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직선제 이후(제6공화국)

노무현 정부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소추가 있었으나 헌법재판소가 기각했습니다.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을 맺었고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열었습니다.

기간
2003.2.25 ~ 2008.2.24 · 4년 11개월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노무현
담긴 것
사건 16 · 영상 43 · 영화·드라마 3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3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재벌집 막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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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87 ~ 2004

JTBC 퓨전. 재벌가 막내로 다시 태어나 외환 위기 등 한국 경제사를 지나는 이야기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시청률 26.9%로 재밌다고 난리난 "2022년 JTBC 드라마 1위" 재벌집 막내아들 몰아보기

카랑Karang · 533.7만회 · 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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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23· 공식 영상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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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2007

2007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교섭] 국정원 요원 현빈 무시하다가 크게 한방 먹은 황정민 | 교섭 X 소개해주는 남자 리뷰

JTBC Voyage · 2.6만회 · 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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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7· 공식 영상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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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2007

2007년 미국 하원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 증언을 모티프로 한 영화

사건 연표 1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2004.4.15), 카드 대란 (~2003.12)

  1. 2003

    4월

    외교

    이라크 파병

    2003.4 ~ 2008.12 · 5년 8개월

    미국의 요청으로 공병·의료 부대(서희·제마)에 이어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에 보냈습니다.

    배경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명시적 승인이 없는 전쟁이어서 세계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에도 요청이 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전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지지층에도 전쟁 반대 여론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북핵 문제 해결에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겹쳐 있었습니다.

    전개

    2003년 4월 국회가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건설 공병 부대인 서희 부대와 의료 부대인 제마 부대가 파견됐습니다. 미국이 추가로 전투병 파병을 요청하자 정부는 논란 끝에 재건 지원을 중심으로 한 부대를 보내기로 했고, 2004년 2월 국회 동의를 거쳐 자이툰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자이툰 부대는 2004년 가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의 아르빌에 자리를 잡고 학교·병원 건설과 직업 교육 등 재건 지원 활동을 했습니다. 규모는 한때 3천 명을 넘어 미국·영국에 이어 큰 편이었습니다. 부대는 2008년 12월 임무를 마치고 철수했습니다.

    서희·제마 부대는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 머물며 도로·시설 복구와 진료 활동을 했습니다. 자이툰 부대 본대는 2004년 8월 출국해 9월 아르빌에 도착했고, 이후 국회는 해마다 파병 연장 동의안을 처리하며 부대 규모를 차츰 줄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파병 기간 중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일하던 한국인 김선일 씨가 무장 단체에 납치돼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파병 반대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자이툰 부대 장병의 전투 중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 살상 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 정부 조사에서도 정보가 잘못됐던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3년 3월 20일미국·영국이 이라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2. 2003년 4월 2일국회가 공병·의료 부대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3. 2003년 4월 말서희·제마 부대가 이라크로 떠났습니다.
    4. 2003년 10월정부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추가 파병 방침을 밝혔습니다.
    5. 2004년 2월 13일국회가 추가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6. 2004년 2월 23일자이툰 부대가 창설됐습니다.
    7. 2004년 6월 22일이라크에서 납치된 김선일 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8. 2004년 9월자이툰 부대가 아르빌에 도착했습니다.
    9. 2008년 12월자이툰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철수했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대통령으로서 지지층의 반대 속에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고졸 출신 인권 변호사로 1988년 국회의원이 됐고 5공 청문회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당선돼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제16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 김선일1970~2004

      이라크에서 무장 단체에 납치돼 살해됐습니다.

      이라크에서 군납 업체 직원이자 통역으로 일하던 민간인이었습니다. 무장 단체는 한국군 철수를 요구하며 그를 붙잡았고, 그의 죽음은 파병 반대 여론과 정부의 재외 국민 보호 문제를 두고 큰 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이라크 파병은 옳은 선택이었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쪽

    북핵 위기 속에서 한미 동맹을 지키고 미국의 협조를 얻는 것이 국익에 필요했다고 봅니다. 전투가 아닌 재건 지원 위주로 파병해 위험을 줄였고, 자이툰 부대가 현지 주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도 듭니다.

    명분 없는 전쟁 동참으로 보는 쪽

    유엔의 명확한 승인 없이,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이유로 시작된 전쟁에 동참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봅니다. 김선일 씨 피살처럼 국민을 위험에 빠뜨렸고, 동맹을 이유로 한 판단이 결과적으로 정당성을 잃었다고 비판합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한미 동맹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 명분 없는 전쟁에 동참했다는 반대 여론도 컸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10kg 방탄복과 헬멧,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 국기가 펄럭인다 | 자이툰 부대 72시간 | KBS 20071206 방송

    KBS 다큐 · 14.3만회 · 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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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자이툰 부대 병력 교대 현장을 사흘간 따라간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다큐3일] 우리는 이라크로 간다! 자이툰 부대 병력교대 72시간 | KBS 2007.12.06 방송

    KBS 다큐 · 157.8만회 · 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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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파병 이후 자이툰 부대의 교대 과정을 담은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현장기록⏮️그때] 꿈같은 3박 4일의 시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싶은 아들을 만나러 이라크로 향한 가족들! | KBS 2005.06.06 방송

    KBS 다큐 · 13.2만회 · 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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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자이툰 부대 장병 가족의 이라크 방문을 담은 KBS 기록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앵커 한마디] 이라크 '파병'에서 얻은 교훈 / JTBC 뉴스룸

    JTBC News · 15만회 ·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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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파병 동의안 통과부터 이라크 파병의 교훈을 짧게 짚은 논평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미국이 스스로 수렁에 빠져버린 최악의 실책.. '이라크전쟁' 몰아보기

    별별역사 · 99.8만회 · 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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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미국의 이라크 전쟁 전반을 다루고 한국 파병은 거의 없습니다.

  2. 10월

    정치

    불법 대선 자금(차떼기) 수사와 정치자금법 개정

    2003.10 ~ 2004.3 · 5개월

    검찰이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대기업이 정당에 건넨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수사했습니다. 현금이 든 트럭을 통째로 건네받은 정황이 드러나 '차떼기'라는 말이 생겼고, 2004년 3월 법인·단체의 정치 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오세훈법')으로 이어졌습니다.

    배경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기업으로부터 대규모 정치 자금을 받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런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전개

    2003년 검찰은 2002년 대선을 전후해 한나라당이 삼성·LG·SK·현대차·롯데 등 대기업으로부터 수백억 원대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정황을 포착해 수사에 나섰습니다. 현금이 든 승합차나 트럭을 통째로 건네받는 방식이 드러나며 '차떼기'라는 말이 생겼고, 수사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 측근의 자금 문제로도 번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거액의 불법 대선 자금 관행이 드러나면서 정치 자금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습니다. 2004년 3월 국회는 법인·단체의 정치 자금 기부를 금지하고 지구당을 폐지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오세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2년 12월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2. 2003년 하반기검찰이 불법 대선 자금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3. 2003년 말한나라당 측 '차떼기' 자금 수수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4. 2004년 3월국회가 법인·단체 정치 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인물

    • 오세훈1961~

      한나라당 의원으로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변호사 출신 정치인으로 이 법안이 '오세훈법'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이후 서울특별시장을 여러 차례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정치자금법 개정(오세훈법)의 효과

    정치 자금 투명성을 높였다는 쪽

    기업의 음성적인 정치 자금 제공 통로를 막아 돈 선거 관행을 크게 줄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신인 정치인의 진입 장벽을 높였다는 쪽

    지구당 폐지와 후원회 제한으로 조직과 자금이 부족한 정치 신인이나 소수 정당이 활동할 기반을 오히려 좁혔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불법정치 자금을 차에 실어 보냈던 이야기 #차떼기

    한국역사쇼츠 · 4,261회 ·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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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1.11

    정치

    열린우리당 창당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새천년민주당 탈당파와 한나라당·개혁국민정당 출신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습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얻어 집권 여당이 됐습니다.

    배경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둘러싸고 새천년민주당 안에서는 옛 동교동계(김대중계) 중심의 당 운영에 반발하는 개혁 성향 의원들과 갈등이 커졌습니다. 대통령이 신당 창당 필요성을 시사하면서 당내 갈등은 분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40명과 한나라당 탈당 의원 5명, 개혁국민정당 출신 의원 2명이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습니다. '열린' 정치,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을 당명에 담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열린우리당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역풍 속에 치러진 4월 15일 총선에서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의원들의 잇단 탈당으로 과반이 무너졌고,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돼 사라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3년 9월새천년민주당 개혁 성향 의원들의 집단 탈당이 본격화했습니다.
    2. 2003년 11월 11일열린우리당이 창당됐습니다.
    3. 2004년 3월 12일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4. 2004년 4월 15일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 의석을 얻었습니다.
    5. 2007년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며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신당 창당의 필요성을 언급해 열린우리당 창당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2003년 취임 첫해부터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당의 분화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 창당 대회

    오마이TV · 5,664회 · 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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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

    3.12

    정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와 기각

    2004.3.12 ~ 5.14 · 2개월

    국회가 선거 중립 위반 등을 이유로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했으나, 헌법 재판소가 두 달 뒤 기각했습니다.

    배경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뒤 여당 새천년 민주당이 갈라져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습니다. 국회 다수당은 야당 한나라당이었고 새천년 민주당도 야당이 돼,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이 깊어졌습니다.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 회견 등에서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는 이것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고, 야당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전개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한나라당과 새천년 민주당은 탄핵 소추안을 냈습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저지 속에 표결해 재적 271명 가운데 193명 찬성으로 탄핵 소추안을 가결했습니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했습니다.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이어졌고, 4월 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인 152석을 얻었습니다. 5월 14일 헌법 재판소는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 등 법을 어긴 사실은 인정했지만,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반은 아니라며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소추안은 3월 9일 두 야당 의원 159명의 서명으로 발의됐습니다. 12일 오전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 본회의장을 점거하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낸 뒤 표결이 진행됐고,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가결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소추였고, 헌법 재판소가 대통령 파면 여부를 판단한 첫 사례였습니다. 이 결정에서 제시된 ‘파면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법 위반’이라는 기준은 이후 2017년·2025년 탄핵 심판에서도 판단의 틀이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두 달 만에 직무에 복귀했습니다. 탄핵을 주도한 야당은 총선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4년 2월 24일노무현 대통령이 기자 회견에서 총선과 관련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기대하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2. 2004년 3월 3일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가 대통령 발언이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했습니다.
    3. 2004년 3월 9일한나라당과 새천년 민주당이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습니다.
    4. 2004년 3월 12일 오전국회가 탄핵 소추안을 가결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습니다.
    5. 2004년 3월 12일 이후탄핵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전국에서 이어졌습니다.
    6. 2004년 4월 15일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을 얻었습니다.
    7. 2004년 5월 14일헌법 재판소가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해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헌법재판소법 제53조 제1항의 '탄핵심판청구가 이유 있는 때'란, 모든 법위반의 경우가 아니라, 단지 공직자의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한' 법위반의 경우를 말한다.”
    — 헌법 재판소 2004. 5. 14. 2004헌나1 결정법을 어긴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파면하지 않고, 파면할 만큼 무거운 위반인지를 따로 따져야 한다는 기준입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탄핵 소추로 직무가 정지됐다가 기각 결정으로 복귀했습니다.

      제16대 대통령으로 권위주의 청산과 지역 구도 타파를 내걸었습니다. 퇴임 뒤 가족의 금품 수수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2009년 5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고건1938~

      국무총리로서 두 달 동안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습니다.

      관료 출신으로 서울시장과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권한 대행 기간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박관용1938~

      국회의장으로 경호권을 발동하고 탄핵 소추안 표결을 진행했습니다.

      부산에서 여러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으로, 김영삼 정부 첫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2002~2004년 국회의장을 맡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탄핵 소추의 정당성

    소추가 정당했다고 보는 쪽

    선관위와 헌법 재판소 모두 대통령의 법 위반을 인정했고, 대통령이 이를 가볍게 여기며 사과를 거부했으므로 국회가 헌법이 정한 절차를 밟은 것이라고 봅니다.

    무리한 소추였다고 보는 쪽

    위반 정도가 가벼운데도 다수 야당이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유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했다고 봅니다. 헌재의 기각과 총선 결과가 이런 판단을 보여 준다고 평가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탄핵과 헌법 재판소

    사실 기록 · 뉴스

    탄핵 D-DAY '전쟁' - 돌발영상 시즌1 2004.03.12 방영 / YTN

    YTN 시사 · 27.5만회 ·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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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던 날 국회 모습을 담은 당시 YTN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2024년 윤석열 탄핵과 아주 달랐던 2004년 탄핵 | 그때는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대통령 탄핵 사유 | 헌법재판소의 기각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발언은..

    광주MBC · 20.1만회 ·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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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소추안 가결부터 기각, 업무 복귀 담화까지 방송 자료로 정리했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2004) (2019.05.14/뉴스투데이/MBC)

    MBCNEWS · 18.2만회 ·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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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헌법 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을 되짚은 MBC 짧은 리포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노무현대통령 탄핵선고 역사적 명판결

    그때 그마음 · 635.6만회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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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선고 장면을 옮긴 짧은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노무현대통령 탄핵소추 기각 결정 mbc뉴스데스크

    정도전 · 8.6만회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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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기각 결정 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개인이 다시 올린 영상입니다.

  5. 4.1

    경제

    한·칠레 자유 무역 협정(FTA) 발효

    2003년 2월 서명한 한국의 첫 자유 무역 협정이 국회 비준을 거쳐 발효됐습니다. 농민 단체의 반대가 컸지만, 남반구에 있어 농산물 수확 시기가 겹치지 않는 칠레를 첫 상대국으로 골랐습니다.

    배경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겪으며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농민 사회의 반대로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이 쉽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농업 피해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를 첫 협상 상대로 찾았습니다.

    전개

    한국은 남반구에 있어 농산물 수확 시기가 겹치지 않는 칠레를 첫 자유 무역 협정 상대국으로 정하고 1999년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2002년 10월 협상이 타결됐고 2003년 2월 15일 정식 서명했지만, 농민 단체의 강한 반대로 국회 비준이 늦어져 2004년 2월에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칠레 자유 무역 협정은 2004년 4월 1일 발효되며 한국의 첫 자유 무역 협정이 됐습니다. 이후 한국은 싱가포르·아세안·미국·유럽 연합·중국 등으로 자유 무역 협정 상대국을 계속 넓혀 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99년 12월한국과 칠레가 자유 무역 협정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2. 2002년 10월 25일협상이 최종 타결됐습니다.
    3. 2003년 2월 15일협정이 정식으로 서명됐습니다.
    4. 2004년 2월 16일국회가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5. 2004년 4월 1일한·칠레 자유 무역 협정이 발효됐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국회 비준 등 협정 발효 과정을 대통령으로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통상 국가로서 자유 무역 협정 확대를 추진한 대통령으로, 이후 미국과의 FTA 협상도 임기 중 시작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칠레를 첫 FTA 상대로 고른 전략

    신중한 전략이었다는 쪽

    농산물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나라부터 시작해 국내 반발을 줄이면서 FTA 경험을 쌓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농업 피해가 여전했다는 쪽

    포도 등 일부 과수 농가는 직접적인 피해를 봤고, 협정 체결 과정에서 농민에 대한 설득과 지원 대책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뉴스K - 한·칠레 FTA 10년..."구멍가게만도 못한 장사"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 4,970회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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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7.1

    경제

    주 5일 근무제 시행

    2003년 8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공공 기관과 1,0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주 5일(주 40시간) 근무제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확대돼 2011년 7월 20인 이상 사업장까지 적용됐습니다.

    배경

    1990년대 후반부터 삶의 질을 높이자는 사회적 요구와 함께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노사정 위원회 등에서 협의가 오갔지만 노동계와 경영계의 이견으로 입법이 여러 해 미뤄졌습니다.

    전개

    정부는 2002년 10월 주 5일 근무제 도입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고, 2003년 8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해 2004년 7월 1일 공공 기관·금융업·보험업과 1,000인 이상 사업장부터 먼저 적용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후 300인 이상(2005년 7월), 100인 이상(2006년 7월), 50인 이상(2007년 7월), 20인 이상(2008년 7월) 사업장까지 차례로 확대됐고, 2011년 7월 5인 이상 사업장까지 넓어지며 제도가 사실상 자리 잡았습니다. 주말 여가와 관광 산업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2년 10월정부가 주 5일 근무제 도입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2. 2003년 8월 29일국회 본회의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3. 2004년 7월 1일공공 기관과 1,0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됐습니다.
    4. 2005~2008년사업장 규모를 낮춰 가며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5. 2011년 7월5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돼 제도가 사실상 자리 잡았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주 5일 근무제 도입 법안 처리를 국정 과제로 추진했습니다.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개선을 강조한 대통령으로, 임기 초 근로기준법 개정을 성사시켰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주 5일제' 덕분에 주말이 이븐하게 익었네요 [그땐그랬지 : 주 5일제]

    옛날티비 : KBS Archive · 3.6만회 ·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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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0.21

    정치

    신행정 수도 특별법 위헌 결정

    헌법 재판소가 수도 이전은 관습 헌법에 어긋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행정 중심 복합 도시로 바뀌어 2012년 세종시가 출범했습니다.

    배경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수도권 집중을 풀기 위해 충청권에 행정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2003년 12월 신행정 수도 건설 특별 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4년 충남 연기·공주 일대가 후보지로 확정됐습니다.

    2004년 8월 11일 정부는 충남 연기·공주 지역을 신행정 수도 입지로 확정 발표했습니다. 계획은 대통령 집무실과 중앙 부처를 비롯한 주요 국가 기관을 옮기는 것이었고, 사실상 수도를 옮기는 사업이었습니다.

    전개

    서울 시민과 공무원 등이 이 법이 국민 투표 없이 수도를 옮기려 한다며 헌법 소원을 냈습니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 재판소는 재판관 8대 1 의견으로 이 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습니다.

    다수 의견은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성문 헌법에 적혀 있지 않지만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국민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습 헌법’이므로, 수도를 옮기려면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헌법 소원은 2004년 7월 서울시 의원과 공무원, 교수 등이 냈고 이석연 변호사가 대리인을 맡았습니다. 재판관 가운데 전효숙 재판관만 수도 이전이 헌법 개정 사항이 아니라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결정 직후 정부와 여당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부와 국회는 2005년 수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 중앙 행정 기관을 옮기는 ‘행정 중심 복합 도시’ 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에 대한 헌법 소원은 각하됐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이를 기업·교육 중심 도시로 바꾸는 수정안을 냈으나 국회에서 부결됐습니다.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했고,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중앙 부처가 차례로 옮겨 갔습니다. 이후 국회 세종 의사당과 대통령 세종 집무실 건설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행정 중심 복합 도시 특별법은 2005년 3월 국회를 통과했고, 헌법 재판소는 그해 11월 이 법에 대한 헌법 소원을 각하했습니다. 2010년 6월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2년 가을노무현 후보가 충청권 행정 수도 건설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2. 2003년 12월신행정 수도 건설 특별 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3. 2004년 7월서울 시민과 공무원 등이 헌법 소원을 냈습니다.
    4. 2004년 8월 11일정부가 연기·공주 지역을 신행정 수도 입지로 확정했습니다.
    5. 2004년 10월 21일헌법 재판소가 8대 1로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6. 2005년 3월행정 중심 복합 도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7. 2005년 11월헌법 재판소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특별법에 대한 헌법 소원을 각하했습니다.
    8. 2010년 6월세종시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습니다.
    9. 2012년 7월 1일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우리 헌법상 관습헌법으로 정립된 사항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사정의 변화도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개정의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
    — 헌법 재판소 2004. 10. 21. 2004헌마554 등 결정 요지헌법 조문에 적혀 있지 않아도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헌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므로, 수도를 옮기려면 국민 투표를 거치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인물

    • 이석연1954~

      청구인들의 대리인으로 헌법 소원을 이끌었습니다.

      변호사로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지냈습니다.

    • 전효숙1951~

      재판관 가운데 혼자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판사 출신으로 2003년 여성 최초의 헌법 재판관이 됐습니다. 2006년 헌법 재판소장 후보로 지명됐지만 임명 절차를 둘러싼 논란 끝에 지명이 철회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관습 헌법’ 논리

    결정을 지지하는 쪽

    수도를 옮기는 것은 나라의 기본 틀을 바꾸는 일이므로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판단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한 정부가 법률만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았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결정을 비판하는 쪽

    헌법에 없는 내용을 ‘관습 헌법’이라는 개념으로 끌어와 국회가 만든 법을 무효로 한 것은 헌법 재판소가 권한을 넘은 것이라고 봅니다.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 판단을 사법이 가로막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탄핵과 헌법 재판소

    사실 기록 · 뉴스

    [TV 보다 리얼] 헌법에 ‘수도’ 조항…다시보는 헌재의 ‘관습헌법’ 결정 | KBS뉴스 | KBS NEWS

    KBS News · 2.1만회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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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헌재의 관습 헌법 위헌 결정을 다시 설명한 KBS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빛을 볼까, 간만 보게 될까? '신행정수도'가 논란되는 이유는? / 비디오머그

    비디오머그 - VIDEOMUG · 5.6만회 ·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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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행정수도 논란의 역사를 짚으며 위헌 결정은 일부로 다룹니다.

  8. 12.15

    경제

    개성 공단 가동

    2004.12.15 ~ 2016.2.10 · 11년 1개월

    북한 개성에 조성된 공단에서 남측 기업이 북측 노동자를 고용해 첫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2016년 가동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배경

    2000년 정상 회담 뒤 현대아산과 북한은 개성에 공업 단지를 짓기로 합의했습니다.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토지와 노동력을 결합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개성은 휴전선에서 가깝고 서울에서 차로 한두 시간이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공단 개발은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 아시아 태평양 평화 위원회가 합의했고, 북한은 2002년 11월 개성 공업 지구법을 만들어 남측 기업의 활동을 법으로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토지 공사와 현대아산이 개발을 맡았습니다.

    전개

    2003년 6월 착공식이 열렸고, 2004년 6월 시범 단지에 입주 기업이 정해졌습니다. 12월 15일 한 주방용품 업체가 북측 노동자를 고용해 만든 첫 제품(냄비)이 출하됐습니다.

    이후 입주 기업은 120곳 넘게 늘었고 북측 노동자는 5만 명을 넘었습니다. 남측 인력과 차량이 매일 군사 분계선을 넘어 출퇴근했습니다.

    2013년 4월 북한이 3차 핵실험 뒤 남측 인원의 출입을 막고 노동자를 철수시켜 다섯 달가량 가동이 멈췄다가 재개됐습니다.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장거리 로켓 발사가 이어지자, 박근혜 정부는 2월 10일 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입주 기업은 주로 섬유·봉제, 전기 전자 부품, 기계 금속 분야의 중소기업이었습니다. 북측 노동자의 임금은 개인에게 바로 가지 않고 북한 당국 기관을 거쳐 지급됐습니다. 2013년에는 4월 3일 통행이 막히고 4월 8일 북측 노동자가 철수했다가 9월 16일 다시 가동됐습니다. 2016년 가동 중단 발표 다음 날 북한은 남측 인원을 추방하고 공단 안 자산을 동결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입주 기업들은 설비와 재고를 두고 급히 철수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2020년 6월 북한은 공단 안에 있던 남북 공동 연락 사무소 건물을 폭파했습니다. 공단은 그 뒤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0년 8월현대아산과 북한이 개성 공단 개발에 합의했습니다.
    2. 2002년 11월북한이 개성 공업 지구법을 만들었습니다.
    3. 2003년 6월 30일개성 공단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4. 2004년 12월 15일첫 제품인 냄비가 출하됐습니다.
    5. 2013년 4월북한이 남측 인원의 통행을 막고 북측 노동자를 철수시켰습니다.
    6. 2013년 9월 16일다섯 달 만에 공단이 다시 가동됐습니다.
    7. 2016년 2월 10일박근혜 정부가 공단 가동 전면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8. 2016년 2월 11일북한이 남측 인원을 추방하고 자산을 동결했습니다.
    9. 2020년 6월 16일북한이 공단 안의 남북 공동 연락 사무소 건물을 폭파했습니다.

    인물

    • 정몽헌1948~2003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으로 개성 공단 개발 합의를 이끌었습니다.

      정주영의 다섯째 아들로 현대그룹 회장을 지내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 등 대북 사업을 맡았습니다. 공단 착공 두 달 뒤인 2003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박근혜1952~

      대통령으로서 2016년 2월 개성 공단 전면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제18대 대통령(2013~2017)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입니다. 2017년 3월 헌법 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파면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개성 공단의 평가

    평화와 경제 협력의 모델로 보는 쪽

    남북이 매일 함께 일하면서 긴장을 낮추는 완충 역할을 했고, 중소기업에는 경쟁력 있는 생산 기지였다고 봅니다. 북한 주민이 남쪽 제품과 문화를 접해 변화의 씨앗이 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안보 위험을 강조하는 쪽

    북측 노동자 임금이 북한 정권에 달러로 지급돼 핵·미사일 개발에 쓰였을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이 필요할 때마다 통행을 막아 기업을 볼모로 삼았고, 결국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 멈출 수 있는 불안정한 사업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68 개성공단과 남북경협

    KBS 히스토리 · 3.8만회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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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개성공단 조성과 남북 경협을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진짜 개성공단 이야기 _김진향

    다큐창작소 · 6.9만회 · 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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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개성공단 이사장 출신 강연자가 공단의 실상을 설명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가동 중단 6년…사진으로 되돌아 보는 개성공단 / KBS 2022.09.19.

    KBS News · 3,681회 ·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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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가동 중단 6년을 맞아 사진으로 개성 공단의 운영을 돌아본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개성공단 가동 중단 10년…“내가 일군 모든 게 저기에” / KBS 2026.02.10.

    KBS News · 3,146회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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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가동 중단 10년에 입주 기업인의 증언을 담은 KBS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음식물 쓰레기 챙겨가던 북한 직원’, 개성공단 영양사가 직접 전하는 개성공단 이야기 #bbc #bbcnews코리아

    BBC News 코리아 · 22.1만회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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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단 영양사가 북측 직원과 일한 경험을 전하는 BBC 짧은 영상입니다.

  9. 2005

    1.5

    경제

    종합부동산세 도입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려 집값을 안정시키려는 종합부동산세법이 제정됐습니다. 그해 8월 31일에는 과세 기준을 공시 가격 6억 원으로 낮추는 부동산 종합 대책이 나왔습니다.

    배경

    2000년대 들어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자,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려 시세 차익 기대를 낮추는 방식으로 집값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전개

    정부는 2003년 10월 부동산 보유세 개편 방안을 발표했고, 2005년 1월 5일 종합부동산세법을 제정했습니다. 일정 금액을 넘는 주택이나 토지를 가진 사람에게 기존 재산세와 별도로 국세인 종합부동산세를 물리는 방식이었습니다. 그해 8월 31일에는 과세 기준을 공시 가격 6억 원으로 낮추고 다주택자 양도세를 무겁게 매기는 부동산 종합 대책(8·31 대책)을 추가로 내놓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세금 강화에도 서울 아파트값은 2005년 이후에도 계속 올라 정책 효과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종합부동산세는 이후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과세 기준과 세율이 여러 차례 조정되는 대표적인 부동산 정책 수단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3년 10월 29일정부가 부동산 보유세 개편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2. 2005년 1월 5일종합부동산세법이 제정됐습니다.
    3. 2005년 8월 31일과세 기준을 낮추는 부동산 종합 대책(8·31 대책)이 발표됐습니다.
    4. 2005년 12월종합부동산세가 처음 부과됐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종합부동산세 도입과 8·31 대책 등 부동산 세제 강화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임기 내내 집값 문제와 씨름한 대통령으로, 보유세 강화를 통한 부동산 시장 안정을 핵심 정책 목표로 삼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종합부동산세 도입의 효과

    과세 형평성을 높였다는 쪽

    소수의 고가 부동산 보유자에게 세 부담을 지워 조세 형평성을 높이고 투기 수요를 억제하려 한 정책이었다고 봅니다.

    집값 안정에 실패했다는 쪽

    세금을 강화해도 서울 강남권 등의 집값 상승세를 꺾지 못했고, 공급 대책 없이 세금에만 의존해 실효성이 낮았다고 봅니다.

  10. 5.18

    경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제정과 위원회 출범

    2005.5.18 ~ 9.1 · 3개월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에 정부 차원에서 대응하기 위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5월 18일 제정됐습니다. 이 법에 따라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9월 1일 출범해 5년마다 기본 계획을 세우게 됐습니다.

    배경

    2000년대 들어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며 2005년에는 1.08명까지 낮아져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노동력 감소와 연금 재정 부담 등 장기적인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전개

    정부와 국회는 인구 문제에 범정부 차원으로 대응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2005년 5월 18일 제정돼 9월 1일 시행됐고, 이에 따라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같은 날 출범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위원회는 5년마다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을 세우고 해마다 시행 계획을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저출산 대책이 나왔지만 출산율 반등에는 이르지 못했고, 정책 실효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3년합계 출산율이 1.19명까지 떨어졌습니다.
    2. 2005년 5월 18일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됐습니다.
    3. 2005년 9월 1일법이 시행되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4. 2006년첫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새로마지 플랜)이 수립됐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제정과 위원회 출범을 국정 과제로 추진했습니다.

      저출산·고령화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고 범정부 대응 체계를 처음 만든 대통령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저출산 대책의 방향

    보육·양육 지원 확대를 강조하는 쪽

    보육료·양육비 지원과 일·가정 양립 제도를 늘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담을 국가가 나눠 져야 한다고 봅니다.

    구조적 원인 해결을 강조하는 쪽

    주거비·고용 불안·경쟁적인 교육 환경 같은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현금성 지원만으로는 출산율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봅니다.

  11. 2006

    7.1

    정치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제주도와 4개 시·군을 하나로 합쳐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했습니다. 지방 분권의 시험 모델로 중앙 정부의 여러 권한을 넘겨받았고, 옛 북제주군은 제주시에, 남제주군은 서귀포시에 통합됐습니다.

    배경

    노무현 정부는 지방 분권을 국정 과제로 삼아 중앙 정부의 권한을 지역에 넘기는 실험을 추진했습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독자적인 관광·환경 정책이 필요했던 제주도가 그 첫 시험 무대로 선택됐습니다.

    전개

    제주도는 2005년 주민 투표를 거쳐 기초 자치 단체인 시·군을 없애고 단일 광역 자치 단체로 개편하는 안을 확정했습니다.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공식 출범하면서 옛 북제주군은 제주시에, 남제주군은 서귀포시에 흡수 통합됐고, 두 시는 자치 권한이 없는 행정시로 바뀌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제주특별자치도는 중앙 정부로부터 관광·환경·교육 등 분야의 권한을 대폭 넘겨받아 지방 분권의 모델로 꼽힙니다. 다만 기초 자치 단체가 사라지면서 주민 자치의 기반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5년 7월제주도 주민 투표에서 기초 자치 단체를 없애고 단일 광역 자치 단체로 개편하는 안이 확정됐습니다.
    2. 2006년 2월 21일제주특별자치도 설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3. 2006년 7월 1일제주특별자치도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지방 분권 실험 모델로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을 추진했습니다.

      임기 중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아 제주특별자치도와 행정 중심 복합 도시(세종시) 등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기초 자치 단체 폐지의 효과

    행정 효율을 높였다는 쪽

    시·군·구 3단계였던 행정 체계를 광역 하나로 단순화해 정책 결정이 빨라지고 예산 낭비를 줄였다고 봅니다.

    풀뿌리 자치가 약해졌다는 쪽

    기초 의회와 기초 단체장이 사라지면서 주민과 가까운 곳에서 이뤄지던 자치 기능이 오히려 축소됐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제주, 새로운 미래를 열다 |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0주년 기념 영상

    제주도TV·Jeju · 7,267회 ·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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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교양 · 해설

    집중진단 제주 [특별자치도 출범 15주년 성과와 과제]

    KBS제주 · 665회 · 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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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0.9

    외교

    북한 첫 핵실험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첫 핵실험을 했습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대북 제재를 결의했습니다.

    배경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1차 북핵 위기가 봉합됐지만, 2002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의혹이 불거지며 합의가 무너졌습니다. 북한은 2003년 핵 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남북한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 회담이 열려 2005년 9·19 공동 성명으로 북한의 핵 포기 원칙에 합의했지만, 곧 미국의 대북 금융 제재 문제로 교착에 빠졌습니다.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으로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처음 공식 선언했습니다. 같은 해 9월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 은행을 북한 자금 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해 북한 계좌 2,500만 달러가량이 묶였고, 북한은 이 제재가 풀리기 전에는 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맞섰습니다.

    전개

    북한은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등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했고, 10월 3일 핵실험 계획을 예고했습니다. 10월 9일 오전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인공 지진파가 관측됐으며, 폭발 규모는 1킬로톤 안팎의 작은 수준으로 분석됐습니다.

    실험은 오전 10시 35분 무렵 이뤄졌고, 북한은 실험 직전 중국에 계획을 알렸습니다. 한국 지질 자원 연구원 등은 규모 3점대의 인공 지진을 관측했습니다. 폭발력이 예상보다 작아 실험이 온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결과와 의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0월 14일 만장일치로 결의 1718호를 채택해 북한에 대한 무기 거래 금지와 금융 제재를 결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북 포용 정책을 계속할지를 두고 논쟁이 커졌지만, 정부는 개성 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유지했습니다.

    6자 회담은 재개돼 2007년 2·13 합의 등이 나왔지만 북한의 핵 개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009년, 2013년, 2016년 두 차례, 2017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 핵실험을 했습니다.

    핵실험 뒤 미국은 2007년 1월 베를린에서 북한과 직접 협의에 나섰고, 이것이 2·13 합의와 BDA 자금 해제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5년 2월 10일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2. 2005년 9월 19일6자 회담에서 북한의 핵 포기 원칙을 담은 9·19 공동 성명이 나왔습니다.
    3. 2005년 9월미국이 BDA 은행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 북한 자금이 묶였습니다.
    4. 2006년 7월 5일북한이 대포동 2호 등 미사일 여러 발을 발사했습니다.
    5. 2006년 10월 3일북한 외무성이 핵실험 계획을 예고했습니다.
    6.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무렵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첫 지하 핵실험이 이뤄졌습니다.
    7. 2006년 10월 14일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결의 1718호를 채택했습니다.
    8. 2007년 2월 13일6자 회담에서 핵 시설 폐쇄와 지원을 맞바꾸는 2·13 합의가 나왔습니다.

    사료로 읽기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서 일대 비약을 창조해나가는 벅찬 시기에 우리 과학연구부문에서는 주체 95(2006)년 10월 9일 지하핵 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 조선중앙통신 보도(2006년 10월 9일)북한이 첫 핵실험을 발표한 문장입니다. ‘주체 95년’은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1년으로 삼는 북한식 연도 표기입니다.

    인물

    • 김정일1941~2011

      북한 최고 권력자로 첫 핵실험을 결정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뒤 북한을 이끌며 군을 앞세운 ‘선군 정치’를 폈습니다. 재임 중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을 했습니다.

    • 크리스토퍼 힐1952~

      미국 6자 회담 수석 대표로 핵실험 뒤 북한과 협상해 2·13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미국 외교관으로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뒤 2005년부터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 겸 6자 회담 수석 대표를 맡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핵실험과 대북 포용 정책

    포용 정책의 실패로 보는 쪽

    교류와 지원을 이어 가는 동안에도 북한은 핵 개발을 계속했으므로, 포용 정책이 북한을 바꾸지 못하고 시간과 자원만 벌어 줬다고 봅니다.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쪽

    북한 핵 개발의 주된 동기는 미국과의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남북 교류만으로 핵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압박만으로도 핵 개발을 멈추지 못했으니, 협상과 교류의 통로를 유지해야 충돌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때 주변에서는
    핵실험 나흘 뒤인 2006년 10월 13일 유엔 총회는 반기문 외교 통상부 장관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은 처음이었고, 그는 2007년 1월부터 두 차례 임기를 지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0 2006년 북한 핵실험과 선군정치

    KBS 히스토리 · 9,823회 ·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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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2006년 북한 첫 핵실험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했던 때 노무현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들의 대화 |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같이 작성했다는 가훈(家訓) | 2010년 '

    광주MBC · 1.3만회 ·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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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핵실험 날 전직 대통령 대화가 앞부분에만 나오고 나머지는 김대중 이야기입니다.

  13. 2007

    6.30

    경제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 서명

    2007.6.30 ~ 2012.3.15 · 4년 8개월

    한국과 미국이 FTA에 서명했고, 재협상을 거쳐 2012년 3월 발효됐습니다.

    배경

    200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나라끼리 관세를 없애는 자유 무역 협정(FTA)이 빠르게 늘었습니다. 한국은 2004년 칠레와 첫 FTA를 발효시킨 뒤 큰 시장과의 협정을 추진했고, 2006년 2월 세계 최대 경제국 미국과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협상 시작 전 정부가 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스크린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는 등 미국의 요구를 먼저 들어줬다는 비판이 나왔고, 농민과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커졌습니다.

    2006년 1월 정부는 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한 해 146일에서 73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고, 2월 3일 한미 FTA 협상 시작을 알렸습니다. 쇠고기 수입 재개,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적용 유예 등과 함께 협상 전에 미리 들어준 ‘4대 선결 조건’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정부는 협상 조건과 관계없는 별개의 정책 결정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개

    여덟 차례 공식 협상 끝에 2007년 4월 2일 협상이 타결됐고, 6월 30일 두 나라가 협정문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가 자동차 분야 등을 문제 삼아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2010년 말 이명박 정부가 자동차 관세 철폐 시기 조정 등을 담은 추가 협상에 합의했습니다. 2011년 11월 22일 국회는 여당 단독으로 비준 동의안을 처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 야당 의원이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렸습니다. 협정은 2012년 3월 15일 발효됐습니다.

    협상 기간 동안 농민·노동·시민 단체가 모인 반대 운동 본부가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타결 직전인 2007년 4월 1일에는 한 택시 기사가 협상에 반대하며 분신해 끝내 숨졌습니다. 2008년 봄에는 협정 비준을 앞두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완화한 합의가 대규모 촛불 집회로 번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추가 협상 뒤인 2011년 10월 12일 이행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결과와 의미

    발효 뒤 두 나라 사이 교역이 늘었고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커졌습니다. 반면 쇠고기·과일 등 농축산물 수입이 늘어 해당 농가는 정부의 피해 보전 대책을 받았습니다.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로 개정 협상이 열려 2019년 개정 의정서가 발효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6년 1월정부가 스크린 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 2006년 2월 3일한미 FTA 협상 시작이 발표됐습니다.
    3. 2007년 4월 2일협상이 타결됐습니다.
    4. 2007년 6월 30일두 나라가 협정문에 서명했습니다.
    5. 2008년 4~6월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 합의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6. 2010년 12월 초자동차 분야 등을 조정한 추가 협상이 타결됐습니다.
    7. 2011년 10월 12일미국 의회가 이행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8. 2011년 11월 22일한국 국회가 비준 동의안을 처리했습니다.
    9. 2012년 3월 15일협정이 발효됐습니다.
    10. 2018년 9월개정 협상 결과를 담은 의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인물

    • 김현종1959~

      통상 교섭 본부장으로 협상을 총괄했습니다.

      통상 법률가 출신으로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일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통상 교섭 본부장과 주유엔 대사를 지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통상 교섭 본부장이 돼 2018년 개정 협상을 맡았습니다.

    • 김종훈1952~

      한국 측 수석 대표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외교관 출신으로 한미 FTA 수석 대표를 맡은 뒤 이명박 정부 통상 교섭 본부장으로 추가 협상과 비준까지 맡았습니다. 이후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한미 FTA의 득실

    성과를 강조하는 쪽

    세계 최대 시장에서 관세 장벽을 낮춰 자동차·부품 등 수출이 늘었고, 서비스 산업 경쟁과 제도 선진화의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우려됐던 농업 피해와 제도 충돌도 예상보다 작았다고 평가합니다.

    우려를 강조하는 쪽

    농축산업과 영세 서비스업이 경쟁에서 밀려 피해가 컸고, 투자자가 국가를 국제 중재에 제소할 수 있는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제도(ISDS)가 공공 정책을 제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미 흑자 확대가 결국 미국의 재협상 압박으로 돌아왔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협정, 뒤바뀐 입장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서명했고 이명박 정부가 추가 협상과 비준을 마무리했습니다. 비준 당시에는 협정을 처음 추진한 정당 쪽이 재협상을 요구하며 반대에 섰고, 처음에 협상 방식을 비판하던 쪽이 비준을 밀어붙여 입장이 엇갈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수출 확대와 경제 체질 개선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농업 등 취약 산업의 피해를 우려한 반대가 컸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외교관 #집안 #출신 #한미 #FTA #협상 #사나이 #김현종

    링킹 · 189.8만회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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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FTA 협상 대표 인물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이라 서명 과정은 거의 없습니다.

  14. 10.2

    외교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과 10·4 선언

    2007.10.2 ~ 10.4 · 3일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 분계선을 넘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10·4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배경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 뒤 6자 회담이 재개돼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로 북한 핵 시설 불능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정부는 임기 말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했습니다. 회담은 원래 8월로 잡혔다가 북한의 수해로 10월로 미뤄졌습니다.

    회담 개최는 2007년 8월 8일 남북이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처음에는 8월 28일부터 30일까지로 잡혔지만, 북한에 큰 수해가 나자 북측 요청으로 10월 초로 미뤄졌습니다.

    전개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차를 타고 가다 군사 분계선 앞에서 내려 걸어서 선을 넘었습니다.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 위원장과 회담한 뒤 10월 4일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선언에는 6·15 공동 선언의 이행, 서해에 공동 어로 구역과 평화 수역을 두는 ‘서해 평화 협력 특별 지대’ 설치, 종전 선언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 회담 추진,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조선 협력 단지 건설 등 경제 협력 사업이 담겼습니다.

    노 대통령은 10월 2일 오전 9시 5분 무렵 군사 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뒤 평양으로 향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 시내에서 직접 맞이했습니다. 두 정상은 10월 3일 두 차례 회담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선언 직후 총리 회담 등 후속 협의가 이어졌지만, 두 달 뒤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고 이명박 정부가 대북 정책을 바꾸면서 대부분의 사업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 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 한계선(NLL)을 포기하는 취지로 말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2013년 국가 정보원이 정상 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면서 큰 정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대화록의 해석을 두고는 지금도 입장이 엇갈립니다.

    2013년 국가 기록원에서 대화록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 폐기 의혹 수사가 벌어졌습니다. 기소된 전직 청와대 관계자들은 2020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2007년 8월 8일남북이 두 번째 정상 회담 개최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2. 2007년 8월 18일북한의 수해로 회담이 10월 초로 미뤄졌습니다.
    3. 2007년 10월 2일 오전노무현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4. 2007년 10월 3일평양에서 두 정상이 두 차례 회담했습니다.
    5. 2007년 10월 4일‘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6. 2007년 11월서울에서 남북 총리 회담이 열려 선언 이행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7. 2007년 12월 19일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8. 2013년 6월 24일국가 정보원이 정상 회담 대화록을 공개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 제4항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 제5항공동 어로 구역을 어디에 둘지가 NLL을 기준으로 하느냐의 문제와 얽혀, 이후 NLL 논란의 중심이 된 조항입니다.

    인물

    • 노무현1946~2009

      걸어서 군사 분계선을 넘어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에 나섰습니다.

      제16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을 이어 ‘평화 번영 정책’을 폈습니다. 임기를 넉 달여 남기고 정상 회담을 열었습니다.

    • 김정일1941~2011

      북한 국방 위원장으로 두 번째 정상 회담에 나섰습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했습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정은이 권력을 이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0·4 선언과 NLL 논란

    평화 구상을 평가하는 쪽

    서해 공동 어로 구역은 해마다 충돌이 일어나는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꾸려는 구상이었고, 대화록에서도 NLL 포기를 약속한 사실은 없다고 봅니다. 이후 정부가 선언을 이행하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합니다.

    우려를 제기하는 쪽

    임기 말 정부가 다음 정부에 큰 재정 부담을 지우는 합의를 했다고 봅니다. 특히 대화록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북한의 주장에 기운 것으로 읽힐 수 있어, 서해 경계선이 흔들릴 위험을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정전 체제(군사 분계선·비무장 지대)

  15. 12.7

    참사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크레인선이 부딪혀 원유가 쏟아졌습니다.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기름을 걷어 냈습니다.

    배경

    충남 태안 앞바다는 해수욕장과 갯벌, 양식장이 많은 곳으로, 1978년 일부 해안이 태안 해안 국립 공원으로 지정됐습니다.

    전개

    2007년 12월 7일 아침,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을 실은 바지선을 끌던 예인선의 줄이 거친 날씨에 끊어졌습니다. 떠밀려 간 크레인 바지선이 만리포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홍콩 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부딪혔고, 유조선 탱크에 구멍이 나 원유 약 1만 2,500킬로리터가 바다로 쏟아졌습니다.

    기름은 태안뿐 아니라 충남 서해안과 전북, 전남 일부 섬까지 번졌습니다. 정부는 태안 등 6개 시·군을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충돌은 오전 7시 무렵 일어났습니다. 크레인 바지선은 인천대교 공사를 마치고 경남 거제로 돌아가던 길이었고, 높은 파도 때문에 초기 방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유출량은 1995년 여수 앞바다 씨프린스호 사고의 두 배를 넘었고, 양식장과 어장 수천 헥타르가 오염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가 이듬해까지 연인원 12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위에 묻은 기름을 흡착포와 헌 옷으로 하나하나 닦아 냈고, 예상보다 빠르게 해안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어민과 주민들은 오랫동안 생계 피해를 입었고, 국제 기금과 선주 측을 통한 배상 절차는 몇 년이 걸렸습니다. 선박 충돌의 책임을 두고 재판이 이어졌고, 삼성중공업은 2013년 지역 발전 기금으로 3,600억 원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이 사고 뒤 유조선을 이중 선체로 만들도록 하는 규정 적용이 앞당겨졌습니다.

    정부는 2008년 3월 피해 주민 지원과 해양 환경 복원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사고 원인을 두고는 악천후 속에 무리하게 예인을 강행한 선단과, 충돌을 피하려는 조치가 늦었던 유조선 쪽 책임이 함께 재판에서 다뤄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95년 7월여수 앞바다에서 씨프린스호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2.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 무렵예인줄이 끊긴 크레인 바지선이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부딪쳤습니다.
    3. 2007년 12월 7일 이후원유 약 1만 2,500킬로리터가 흘러나와 태안 해안으로 밀려들었습니다.
    4. 2007년 12월 11일정부가 태안 등 6개 시·군을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5. 2007년 12월~2008년전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해안의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6. 2008년 3월피해 주민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습니다.
    7. 2013년삼성중공업이 지역 발전 기금 3,600억 원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날 남은 흔적
    태안에는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을 기록한 유류 피해 극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사고는 한국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해양 오염 사고로 꼽힙니다.

    해설·교양 · 다큐

    생명이 살아있는 청정 갯벌 태안, 1만 2,548kl의 기름 유출되다

    KTV 국민방송 · 9.2만회 ·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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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출 피해와 자원봉사 방제를 담은 KTV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다,시그날] 123만 명이 살린 태안의 기적…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모지 · 15.9만회 ·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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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방제 과정을 짧게 정리했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그때 그 뉴스]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KBS News · 8.5만회 ·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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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베이 스피릿호 충돌과 기름 유출 당시를 되짚은 KBS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사고, 그 후 5년. 태안은 어떤 모습일까? [환경스페셜-허베이스트리트호 기름 유출사고, 그 후 5년] / KBS 20121207 방송

    환경스페셜 · 7,605회 · 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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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5년 뒤 태안 바다의 회복 상태를 살핀 KBS 환경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해양경찰이 기억하는 가장 참혹했던 현장은? 국내 최대의 해양오염 사고 #태안기름유출사건 |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코끼리 사진관 3 회

    채널아하: 채널A Health & Asset · 7,335회 ·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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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출동한 해양 경찰이 사고 현장을 회고하는 교양 예능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정답 맞추기 - 돌발영상 시즌1 2007.12.12 방영 / YTN

    YTN 시사 · 61.1만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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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닷새 뒤 대통령의 피해 지역 방문을 담은 당시 YTN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사상 초유의 해양 재난... 태안 기름 유출 사고 (12월7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52회] / YTN2

    YTN 밀덕스 · 1.3만회 ·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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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경위와 자원봉사 규모를 정리하되 다른 날짜 사건도 함께 다룹니다.

  16. 2008

    2.10

    참사

    숭례문 화재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방화로 불타 무너졌습니다. 5년 넘는 복구 끝에 2013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배경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1398년(태조 7년) 처음 세워졌고, 세종과 성종 때 고쳐 지었습니다. 흔히 남대문이라 불렸으며 서울에 남은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며 ‘국보 제1호’가 됐습니다. 2006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개방됐습니다.

    서울시는 2006년 숭례문 둘레에 광장을 만들고 일반인이 문 안까지 드나들 수 있게 했습니다. 밤에는 경비 인력 없이 무인 경비 장치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전개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40분 무렵, 한 60대 남성이 숭례문 2층 누각에 올라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소방관들이 출동했지만 기와 아래 목재 속으로 번진 불을 잡지 못했고,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지붕을 헐고 진화하는 결정도 늦어졌습니다.

    불은 밤새 타올랐고 11일 새벽 2층 누각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방화범은 자신의 땅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으며, 2006년에도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불길이 잡힌 듯 보였지만 기와 아래 속 목재에 남은 불씨가 살아나 밤이 깊어지면서 다시 거세졌습니다. 방화범은 이튿날인 11일 붙잡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1층 석축과 일부 목재는 남았지만 누각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정부는 전통 기법과 재료로 복구하기로 하고 5년 넘게 공사해 2013년 5월 복구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일제 때 헐린 좌우 성곽 일부도 함께 되살렸습니다.

    그러나 복구 몇 달 뒤 단청이 벗겨지고 목재가 갈라지는 문제가 드러나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고, 감사와 수사가 이어졌습니다. 화재를 계기로 목조 문화재에 대한 방재 설비와 관리 체계가 크게 강화됐습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복구에는 200억 원 넘게 들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398년한양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숭례문이 처음 세워졌습니다.
    2. 1962년국보로 지정되며 ‘국보 제1호’가 됐습니다.
    3. 2006년문 주변에 광장이 생기고 일반인에게 개방됐습니다.
    4.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40분 무렵2층 누각에 불이 났습니다.
    5. 2008년 2월 11일 새벽 2시 무렵2층 누각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6. 2008년 2월 11일방화범이 붙잡혔습니다.
    7. 2010년 2월복구 공사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8. 2013년 5월 4일복구 기념식이 열리고 숭례문이 다시 공개됐습니다.
    9. 2013년 가을단청이 벗겨지는 등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습니다.

    인물

    • 채종기

      숭례문 2층 누각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60대 남성으로, 자신의 땅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2006년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러 집행 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숭례문 방화로 징역 10년이 확정됐습니다.

    • 유홍준1949~

      문화재청장으로 화재 책임을 지고 사임했습니다.

      미술사학자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저자입니다. 2004년부터 문화재청장을 지내다 숭례문 화재 뒤 물러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국보 1호’의 의미
    국보 번호는 중요도 순서가 아니라 지정한 순서에 따른 관리 번호였습니다. 숭례문이 1호가 된 것도 가치가 가장 높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번호가 서열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지적에 따라 2021년 문화재 지정 번호 제도가 폐지돼, 지금은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부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꼬무 151회 요약] 5시간의 사투 끝에 무너진 610년의 역사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SBS방송)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110.3만회 ·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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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방화와 붕괴까지 다섯 시간을 따라간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다,시그날] 허망하게 타버린 국보 1호…“숭례문 화재 참사”

    모지 · 28만회 ·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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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화재 원인과 허술한 관리를 짧게 정리했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그때는지금은] "믿기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숭례문 무너지던 날 / SBS / 모아보는 뉴스

    SBS 뉴스 · 4.3만회 ·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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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 당일부터 무너지기까지의 SBS 보도를 모아 둔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방화범의 소행?! 숭례문 방화 사건의 전말 | 그알로 보는

    그것이 알고싶다 · 16.9만회 ·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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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 직후 범행 동기와 관리 부실을 추적한 그것이 알고싶다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FULL] 더 화려하게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온 숭례문, 복구현장 밀착취재 (2부) | KBS 특별기획 - “숭례문 1911일의 기록” (KBS 130501 방송)

    KBS 다큐 · 35.1만회 · 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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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 뒤 5년에 걸친 복구 과정을 기록한 KBS 특별기획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FULL] 무형문화재장인들이 합심한 숭례문 복구 현장, 5년 3개월 밀착 취재 (1부) | KBS 특별기획 - “숭례문 1911일의 기록” (KBS 130430

    KBS 다큐 · 87만회 · 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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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 이후 숭례문 복구 과정을 중심으로 다룬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심랑괴】서울 한복판에 일어난 거대한 화재 불은 고작 5시간만에 국보를 앗아갔다.- 숭례문 방화 참사 [실제사건]

    캬랑Kyaryang · 55.7만회 ·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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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숭례문 방화 경위를 개인 채널이 정리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숭례문 화재에서 붕괴까지 / 2008년

    미디어몽구 · 8.7만회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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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이 번져 누각이 무너지는 과정을 현장에서 찍은 영상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탄핵과 헌법 재판소

대통령 등 고위 공직자가 헌법·법률을 어기면 국회가 소추하고 헌법 재판소가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대통령 탄핵 소추는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되고, 헌법 재판소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찬성하면 파면됩니다. 소추되면 결정 때까지 권한이 멈춥니다.

헌법 재판소는 1987년 헌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노무현(2004, 기각), 박근혜(2017, 파면), 윤석열(2025, 파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있었습니다.

해설

22분짜리 탄핵 판결문, 딱 핵심만 5분 정리해 봄 / 스브스뉴스

스브스뉴스 SUBUSUNEWS · 229.3만회 ·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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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체제(군사 분계선·비무장 지대)

1953년 정전 협정으로 전쟁을 멈춘 채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정전 협정으로 군사 분계선을 긋고 양쪽으로 2km씩 비무장 지대를 뒀습니다. 전쟁을 끝내는 평화 협정은 맺어지지 않아 법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상태입니다.

바다에는 유엔군이 정한 북방 한계선(NLL)이 있으며, 서해에서는 이를 둘러싼 충돌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