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대폭 정리
전국 서원 가운데 47곳만 남기고 모두 없앴습니다. 세금을 피하고 백성을 수탈하던 폐단을 없앤다는 명분이었고, 유생들의 반발이 컸습니다.
배경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하고 유생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입니다. 16세기 중반 처음 생긴 뒤 늘어나 19세기에는 전국에 수백 곳이 넘었고, 한 인물을 모시는 서원이 여러 곳에 겹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서원은 토지와 노비에 세금 면제 혜택을 받았고,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서원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일부 서원은 지방민에게 돈과 물자를 강요하고 당파의 거점 노릇을 해 폐단이 컸습니다.
전개
정리는 단계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대원군은 1864년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했고, 1865년 만동묘를 없앴습니다. 1868년에는 나라에서 이름을 내려 준 사액 서원이 아닌 서원을 정리하고, 서원 토지에도 세금을 매기게 했습니다. 1870년에는 사액 서원이라도 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모시는 경우를 정리하게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를 없앤 데 이어 여러 차례 서원을 정리했습니다. 1871년 음력 3월에는 한 인물에 한 서원만 두고,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모신 47곳을 뺀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유생들은 대궐 앞에 모여 철회를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의 말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결과와 의미
수백 곳의 서원이 헐리고 그 토지와 노비가 관청에 돌아가면서 국가 재정이 늘었습니다. 양반 유생들이 모여 여론을 만들고 지방을 좌우하던 거점도 크게 줄었습니다.
반대로 전국 유생들의 반감은 깊어졌고, 이는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는 데 영향을 줬습니다.
철폐된 서원 자리에는 위패를 묻거나 단을 쌓아 제사를 이어 간 곳도 있었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 유생들의 요구로 만동묘가 다시 세워지는 등 일부 서원은 복설됐지만, 서원이 예전처럼 향촌을 좌우하는 힘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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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최익현1833~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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