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대한제국기

대한제국 선포와 만민 공동회

고종이 황제로 즉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열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해 말 강제로 해산됐습니다.

기간
1897.10.12 ~ 1898.12.31 · 1년 2개월
누가 다스렸나
황제 고종(광무)
담긴 것
사건 7 · 영상 47 · 영화·드라마 4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8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90분) — 고종의 충신이던 이완용은 왜 매국노가 되었나

디글 · 272.7만회 · 1: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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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 독립 협회부터 을사늑약까지 다룹니다.

1896.7.2 ~ 1910.8.29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다큐

역사스페셜 —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KBS 히스토리 · 207.7만회 · 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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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미사변 가담자 우범선과 그를 벤 고영근을 다룬 역사스페셜입니다.

1895.10.8 ~ 1903.11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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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KBS 히스토리 · 129.6만회 ·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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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이완용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시기를 인물 중심으로 봅니다.

1896.7.2 ~ 1910.8.29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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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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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5일차 4교시 — 독립 협회부터 대한 제국까지

최태성 1TV · 64.7만회 ·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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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독립 협회부터 대한 제국까지 기출 개념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896.7.2 ~ 1899.8.17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해설·교양 · 만화

돌아온 서재필 —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

지니스쿨 역사 · 45만회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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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서재필과 독립 협회, 만민 공동회를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합니다.

1896.4.7 ~ 1898.12.25 · 대한제국 선포 → 독립협회 해산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4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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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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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0· 공식 영상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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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5.4.10 ~ 1905

SBS.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의사가 된 백정 출신 청년 이야기

영화 · 2017· 제목만

「대장 김창수」

배경 1896 ~ 1898

청년 김구(김창수)가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시절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영화걸작선] 38회 - 대장 김창수

거의없다 · 64.7만회 ·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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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독립협회 창립 (~1898.12.25), 독립문 정초 (~1897.11)

  1. 1897

    10.12

    정치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10월 12일). 이튿날 국호를 대한으로 반포했고, 연호 광무와 함께 자주독립국임을 안팎에 알렸습니다.

    배경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에게는 국왕의 위신을 되살리고 청·일본·러시아와 대등한 나라임을 보여야 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청일 전쟁으로 청과의 사대 관계는 끝났고,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면서 어느 한쪽도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관료와 유생, 독립협회 인사들 사이에서 국왕이 황제로 즉위해야 한다는 ‘칭제’ 상소가 잇따랐습니다. 중국 황제와 같은 칭호를 써야 청의 속국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전개

    1897년 8월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었고, 서울 소공동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새로 쌓았습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튿날 나라 이름을 ‘대한’으로 정해 반포했습니다. 옛 삼한을 아우른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떠난 왕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국장을 치렀습니다.

    칭제 상소는 1897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올라왔습니다. 의정 심순택을 비롯한 대신들이 백관을 이끌고 여러 차례 황제 즉위를 청했고, 고종은 사양하다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즉위 하루 전인 10월 11일 고종은 대신들과 새 나라 이름을 의논해 ‘대한’으로 정했습니다. 즉위식에서 고종은 황제를 상징하는 누런 빛의 곤룡포를 입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선은 대한제국이 됐고, 왕은 황제, 왕세자는 황태자로 칭호가 바뀌었습니다. 대한제국은 경운궁을 중심 궁궐로 삼고, 이후 광무개혁과 대한국 국제 반포(1899)로 황제 중심의 국가 체제를 갖춰 나갔습니다.

    대한제국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약 1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1919년 수립된 임시 정부가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할 때 ‘대한’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1899년 9월 대한제국은 청과 한청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두 나라 황제가 대등한 자격으로 맺은 조약으로, 조공과 책봉으로 이어진 옛 관계가 조약 관계로 바뀌었음을 보여 줍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7년 2월 20일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왔습니다.
    2. 1897년 8월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었습니다.
    3. 1897년 9월 말~10월 초대신과 유생들의 칭제 상소가 잇따랐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4. 1897년 10월 11일고종이 대신들과 의논해 새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습니다.
    5. 1897년 10월 12일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6. 1897년 10월 13일국호를 ‘대한’으로 한다는 조서를 반포했습니다.
    7. 1897년 11월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르고 홍릉(지금의 서울 청량리 부근)에 모셨습니다.
    8. 1899년 9월청과 대등한 자격으로 한청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인물

    • 고종(광무 황제)1852~1919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습니다.

      열두 살에 즉위해 흥선대원군 섭정, 개항, 임오군란·갑신정변, 청일 전쟁, 을미사변을 모두 겪은 군주입니다. 1907년 퇴위한 뒤 덕수궁에 머물다 1919년 1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장례는 3·1 운동의 계기가 됐습니다.

    • 심순택1824~1906

      의정으로서 백관을 이끌고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했습니다.

      고종 대에 영의정 등을 지낸 원로 관료입니다. 대한제국 수립 직후 의정부의 수장인 의정을 맡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개명 군주로 보는 쪽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외교로 나라를 지키려 했고,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으로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려 헤이그 특사를 보내는 등 끝까지 국권을 지키려 한 군주로 봅니다.

    책임을 무겁게 보는 쪽

    결정적인 순간마다 외국 세력에 기대었고, 황실 재정을 키우는 데 치중해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제대로 기르지 못했으며, 독립협회 같은 개혁 세력을 억눌러 국권 상실을 막을 기회를 놓쳤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환구단과 황궁우
    환구단은 일제 강점기인 1913년 헐리고 그 자리에 조선 철도 호텔이 들어섰습니다(지금의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 1899년 지은 부속 건물인 팔각형의 황궁우와 돌북만 남아 서울 소공동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연호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고종의 승부수, 대한제국 선포ㅣKBS 230115 방송

    KBS 히스토리 · 1.9만회 ·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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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7%추천 ★★★★★

    역사저널 그날에서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를 다룬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KBS 히스토리 · 3.2만회 ·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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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환구단 황제 즉위식과 대한제국 선포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만화

    새로운 국가의 탄생 '대한 제국' (역사만화 83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4.7만회 ·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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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고종의 환궁과 대한 제국 선포를 다룬 역사만화 편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있었던 일

    이강민의 잡지사 · 6.1만회 · 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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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환구단에서 있었던 선포 과정과 평가를 다룬 라디오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도망친 고종이 돌아와 세운 대한제국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설민석의 한국통사 EP.51] | 매주 월요일 공개

    설민석 Seol Min Seok · 2.5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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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설민석 한국통사로 아관파천에서 대한제국 선포까지 이어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제국 이야기 | Korean Empire (AD 1864 ~ 1910) - 근대의 빛과 몰락

    5분순삭한국사 · 25만회 · 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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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대한제국의 역사 전체를 넓게 훑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대한제국 황실가족

    국립고궁박물관 gogungmuseum · 77.1만회 ·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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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대한제국 황실 가족을 소개하는 전시 영상이라 선포 자체는 없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제국 애국가" - National Anthem of The Korean Empire [1902-1904]

    Ingen · 45.9만회 ·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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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대한제국 애국가 음원이라 선포 과정은 다루지 않습니다.

  2. 10.12

    정치

    광무개혁

    1897.10.12 ~ 1904 · 7년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작한다(구본신참)'를 내걸고 대한제국이 추진한 개혁입니다. 토지를 측량해 소유자에게 지계(토지 증서)를 발급하고, 황제 직속 원수부를 두어 군권을 쥐었습니다.

    • 전차(1899)·경인선(1899)·전화 등 근대 시설과 상공 학교,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배경

    대한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개혁의 원칙으로 내세웠습니다. 갑오·을미개혁이 일본의 영향 아래 서둘러 추진돼 반발을 샀다는 반성이 깔려 있었고, 황제가 중심이 되어 점진적으로 근대 제도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던 1897~1904년 무렵은 어느 한 나라의 간섭이 비교적 약해, 대한제국이 스스로 정책을 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전개

    정치·군사 면에서는 1899년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황제권을 법으로 정하고, 황제 직속 원수부를 두어 군 통수권을 쥐었습니다. 서울에는 시위대, 지방에는 진위대를 늘렸고, 1898년 무관 학교를 세워 장교를 길렀습니다.

    경제 면에서는 1898년부터 토지를 측량하고 1901년부터 소유자에게 지계를 발급했습니다.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 내장원이 광산·홍삼·역둔토 등의 수입을 모아 재정을 크게 키웠고, 황실과 상인이 함께 은행·회사를 세웠습니다. 상공 학교·의학교 같은 실업·기술 학교와 외국어 학교도 세웠습니다.

    근대 시설로는 전차(1899)와 경인선(1899)이 개통됐고, 전화·전등·우편·전신망이 넓어졌습니다. 1900년에는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했고, 같은 해 파리 만국 박람회에도 참가했습니다. 개혁은 1904년 러일 전쟁과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멈췄습니다.

    결과와 의미

    짧은 기간이지만 토지 제도·교육·교통·통신 등에서 근대화의 틀이 여럿 마련됐습니다. 반면 황실 재정(내장원)이 정부 재정(탁지부)보다 커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정치 참여를 요구한 독립협회는 해산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7년 10월 12일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구본신참’을 내건 개혁이 시작됐습니다.
    2. 1898년장교를 기르는 무관 학교가 세워지고, 7월 토지 측량을 맡은 양지아문이 설치됐습니다.
    3. 1899년 1월대한 천일 은행이 문을 열었습니다.
    4. 1899년 5월서대문~청량리 구간 전차가 개통됐습니다.
    5. 1899년 6~8월황제 직속 원수부를 두고(6월), 대한국 국제를 반포했습니다(8월).
    6. 1899년 9월 18일노량진~제물포 사이 경인선이 개통됐습니다.
    7. 1900년1월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고, 4월 문을 연 파리 만국 박람회에 한국관을 세워 참가했습니다.
    8. 1901년 10월지계아문을 두어 토지 소유 증서(지계) 발급에 나섰습니다.
    9. 1904년 2월러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개혁이 사실상 멈췄습니다.

    인물

    • 이용익1854~1907

      내장원경·탁지부 대신 등을 맡아 광산·화폐 등 황실 재정을 키우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함경도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왕비와 궁궐 사이의 연락을 맡아 신임을 얻었습니다. 고종의 재정 측근으로 활약했고, 러일 전쟁 때 친러 인물로 지목돼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돌아와 보성학교를 세웠으며, 190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채연1861~1900

      한성판윤으로 서울의 도로를 넓히고 정비하는 도시 개조 사업을 이끌었고, 한성 전기 회사 사장을 맡았습니다.

      주미 공사관에서 일하며 미국 워싱턴의 도시 모습을 직접 본 관료입니다. 1896년부터 한성판윤으로 일하며 종로·남대문로 일대의 가가(임시 상가)를 정리하고 길을 넓혔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광무개혁은 자주적 근대화였나

    자주적 근대화 노력으로 보는 쪽

    외세의 강요가 아니라 대한제국 스스로 계획한 개혁이었고, 양전·지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세우려 했으며, 상공업 진흥과 교통·통신 시설을 갖추는 등 실질적인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이어질 수 있었던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합니다.

    한계를 강조하는 쪽

    개혁의 초점이 황제권 강화와 황실 재정 확대에 맞춰져 국민의 정치 참여는 막혔고, 재정이 부족한 데다 황실과 정부 재정이 뒤섞여 효율이 떨어졌으며, 군사력도 실제 방어에는 부족해 러일 전쟁 앞에서 무력했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광무개혁 논쟁
    1970년대 학계에서는 대한제국 개혁을 근대화의 주체로 볼 것인지, 독립협회 쪽을 근대화의 주체로 볼 것인지를 두고 ‘광무개혁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연구가 쌓이면서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구본신참연호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근대화를 시도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황제권 강화에 치우쳤고 재정이 부족한 데다 열강의 간섭으로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광무개혁의 정치적 내용은?

    EBSi · 3,191회 ·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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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 EBS 강의로 광무개혁의 정치 개혁 내용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대한제국선포#광무개혁의 모든것(9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3.6만회 ·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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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을 함께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0차시│대한제국 수립│광무개혁

    워니비 · 5.6만회 ·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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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을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제국 & 광무개혁 l 근대 한국사 19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4.4만회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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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의 내용을 요약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3역사②[6-1~4]국민 국가의 수립(1)(feat.삼국간섭,독립협회,광무개혁)-빡공시대 람보쌤 4시간의 기적

    빡공시대TV · 14.8만회 · 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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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삼국간섭부터 광무개혁까지 긴 수업의 일부입니다.

    창작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6회 — 미군 대위 유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교관이 되다

    tvN DRAMA · 105.1만회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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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무관학교가 배경일 뿐 광무개혁 자체는 다루지 않습니다.

    1897.10.12 ~ 1904 · 광무개혁 때 세운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배경으로 한 장면입니다(인물은 창작).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3. 1898

    경제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1898 ~ 1904 · 6년

    양지아문(1898)이 토지를 측량하고, 지계아문(1901)이 땅 주인에게 근대적 토지 소유 문서인 지계를 발급했습니다. 러일 전쟁으로 중단됐습니다.

    배경

    조선 후기에는 토지 대장(양안)이 오래돼 실제 경작 상황과 맞지 않았고, 세금이 공평하게 매겨지지 않았습니다. 개항 뒤에는 외국인이 몰래 땅을 사들이는 일도 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토지를 다시 측량해 세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토지 소유권을 국가가 증명하려 했습니다.

    당시 양안은 대부분 수십 년에서 백 년 넘게 고쳐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개간된 땅이나 주인이 바뀐 땅이 제대로 올라 있지 않아 세금에서 빠지는 땅(은결)이 많았고, 그 부담은 힘없는 농민에게 돌아갔습니다. 정부 재정을 늘리고 황제 중심의 개혁 비용을 마련하려면 먼저 나라 안 땅의 규모와 주인을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전개

    1898년 7월 양지아문을 세우고 미국인 측량 기사 크럼을 초빙해 토지 측량(양전)을 시작했습니다. 1901년에는 지계아문을 세워 측량한 땅의 주인에게 ‘대한제국 전답관계’라는 이름의 지계(토지 소유 증서)를 발급했고, 1902년 양지아문을 지계아문에 합쳤습니다.

    지계는 개항장 밖에서 외국인이 땅을 소유하는 것을 막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사업은 전국 군의 3분의 2 가량에서 측량이 이루어진 뒤, 러일 전쟁이 터진 1904년 지계아문이 폐지되면서 중단됐습니다.

    새로 만든 양안(광무 양안)에는 땅의 모양과 넓이, 등급과 함께 그 땅의 주인인 ‘시주(時主)’와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인 ‘시작(時作)’을 나란히 적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양지아문이 124개 군, 지계아문이 94개 군을 측량해 모두 218개 군에서 양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계 발급은 강원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실제로 시행됐고, 지계에는 땅의 위치와 넓이, 소유자 등을 적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가가 토지 소유자를 확인하고 증서를 내준 근대적 토지 제도의 첫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계 발급은 일부 지역에 그쳤고, 전국적 토지 조사는 뒤에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7월토지 측량을 맡는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미국인 측량 기사 크럼을 초빙했습니다.
    2. 1899년충청도 등지에서 본격적인 측량이 시작됐습니다.
    3. 1901년 10월지계아문을 두어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를 내주는 일을 맡겼습니다.
    4. 1902년양지아문을 지계아문에 합쳐 측량과 지계 발급을 한 기관에서 맡게 했습니다.
    5. 1903년 무렵강원도 등 일부 지역에서 지계가 발급됐습니다.
    6. 1904년러일 전쟁과 일본의 간섭 속에 지계아문이 폐지되고 사업이 중단됐습니다.
    7. 1910~1918년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전국 토지를 다시 조사했습니다.

    인물

    • 크럼(Raymond Krumm)

      양지아문이 초빙한 미국인 측량 기사로 양전의 측량 기술을 지도했습니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수석 측량 기사로 일하며 한국인 견습생들에게 근대 측량법을 가르쳤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광무 양전의 성격

    근대적 소유권 제도의 시작으로 보는 쪽

    국가가 실제 소유자를 조사해 증서를 발급하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보다 앞선 자주적 근대 토지 제도 수립 시도였다고 봅니다.

    전통 양전의 연장으로 보는 쪽

    면적을 재는 방식이 옛 결부제를 그대로 썼고, 소유권 확인보다 세금을 더 걷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사업이 절반 남짓에서 멈춰 근대적 제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국사 개념 찰칵] 광무개혁의 지계

    밀크티타임 · 209회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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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개혁의 지계를 사진 자료 중심으로 1분 남짓 짚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44강 양전제도

    김성진 · 2,793회 ·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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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양전 제도 일반을 다루는 강의로 광무 양전과 지계는 일부로 보입니다.

  4. 3.10

    운동

    만민 공동회

    종로에서 열린 첫 근대식 민중 집회입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와 군사·재정 고문 파견에 반대했고, 러시아 고문단이 철수했습니다.

    배경

    아관파천 뒤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대한제국에 보냈고, 1898년 초에는 한러 은행을 세우고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석탄 저장 기지를 두겠다며 땅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를 나라의 자주권을 해치는 일로 보고 반대 운동에 나섰습니다.

    1898년 2월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외국에 기대지 말고 자주권을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 같은 무렵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의 땅을 석탄 저장고 용지로 빌려 달라고 요구했고, 러시아 재정 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맡으려 하면서 한러 은행이 서울에 문을 열었습니다. 군사와 재정, 항구가 한꺼번에 한 나라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걱정이 커졌습니다.

    전개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1만여 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습니다.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뽑혔고, 연사들이 나서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결의는 정부에 전달됐습니다.

    여론에 밀린 정부는 러시아에 고문단 철수를 요청했고, 러시아는 교관과 고문을 철수시키고 한러 은행도 문을 닫았습니다. 절영도 조차 요구도 거둬들여졌습니다.

    3월 12일에는 협회 지도부와 별개로 서울 시민들이 종로에 다시 모여 같은 요구를 결의했습니다. 앞선 3월 10일 집회에서는 관리가 아닌 상인·학생 등이 연단에 올랐고, 배재학당 학생이던 이승만도 연사로 나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관리나 지식인이 아닌 일반 시민이 집회를 열어 외국의 간섭을 물리친 첫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만민 공동회는 여러 차례 열리며 이권 반대, 대신 규탄, 의회 설립 요구로 넓어졌습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한발 물러나 1898년 4월 일본과 니시·로젠 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일본의 상공업상 우위를 인정했습니다. 러시아는 대신 만주 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2월 21일독립협회가 자주권을 지키라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습니다.
    2. 1898년 2~3월러시아가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고, 한러 은행이 서울에 문을 열었습니다.
    3. 1898년 3월 10일종로에서 1만여 명이 모인 만민 공동회가 열려 러시아 군사 교관·재정 고문 철수를 결의했습니다.
    4. 1898년 3월 12일서울 시민들이 다시 종로에 모여 같은 요구를 이어 갔습니다.
    5. 1898년 3월 중순러시아가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기로 했고, 한러 은행도 곧 문을 닫았습니다.
    6. 1898년 4월 25일러시아와 일본이 니시·로젠 협정을 맺었습니다.
    7. 1898년 10월만민 공동회가 보수 대신 퇴진과 의회 설립 요구로 이어지며 관민 공동회가 열렸습니다.

    인물

    • 이승만(청년기)1875~1965

      배재학당 학생 모임 협성회 출신으로 만민 공동회에서 연설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898년 만민 공동회의 젊은 연사로 활동했고, 1899년 초 체포돼 약 5년 반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1904년 석방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독립운동을 했으며, 뒤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 현덕호

      서울의 쌀장수로, 1898년 3월 10일 만민 공동회에서 회장으로 뽑혔습니다.

      관직이 없는 상인이 대규모 집회의 회장을 맡은 것은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정치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만민 공동회의 성격을 보여 주는 일로 자주 소개됩니다.

    더 알아두기

    ‘만민’ 공동회라는 이름
    신분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백정·상인·학생·부녀자까지 연단에 서거나 참여했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9차시│독립협회│만민공동회

    워니비 · 7.4만회 ·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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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도시의 품격] 말하는 도시_만민공동회와 숙의민주주의

    TBS 시민의방송 · 4,815회 ·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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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년 만민공동회를 오늘날 토론 문화와 이어 설명합니다.

  5. 8.10

    사회

    제국신문·황성신문 창간

    1898.8.10 ~ 9.5 · 27일

    순한글로 서민과 여성을 독자로 삼은 제국신문(8월)과, 국한문 혼용으로 유학자층을 겨냥한 황성신문(9월)이 창간됐습니다.

    배경

    독립신문의 성공과 독립협회 활동으로 신문을 읽는 사람이 늘자, 1898년에는 여러 신문이 잇따라 창간됐습니다. 그해 4월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의 협성회가 만든 『매일신문』이 우리나라 첫 일간 신문으로 나왔습니다.

    1898년 1월 배재학당 학생 모임인 협성회는 주간 『협성회 회보』를 냈고, 4월 9일 이를 일간 『매일신문』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승만·양홍묵 등 학생들이 기사를 쓰고 만들었습니다. 3월에는 『경성신문』이 창간돼 곧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 신문을 이어받아 새로 꾸린 것이 『황성신문』입니다.

    전개

    1898년 8월 10일 이종일이 『제국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순한글로 쉽게 써서 서민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로 삼았고, 여성 교육과 생활 개선에 관한 글을 많이 실었습니다.

    1898년 9월 5일에는 남궁억 등이 『황성신문』을 창간했습니다. 국한문 혼용으로 한문에 익숙한 유학자·관료층을 독자로 삼아, 유교 지식인에게 개화와 자강의 필요를 설득하는 논설을 실었습니다.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부인들이 여성도 교육받고 사회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여권통문」을 발표하자, 『황성신문』은 논설 자리에 이 글을 그대로 실었고 『독립신문』도 이를 소개했습니다. 새로 생긴 신문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널리 알린 일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두 신문은 독립신문이 폐간(1899)된 뒤에도 이어지며 대한제국기의 대표 신문이 됐습니다. 황성신문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정간을 당했고, 두 신문 모두 1910년 국권 피탈 전후 문을 닫았습니다.

    『제국신문』은 1910년 8월, 『황성신문』은 1910년 9월 문을 닫았습니다.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은 1905년 11월 20일자에 실렸고, 이 일로 장지연이 체포되고 신문은 한동안 정간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1월 1일배재학당 협성회가 주간 『협성회 회보』를 냈습니다.
    2. 1898년 4월 9일『협성회 회보』가 일간 『매일신문』으로 바뀌어 첫 일간 신문이 됐습니다.
    3. 1898년 8월 10일이종일이 순한글 『제국신문』을 창간했습니다.
    4. 1898년 9월 1일서울 북촌 부인들이 「여권통문」을 발표했고, 신문들이 이를 보도했습니다.
    5. 1898년 9월 5일남궁억 등이 국한문 혼용 『황성신문』을 창간했습니다.
    6. 1899년『매일신문』과 『독립신문』이 잇따라 문을 닫았습니다.
    7. 1905년 11월 20일『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정간됐습니다.
    8. 1910년 8~9월『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이 국권 피탈을 전후해 폐간됐습니다.

    인물

    • 이종일1858~1925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운영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언론인으로, 뒤에 천도교에 들어갔습니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사장이던 보성사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했다가 옥고를 치렀습니다.

    • 남궁억1863~1939

      황성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초대 사장을 맡았습니다.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했고, 뒤에 교육자로서 강원도 홍천에서 학교를 열어 무궁화 묘목을 퍼뜨리며 민족의식을 일깨웠습니다. 1933년 이 일로 체포된 ‘무궁화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 장지연1864~1921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뒤에 주필·사장을 맡았으며,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을 썼습니다.

      경상도 상주 출신 유학자로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을사늑약 비판 논설로 옥고를 치렀고 대한자강회 등 계몽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09년부터 『경남일보』 주필을 지냈고, 1910년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글들을 두고 친일 논란이 있습니다.

    더 알아두기

    한글 신문과 국한문 신문
    제국신문은 ‘암(여성) 신문’, 황성신문은 ‘수(남성) 신문’이라 불렸다고 전합니다. 같은 해에 독자층이 서로 다른 두 신문이 나온 것은 당시 문자 생활이 한글과 한문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강의

    개항 이후 경제,사회의 변화 | 한성순보, 독립, 황성,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 박기훈

    티클 · 738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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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신문 여럿을 차례로 정리하고 두 신문 창간은 그 일부입니다.

  6. 10.28

    운동

    관민 공동회와 헌의 6조

    1898.10.28 ~ 11.2 · 6일

    정부 대신들까지 참여한 관민 공동회가 헌의 6조를 결의했고 고종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중추원을 의회 기능을 일부 갖춘 기구로 바꾸는 관제가 발표됐습니다.

    배경

    1898년 봄 러시아의 간섭을 물리친 뒤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는 정부 개혁으로 요구를 넓혔습니다. 가을에는 보수적 대신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졌고, 협회는 정부 대신들을 집회에 불러 개혁안을 함께 결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협회는 중추원을 고쳐 의회 역할을 하는 기구로 만들자는 요구도 내놓고 있었습니다.

    전개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종로에서 관민 공동회가 열렸습니다. 의정부 참정 박정양 등 정부 대신들이 참석했고,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회 연설을 해 신분을 넘어선 집회라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10월 29일 집회는 헌의 6조를 결의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① 외국인에게 기대지 말고 관민이 힘을 합쳐 황제권을 굳건히 할 것, ② 광산·철도 등 외국과의 이권 계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서명해야 시행할 것, ③ 재정은 탁지부가 모두 맡고 예산과 결산을 공개할 것, ④ 중대한 죄인은 공개 재판으로 처리할 것, ⑤ 칙임관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 임명할 것, ⑥ 정해진 규칙을 실제로 지킬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헌의 6조를 받아들이고, 11월 2일 중추원 관제를 새로 반포했습니다. 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절반은 정부가, 절반은 독립협회가 뽑도록 해 의회 기능을 일부 갖춘 기구로 바꾸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헌의 6조와 중추원 관제 개정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의회 설립이 제도로 약속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며칠 앞둔 11월 초 익명서 사건이 터지면서 실행되지 못했고, 운동은 독립협회 해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10월 중순만민 공동회가 보수 대신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이어 가며, 박정양 등 개혁 성향 대신들이 정부에 들어왔습니다.
    2. 1898년 10월 28일종로에서 관민 공동회가 시작됐고,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회 연설을 했습니다.
    3. 1898년 10월 29일참석한 대신들과 시민이 헌의 6조를 결의하고, 대신들이 이를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4. 1898년 10월 말고종이 헌의 6조를 받아들이고, 따로 개혁 방향을 담은 조칙 5조를 내렸습니다.
    5. 1898년 11월 2일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25명을 독립협회가 뽑도록 한 새 중추원 관제가 반포됐습니다.
    6. 1898년 11월 4일 밤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가 붙었습니다.
    7. 1898년 11월 5일협회 간부들이 체포돼 중추원 의관 선거가 무산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勿依附於外國人, 官民同心合力, 鞏固專制皇權事”
    — 헌의 6조 제1조(1898)외국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할 것.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번역)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하지만,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 박성춘의 관민 공동회 개회 연설(1898년 10월 28일)이어서 그는 천막을 장대 하나로 받치면 힘이 부족하지만 여러 장대가 힘을 합치면 튼튼하다는 비유로,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현대어 번역)

    인물

    • 박정양1841~1905

      의정부 참정으로 관민 공동회에 참석해 헌의 6조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1887년 초대 주미 공사를 지낸 온건 개화파 관료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여러 차례 내각을 이끌었고, 독립협회에 우호적인 대신으로 꼽혔습니다.

    • 박성춘

      백정 출신으로 관민 공동회 첫날 개회 연설을 했습니다.

      서울의 백정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뒤 백정 차별 철폐 운동에 나섰습니다. 가장 천대받던 신분의 사람이 대신들 앞에서 연설한 일은 당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헌의 6조가 지향한 정치 체제

    입헌 정치의 첫걸음으로 보는 쪽

    이권 계약과 재정, 고위 관리 임명에 의회와 정부의 동의를 거치게 해 황제의 권한을 제도로 묶으려 한 것으로, 사실상 입헌 군주제를 지향한 시도였다고 봅니다.

    제한된 개혁으로 보는 쪽

    첫 조항부터 ‘황제권을 굳건히 한다’고 밝혔고, 의관의 절반을 독립협회라는 한 단체가 뽑게 한 만큼 국민 전체의 참정권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93 만민공동회 - 백정이 정3품 앞에서 연설하다

    KBS 히스토리 · 2.4만회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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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년 10월 관민공동회 현장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헌의6조의 주요내용은?

    EBSi · 2,428회 ·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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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 EBS 강의로 헌의 6조의 주요 내용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32_[이벤트 종료] 대한 제국의 시국 개혁안 '관민공동회 헌의 6조 발표'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8,211회 ·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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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민공동회와 헌의 6조를 정면으로 다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9 만민공동회 - 백정이 정3품 앞에서 연설하다

    KBS 히스토리 · 2,532회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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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년 10월 29일 관민이 함께 모인 집회를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8 백정 박성춘, 만민공동회에서 신분해방을 외치다

    KBS 히스토리 · 4,637회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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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정 박성춘이 집회에서 연설한 장면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7. 12.25

    정치

    독립협회 해산

    독립협회가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가 돌자, 고종은 간부들을 체포하고 황국협회와 군대를 동원해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켰습니다.

    배경

    헌의 6조와 중추원 개편으로 독립협회의 영향력이 커지자, 황제권이 약해질 것을 걱정한 보수 관료들과 협회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1898년 6월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가 만들어져 독립협회와 맞섰습니다.

    전개

    1898년 11월 4일 밤,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정을 세워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삼으려 한다는 익명서가 서울 거리에 붙었습니다. 조병식 등 보수 관료들이 꾸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종은 11월 5일 이상재 등 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하고 협회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시민들은 경무청과 궁궐 앞에서 밤낮으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석방을 요구했고, 간부들은 풀려났습니다. 11월 21일에는 황국협회 보부상들이 집회를 습격해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11월 26일 고종이 직접 나와 협회 회복과 개혁을 약속하고 해산을 권했습니다.

    12월 중추원 회의에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와 서재필 등을 대신 후보로 추천하자, 고종과 보수 세력은 이를 반역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12월 하순 군대가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켰고, 12월 25일 고종은 독립협회 등 여러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독립협회는 이로써 사라졌고, 간부 상당수가 체포되거나 흩어졌습니다. 이듬해 1899년 1월에는 이승만 등이 박영효 관련 혐의로 투옥됐고, 8월에는 황제의 무한한 권한을 명시한 대한국 국제가 반포됐습니다.

    의회 설립 운동이 좌절되면서 대한제국은 황제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모이는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6월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2. 1898년 11월 2일중추원 관제가 개정돼 의관 절반을 독립협회가 뽑게 됐습니다.
    3. 1898년 11월 4일 밤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가 서울 거리에 붙었습니다.
    4. 1898년 11월 5일이상재 등 간부 17명이 체포되고 협회 해산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시민들은 경무청 앞에서 철야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5. 1898년 11월 중순체포된 간부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6. 1898년 11월 21일황국협회 보부상들이 만민 공동회를 습격해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7. 1898년 11월 26일고종이 직접 나와 시민들에게 협회 회복과 개혁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했습니다.
    8. 1898년 12월 중순중추원 회의가 박영효·서재필 등을 대신 후보로 추천해 반역 논란이 일었습니다.
    9. 1898년 12월 25일군대가 집회를 해산시킨 뒤 고종이 독립협회 등 여러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10. 1899년 1월이승만 등이 박영효 관련 혐의로 체포돼 투옥됐습니다.

    인물

    • 고종1852~1919

      익명서 사건 뒤 간부를 체포하고 12월 협회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처음에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황제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뒤 해산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 조병식1823~1907

      익명서 사건을 꾸며 협회를 모함한 보수 관료로 지목됩니다.

      함경도 관찰사 시절인 1889년 방곡령을 내린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제국기에 법부대신 등을 지낸 보수 관료였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해산의 책임은 어디에 있나

    황제와 보수 세력의 탄압을 강조하는 쪽

    의회 설립과 개혁이라는 합법적 요구를 모함과 보부상·군대 동원으로 짓눌렀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잃었다고 봅니다.

    협회의 급진화를 함께 보는 쪽

    협회가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를 대신 후보로 추천하고 궁궐 앞 철야 시위를 이어 가면서, 황제와 온건한 관료층의 지지를 잃고 정변 시도로 의심받을 빌미를 주었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박종인의 땅의 역사]117.“역적 처벌을 위해 참수형을 부활한다”: 독립협회 강제해산과 공포의 3년

    박종인의 땅의 역사 · 1.9만회 ·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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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독립협회 강제 해산과 그 뒤의 탄압을 다룬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1]_ 30-4 독립협회, 대한 제국/ 30강 개항기(동학 농민 운동~대한 제국)|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최태성 1TV · 8.7만회 ·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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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을 함께 다루는 강의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연호

임금이 즉위한 해를 기준으로 해를 세는 이름입니다.

조선은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써 왔습니다. 갑오개혁 때 청의 연호 대신 조선 건국 해를 기준으로 한 '개국' 기년을 썼고, 을미개혁 때 '건양'(1896)이라는 독자 연호를 정했습니다.

대한제국은 '광무'(1897~1907), 순종 때 '융희'(1907~1910)를 썼습니다. 스스로 연호를 쓰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해설

연호, 서기(AD), 기원전, 세기 아는척하기 (눈부심주의) #상식史전

두선생의 역사공장 · 4.6만회 ·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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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시호, 묘호, 연호 |'임금님을 부를 때'에 대하여

두선생의 역사공장 · 1.9만회 ·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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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신참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대한제국 광무개혁의 원칙입니다.

갑오·을미개혁이 일본의 영향 아래 급하게 추진됐다는 반성에서, 전통 제도를 바탕으로 필요한 근대 제도만 골라 들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황제권 강화, 양전과 지계 발급, 상공업 진흥이 이 원칙 아래 진행됐습니다.

강의

매일 아침 떠먹는 한국사 용어_ 구본신참 | 사회탐구 용어사전-한국사 | EBSi 고교강의

EBSi · 813회 ·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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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황실문화갤러리] 구본신참(舊本新參)-조선의 마지막 13년을 꽃피운 문화 - 대한황실 콜렉션

craftweek공예주간 · 50회 ·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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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