 데 힘썼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이 사건의 성격

    동학 교도의 봉기로 보는 쪽

    교조 신원을 명분으로 내걸고 동학 교도가 대거 참여한 만큼 동학의 첫 무장 봉기이며, 뒤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이필제 개인의 변란으로 보는 쪽

    이필제가 이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변란을 모의해 온 점을 들어, 동학 교단을 이용한 개인 주도의 변란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교단 지도부의 참여 정도도 연구에 따라 해석이 다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동학

    해설·교양 · 해설

    [조선변란사]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지배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겠다던, 이필제의 난

    문역뜰 · 903회 ·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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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필제의 난 전개를 정면으로 다룬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1871영해와 이필제의거 윤석산교수 특강 2020동학네트워크 영해 #윤석산#동학과 영해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서울동학 · 296회 ·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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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윤석산 교수가 1871년 영해 봉기와 이필제를 다룬 특강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대구MBC뉴스] 동학혁명의 시발점, 영해 동학혁명

    dgmbcnews · 514회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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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 봉기를 소개하는 대구MBC 지역 뉴스 보도입니다.

  5. 6.1

    전쟁음력 4~5월

    신미양요

    1871.6.1 ~ 7.3 · 33일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싸우다 대부분 전사했지만, 조선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물러났습니다.

    • 미군은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를 가져갔습니다. 이 깃발은 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가, 대여 연장이 끝나 2024년 3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배경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불탄 사건의 경위를 따지고, 난파 선원 보호와 통상 조약을 맺을 목적으로 조선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1871년 주청 미국 공사 로(Frederick Low)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군함 5척과 병력 1,200여 명을 이끌고 왔습니다.

    미국은 1866년 이후 두 차례 군함을 보내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조사했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한편 미국 정부는 태평양 항로를 오가는 배가 조선 해안에서 조난당했을 때 선원을 보호받을 약속이 필요하다고 보고, 1870년 청나라 주재 공사 로에게 조선과 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기함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모여 훈련한 뒤 조선으로 왔습니다.

    전개

    함대는 1871년 5월 하순 경기도 앞바다에 이르러 강화도 가까이에 닻을 내렸습니다. 미국은 조선 관리와 접촉하며 강화 해협 물길을 측량하겠다고 알렸습니다. 6월 1일 미군 함정이 조선의 허락 없이 강화 해협 손돌목으로 들어오자 강화 포대가 포격했고, 미군도 대응했습니다.

    미국은 사과와 협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6월 10일 미군은 초지진에 상륙해 점령했고, 이튿날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를 공격했습니다. 어재연이 지휘한 조선군은 백병전까지 벌이며 맞섰지만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한 뒤에도 조선 조정이 끝내 협상에 나서지 않자, 한 달 가까이 머물다 7월 3일 물러났습니다.

    조정은 진무중군 어재연을 강화도로 보내 광성보를 지키게 했습니다. 미국 쪽이 보낸 편지에 조선 관리가 답하면서, 조선은 서양과 교역하지 않는다는 뜻과 함께 미군이 허락 없이 해협에 들어온 것을 따졌습니다. 양쪽의 요구가 맞서면서 협상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선은 서양 세력을 다시 물리쳤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굳혔습니다.

    미국은 전투에서 조선군을 크게 이겼지만 목표였던 조약은 얻지 못했습니다. 조선과 미국은 11년 뒤인 1882년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1년 5월 16일미국 아시아 함대 군함 5척이 일본 나가사키를 떠났습니다.
    2. 1871년 5월 하순함대가 경기도 남양 앞바다를 거쳐 강화도 근처 작약도 부근에 닻을 내렸습니다.
    3. 1871년 6월 1일허락 없이 손돌목으로 들어온 미군 함정에 강화 포대가 포격했고 미군이 맞대응했습니다.
    4. 6월 초미국이 사과와 협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5. 1871년 6월 10일미군이 초지진에 상륙해 점령했습니다.
    6. 1871년 6월 11일미군이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를 공격했습니다. 어재연 등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7. 6월 중순~하순미군은 함대에 머물며 협상을 기다렸지만 조정은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8. 1871년 7월 3일미국 함대가 조선을 떠났습니다. 이후 조정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인물

    • 로저스 제독1812~1882

      미국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존 로저스는 미국 해군 장교 집안 출신으로 남북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원정 뒤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 요직을 지냈습니다.

    • 프레더릭 로1828~1894

      주청 미국 공사로 조선과의 교섭을 맡았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으로, 원정의 외교 책임자였습니다. 조선이 끝내 교섭에 응하지 않자 함대를 철수시켰습니다.

    • 어재연1823~1871

      진무중군으로 광성보를 지키다 전사했습니다.

      무과 출신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도 광성보 방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광성보 수비를 맡았고 동생 어재순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신미양요는 누가 이긴 전쟁인가

    조선이 목적을 지켰다고 보는 쪽

    미국의 목표는 통상 조약이었는데 조선이 끝까지 협상을 거부했고 미군은 빈손으로 물러났으므로, 전략적으로는 조선이 뜻을 관철했다고 봅니다. 당시 조선 조정도 이렇게 받아들였고, 광성보 수비대가 끝까지 싸운 일을 높이 평가합니다.

    미국의 군사적 승리로 보는 쪽

    미국 쪽 기록은 신미양요를 ‘1871년 조선 원정’이라 부르며 전투의 완승으로 적습니다. 미군은 사상자가 매우 적었던 반면 조선군은 요새를 모두 잃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전력 차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조선이 대비를 미루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양요’란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소란’이라는 뜻입니다. 병인년(1866)의 프랑스 침입을 병인양요, 신미년(1871)의 미국 침입을 신미양요라고 부릅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신미양요가 끝난 1871년 가을, 일본은 청나라와 대등한 조건의 청일 수호 조규를 맺었고, 그해 말에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표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 서양의 제도와 산업을 시찰했습니다. 같은 해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문을 닫는 쪽을, 일본은 서양을 배우는 쪽을 택한 셈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신미양요150주년 특별영상] 1부. 신미양요, 그리고 빼앗긴 깃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OKCHF · 26.3만회 ·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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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아 전투와 빼앗긴 수자기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전다방100 ■우리가 미처 몰랐던 진짜!! ☆신미양요

    KFN · 13.5만회 · 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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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국방TV 역사 토크로 신미양요 전 과정을 길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신미양요(1871년) 전개과정 사진으로 보기ㅣ150년전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모습

    대한여지도 Korean Geographic · 20.8만회 ·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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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당시 사진으로 신미양요의 전개를 따라갑니다.

    창작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 — '우리가 도망가면 여기는 누가 지키냐' 신미양요 전투

    tvN DRAMA · 100.7만회 ·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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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신미양요 때 강화도 전투를 그린 공식 클립입니다. 인물은 창작입니다.

    1871.6.1 ~ 7.3 ·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 맞서 강화도를 지키던 조선 병사들을 그린 장면입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94회 무삭제 확장판] 조선, 서구 열강에 맞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2부ㅣ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YTN2

    YTN 밀덕스 · 7.7만회 · 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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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YTN 전쟁 다큐 2부로 신미양요 전투 과정을 중심으로 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신미양요 2분 요약 노래

    유요 · 8.4만회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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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그림과 노래로 신미양요를 2분 안에 요약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알쓸신잡3 — 한여름에 9겹 솜옷을 입고 싸운 신미양요

    tvN Joy · 41.1만회 ·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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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 모습을 짧게 이야기하는 알쓸신잡 장면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종훈 한국사] 신미양요, 민씨정권

    고종훈 한국사 · 8,439회 ·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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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공무원 한국사 강의로 신미양요와 이후 민씨 정권을 이어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신미양요150주년 특별영상] 2부. 수자기가 돌아오기까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OKCHF · 6.1만회 ·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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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신미양요 때 빼앗긴 수자기가 돌아오기까지를 다룹니다.

    창작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 —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과 조선의 포로들

    tvN DRAMA · 91.2만회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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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신미양요 뒤 대원군을 그린 드라마 장면으로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1871.6.1 ~ 7.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6. 6.11

    전쟁

    광성보 전투

    미군이 초지진·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광성보를 공격했습니다. 어재연 형제를 비롯한 조선군 수비대가 백병전 끝에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배경

    광성보는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새 가운데 하나로, 물살이 거센 손돌목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이곳을 향했습니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조선군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화 해협에는 초지진·덕진진·광성보가 물길을 따라 차례로 늘어서 있었고, 각 진·보에는 돌로 쌓은 작은 포대인 돈대가 딸려 있었습니다. 광성보에는 손돌목돈대·용두돈대 등이 있어 해협에서 물살이 가장 거센 손돌목을 지켰습니다.

    전개

    1871년 6월 11일(음력 4월 24일) 미군은 함포와 곡사포로 광성보를 먼저 두들긴 뒤 상륙 부대를 돌격시켰습니다. 조선군의 화승총과 대포는 사거리와 발사 속도에서 크게 뒤졌습니다.

    조선군은 총알이 떨어지자 칼과 창, 돌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전투는 한 시간 남짓 만에 끝났고 어재연과 동생 어재순을 비롯한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미군은 어재연의 지휘 깃발인 수(帥)자기를 가져갔습니다.

    미군 상륙 부대는 킴벌리 중령이 지휘했고, 해병대와 수병 등 수백 명이 야포를 끌고 육지로 나아갔습니다. 미군 가운데 맥키 중위가 가장 먼저 성벽을 넘다 전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피해 규모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조선 조정의 기록에는 전사 53명, 부상 24명이 적혔지만, 미군 쪽 기록은 조선군 전사자를 240여 명으로 적었습니다.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 안팎이었습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했으나 조선 조정은 이후에도 협상을 거부했고, 미군은 3주 남짓 뒤 철수했습니다.

    광성보의 돈대와 성문은 전투 뒤 무너진 채 남았다가 1970년대 강화 전적지 정비 사업으로 복원됐습니다. 오늘날 인천 강화군 불은면에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1년 6월 10일미군이 초지진에 상륙해 점령하고 그 근처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2. 1871년 6월 11일 오전미군이 덕진진을 점령했습니다. 수비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습니다.
    3. 같은 날 낮함포와 야포가 광성보를 포격한 뒤 상륙 부대가 돌격했습니다.
    4. 한 시간 남짓 뒤백병전 끝에 어재연·어재순 형제를 비롯한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하고 광성보가 점령됐습니다. 미군은 수자기를 가져갔습니다.
    5. 6월 12일미군이 점령한 요새에서 물러나 함대로 돌아갔습니다.
    6. 1871년 7월 3일조선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국 함대가 철수했습니다.

    인물

    • 어재연1823~1871

      광성보 수비를 지휘하다 전사했습니다.

      전사 뒤 병조판서로 추증됐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강화 광성보 안에 그와 동생을 기리는 쌍충비각이 있습니다.

    • 휴 맥키1844~1871

      미군 상륙 부대 장교로 광성보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가 전사했습니다.

      미국 해군 중위로, 광성보 공격 때 앞장서 돌격하다 조선군의 창과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았고, 미국 기록은 그의 죽음을 이 전투의 상징으로 남겼습니다.

    더 알아두기

    어재연 장군 수자기
    가로세로 4m가 넘는 무명 깃발로, 미군이 가져가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해 왔습니다. 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돌아와 강화역사박물관 등에 전시됐으나, 대여 기간 연장이 어려워져 2024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영구 환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쪽에서 본 광성보
    미국은 이 전투에서 활약한 병사 15명에게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 훈장을 줬습니다. 미국 기록에도 조선군이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신미순의총
    광성보 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자들을 함께 묻은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있습니다. 어재연 형제의 시신은 고향으로 옮겨졌지만 나머지 전사자들은 이곳에 묻혔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서구 열강에 끝까지 맞서다, 광성보 전투 | 썬킴의 이런(e-learn) 역사이야기(ENG SUB)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4,373회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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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썬킴이 광성보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조선시대] 결사항전의 의지를 담다(광성보 전투와 수자기)(ENG SUB) | 문화유산 e클립뱅크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4,033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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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국가유산채널이 광성보 전투와 수자기를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처절했던 전투 [광성보 전투, 신미양요]

    역사멘터리 · 7만회 ·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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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광성보 전투의 경과를 정면으로 다룬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패전사 이야기 23편 - 최초의 한미 전쟁 : 광성보 전투 (1871)

    패전사 · 3.7만회 ·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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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광성보 전투 한 편을 정리한 전투사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압도적 무기 차이에.. 15분 만에 360여 명 전원이 몰살당했다!ㅣ차클투어 EP.25

    교양 Voyage · 4.9만회 ·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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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차클투어가 덕진진과 광성보를 걸으며 전투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강화 돈대 그래픽 제작 사업 결과물 공유 : 광성보 전투

    인천문화재단 · 560회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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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인천문화재단이 광성보 전투를 그래픽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신미양요 격전지 광성보를 마주한 미국인?! 역사의 진실을 배운 의미있던 시간 l #어서와한국은처음이지 l #MBCevery1 l EP.414

    MBC every1 · 6.3만회 ·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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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외국인 여행 예능에서 광성보를 방문하는 장면이라 설명이 짧습니다.

  7. 1873

    12월

    정치음력 11월

    흥선대원군 하야와 고종 친정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계유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스물두 살 고종이 직접 정치를 맡았습니다. 명성황후의 척족인 여흥 민씨가 정계에 대거 들어섰습니다.

    • 최익현은 서원 철폐·원납전·당백전 등을 비판했고, 고종은 그를 호조참판으로 올려 힘을 실어 줬습니다.

    배경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정치는 여러 세력의 불만을 쌓았습니다. 서원 정리와 호포제로 양반 유생들이 반발했고,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당백전·청전으로 백성의 부담이 컸습니다.

    스물두 살이 된 고종은 직접 정치를 하려는 뜻을 키웠고, 왕비 민씨(명성황후) 쪽 척족과 대원군 정치에서 소외된 세력도 고종의 친정을 바랐습니다. 대원군의 형 이최응 등 왕실 안에서도 대원군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전개

    1873년 음력 10월 동부승지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고종은 오히려 그를 호조참판으로 올렸고, 최익현은 음력 11월 다시 상소를 올려 만동묘와 서원 철폐, 원납전 징수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계유상소).

    대원군 쪽 관리들은 최익현을 벌하라고 요구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제주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그치고,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대원군은 경기도 양주로 물러났습니다.

    최익현의 첫 상소에 대원군 쪽 관리들이 들고일어나자 고종은 오히려 그를 감쌌고, 두 번째 상소가 대원군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자 조정 분위기는 대원군에게 불리해졌습니다. 고종은 친정의 뜻을 밝히며 대원군이 궁궐을 드나들던 문을 닫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대원군은 공식적으로 물러난다는 명령 없이 스스로 도성을 떠나는 형식으로 물러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민씨 척족이 정계의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조정은 청전 통용을 금지하고 만동묘를 다시 세우는 등 대원군의 정책 일부를 되돌렸습니다.

    대외 정책도 바뀌어, 박규수 등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가운데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이뤄졌습니다. 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대립은 이후 임오군란(1882) 등 여러 정변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3년 10월(음력)동부승지 최익현이 첫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고종은 그를 호조참판으로 올렸습니다.
    2. 1873년 11월(음력)최익현이 두 번째 상소(계유상소)로 만동묘·서원 철폐와 원납전 등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3. 같은 달대원군 쪽의 반발 속에 고종이 최익현을 제주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그치고 직접 정치를 선포했습니다.
    4. 1873년 말대원군이 경기도 양주로 물러났습니다.
    5. 1874년청전 통용이 금지되고 만동묘가 다시 세워지는 등 대원군 시기 정책 일부가 되돌려졌습니다.
    6. 1875년대원군이 서울 운현궁으로 돌아왔지만 정권은 되찾지 못했습니다.
    7. 1876년 2월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을 열었습니다.

    인물

    • 최익현1833~1906

      상소로 대원군 정치를 비판해 하야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경기도 포천 출신 유학자로, 이항로의 제자입니다. 대원군을 비판한 뒤에는 개항에도 반대해 1876년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을사늑약 뒤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쓰시마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고종1852~1919

      최익현을 감싸며 직접 정치를 선포했습니다.

      즉위 10년 만에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개항과 개화 정책을 추진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가 됐습니다.

    • 박규수1807~1877

      고종 친정 초기 우의정으로 대외 정책 전환을 주장했습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평안도 관찰사였던 인물로, 고종 친정 뒤 우의정에 올라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했습니다.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대원군의 하야는 무엇이 원인이었나

    정책 실패와 민심 이반을 강조하는 쪽

    경복궁 중건과 무리한 재정 정책, 양반 특권 축소에 따른 반발이 쌓여 대원군이 지지 기반을 잃었고, 최익현의 상소는 그 불만이 터져 나온 계기였다고 봅니다.

    권력 다툼을 강조하는 쪽

    고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원하고 왕비 쪽 척족과 반대원군 세력이 이를 뒷받침한 권력 이동이 핵심이었다고 봅니다. 최익현의 상소는 고종이 친정의 명분으로 삼은 측면이 크다고 해석합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자주적 방어 정책으로 보는 쪽

    서양 열강이 무력으로 문을 열던 시대에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 한 정책이라고 봅니다. 조선이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버텨 낸 것도 이 결단 덕분이며, 준비 없는 개방이 더 큰 피해를 불렀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근대화를 늦춘 정책으로 보는 쪽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일 시간을 스스로 닫아 버렸다고 봅니다. 그 결과 조선은 준비 없이 일본의 무력에 밀려 불평등 조약으로 개항했고, 먼저 문을 연 일본과의 격차가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하야 뒤의 흥선대원군
    대원군은 물러난 뒤에도 정치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다시 권력을 잡았다가 한 달여 만에 청나라에 끌려갔고, 1895년 을미사변 때는 일본에 의해 궁궐로 들어가는 등 격동기 내내 정국의 한 축으로 남았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가을, 일본 메이지 정부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자는 정한론을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서양 시찰에서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나라 안 정비가 먼저라며 반대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2년 뒤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개항을 압박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서원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흥선대원군과 고종 이야기 부자 관계가 서로를 파멸시키려는 원수 사이가 되기까지

    디글 :Diggle · 70.2만회 · 2: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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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갈등을 길게 다루며 하야 과정이 포함됩니다.

    해설·교양 · 예능

    아들을 죽여서라도 권력을 얻고자 했던 아버지? 다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왜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뤘나! | #벌거벗은한국사 흥선대원군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 9.1만회 ·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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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하야 뒤 대원군과 고종의 부자 갈등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5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서원

선현의 제사를 지내고 유학을 가르치던 조선의 사립 교육 기관입니다.

1543년 백운동 서원을 시작으로 전국에 세워져 지방 양반의 교육과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됐습니다. 왕이 이름을 내려 준 사액 서원은 토지와 노비를 받고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19세기에는 수백 곳으로 늘어나 면세 특권으로 나라 재정을 줄이고 붕당의 근거지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71년 47곳만 남기고 정리했습니다.

도산 서원·옥산 서원 등 9곳은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됐습니다.

다큐

당쟁과 비리 이전 서원의 '진짜' 모습 (SUB)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25.9만회 ·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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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200초로 즐기는 한국의 유네스코 등재유산] 성리학 전파의 뿌리, 한국의 서원

문화포털 · 3.4만회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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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소수서원 1부 조선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을 가다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4.6만회 ·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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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바른 것(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것(서양 문물)을 물리친다'는 보수 유생의 사상입니다.

이항로·기정진 등에서 비롯해 시기마다 모습을 바꿨습니다. 1860년대에는 서양과의 통상 반대(척화), 1870년대에는 일본과의 개항 반대(최익현의 왜양일체론), 1880년대에는 『조선책략』 반대(영남 만인소), 1890년대 이후에는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외세 침략에 맞선 자주 의식이 강했다는 평가와 함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한계도 함께 지적됩니다.

해설

위정척사운동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8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4만회 ·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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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5차시│위정척사파│임오군란│

워니비 · 7.5만회 · 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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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빡공시대 중3역사2[1-1](2)조선의 문호개방 및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2021)-음질개선판

빡공시대TV · 58.7만회 · 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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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의 문란

나라 재정의 세 기둥인 전정·군정·환곡이 수탈 수단으로 변한 것입니다.

전정(토지세), 군정(군역 대신 내는 군포), 환곡(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제도)을 삼정이라 합니다.

19세기에는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고, 환곡을 억지로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호포제와 사창제는 이 가운데 군정과 환곡을 바로잡으려는 조치였습니다.

해설

삼정의 문란 l 조선 17부(최종회)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3.5만회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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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상한국사 I 237 군포의 폐단과 영조의 균역법

KBS 히스토리 · 1.2만회 ·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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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군역 문제 해결을 위해 여론조사까지?! 직접 백성과 소통해 만든 '영조'의 「균역법」 | 차이나는 클라스 265회 | JTBC 230514 방송

교양 Voyage · 9,929회 ·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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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분제

조선 사회를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눈 신분 질서입니다.

법으로는 양인과 천인 두 신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양반·중인·상민·천민 네 층으로 나뉘었습니다. 노비와 백정 등 천민은 가장 큰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선 후기 납속과 공명첩, 족보 매매 등으로 양반 수가 크게 늘며 신분제가 흔들렸고,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 폐지됐습니다. 그 뒤에도 차별은 이어져 1923년 형평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능

[#어쩌다어른] 상상초월 조선시대 노비의 가격은? 신분 상승을 노리고 주인을 겁탈한 노비의 최후 | #지금꼭볼동영상

디글 :Diggle · 27.7만회 ·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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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4K풀] 신분제에 도전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 영화같은 일대기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조선의 신분제 2부 "노비, 사또가 되다" (KBS_2

KBS 히스토리 · 42.6만회 · 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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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3역사②[5-2~1]사회 변화와 농민의 봉기(1)(feat.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빡공시대 람보쌤 4시간의 기적

빡공시대TV · 29.8만회 · 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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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뒤에 천도교가 됐습니다.

서양의 종교·학문인 서학(천주교)에 맞선다는 뜻에서 '동학'이라 했습니다. 유교·불교·도교와 민간 신앙을 아우르고,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며 모든 사람의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꾼다는 '후천개벽'을 내세워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 사이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정부는 이를 위험하게 여겨 1864년 최제우를 처형했지만, 2대 교주 최시형이 조직을 넓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바탕이 됐습니다.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가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습니다.

해설

[종교] 동학농민운동의 뿌리, 동학이란 무엇인가? : 도올 김용옥의 역주, 동경대전-최제우 1부

일당백 : 일생동안 읽어야 할 백권의 책 · 15.4만회 · 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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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역사만화 72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4.9만회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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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동학의 창시와 교조 신원 운동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12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3.2만회 ·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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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