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단독 선거 반대 등을 내걸고 경찰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무력 충돌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한라산 금족 지역이 풀린 1954년 9월까지 이어졌습니다.
- 1947년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숨진 일이 긴장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중산간 마을을 불태운 초토화 작전 때 희생이 가장 컸습니다.
- 2003년 정부 진상 조사 보고서는 희생자를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고, 같은 해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배경
해방 뒤 제주도에는 일본 등지에서 돌아온 사람이 많아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일자리는 부족했고 흉년과 콜레라 유행이 겹쳤습니다. 미군정의 미곡 수집 정책과 일제 때 경찰이 그대로 일하는 데 대한 반감도 컸습니다. 제주에서는 해방 직후 만들어진 인민 위원회의 영향력이 다른 지역보다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에서 열린 3·1절 기념 대회 뒤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숨졌습니다. 경찰이 사과하지 않자 3월 10일부터 관공서와 학교, 회사가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이를 좌익의 선동으로 보고 대규모 검거에 나섰고, 육지에서 경찰과 서북 청년회 단원들이 들어왔습니다. 1년 동안 2,500명가량이 검거됐고, 1948년 3월에는 유치장에서 고문으로 숨지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전개
1948년 4월 3일 새벽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당의 무장대가 도내 경찰 지서 여러 곳과 서북 청년회 등 우익 단체 인사의 집을 공격했습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단체의 탄압 중지,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등을 내걸었습니다. 4월 말 국방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도됐으나, 곧이어 오라리 방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충돌이 이어지면서 무산됐습니다.
5·10 총선거 때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2곳은 투표자가 과반에 못 미쳐 무효가 됐습니다. 정부가 세워진 뒤인 1948년 10월 정부는 강경 진압 방침을 정했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이때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압군은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무장대와 한편으로 여겨 집단으로 살해하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습니다. 무장대도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 주민을 살해했습니다.
1949년 봄 무장대 대부분이 진압된 뒤에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예비 검속된 주민들이 처형됐습니다. 한라산 출입을 막던 금족 지역이 풀린 1954년 9월 21일에야 사건은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2000년 제정된 제주 4·3 특별법은 이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습니다.
2003년 정부의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는 희생자를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습니다. 당시까지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14,028명 가운데 토벌대(군경)에 의한 희생이 10,955명(78.1%),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1,764명(12.6%)이었고, 희생자 가운데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도 많았습니다. 같은 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2014년 4월 3일이 국가 추념일(4·3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됐습니다. 2021년 특별법 전면 개정으로 희생자 보상과 군사 재판 수형인에 대한 특별 재심의 길이 열렸고, 이후 재심을 거친 수형인들이 잇따라 무죄 판결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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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물
김익렬1921~1988
김달삼(본명 이승진)1923~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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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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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평화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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