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애국단 결성
침체된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려고 김구가 상하이에서 만든 비밀 조직입니다. 일본 요인을 겨냥한 의열 투쟁을 벌였습니다.
배경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사람과 돈이 모두 부족해 존재감이 크게 줄었습니다.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중국 안에서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김구는 적은 인원으로 큰 타격을 줘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고 중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미주 동포들이 보내온 자금이 활동 밑천이 됐습니다.
전개
1931년 10월 무렵 김구는 상하이에서 비밀 조직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습니다. 단원은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쓰고 사진을 찍은 뒤 거사에 나섰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고,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등을 숨지게 했습니다. 같은 해 다롄에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을 노린 계획은 사전에 발각됐습니다.
윤봉길의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이 숨졌고,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 여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다롄 계획은 1932년 5월 국제 연맹 리턴 조사단의 방문에 맞춰 관동군 사령관 등을 노린 것이었으나 유상근·최흥식이 미리 체포됐고, 국내로 들어가 조선 총독을 노린 이덕주·유진식도 붙잡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윤봉길 의거 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임시 정부를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고,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두어 군인을 길렀습니다. 이 인연은 뒤에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일제의 수색이 심해져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게 됐습니다.
김구는 의거 직후 자신이 계획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일제가 큰 현상금을 걸자 자싱 등지로 몸을 피했습니다.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와 만난 뒤 뤄양 군관 학교 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김구1876~1949
윤봉길1908~1932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의열 투쟁의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