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무단 통치기

비밀 결사와 3·1 운동 전야

대한 광복회 같은 비밀 결사가 활동하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민족 자결주의 소식 속에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기간
1915.1 ~ 1919.2.28 · 4년 1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데라우치 → 하세가와
담긴 것
사건 12 · 영상 44 · 영화·드라마 2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2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조선 국권 회복단 → 2·8 독립 선언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6일차 1교시 — 1910년대 식민 통치와 저항

최태성 1TV · 77.2만회 · 20:5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10년대 무단 통치와 국내외 저항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10.8.29 ~ 1919.4.11 · 조선 국권 회복단 → 2·8 독립 선언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2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영화 · 2019· 공식 영상

「자전차왕 엄복동」

유튜브 앱에서 보기

배경 1910 ~ 1920

일제강점기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이긴 엄복동 이야기(각색 많음)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유튜브 앱에서 보기

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유튜브 앱에서 보기

사건 연표 12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토지 조사 사업 (~1918), 회사령 (~1920.4), 조선 태형령 (~1920.3)

  1. 1915

    1월

    운동

    조선 국권 회복단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로, 뒤에 대한 광복회 결성과 3·1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배경

    1910년대 경상도에서는 계몽 운동을 하던 유생·지주·상인들이 무단 통치의 감시를 피해 비밀 결사를 만들었습니다.

    회원 상당수는 병합 전 대구에서 달성 친목회 같은 계몽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상도의 혁신 유림과 중소 지주, 곡물상을 하던 상인이 많았고, 이들은 드러내 놓고 할 수 없게 된 국권 회복 운동을 비밀 조직으로 이어 가려 했습니다.

    전개

    1915년 1월 대구 앞산의 한 암자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시를 짓는 모임을 가장해 모여 조선 국권 회복단을 결성했습니다. 단군을 받드는 의식을 치르고,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일부 회원은 그해 7월 결성된 대한 광복회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대구 지역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유림 대표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낸 파리 장서 운동도 도왔습니다.

    결성일은 1915년 음력 1월 15일로 전해집니다. 뒤에 정비된 임원을 보면 통령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등이 있었고, 마산에도 지부를 두었습니다. 회원들이 운영하던 곡물상과 상점을 연락 거점과 자금 창구로 썼습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대구 시위를 돕고, 경남 창원의 진동·진북·진전 세 면 주민이 벌인 삼진 의거(4월 3일)에도 회원 변상태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 시위에서 여러 명이 일본 헌병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해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을 호소한 파리 장서를 전달하는 일도 도왔고, 상하이 임시 정부에 보낼 자금을 모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1919년 조직이 드러나 회원들이 붙잡히면서 활동이 끝났습니다. 경상도 지역 비밀 결사가 대한 광복회와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3년경북 풍기에서 비밀 결사 풍기 광복단이 결성됐습니다.
    2. 1915년 음력 1월 15일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시를 짓는 모임을 가장해 조선 국권 회복단이 결성됐습니다.
    3. 1915년 7월일부 회원이 풍기 광복단과 함께 대한 광복회를 결성했습니다.
    4. 1919년 3월대구 만세 시위를 돕고, 유림의 파리 장서 전달에 협력했습니다.
    5. 1919년 4월 3일회원 변상태 등이 참여한 경남 창원 삼진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6. 1919년조직이 드러나 윤상태·서상일 등 회원들이 붙잡혔습니다.

    인물

    • 윤상태

      조선 국권 회복단의 통령을 맡았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계몽 운동을 하다 국권 회복단을 이끌었습니다. 1919년 조직이 드러나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 서상일

      외교부장을 맡고 국권 회복단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대구 출신으로 달성 친목회에서 활동했고, 국권 회복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광복 뒤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BTN뉴스]항일결사 '조선국권회복단' 본거지 안일사를 아십니까

    한국불교 대표방송 BTN · 219회 · 3:0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국권 회복단 본거지 사찰을 소개한 짧은 불교 방송 보도입니다.

  2. 3월

    운동

    신한 혁명당

    상하이·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이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이길 것에 대비해 고종을 앞세운 망명 정부를 세우려 한 단체입니다.

    배경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가들은 독일이 이기면 일본이 패전국 편에 서게 되고, 이때 독일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할 기회가 온다고 판단했습니다.

    1914년 8월 일본은 영일 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중국 산둥의 독일 조차지 칭다오를 점령했습니다. 1915년 1월에는 중국 위안스카이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내밀어 산둥 이권 등을 넘기라고 압박했습니다. 망명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안에서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있고, 독일이 전쟁에서 이기면 일본이 고립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전개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이상설·박은식·신규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했습니다. 본부장은 이상설이 맡았습니다. 이들은 고종을 망명시켜 당수로 추대하고 망명 정부를 세운 뒤 중국·독일과 동맹을 맺는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원이 국내에 들어와 고종 측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돼 붙잡혔고,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썼습니다. 본부장 이상설 아래 감독 박은식, 외교부장 성낙형,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고종을 당수로 내세운 망명 정부가 중국 정부와 ‘중한 의방 조약’을 맺어 일본을 함께 상대하는 군사 동맹을 이루겠다는 구상을 세웠습니다.

    외교부장 성낙형은 1915년 국내에 들어와 고종의 측근과 선을 대 고종의 동의를 얻으려 했지만,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총독부는 이 일을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처리했습니다. 게다가 1917년 중국이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고 이듬해 독일이 패하면서 구상의 전제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한 혁명당은 황제를 앞세운 마지막 대규모 망명 정부 구상이었습니다. 2년 뒤 같은 사람들 상당수가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해 공화주의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4년 7월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2. 1914년 8월일본이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습니다.
    3. 1915년 1월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내밀었습니다. 중국은 5월 대부분을 받아들였습니다.
    4. 1915년 3월상하이에서 이상설·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했습니다.
    5. 1915년외교부장 성낙형이 국내에 들어와 고종 측과 접촉하려다 체포됐습니다.
    6. 1917년본부장 이상설이 연해주에서 병으로 숨지고, 같은 해 여름 대동단결 선언이 나왔습니다.

    인물

    • 이상설1870~1917

      신한 혁명당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고 연해주에서 권업회·대한 광복군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1917년 연해주에서 병으로 숨졌습니다.

    • 박은식1859~1925

      당의 감독을 맡고 규칙과 취지서를 썼습니다.

      황해도 출신 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했습니다. 망명 뒤 『한국통사』(1915)와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1920)를 썼고, 1925년 임시 정부 대통령이 됐다가 그해 숨졌습니다.

    • 성낙형

      외교부장으로 국내에 들어와 고종 측과 접촉하려다 붙잡혔습니다.

      신한 혁명당의 국내 연락을 맡았던 인물로, 체포된 뒤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때 주변에서는
    1915년 중국에서는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가 거센 반대에 부딪혀 이듬해 제정을 취소했습니다. 신한 혁명당이 황제를 앞세운 망명 정부를 구상하던 무렵, 이웃 중국에서는 황제 제도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3. 7월

    운동

    대한 광복회 결성

    1915.7 ~ 1918 · 3년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로, 공화정 국가를 목표로 했습니다.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 부호를 처단하다 1918년 조직이 드러났습니다.

    배경

    1913년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 풍기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 국권 회복단 일부 회원들이 무력으로 독립을 되찾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풍기 광복단은 채기중 등 경북 북부의 의병 계열 인사들이 만든 무장 결사였고, 조선 국권 회복단은 대구의 계몽 운동 계열이었습니다. 성격이 다른 두 조직의 인사들이 합치면서, 계몽 운동의 조직 방식과 의병의 무장 투쟁 노선이 한 단체 안에 함께 담겼습니다.

    전개

    1915년 7월 대구 달성 공원에서 대한 광복회가 결성됐습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맡았고, 만주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으로 파견돼 무관 학교 설립을 준비했습니다. 전국 여러 도에 지부를 두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울 자금을 모았습니다.

    광복회는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는 통지문을 보내고, 따르지 않거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을 처단했습니다. 1917년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1918년 충남 아산 도고 면장 박용하를 사살했습니다. 세금을 운송하는 우편 마차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1918년 초 조직이 드러나 박상진 등 주요 회원이 붙잡혔습니다.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가 정리한 강령은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이 불법으로 걷는 세금을 압수해 무장을 준비할 것, 남북 만주에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기를 것, 옛 의병과 해산 군인을 모을 것, 중국·러시아에서 무기를 사들일 것, 연락 기관을 둘 것, 일본인 고관과 반역자를 처단할 것, 무력이 갖춰지면 일본과 결전할 것 등 7개 항이었습니다.

    지부로는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황해도 지부장 이관구 등이 있었습니다. 우재룡·권영만은 경북 경주에서 세금을 실어 나르던 우편 마차를 습격해 자금을 빼앗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박상진은 1921년 대구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대한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가운데 공화정 국가 수립을 목표로 내건 대표적 단체로, 붙잡히지 않은 회원들은 만주로 건너가 무장 투쟁을 이어 갔습니다.

    재판에서 박상진·채기중·김한종 등이 사형을, 우재룡·한훈 등은 무기 또는 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우재룡 등은 풀려난 뒤에도 독립운동을 이어 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3년채기중 등이 경북 풍기에서 풍기 광복단을 결성했습니다.
    2. 1915년 7월대구 달성 공원에서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고 박상진이 총사령이 됐습니다.
    3. 1915~1917년부호들에게 군자금 통지문을 보내고, 경주에서 세금 운송 우편 마차를 습격했습니다.
    4. 1917년김좌진이 부사령으로 만주에 파견됐습니다.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 처단됐습니다.
    5. 1918년 1월충남 아산 도고 면장 박용하가 처단됐습니다.
    6. 1918년 초조직이 드러나 박상진 등 주요 회원이 잇따라 붙잡혔습니다.
    7. 1921년박상진·채기중·김한종 등에게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인물

    • 박상진1884~1921

      대한 광복회 총사령으로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울산 출신으로 의병장 허위에게 배웠고 양정의숙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판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광복회를 이끌다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순국했습니다.

    • 김좌진1889~1930

      광복회 부사령으로 만주에 파견됐습니다.

      충남 홍성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집안의 노비를 풀어 준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주에서 북로 군정서를 이끌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930년 암살됐습니다.

    • 채기중

      풍기 광복단을 만들고 광복회에 합류해 장승원 처단을 이끌었습니다.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했습니다. 대한 광복회에서 친일 부호 처단 활동을 하다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순국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스페셜 – 잊혀진 영웅,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 KBS 20100410 방송

    KBS 히스토리 · 13.8만회 · 58:3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목숨까지 바쳤지만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남자의 정체 | KBS 20100410 방송

    KBS 다큐 · 1.7만회 · 57:4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추적한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26 국내에서의 대한광복회원들의 무장투쟁

    KBS 히스토리 · 4,138회 · 5:5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대한 광복회원들의 국내 무장 투쟁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4단원 4차시│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독립의군부│대한광복회

    워니비 · 7.3만회 · 7:2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독립의군부와 대한광복회를 함께 설명하는 고교 한국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나라를 팔아먹은 시대의 매국노 이완용과 나라를 지키려 했던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상반된 두 사람의 삶에 대하여 | 프리한닥터W

    tvN Joy · 5,300회 · 20:1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이완용과 박상진의 삶을 견주며 광복회 활동을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들(파락호 김용환, 백산상회 안희제, 경주최부자 최준, 대한광복회 박상진)

    일상의인문학 · 4.6만회 · 37:0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숨은 독립운동가 여럿을 소개하는 강연으로 박상진은 일부입니다.

  4. 9.11

    정치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

    1915.9.11 ~ 10.31 · 51일

    총독부가 병합 5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식민 통치의 성과를 알리는 대규모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116만여 명이 다녀갔습니다.

    • 행사장을 마련하려고 경복궁 안 건물 4,000여 채가 헐리거나 옮겨졌고, 근정전·경회루 등 일부만 남았습니다.
    • 박람회장에 지은 미술관 건물은 그해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배경

    1910년 병합 뒤 총독부는 식민 통치가 조선을 근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국내외에 보여 줄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병합 5년이 되는 1915년은 그런 성과를 드러내기에 알맞은 때였습니다.

    박람회 부지로는 경복궁이 골라졌습니다. 조선 왕조의 정궁이던 이곳에서 행사를 여는 것 자체가 옛 왕조의 권위를 낮추고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라는 이름으로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에서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산업·농업·임업·수산업 등 분야별 전시관과 미술관을 새로 지었고, 일본과 식민지 대만의 물품도 함께 전시했습니다.

    행사장을 마련하려고 근정전·경회루·교태전 등 일부를 뺀 경복궁 안 건물 약 4,000채가 헐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근정전 앞뜰에는 큰 전시관이 들어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51일 동안 116만여 명이 다녀갔습니다. 박람회장에 새로 지은 미술관 건물은 행사가 끝난 그해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바뀌어 경복궁에 남았고, 이는 광복 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뿌리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5년 9월 11일조선 물산 공진회가 경복궁에서 개막했습니다.
    2. 1915년 10월각지에서 단체 관람이 이어졌고 지방 유지들이 이끄는 시찰단도 여럿 올라왔습니다.
    3. 1915년 10월 31일51일간의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4. 1915년 12월박람회 미술관 건물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총독으로 병합 5년 기념 박람회를 주도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10년 통감으로 와서 병합을 처리하고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폈고, 1916년 일본 총리가 됐다가 1918년 쌀 소동으로 물러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경복궁의 훼손
    공진회를 위해 헐린 경복궁 전각 다수는 광복 뒤에도 복원되지 못한 채 남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 정부의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흥례문 등 일부가 다시 지어졌지만, 지금도 원래 규모를 다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정전 체제(군사 분계선·비무장 지대)

    해설·교양 · 해설

    치욕의 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렸습니다 - 역사의 재원쌤

    손에잡히는경제 · 1.1만회 · 25:24

    유튜브 앱에서 보기

    해설·교양 · 해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홍보를 위한 이벤트장이었던 경복궁

    한국사 여행자 · 1,540회 · 5:45

    유튜브 앱에서 보기

  5. 1917

    7월

    운동

    대동단결 선언

    신규식·박은식 등이 순종이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넘긴 것이라며, 국민 주권에 바탕한 임시 정부를 세우자고 선언했습니다. 공화주의 임시 정부의 사상적 바탕이 됐습니다.

    배경

    1910년대 중반까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황제를 다시 세우자는 생각과 공화국을 세우자는 생각이 함께 있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는 등 세계 정세가 바뀌면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을 이론적 바탕이 필요해졌습니다.

    1910년대 중반 국외 독립운동은 만주·연해주·중국 관내·미주로 흩어져 있었고, 단체마다 목표와 방법이 달랐습니다. 1915년 신한 혁명당이 고종을 앞세운 망명 정부를 꾸리려다 실패하자, 황제에게 기대지 않고도 독립운동 전체를 대표할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졌습니다.

    전개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조소앙·신채호 등 14명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조소앙이 초안을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언의 핵심 논리는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주권을 포기한 것은 그 주권을 국민에게 넘겨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주권은 이제 국민에게 있고, 국외 동포들이 그 주권을 이어받아 행사할 통일된 기관, 곧 임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신규식·조소앙(당시 이름 조용은)·신석우·박은식·박용만·신채호 등 14명이었습니다. 선언은 황제권이 사라진 날이 곧 국민의 주권이 생겨난 날이라고 보고, 옛 한국의 마지막 날은 곧 새 한국의 첫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선언은 이런 논리 위에서 해외 각지의 단체를 하나로 묶을 것, 중앙 총본부를 세울 것, 법률의 바탕이 될 대헌(大憲)을 만들 것 등의 방안을 내놓고 각지 독립운동 단체에 동의를 구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결과와 의미

    당장 정부가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국민 주권론과 임시 정부 수립 구상은 2년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민주 공화제로 이어졌습니다. 황제 중심의 복벽주의에서 공화주의로 독립운동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문서로 평가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8월 29일병합 조약이 공포돼 순종이 통치권을 내놓았습니다.
    2. 1912년신규식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를 세웠습니다.
    3. 1915년 3월고종을 앞세운 망명 정부를 꾸리려던 신한 혁명당 구상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4. 1917년 3월러시아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5. 1917년 7월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조소앙 등 14명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6. 1919년 4월상하이에서 민주 공화제를 내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隆熙皇帝가 三寶를 抛棄한 八月二十九日은 即 吾人同志가 三寶를 繼承한 八月二十九日이니”
    — 대동단결 선언(1917)융희 황제(순종)가 삼보(땅·백성·주권)를 포기한 8월 29일은 곧 우리 동지들이 삼보를 이어받은 8월 29일이다.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수록 구절입니다.
    “舊韓最終의 一日은 即 新韓最初의 一日이니”
    — 대동단결 선언(1917)옛 한국의 마지막 날은 곧 새 한국의 첫날이다. — 국민 주권론을 담은 대표 구절입니다.

    인물

    • 신규식1880~1922

      대동단결 선언을 주도했습니다.

      대한제국 무관 출신으로 을사늑약에 항의해 음독 자결을 시도했다가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신해혁명에 참여하고 동제사를 세웠습니다. 임시 정부에서 법무총장·국무총리 대리 등을 지냈고, 1922년 임시 정부의 분열을 걱정하며 단식하다 숨졌습니다.

    • 조소앙1887~1958

      선언문 초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 독립 선언서와 임시 정부 헌법 문서 작성에 참여했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세운 삼균주의를 만들어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에 반영했습니다. 광복 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됐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자료가 들려주는 독립운동 이야기: 7월 대동단결선언

    독립기념관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 1,556회 · 2:36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독립기념관 학예사가 대동단결 선언 원문 자료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17년, 독립운동가들이 하나로 뭉친 이유|그 해, 무슨일이 있었나?

    역사가된사건들 · 117회 · 7:3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17년 대동단결 선언의 배경과 내용을 정리한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주제심화학습 대동단결선언

    창선고TV · 529회 · 4:1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대동단결 선언을 다룬 학교 수업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선언! ·· 대동단결선언 105주년 기념식” 1917년 예관 신규식 ·· 민주공화국 건국의 초석 마련 [통통미디어]

    연천을 걷는다-통통미디어 · 539회 · 25:2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대동단결 선언 105주년 기념식을 전한 지역 매체 영상입니다.

  6. 1918

    6월

    운동

    한인 사회당 결성

    이동휘 등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만든 첫 한인 사회주의 정당입니다.

    배경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볼셰비키 정부는 식민지 민족의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한인 독립운동가 일부는 이를 독립을 도울 새 세력으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혁명 뒤 극동 지역에서는 볼셰비키 세력과 이에 맞서는 백군, 그리고 개입한 외국 군대가 뒤엉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에서 일하던 한인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가 이동휘 등과 손잡으면서,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러시아 혁명 세력 사이에 협력의 길이 열렸습니다.

    전개

    1918년 6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김립 등이 한인 사회당을 결성했습니다. 한인이 만든 첫 사회주의 정당입니다. 이들은 볼셰비키와 손잡고 한인 부대를 만들어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하바롭스크가 점령되자 근거지를 옮겼고, 이동휘가 1919년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로 가면서 활동 무대가 상하이로 넓어졌습니다.

    당은 1918년 6월 26일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됐습니다. 이동휘가 위원장을 맡고 김립·박진순 등이 참여했으며, 결성을 준비하는 회합은 김알렉산드라의 후원 아래 열렸습니다.

    1918년 가을 일본군과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면서 김알렉산드라는 붙잡혀 처형됐고 당원들은 흩어졌습니다. 살아남은 당원들은 1919년 조직을 다시 정비했고,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보내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연락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인 사회당은 1921년 상하이에서 고려 공산당(상하이파)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이르쿠츠크에서도 고려 공산당(이르쿠츠크파)이 만들어져 두 세력이 주도권을 놓고 다퉜습니다. 이후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함께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7년 11월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습니다(10월 혁명, 러시아 옛 달력 기준 10월).
    2. 1918년 6월 26일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등이 한인 사회당을 결성했습니다.
    3. 1918년 8월일본이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4. 1918년 가을하바롭스크가 일본군·백군에 점령되고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됐습니다.
    5. 1919년당이 다시 정비되고 박진순이 모스크바에 파견됐습니다. 이동휘는 임시 정부 국무총리로 상하이에 갔습니다.
    6. 1921년 5월상하이에서 고려 공산당(상하이파)이 결성됐습니다.

    인물

    • 이동휘1873~1935

      한인 사회당을 결성하고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강화 진위대장을 지냈고 신민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연해주로 망명해 대한 광복군 정부에 참여했고, 1919년 통합 임시 정부 국무총리가 됐으나 이승만 등과 노선 차이로 1921년 물러났습니다. 1935년 연해주에서 숨졌습니다.

    • 김알렉산드라1885~1918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간부로 한인 사회당 결성을 후원했습니다.

      연해주 한인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난 볼셰비키 당원으로,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1918년 가을 하바롭스크가 백군에 넘어가자 붙잡혀 처형됐습니다.

    • 김립

      한인 사회당 결성 때 서기를 맡았습니다.

      이동휘의 가까운 동지로 뒤에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장을 지냈습니다. 소련에서 받은 자금을 관리하다 그 사용처를 두고 논란이 일었고, 1922년 상하이에서 암살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모스크바 자금 문제
    이동휘 쪽은 소련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았는데, 이 돈을 임시 정부가 아니라 공산당 활동에 썼다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임시 정부 안의 갈등이 커졌습니다. 자금을 관리하던 김립은 1922년 상하이에서 암살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해설

    이동휘 첫번째 이야기

    우리역사바로알기 · 2,823회 · 32:0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이동휘의 초기 행적을 다루고 한인 사회당 결성은 거의 없습니다.

  7. 6월

    경제

    조선식산은행 설립

    1918.6 ~ 1918.10 · 4개월

    총독부가 제령으로 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하고 기존 6개 농공은행을 강제로 합병해 산업 금융을 맡는 특수 은행을 세웠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함께 식민지 경제 지배의 두 축이 됐습니다.

    • 농공은행은 대한제국 때 지역별로 세워진 은행들이었고, 식산은행 설립으로 전국 지점망을 가진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됐습니다.
    • 산업 자금을 일본 자본 중심으로 조달해 조선 안 대규모 사업과 뒤에 전시 군수 산업 자금까지 취급했습니다.

    배경

    대한제국 때는 농공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마다 은행이 따로 세워져 농업·상공업 자금을 대출했습니다. 규모가 작고 자본도 넉넉하지 않아 큰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어려웠습니다.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으로 확정된 토지를 담보로 큰돈을 빌려주고, 일본 자본을 조선의 산업에 끌어들일 큰 은행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전개

    1918년 6월 제령 제7호로 조선식산은행령이 공포됐고, 그해 10월 전국 6개 농공은행이 강제로 합쳐져 조선식산은행이 문을 열었습니다.

    식산은행은 산업 자금을 전문으로 대출하는 특수 은행으로, 전국에 지점망을 갖추고 장기 저리 자금을 필요한 사업에 댔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설립 초기부터 식산은행 주식을 인수해 두 기관은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식산은행은 이후 산미 증식 계획의 수리 조합 자금, 1930년대 공업화 정책의 설비 자금까지 취급하며 식민지 경제 개발의 자금줄 역할을 했습니다. 1937년 이후로는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군수 산업 대출을 늘리는 은행으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8년 6월제령 제7호 조선식산은행령이 공포됐습니다.
    2. 1918년 10월전국 6개 농공은행이 강제 합병돼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됐습니다.
    3. 1920년대산미 증식 계획의 수리 조합 사업에 자금을 대출했습니다.
    4. 1937년 9월임시자금조정법 시행으로 총독부의 지시를 받는 광공업 대출 창구가 됐습니다.
    5. 1954년한국산업은행법에 따라 새로 세워진 한국산업은행에 자산과 업무 대부분을 넘기고 해체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광복 뒤의 식산은행
    식산은행은 광복 뒤에도 한동안 영업을 이어 가다가, 1954년 한국산업은행이 새로 세워지면서 그 자산과 업무 상당 부분을 넘겼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10년대 일제의 산업 침탈 l 한국사 일제 강점기 3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3.5만회 · 3:41

    유튜브 앱에서 보기

  8. 8월

    운동

    신한 청년당 결성

    여운형·김규식 등이 상하이에서 만든 단체로,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배경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전후 질서의 원칙으로 ‘14개조’를 발표했고, 그 가운데 민족 자결의 원칙이 식민지 민족들에게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11월에 끝나고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자 상하이의 한국 청년들은 이 기회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전개

    1918년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 상하이의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습니다. 결성 시기는 8월로 알려져 있으나 11월로 보는 자료도 있습니다. 여운형은 1918년 11월 상하이를 찾은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만나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전달했습니다.

    1919년 2월 당은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에 보냈습니다. 동시에 장덕수를 일본, 선우혁 등을 국내, 여운형을 연해주로 보내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게 했습니다. 국내에 들어간 당원은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와 접촉했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여운형은 1918년 11월 27일 상하이에서 윌슨의 개인 특사 크레인을 만났고, 신한 청년당 총무 여운형 이름의 청원서는 11월 28일 자로 작성됐습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중국인 여권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김규식은 3월 파리에 도착해 대표부를 세우고 독립 청원서를 냈지만, 일본은 승전국이었고 한국 문제는 회의 안건으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한 청년당의 움직임은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을 준비하는 흐름에 힘을 보탰고, 당원들은 4월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을 주도했습니다.

    파리에 간 김규식은 청원서와 함께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글을 각국 대표와 언론에 돌렸습니다. 당은 기관지 『신한 청년』도 펴냈습니다. 여운형·김철·선우혁 등 당원들은 이후 임시 의정원 의원과 임시 정부 요직을 맡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8년 1월윌슨 미국 대통령이 ‘14개조’를 발표했습니다.
    2. 1918년 8월 무렵여운형 등이 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습니다(11월로 보는 자료도 있습니다).
    3. 1918년 11월 11일1차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4. 1918년 11월 27일여운형이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만나 한국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5. 1919년 1월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습니다.
    6. 1919년 2월 1일김규식이 중국인 여권으로 상하이를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 장덕수는 일본, 선우혁은 국내, 여운형은 연해주로 갔습니다.
    7. 1919년 3월 13일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해 대표부를 세웠습니다.
    8. 1919년 4월당원들이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을 주도했습니다.

    인물

    • 여운형1886~1947

      신한 청년당을 이끌고 크레인에게 독립 청원서를 전달했습니다.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1930년대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냈고, 1944년 비밀 결사 조선 건국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광복 직후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이끌었고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다 1947년 암살됐습니다.

    • 김규식1881~1950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됐습니다.

      미국 로어노크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했습니다. 임시 정부 외무총장·부주석을 지냈고, 광복 뒤 여운형과 좌우 합작 운동을 이끌었으며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6·25 전쟁 중 납북돼 1950년 숨졌습니다.

    • 장덕수1894~1947

      당의 결정에 따라 일본에 건너가 유학생들과 연락했습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초대 주필이 됐습니다. 광복 뒤 한국 민주당 간부로 활동하다 1947년 암살됐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59 신한청년당 김규식, 파리강화회에 참가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다

    KBS 히스토리 · 3,095회 · 3:1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신한 청년당의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독립운동 해외유적지]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 창립지

    독립운동 유적관 · 233회 · 2:3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상하이 신한 청년당 창립지를 소개하는 유적 안내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209 여운형, 통일정부를 꿈꾸다

    KBS 히스토리 · 2.7만회 · 3:5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영상한국사가 신한 청년당을 만든 여운형의 활동을 짧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155) 파리강화회의 수석대표 엘리트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

    사람이야기 역사캐리터치 · 8,816회 · 11:4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김규식의 생애를 다루며 신한 청년당은 일부에 그칩니다.

  9. 1919

    1.21

    정치

    고종 승하

    덕수궁에서 고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 감정이 높아졌고, 3월 3일 장례일을 앞두고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배경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한 뒤 덕수궁(경운궁)에 머물며 ‘이태왕’으로 불렸습니다. 병합 뒤에도 독립운동 세력은 고종을 상징적 구심점으로 여겼고, 신한 혁명당처럼 고종을 망명시키려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전개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총독부는 뇌일혈이라고 발표하고 사망 사실을 하루 늦게 알렸습니다. 1월 25일로 예정돼 있던 영친왕과 일본 왕족 마사코의 결혼식은 미뤄졌습니다.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데다 시신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일제나 친일 인사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고종이 파리 강화 회의에 밀사를 보내려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영친왕의 일본 결혼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등이 함께 돌았습니다.

    고종이 숨진 때는 1월 21일 오전 6시 무렵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 발표는 이튿날인 1월 22일에 나왔고 발표된 사망 시각도 하루 늦춰진 1월 22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망 사실을 감추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더 커졌습니다.

    소식이 퍼지자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흰 옷을 입고 곡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지방에서도 망배를 올리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국장은 일본식 절차가 섞인 방식으로 치러졌고, 3월 3일 장례 행렬이 서울을 지나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홍릉에 이르렀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장은 3월 3일로 정해졌고, 장례를 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모였습니다. 3·1 운동 준비 세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 시기를 거사일로 잡았습니다. 고종의 죽음과 독살 소문은 쌓여 있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7년 7월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했습니다.
    2. 1918년 11월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3. 1919년 1월 21일 새벽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졌습니다.
    4. 1919년 1월 22일사망 사실이 공식 발표됐습니다. 발표된 사망 시각은 22일로 하루 늦춰져 있었습니다.
    5. 1919년 1월 25일예정돼 있던 영친왕의 결혼식이 미뤄졌습니다.
    6. 1919년 3월 1일국장을 앞두고 서울에 사람이 몰린 가운데 3·1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7. 1919년 3월 3일국장이 치러지고 고종이 남양주 홍릉에 묻혔습니다.
    8. 1920년 4월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도쿄에서 치러졌습니다.

    인물

    • 고종1852~1919

      덕수궁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첫 황제입니다. 1907년 강제로 퇴위한 뒤 12년 동안 덕수궁에서 지냈습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의 홍릉입니다.

    • 영친왕 이은1897~1970

      고종이 숨지면서 1919년 1월로 잡혀 있던 결혼이 미뤄졌습니다.

      고종의 아들로 1907년 황태자가 된 뒤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보내졌습니다.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광복 뒤에도 오래 귀국하지 못하다 1963년 돌아와 1970년 숨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고종 독살설

    독살 가능성을 높게 보는 쪽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 등을 마신 뒤 갑자기 숨졌다는 증언, 시신이 빨리 부패하고 이가 빠졌다는 목격담이 당대 기록(윤치호 일기 등)에 남아 있다고 봅니다. 또 2009년 공개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유자부로의 일기에 데라우치 등이 독살을 지시했다는 전언이 적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확증이 없다고 보는 쪽

    근거로 드는 기록이 대부분 소문이나 전해 들은 말이고, 직접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고령이었던 고종이 뇌출혈 등으로 갑자기 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독살은 당시 널리 믿어진 소문으로 다루는 것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 소문이 3·1 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적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시신의 이가 전부 사라졌다" 일제 독살설 미스터리의 진실은? | KBS 20090815 방송

    KBS 다큐 · 27.8만회 · 56:0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고종의 죽음과 독살설을 검증한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스페셜 –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 / KBS 2009.8.15. 방송

    KBS 히스토리 · 89.2만회 · 57:2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고종 독살설을 다룬 역사스페셜이라 고종 승하에 맞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셀럽병사 본방] 친일파의 독살? 고종의 죽음에 유독 의혹이 많은 이유

    KBS 생로병사의 비밀 · 33만회 · 30:5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고종의 사인을 의학적으로 따져 보는 교양 예능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5회 요약] 황제의 혀가 사라졌다? 고종 독살설의 전말과 실체

    KBS 셀럽병사의 비밀 · 28.3만회 · 32:56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고종의 죽음과 독살설을 의학적으로 따지는 KBS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일본식 국장, 고종황제 장례식ㅣKBS 230115 방송

    KBS 히스토리 · 2.1만회 · 6:2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고종 승하 뒤 일본식으로 치른 국장을 다룬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독살 미스터리' 고종 승하 현장 첫 공개 / SBS

    SBS 뉴스 · 109.9만회 · 1:4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 공개 보도로 독살설을 짧게 언급합니다.

  10. 2월

    운동

    대한 독립 선언(무오 독립 선언)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이름을 올린 독립 선언서로,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발표 시기는 1918년 말과 1919년 초로 견해가 나뉩니다.

    배경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면서 국외 독립운동가들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만주·연해주·중국 관내·미주에 흩어진 지도자들이 함께 이름을 올린 선언서가 추진됐습니다.

    서명자 가운데에는 대종교 인사가 많았습니다. 대종교는 단군을 받드는 종교로, 1910년대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중광단 같은 무장 단체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언서는 ‘중광단 선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전개

    대한 독립 선언서에는 김교헌·김규식·김동삼·김약연·김좌진·박은식·박용만·신채호·신규식·안창호·이동휘·이승만·이상룡·이시영·조소앙 등 39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조소앙이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언서는 일본의 병합이 사기와 강박, 무력으로 이뤄져 무효라고 밝히고, 독립은 하늘의 뜻이자 민족의 권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독립 선언서들과 달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이뤄야 한다며 무장 투쟁을 분명히 내세운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는 이 선언서가 1919년 2월 이후 중국 지린(길림) 지역에서 조소앙의 주도로 발표됐다고 설명합니다. 선언서는 첫머리에서 대한 민족이 이민족의 전제 정치에서 벗어나 ‘대한 민주국’으로 자립한다고 밝혔습니다.

    서명자는 지역별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만주의 김동삼·이상룡·김좌진, 연해주의 이동휘, 중국 관내의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미주의 이승만·안창호·박용만 등이 이름을 올려, 당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폭넓은 참여를 보여 줍니다. 다만 모두가 직접 서명한 것인지, 이름을 넣는 데 동의만 한 것인지는 사람마다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선언서는 이후 만주·연해주 무장 독립 전쟁의 정신적 바탕이 됐고, 2·8 독립 선언·3·1 독립 선언과 함께 1919년 무렵의 대표적 독립 선언서로 꼽힙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8년 11월1차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2. 1919년 1월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습니다.
    3. 1919년 2월 무렵지린에서 조소앙이 주도해 대한 독립 선언서가 작성·발표됐다는 설명이 최근 유력합니다. 선언서에 적힌 ‘무오년’을 따라 1918년 말로 보는 설명도 있습니다.
    4. 1919년 2월 8일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이 있었습니다.
    5. 1919년 3월 1일국내에서 3·1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6. 1920년 6~10월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만주 무장 투쟁이 본격화했습니다. 서명자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북로 군정서를 이끌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우리 대한 민족 남매 및 온 세상 우방국의 동포들이여! 우리 대한 민족은 완전한 자주 독립과 신성한 평등 복리를 우리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하기 위하여 지금 이민족이 자행하고 있는 전제정치의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나 대한 민주국으로 자립할 것을 선포하노라.”
    — 대한 독립 선언서(1919) 첫머리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현대어 번역입니다.
    “肉彈血戰으로 獨立을 完成할지어다”
    — 대한 독립 선언서(1919) 끝머리목숨을 건 싸움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 무장 투쟁을 분명히 밝힌 구절입니다.

    인물

    • 조소앙1887~1958

      선언서를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동단결 선언과 임시 정부 헌법 문서 작성에 참여했고, 삼균주의를 만들어 임시 정부의 이념적 틀을 마련했습니다. 6·25 전쟁 중 납북됐습니다.

    • 김교헌1868~1923

      선언서 서명자 명단의 맨 앞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대한제국 관리 출신으로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의 2대 교주가 됐습니다. 대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운동 세력과 가까워, 선언서 서명자 중에도 대종교 관계자가 많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언제 발표됐나 — ‘무오’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쟁

    1918년 말 발표로 보는 쪽

    ‘무오 독립 선언’이라는 이름대로 무오년(1918년) 음력 11월 무렵 발표됐다고 봅니다. 이 경우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보다 앞선 첫 독립 선언서가 되며, 오랫동안 교과서도 이 설명을 따랐습니다.

    1919년 2~3월 발표로 보는 쪽

    선언서에 적힌 연호와 날짜, 서명자들의 당시 행적, 선언서가 처음 알려진 시점 등을 따져 보면 1919년 2월 이후에 작성·발표됐다고 봅니다. 최근 연구에서 힘을 얻고 있어, 요즘은 ‘무오 독립 선언’보다 ‘대한 독립 선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씁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조소앙 선생 '대한독립선언서 육필 초고' 100년 만에 공개

    JTBC News · 745회 · 1:45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조소앙이 쓴 독립 선언서 초고 공개를 전한 JTBC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대한(무오)독립선언서'는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주축되어 선언한 최초이며, 자주적인 선언서였다.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 1,186회 · 13:1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대한 독립 선언서의 성격과 의미를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11. 2월

    외교

    파리 강화 회의 대표단 파견과 청원

    1919.2 ~ 1919.5 · 3개월

    신한 청년당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내 한국 독립을 청원했습니다. 전승국이 아닌 조선은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해 회의장에 서지 못했습니다.

    • 김규식은 '한국 독립 청원서'를 회의 사무국에 제출하고 파리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통신국을 두어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활동을 폈습니다.
    • 민족 자결주의는 원래 전쟁에서 진 나라들의 식민지에 적용하려던 원칙이어서, 전승국이던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배경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원칙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자,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 원칙은 원래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의 지배 지역에 적용하려던 것이어서,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신한 청년당은 이 국제 정세를 활용해 파리로 대표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전개

    신한 청년당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뽑아 1919년 2월 상하이를 떠나게 했습니다. 김규식은 3월 파리에 도착해 '한국 독립 청원서'를 강화 회의 사무국에 제출했습니다.

    조선은 전승국도 참전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해 본회의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김규식은 파리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통신국(파리위원부)을 두고 각국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회의는 한국 문제에 실질적인 성과 없이 끝났지만,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 이 소식이 자극이 됐고, 김규식은 뒤에 임시 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내며 외교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8년 1월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14개조 원칙에서 민족 자결을 내세웠습니다.
    2. 1918년 8월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이 만들어졌습니다.
    3. 1919년 2월신한 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뽑아 상하이에서 출발시켰습니다.
    4. 1919년 3월 중순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5. 1919년 4월김규식이 '한국 독립 청원서'를 강화 회의 사무국에 제출했습니다.
    6. 1919~1920년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파리 위원부를 이끌며 외교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인물

    • 김규식1881~1950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돼 한국 독립을 청원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한 뒤 새문안교회·연희전문 등에서 활동했고, 이후 임시 정부 외무총장을 지냈습니다. 광복 뒤에는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에 참여했고 6·25 전쟁 중 납북돼 숨졌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자결주의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57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가

    KBS 히스토리 · 3,142회 · 4:25

    유튜브 앱에서 보기

  12. 2.8

    운동

    2·8 독립 선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습니다. 국내 3·1 운동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 이 무렵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냈습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 자결주의가 배경이었습니다.

    배경

    1910년대 일본 도쿄에는 수백 명의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 회관을 중심으로 모였고, 일본 신문과 영자 신문을 통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파리 강화 회의 소식을 국내보다 빨리 접했습니다. 1919년 1월 미국 교포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려 한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1919년 1월 6일 도쿄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모였고, 실행을 맡을 위원들이 뽑혔습니다. 이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의 중심이 됐습니다.

    전개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최팔용·백관수·김도연 등 11명을 대표로 정했습니다. 선언서는 이광수가 썼고, 이광수는 발표 전에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송계백은 선언서 초안을 옷 속에 숨겨 국내로 들어가 현상윤·최린 등에게 전해 국내 운동 준비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2월 8일 오후 도쿄 간다의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백관수가 독립 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선언서와 결의문은 일본 정부와 각국 대사관, 신문사에도 보내졌습니다. 곧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표들을 체포했습니다.

    선언서는 우리말뿐 아니라 일본어·영어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날 회관에는 400~600명으로 전해지는 유학생이 모였고, 선언서와 결의문 낭독 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려다 경찰에 막혀 27명이 붙잡혔습니다. 결의문은 일본 의회에 민족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벌이겠다고 밝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표들은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형을 받았습니다. 2·8 독립 선언은 식민 통치의 중심지인 도쿄에서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국내에 전해져 3·1 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극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1월 6일도쿄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의 유학생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하고 실행 위원을 뽑았습니다.
    2. 1919년 1월 하순이광수가 선언서를 쓰고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송계백이 초안을 가지고 서울로 들어가 현상윤·최린에게 전했습니다.
    3. 1919년 2월 8일 오후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독립 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4. 1919년 2월 8일거리로 나서려던 유학생들이 경찰에 막히고 대표 등 27명이 붙잡혔습니다.
    5. 1919년 3월 1일국내에서 3·1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도쿄의 소식은 국내 준비 세력에게 큰 자극이 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가 승리를 거둔 세계 여러 나라의 앞에서 기필코 독립을 이루겠다는 뜻을 널리 알리노라.”
    — 2·8 독립 선언서(1919) 첫머리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현대어 번역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피의 전쟁을 펼칠 것이다.”
    — 2·8 독립 선언서(1919)원문은 ‘永遠의 血戰을 宣하리라’입니다. 3·1 독립 선언서보다 투쟁 의지를 더 강하게 드러낸 구절로 자주 비교됩니다.

    인물

    • 최팔용1891~1922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로 선언을 주도했습니다.

      함남 홍원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에 다니며 유학생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선언 뒤 금고형을 살았고, 귀국 뒤 잡지 발행 등에 참여하다 1922년 병으로 숨졌습니다.

    • 이광수1892~1950

      2·8 독립 선언서를 썼습니다.

      소설 『무정』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입니다. 선언서를 쓴 뒤 상하이로 가 임시 정부 독립신문 편집을 맡았으나 1921년 귀국했습니다. 1922년 「민족 개조론」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1930년대 후반부터 창씨개명과 학병 권유 등 친일 활동을 해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으며 6·25 전쟁 중 납북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자결주의

    해설·교양 · 강의

    큰별쌤의 오늘 — 조선 독립 만세! 2·8 독립 선언

    최태성 2TV · 7,285회 · 2:5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도쿄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짧게 설명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도쿄에 울린 만세 함성, 조선 유학생의 2•8 독립선언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 YTN KOREAN

    YTN korean · 1,252회 · 3:1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을 되짚은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2·8독립선언 기념일 02 기념일에 대해 알고 싶어요

    국가보훈부 · 539회 · 1:3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2·8 독립 선언의 경과와 의미를 짧게 소개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대한독립 만세”…2·8 독립선언 100주년 / KBS뉴스(News)

    KBS News · 745회 · 1:3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2·8 독립 선언 100주년을 맞아 그날을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 3.1 운동 2부 | 핵심 in 한국사

    EBSi · 5,311회 · 4:0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3·1 운동 흐름을 애니메이션으로 풀며 2·8 선언은 그 앞부분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민족 자결주의

각 민족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입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전후 질서의 원칙으로 내세웠습니다. 실제로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됐지만,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줘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설

우드로윌슨 '민족자결주의'의 진짜 실체 (5분 순삭 ver.) #효기심26

효기심 · 34.2만회 · 5:40

유튜브 앱에서 보기

해설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환영 받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과연 그 실행은?

함께하는 세계사 · 2.4만회 · 9:25

유튜브 앱에서 보기

정전 체제(군사 분계선·비무장 지대)

1953년 정전 협정으로 전쟁을 멈춘 채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정전 협정으로 군사 분계선을 긋고 양쪽으로 2km씩 비무장 지대를 뒀습니다. 전쟁을 끝내는 평화 협정은 맺어지지 않아 법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상태입니다.

바다에는 유엔군이 정한 북방 한계선(NLL)이 있으며, 서해에서는 이를 둘러싼 충돌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퍼진,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내건 운동입니다.

노동·농민·청년 운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 됐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에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치안 유지법으로 강하게 탄압했고, 광복 뒤 좌우 대립의 한 축이 됐습니다.

강의

[5.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통합운동 한 눈에 정리! (20년대, 30년대, 40년대) (20분컷 정리)

원유철한국사TV · 1만회 · 22:05

유튜브 앱에서 보기

해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뭐가 다른 걸까??? | 정치 외교

지식한잔 · 207.1만회 · 8:08

유튜브 앱에서 보기

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