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개항 뒤 일본의 제일 은행 등 외국 은행이 국내에 지점을 내고 금융을 장악해 가자, 한국인 자본으로 은행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1896년 조선은행, 1897년 한성은행이 세워졌고, 대한 천일 은행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개항 뒤 들어온 첫 외국 은행은 1878년 부산에 지점을 연 일본 제일 은행이었습니다. 제일 은행은 개항장의 무역 대금 결제와 관세 수납을 맡으며 세력을 넓혔고, 한국 상인들은 돈을 빌리려 해도 외국 은행이나 고리대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6년 세워진 조선은행은 몇 해 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897년 세워진 한성은행은 뒤에 조흥은행을 거쳐 신한은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개
1899년 1월 30일 서울의 관료와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 천일 은행을 세웠습니다. 초대 은행장은 고위 관료 민병석이었고, 황실이 자금을 내어 뒷받침했습니다. 뒤에 황태자 영친왕이 은행장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은행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정부 세금을 맡아 운송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으로 한국 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자 은행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한 천일 은행의 주주는 서울의 관료와 시전 상인 등이었습니다.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으로 돈이 돌지 않아 경영이 크게 흔들리자, 1906년 황실이 자금을 내고 영친왕(황태자 이은)을 은행장으로 내세워 은행을 살렸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 천일 은행은 1911년 조선 상업 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광복 뒤 한국 상업 은행, 한빛 은행을 거쳐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이어집니다.
1909년 서울 남대문로 광교 부근에 은행 건물인 광통관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우리은행 지점으로 쓰이며,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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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일본 제일 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열었습니다.
1896~1897년조선은행(1896)과 한성은행(1897)이 한국인 자본으로 세워졌습니다.
1899년 1월 30일대한 천일 은행이 설립됐습니다.
1905년 7월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돼 한국 상인과 은행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1906년황실이 자금을 내고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세워 은행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1909년은행 건물 광통관이 완공됐습니다.
1911년조선 상업 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50년 이후한국 상업 은행(1950), 한빛 은행(1999)을 거쳐 2002년 우리은행이 됐습니다.
인물
민병석1858~1940
대한 천일 은행의 초대 은행장을 맡았습니다.
고종 대에 여러 대신직을 지낸 민씨 척족 출신 관료입니다. 1910년 병합 때 궁내부 대신으로 병합에 협력해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뒤에 이왕직 장관 등을 지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습니다.
영친왕 이은1897~1970
1906년 황실이 은행을 지원할 때 은행장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종의 아들로 1907년 황태자가 됐으나 곧 일본으로 보내져 일본 황족 여성 이방자와 혼인했습니다. 광복 뒤 오랫동안 귀국하지 못하다 1963년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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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이라는 이름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은행의 창립 관련 기록물은 국가 지정 기록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황실과 미국인이 함께 세운 한성 전기 회사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놓았습니다. 개통 직후 전차에 아이가 치여 숨지자 성난 군중이 전차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배경
1898년 1월 황실이 자금을 대고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윅이 경영과 공사를 맡는 한성 전기 회사가 세워졌습니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지금의 청량리 부근)에 자주 행차했기 때문에, 서울 도심에서 홍릉까지 전차를 놓는 사업이 먼저 추진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성 전기 회사는 황실이 자본을 대고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세운 회사였지만, 기술과 설비는 미국에 의존했습니다. 회사는 전차를 움직일 전기를 만들기 위해 동대문 근처에 발전소를 세웠고, 전차 차량과 설비는 미국 등에서 들여왔습니다. 전차는 일본 도쿄보다 먼저 서울에 놓였다는 점으로도 자주 소개됩니다.
전개
1899년 5월 17일(음력 4월 8일) 서대문에서 종로·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약 8킬로미터 구간의 전차 개통식이 열렸고, 곧 일반 승객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개통 열흘 남짓 만인 5월 26일 탑골 공원 앞에서 다섯 살 아이가 전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성난 군중이 전차를 부수고 불태웠고, 전차 운행은 한동안 멈췄습니다. 그해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소문까지 돌아 민심이 좋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사고 뒤 운전을 맡던 일본인 기사들이 신변 위협을 이유로 일을 그만두면서 운행 재개가 늦어졌고, 회사는 다른 기술자를 구해 몇 달 뒤에야 운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탑승을 꺼리던 사람들도 곧 전차에 익숙해져, 전차를 타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결과와 의미
운행이 재개된 뒤 전차는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이 됐고, 노선이 남대문·용산 등으로 늘어났습니다. 한성 전기 회사는 전차와 함께 전등도 공급했습니다. 서울 전차는 1968년 운행을 멈출 때까지 약 70년 동안 달렸습니다.
1900년 4월에는 종로의 전차 정류장 주변에 가로등이 켜졌는데, 궁궐 밖 민간 거리에 전등이 켜진 첫 사례로 소개됩니다. 한성 전기 회사는 1904년 한미 전기 회사로 바뀌었고, 1909년 일본 자본의 회사로 넘어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898년 1월황실 자본으로 한성 전기 회사가 세워지고,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윅이 공사를 맡았습니다.
1898년 가을서대문~청량리 구간 전차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1899년 5월 17일(음력 4월 8일)동대문에서 전차 개통식이 열렸습니다.
1899년 5월 26일탑골 공원 앞에서 아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자 군중이 전차를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1899년 하반기새 기술자를 구해 전차 운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1900년 4월종로 전차 정류장 주변에 가로등이 켜졌습니다.
1909년전차 사업이 일본 자본의 회사로 넘어갔습니다.
1968년 11월 29일서울 전차가 약 70년 만에 운행을 멈췄습니다.
인물
콜브란(Henry Collbran)1852~1925
보스트윅과 함께 한성 전기 회사의 공사와 경영을 맡았습니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철도 사업을 하던 기업가입니다. 한국에서 전차·전등·수도 사업 등을 벌였고, 뒤에 사업권을 일본 측에 넘겼습니다.
이채연1861~1900
한성판윤으로 한성 전기 회사의 사장을 맡아 전차 사업을 이끌었습니다.
주미 공사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관료로, 서울 도로를 넓히고 정비하는 도시 개조 사업을 주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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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통사고 기록
탑골 공원 앞 사고는 기록으로 남은 우리나라 첫 전차 사고로 자주 소개됩니다. 새 문물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며 황제가 직접 군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뒤 황제권을 강화하는 작업의 하나로 군 지휘 체계를 황제 아래로 모으려 했습니다.
을미사변 때 궁궐을 지켜야 할 훈련대 일부가 일본 쪽에 가담했고, 아관파천 때는 국왕이 외국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황제가 믿을 수 있는 군대를 직접 거느려야 한다는 생각이 이런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원수부 설치는 같은 해 반포된 대한국 국제와 함께 군사·행정·외교 권한을 황제에게 모으는 작업의 일부였습니다.
전개
1899년 6월 황제 직속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두었습니다. 황제가 대원수, 황태자가 원수를 맡아 군대를 직접 통솔했고, 원수부 아래에 군무·검사·기록·회계 부서를 두었습니다. 기존 군사 행정 기관인 군부는 원수부의 지휘를 받게 됐습니다.
이 시기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늘어났고, 국가 예산에서 군사비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고종은 대원수 군복을 입고 사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00년 무렵부터 지방 진위대가 여러 대대로 늘었고, 1900년 말에는 시위대에 군악대를 두고 이듬해 독일인 에케르트를 초빙해 지도하게 했습니다. 1903년에는 일본에서 화물선을 사들여 고친 첫 근대식 군함 양무호를 들여왔지만, 비용에 비해 쓸모가 적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군 통수권이 황제에게 모여 대한국 국제(1899년 8월)의 ‘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는 규정의 바탕이 됐습니다. 원수부는 러일 전쟁 중인 1904년 일본의 압력 속에 폐지됐고,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강제 해산됐습니다.
원수부가 없어진 뒤 군 지휘 업무는 군부로 넘어갔고, 일본은 1905년 이후 재정 정리를 명분으로 시위대와 진위대의 규모를 크게 줄였습니다. 황제가 군을 직접 거느려 나라를 지키려던 구상은 이렇게 실제 병력의 축소로 이어지며 힘을 잃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기본법으로, 대한제국이 자주독립한 전제 군주국이며 황제가 군 통수권·입법권·사법권·외교권 등 무한한 권한을 가진다고 정했습니다.
배경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고종은 황제 중심의 국가 체제를 법으로 확정하려 했습니다. 1899년 6월 법규 교정소를 두어 나라의 기본 법을 만들게 했습니다.
법규 교정소의 총재는 의정 윤용선이 맡았고, 한국인 관료들과 함께 르장드르·그레이트하우스 등 외국인 고문도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국제법(당시 말로 ‘만국 공법’)을 참고해, 대한제국이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독립 국가라는 점과 그 주권이 황제에게 있다는 점을 법 조문으로 정리했습니다.
전개
1899년 8월 17일 모두 9개 조로 된 대한국 국제가 반포됐습니다. 제1조는 대한국이 세계 여러 나라가 인정한 자주독립 제국이라고 밝혔고, 제2조는 대한국의 정치가 만세토록 변하지 않을 전제 정치라고 정했습니다. 제3조는 황제가 무한한 군권(임금의 권한)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조항에서는 육해군 통솔과 계엄, 법률 제정과 사면, 행정 관제와 관리 임면, 조약 체결과 사신 파견 등 입법·사법·행정·군사·외교 권한이 모두 황제에게 있다고 정했습니다.
조문을 차례로 보면 제4조는 신민이 황제의 권한을 침해하면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본다고 했고, 제5조는 육해군 통솔과 계엄, 제6조는 법률 제정과 반포·사면, 제7조는 행정 관제와 칙령, 제8조는 문무관 임면과 작위·훈장 수여, 제9조는 조약 체결과 선전·강화, 사신 파견을 황제의 권한으로 정했습니다. 제3조의 ‘자립 정체’라는 말은 국제법에서 말하는 독립된 정치 체제라는 뜻으로, 법 조문에 국제법 개념을 끌어온 것입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국 국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 성격을 가진 법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나 의회에 관한 조항은 없었고, 황제의 권한만 규정했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공포된 뒤 다시 고쳐지지 않았고, 대한제국이 끝날 때까지 나라의 기본 법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1907년 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권을 빼앗기면서 황제의 권한을 적은 조문들은 실제로는 힘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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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2월일본이 메이지 헌법을 반포했습니다.
1898년 12월 25일독립협회가 해산 명령을 받았습니다.
1899년 6월나라의 기본 법을 만들 법규 교정소가 설치됐습니다.
1899년 8월 17일9개 조로 된 대한국 국제가 반포됐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겨 제9조의 외교 권한이 무력해졌습니다.
1907년 7월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한일 신협약으로 통감이 내정을 장악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大韓國은 世界萬國의 公認되온바 自主獨立하온 帝國이니라”
— 대한국 국제 제1조(1899)대한국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자주독립 제국이다. (원문의 옛 글자 ‘아래아’는 현대 글자로 바꿔 적었습니다)
“大韓帝國의 政治는 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由後則亘萬世不變하오실 專制政治이니라”
— 대한국 국제 제2조(1899)대한제국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해 내려왔고 앞으로 만세토록 변하지 않을 전제 정치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번역)
인물
고종(광무 황제)1852~1919
법규 교정소를 두어 대한국 국제를 만들게 하고 반포했습니다.
독립협회를 해산한 직후 황제 중심 체제를 법으로 확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윤용선
의정으로 법규 교정소 총재를 맡아 대한국 국제 제정을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국 초기 의정부의 수장을 지낸 고위 관료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대한국 국제의 성격
자주 국가 선언으로 의미를 두는 쪽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법으로 밝히고, 열강의 간섭 속에서 권력을 한곳에 모아 개혁을 추진하려 한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전제 황권의 명문화로 보는 쪽
독립협회의 의회 운동을 누른 직후에 나왔고, 백성의 권리는 한 줄도 없이 황제의 무한한 권한만 적어, 근대 헌법이라기보다 전제 군주권을 법으로 굳힌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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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때 주변에서는
일본은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반포했습니다. 천황의 권한을 크게 인정했지만 제국 의회와 신민의 권리·의무 조항을 두었습니다. 청은 1908년에야 헌법의 방향을 담은 흠정 헌법 대강을 발표했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일본보다 10년 뒤, 청보다 9년 앞서 나왔지만 의회와 국민의 권리 조항은 없었습니다.
노량진과 제물포(인천) 사이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개통됐습니다. 부설권은 미국인 모스가 받았다가 일본 회사로 넘어갔습니다.
배경
서울과 개항장 인천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늘었지만, 걸어서나 배로 가면 하루 가까이 걸렸습니다. 아관파천 중이던 1896년 3월 조선 정부는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부설권을 내주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인천까지는 걸어서 하루 가까이 걸렸고, 한강 뱃길을 이용해도 조수와 날씨에 따라 시간이 들쭉날쭉했습니다. 개항장 인천으로 들어온 외국 물건과 서울의 물자를 빠르게 옮기려는 수요가 컸습니다. 모스는 미국 공사관의 알렌 등과 가까웠고, 아관파천으로 친미·친러 인사들이 정부에 들어선 때에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7월 프랑스는 경의선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전개
모스는 1897년 3월 인천에서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이 모자라 부설권과 공사를 일본 측 회사(경인 철도 합자 회사)에 넘겼습니다.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인천) 사이 약 33킬로미터 구간이 먼저 개통됐습니다. 한강 철교가 1900년 7월 완공되면서 서울 서대문 근처까지 전 구간이 이어졌습니다.
일본 측은 경인 철도 인수 조합을 만들어 1898년 모스로부터 부설권을 사들였고, 이어 경인 철도 합자 회사를 세워 공사를 이어 갔습니다. 개통 당시 역은 인천·축현·우각동·부평·소사·오류동·노량진의 일곱 곳이었고, 미국에서 들여온 증기 기관차가 객차를 끌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고도 불렀습니다.
결과와 의미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서울과 인천을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로 묶었습니다. 동시에 한반도 철도가 일본 자본의 손에 들어가기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경인선은 1903년 경부 철도 회사에 합쳐졌고, 1906년 통감부가 철도를 사들이면서 국유 철도가 됐습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전철로 바뀌어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일부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896년 3월아관파천 중인 조선 정부가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부설권을 내주었습니다.
1897년 3월모스가 인천에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898년자금난에 빠진 모스가 부설권을 일본 측 조합에 넘겼습니다.
1899년 9월 18일노량진~제물포 사이 약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1900년 7월한강 철교가 완공돼 서울 서대문 근처까지 전 구간이 이어졌습니다.
1903년경인선이 경부 철도 회사에 합쳐졌습니다.
1974년 8월 15일경인선이 전철화돼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일부가 됐습니다.
인물
모스(James R. Morse)
경인선 부설권을 얻어 공사를 시작했으나 일본 측에 넘겼습니다.
미국인 사업가로, 미국 공사 알렌 등의 도움을 받아 조선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는 데에도 관여했습니다.
알렌(Horace N. Allen)1858~1932
미국 공사관 외교관으로서 모스가 경인선 부설권을 얻도록 도왔습니다.
1884년 의료 선교사로 와 갑신정변 때 다친 민영익을 치료해 왕실의 신임을 얻었고, 제중원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뒤에 주한 미국 공사가 돼 운산 금광 등 미국인 이권 획득에도 관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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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날이 바뀐 이유
경인선 개통일인 9월 18일은 오랫동안 ‘철도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회사가 놓은 철도의 개통일을 기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2018년부터 1894년 조선 정부가 철도국을 둔 날인 6월 28일로 바뀌었습니다.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고, 울도 군수가 울릉 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하도록 정한 칙령입니다. 관보에 실려 공포됐습니다.
배경
조선은 오랫동안 울릉도에 주민이 사는 것을 막는 쇄환 정책을 폈지만, 일본인의 불법 벌목과 어로가 잦아지자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을 보내 조사하고 1883년부터 사람을 이주시켜 개척했습니다.
1890년대 말 일본인의 벌목과 무역이 다시 늘자, 대한제국은 1900년 내부 관리 우용정을 보내 울릉도를 조사했습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울릉도의 행정 지위를 높여 관리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전개
1900년 10월 24일 의정부 회의에서 울릉도를 울도로 고치고 도감을 군수로 바꾸는 안이 결정됐고, 10월 25일 황제가 재가했습니다. 이 칙령은 10월 27일자 『관보』에 실려 공포됐습니다.
칙령 제2조는 군청을 태하동에 두고, 관할 구역을 ‘울릉 전도와 죽도·석도’로 한다고 정했습니다.
칙령에 앞서 1900년 6월 내부 시찰관 우용정은 부산 해관의 외국인 세무사, 일본 영사관 관리와 함께 울릉도에 들어가 일본인의 불법 벌목과 거주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우용정은 일본인들이 섬의 나무를 마구 베어 가고 주민을 위협한다고 보고하며, 섬을 제대로 다스릴 관리가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초대 울도 군수로는 그동안 도감으로 섬을 맡아 온 배계주가 임명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울릉도는 강원도에 속한 울도군이 됐습니다. 이 칙령은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그 주변 섬을 근대적 행정 구역으로 편성해 관보로 널리 알린 문서로, 독도 영유권 논의에서 핵심 자료로 다뤄집니다.
일본은 이로부터 약 4년 뒤인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다케시마’라 이름 붙여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고 주장합니다.
울도군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옮겨져 울릉군이 됐고, 독도는 지금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882년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일본인의 불법 벌목을 확인했습니다.
1883년정부가 주민을 울릉도로 이주시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1900년 6월내부 시찰관 우용정이 일본 영사관 관리 등과 함께 울릉도를 조사했습니다.
1900년 10월 24일의정부 회의에서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는 안을 결정했습니다.
1900년 10월 25일황제가 칙령 제41호를 재가했습니다.
1900년 10월 27일칙령이 『관보』에 실려 공포됐습니다.
1905년 2월 22일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고 주장하는 조치를 했습니다.
1906년 3월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 관리의 방문으로 편입 사실을 알고 ‘본군 소속 독도’라고 정부에 보고했습니다.
1914년울도군이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郡廳位置는 台霞洞으로 定하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를 管轄할 事”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2조(『관보』 1900년 10월 27일)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한다. (원문의 옛 글자 ‘아래아’는 현대 글자로 바꿔 적었습니다)
인물
우용정
1900년 내부 시찰관으로 울릉도를 조사하고 관리 강화를 건의했습니다.
대한제국 내부 관리로, 그의 조사 보고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는 칙령의 바탕이 됐습니다.
배계주
울릉도 도감을 거쳐 칙령 제41호에 따라 초대 울도 군수가 됐습니다.
울릉도에 살며 일본인의 벌목을 정부에 알리고 이를 막으려 한 인물로, 섬의 행정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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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는 독도인가 —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한국 고유의 영토이며, 영토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칙령의 ‘석도’는 당시 울릉도에 살던 전라도 출신 주민들이 ‘돌섬’, 사투리로 ‘독섬’이라 부르던 독도를 한자의 뜻(돌 석)으로 적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906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의 편입 사실을 듣고 ‘본군 소속 독도’라고 보고한 문서,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호 일지에 ‘한국인들이 이 섬을 독도(獨島)라고 쓴다’고 적힌 기록 등을 근거로 듭니다. 따라서 1905년 일본의 편입은 이미 대한제국이 관할하던 섬을 빼앗은 것으로 무효라고 봅니다.
일본 정부의 주장
일본 정부는 칙령의 ‘석도’가 독도라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또 설령 석도가 독도라 하더라도 대한제국이 그 섬을 실제로 다스린 사실이 없으므로, 1905년 시마네현 편입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한국 측은 이에 대해 칙령 자체가 국가의 관할 의사를 공식 표명한 것이며, 울도 군수가 1906년 독도를 자기 군 소속으로 인식해 보고한 사실이 실제 관할을 보여 준다고 반박합니다.
칙령의 ‘죽도’는 어디인가
칙령의 죽도는 울릉도 바로 동쪽에 있는 작은 섬 죽서도(댓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부르는 ‘다케시마(竹島)’와 한자가 같지만 다른 섬입니다. 칙령 제정일인 10월 25일은 민간 단체와 경상북도 등이 ‘독도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