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전시 동원기

만주 사변과 의열 투쟁

만주 사변 뒤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은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가 임시 정부에 활로를 열었습니다.

기간
1931.9.18 ~ 1936.12.31 · 5년 3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우가키
담긴 것
사건 17 · 영상 66 · 영화·드라마 14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4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역사 속 그날들 —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김구

KBS 히스토리 · 3.2만회 · 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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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한인 애국단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다룬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1931 ~ 1932.4.29 · 한인 애국단 결성 → 윤봉길 의거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6일차 3교시 — 1930년대 이후 식민 통치와 저항

최태성 1TV · 59.6만회 ·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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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통치와 저항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31.9.18 ~ 1945.8.15 · 만주 사변 →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과 예방구금령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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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한인 애국단 결성 →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과 예방구금령

해설·교양 · 다큐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KBS 히스토리 · 8.3만회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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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원봉의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까지를 다룬 KBS 방송입니다.

1919.11.9 ~ 1938.10.10 · 한인 애국단 결성 →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과 예방구금령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4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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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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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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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11· 제목만

「절정」

배경 1925 ~ 1944.1

KBS 3·1절 특집.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

영화 · 2005· 제목만

「청연」

배경 1925 ~ 1933

일제강점기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영화 · 2016· 공식 영상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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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5 ~ 1945.8.15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삶. 사실과 다른 각색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화 · 2016· 공식 영상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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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창작). 친일 귀족의 저택이 무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넘볼 수 없는 귀족 아가씨를, 끝까지 지킨 남자의 사랑 (결말포함)

라라무비 · 34.9만회 ·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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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7· 제목만

「경성스캔들」

배경 1930 ~ 1938

KBS.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속 독립운동

드라마 · 2017· 공식 영상

「시카고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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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4

tvN. 현생과 1930년대 경성의 독립운동가 전생이 겹치는 판타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다시보는 여운작] 전생을 초월한 운명 시카고타자기 몰아보기 EP.1~16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 정주행 /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22.5만회 ·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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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8· 공식 영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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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만주 벌판의 보물 지도 쟁탈전을 그린 활극(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내부자들'에서 손 잘리기 전 손가락 먼저 잘렸던 병헌이 형 (feat. 손가락 귀신ㅋ)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온갖 TMI 썰 풀어 주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23.8만회 ·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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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8· 제목만

「라듸오 데이즈」

배경 1932 ~ 1934

경성 방송국에서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코미디

영화 · 2023· 공식 영상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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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3

1933년 경성, 총독 암살 작전을 막으려는 조선총독부 안의 항일 스파이 '유령' 찾기(창작)

영화 · 2015· 공식 영상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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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3

1933년 경성, 친일파와 일본 요인 암살 작전.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천만 관객 영화 '암살' 비하인드 스토리 총정리 "해방될 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251.2만회 ·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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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2· 공식 영상

「각시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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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4 ~ 1938

KBS. 1930년대 경성의 가면 영웅 이야기(허영만 만화 원작)

영화 · 2016· 공식 영상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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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5 ~ 1945.2

시인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의 청춘과 죽음

사건 연표 1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산미 증식 계획 (~1934), 근우회 결성 (~1931), 세계 대공황과 쌀값 폭락 (~1931), 브나로드 운동 (~1934)

  1. 1931

    운동

    한인 애국단 결성

    침체된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려고 김구가 상하이에서 만든 비밀 조직입니다. 일본 요인을 겨냥한 의열 투쟁을 벌였습니다.

    배경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사람과 돈이 모두 부족해 존재감이 크게 줄었습니다.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중국 안에서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김구는 적은 인원으로 큰 타격을 줘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고 중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미주 동포들이 보내온 자금이 활동 밑천이 됐습니다.

    전개

    1931년 10월 무렵 김구는 상하이에서 비밀 조직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습니다. 단원은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쓰고 사진을 찍은 뒤 거사에 나섰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고,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등을 숨지게 했습니다. 같은 해 다롄에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을 노린 계획은 사전에 발각됐습니다.

    윤봉길의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이 숨졌고,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 여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다롄 계획은 1932년 5월 국제 연맹 리턴 조사단의 방문에 맞춰 관동군 사령관 등을 노린 것이었으나 유상근·최흥식이 미리 체포됐고, 국내로 들어가 조선 총독을 노린 이덕주·유진식도 붙잡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윤봉길 의거 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임시 정부를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고,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두어 군인을 길렀습니다. 이 인연은 뒤에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일제의 수색이 심해져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게 됐습니다.

    김구는 의거 직후 자신이 계획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일제가 큰 현상금을 걸자 자싱 등지로 몸을 피했습니다.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와 만난 뒤 뤄양 군관 학교 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1년 10월 무렵김구가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습니다.
    2. 1931년 12월 13일이봉창이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를 했습니다.
    3. 1932년 1월 8일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4. 1932년 1월 28일상하이에서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한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5. 1932년 4월 29일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6. 1932년 5월다롄에서 관동군 요인을 노린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습니다.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옮겨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7. 1933년김구가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인 군사 교육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8. 1934년뤄양 군관 학교 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됐습니다.

    인물

    • 김구1876~1949

      한인 애국단을 만들고 의거를 계획했습니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고, 1896년 일본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임시 정부 경무국장·국무령을 거쳐 1940년 주석이 됐습니다. 광복 뒤 신탁 통치 반대와 남북 협상을 주도했고, 1949년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됐습니다.

    • 윤봉길1908~1932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야학과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의거 직후 체포돼 일본으로 옮겨졌고, 1932년 12월 가나자와에서 총살됐습니다. 1946년 유해가 국내로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의열 투쟁의 평가

    독립운동을 되살린 전략으로 보는 쪽

    무장 부대를 운영할 힘이 없던 임시 정부가 적은 인원으로 일본의 핵심 인물을 노려 세계와 중국에 한국 독립 의지를 알렸고, 중국 정부의 공식 지원을 얻어 내 광복군 창설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봅니다.

    한계를 짚는 쪽

    개인의 희생에 기대는 방식이어서 조직적 대중 운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웠고, 거사 뒤 일제의 보복과 수색으로 임시 정부와 교민 사회가 큰 대가를 치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만 목표가 민간인이 아니라 군·정부 요인이었다는 점은 양쪽이 대체로 인정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의거)|백범김구기념관 상설전시실

    백범김구기념관 KIMKOO MUSEUM & LIBRARY · 2.4만회 ·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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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백범김구기념관 전시실 영상으로 한인애국단과 두 의거를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다시 만난 김구와 윤봉길의 시계 |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활동 [설민석의 한국통사 EP.55] | 매주 월요일 공개

    설민석 Seol Min Seok · 9,245회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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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설민석이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의거 활동을 벌인 '한인 애국단' (역사만화 96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6.6만회 ·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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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한인 애국단 결성과 두 의거를 짧게 그린 만화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학교역사#고등학교한국사#한인애국단 공부 꿀팁!!(with 유튜버 메더 M.K)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4.3만회 ·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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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한인 애국단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정리한 교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윤봉길, 이봉창,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한인애국단’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이야기, MBC 240331 방송

    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 1.2만회 ·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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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서프라이즈가 한인애국단의 여성 단원 이화림 이야기를 재연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지독한 구두쇠였던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댔을 리 없다” 하와이 사람들도 몰랐던 비밀결사 8인ㅣ하와이애국단의 비밀ㅣ윤봉길 의사의 폭탄과 하와이에서 온 천 달러

    EBS 컬렉션 - 라이프스타일 · 1.3만회 · 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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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하와이 애국단의 자금 지원을 다룬 EBS 다큐로 한인 애국단 결성은 일부입니다.

  2. 9.18

    전쟁

    만주 사변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 철도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군 소행이라며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이듬해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배경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경제가 크게 어려워지자, 일본 군부 안에서는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차지해 위기를 벗어나자는 주장이 커졌습니다.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이 이를 앞장서 추진했습니다.

    1928년 관동군이 만주 군벌 장쭤린을 열차 폭파로 살해한 뒤,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고 일본 철도와 경쟁하는 철도를 놓는 등 일본의 이권을 위협했습니다.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무력으로 만주를 차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개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은 펑톈(지금의 선양) 부근 류탸오후에서 자기들이 관리하던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구실로 곧바로 공격을 시작해 몇 달 만에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확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군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사건 다음 날 관동군은 펑톈을 점령했고,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정부 승인 없이 부대를 만주로 보냈습니다. 장쉐량은 주력을 만리장성 남쪽에 두고 저항을 자제해 일본군은 빠르게 나아갔고, 1932년 2월에는 하얼빈까지 들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제 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보내 조사했고, 일본의 행동을 자위로 볼 수 없다는 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해 1933년 국제 연맹을 탈퇴했습니다.

    만주가 일본 손에 들어가자 만주 한인 사회와 독립군은 큰 위기를 맞았지만, 중국인 사이에 반일 감정이 높아져 한중 연합 작전이 이뤄지는 계기도 됐습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만주국은 겉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실권은 관동군이 쥐었고, 1934년 푸이가 황제에 오르며 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국제 연맹 총회는 1933년 2월 리턴 보고서를 42 대 1로 채택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8년 6월관동군이 장쭤린이 탄 열차를 폭파해 그를 살해했습니다.
    2. 1929년 10월미국 주가 폭락으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됐습니다.
    3. 1931년 9월 18일 밤관동군이 류탸오후에서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1931년 9월 19일관동군이 펑톈을 점령했습니다.
    5. 1931년 9월 21일조선 주둔 일본군이 정부 승인 없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6. 1932년 1월관동군이 진저우를 점령했고,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7. 1932년 2월관동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습니다.
    8. 1932년 3월 1일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운 만주국이 세워졌습니다.
    9. 1933년 2월 24일국제 연맹 총회가 리턴 보고서를 42 대 1로 채택했습니다.
    10. 1933년 3월일본이 국제 연맹 탈퇴를 통보했습니다.

    인물

    • 이시와라 간지1889~1949

      관동군 작전 참모로 류탸오후 사건과 만주 점령을 계획했습니다.

      일본 육군 장교로 일본과 미국이 결국 최후의 전쟁을 치른다는 ‘세계 최종 전쟁론’을 내세웠습니다. 뒤에 중일 전쟁 확대에 반대하다 도조 히데키와 부딪혀 예편했습니다.

    • 푸이1906~1967

      만주국 집정으로 추대됐고 1934년 황제가 됐습니다.

      청의 마지막 황제로 1912년 퇴위했습니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혔고 중국에서 전범 관리소 생활을 한 뒤 1959년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15년 전쟁
    일본 학계 일부는 만주 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를 하나로 묶어 ‘15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이 이어진 한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전다방2 태평양전쟁 ep.2 일본이 선택한 돌파구! 만주사변 – 운명의 1930‘s

    KFN · 96만회 · 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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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국방TV 교양 토크 역전다방이 만주 사변의 배경과 경과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우리가 몰랐던 만주사변 (1931) - 자문: 역사학자 유정희(남, 1981~) #일본 #중일전쟁 #만주사변

    인문학 프로파일 - 역사 시사 여행 족보 · 23.1만회 ·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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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만주사변의 원인과 전개를 전황 지도와 함께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이 따위 군대가 일으킨 전쟁, 만주사변. 관동군은 이렇게 싸운다. 일제패망史#03: 만주사변의 발발(전편, 이전편 다시 제작)

    생생역사 - 세계를 보는 눈 · 9.8만회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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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관동군의 만주사변 발발 과정을 전쟁사 관점에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만주국이 도대체 어떤 나라야?ㅣ KBS 191217 방송

    KBS 히스토리 · 29.2만회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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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역사저널 그날이 만주 사변 뒤 세워진 만주국의 성격을 짚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만주는 어쩌다가 중국 땅이 된 걸까?|우리가 몰랐던 만주 쟁탈의 잔혹사..

    별별역사 · 95.7만회 ·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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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만주 영유권의 긴 역사를 다뤄 만주 사변은 짧게 지나갑니다.

  3. 1932

    전쟁

    한중 연합 작전

    1932 ~ 1933 · 1년

    만주 사변 뒤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 쌍성보·대전자령에서,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이 영릉가·흥경성에서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배경

    만주 사변 뒤 만주 곳곳에서 중국인 항일 부대(구국군·자위군 등)가 일어났습니다. 만보산 사건으로 나빠졌던 중국인의 한인 감정도 공동의 적 앞에서 누그러졌고, 한인 독립군은 중국군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때 만주의 독립군은 크게 둘이었습니다. 북만주의 한국 독립당이 거느린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 남만주의 조선 혁명당이 거느린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입니다.

    한국 독립군은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만들어진 한국 독립당의 군대였고, 조선 혁명군은 1929년 남만주의 국민부 아래 만들어진 조선 혁명당의 군대였습니다. 두 부대 모두 병력과 무기가 넉넉하지 않아 중국 부대와의 연합이 필요했습니다.

    전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 등과 연합해 1932년 가을 쌍성보를 두 차례 공격했고, 1933년 사도하자·동경성 전투를 거쳐 1933년 6월 말~7월 초 대전자령에서 일본군 부대를 매복 공격해 크게 이기고 많은 군수 물자를 얻었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1932년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만주국군을 물리쳤고, 1933년 흥경성 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대전자령 전투는 산길을 지나는 일본군을 며칠 동안 매복해 기다린 끝에 벌인 싸움으로, 한국 독립군은 군복·군량·무기 등 많은 물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전리품 분배를 두고 중국 부대와 갈등이 생기면서 연합이 흔들렸습니다.

    결과와 의미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와 중국 부대들의 약화·분열로 연합 작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국 독립군은 1933년 말 임시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옮겨 가 군관 학교에서 군인을 길렀고, 이들은 뒤에 한국광복군의 중심이 됐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1934년 양세봉이 일제의 공작으로 피살된 뒤에도 1930년대 후반까지 남만주에서 싸웠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9년남만주에서 국민부와 조선 혁명당·조선 혁명군이 조직됐습니다.
    2. 1930년 7월북만주에서 한국 독립당이 만들어지고 한국 독립군이 편성됐습니다.
    3. 1931년 9월만주 사변이 일어나 만주 곳곳에서 중국인 항일 부대가 일어났습니다.
    4. 1932년 봄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5. 1932년 가을한국 독립군이 중국 부대와 함께 쌍성보를 두 차례 공격했습니다.
    6. 1933년 봄~여름한국 독립군이 사도하자·동경성 전투를 치렀고, 조선 혁명군은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7. 1933년 6월 말~7월 초한국 독립군이 대전자령에서 일본군 부대를 매복 공격해 크게 이겼습니다.
    8. 1933년 말한국 독립군 주요 인물들이 임시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옮겨 갔습니다.
    9. 1934년조선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이 일제의 공작으로 피살됐습니다.

    인물

    • 지청천1888~1957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쌍성보·대전자령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나온 장교였으나 1919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 무관 학교에서 독립군을 길렀습니다. 이청천으로도 불립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고, 광복 뒤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 양세봉1896~1934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영릉가·흥경성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참의부·정의부를 거쳐 조선 혁명군을 이끌었습니다. 1934년 일제가 보낸 밀정의 꾐에 빠져 피살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1]_ 37-1 한중 연합 작전 / 37강 일제 강점기(1930년대 이후 저항)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최태성 1TV · 6.9만회 ·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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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의 한능검 심화 강의로 한중 연합 작전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5]_ 37-1 한중 연합 작전 / 37강 일제 강점기(1930년대 이후 저항)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PT 닭가슴살

    최태성 1TV · 5.2만회 ·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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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강의의 요약판으로 한중 연합 작전을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4]_ 37-1 한중 연합 작전 / 37강 일제 강점기(1930년대 이후 저항)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PT

    최태성 1TV · 2.9만회 ·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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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강의의 PT판으로 앞의 강의와 내용이 겹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9] 37-1 한중 연합 작전 / 37강 일제 강점기(1930년대 이후 저항)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자막 속성 분절

    최태성 1TV · 2.1만회 ·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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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의 연합 작전을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으랏차차 한국독립전쟁사] 8회 한국과 중국의 연합군, 역대급 대승을 거두다

    KFN · 3,330회 · 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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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TV 교양 프로그램이 한중 연합군의 대승 전투를 다룹니다.

  4. 경제

    남면북양 정책

    1932 ~ 1934 · 2년

    일본 방직 자본에 원료를 대려고 남부 지방에는 목화를, 북부 지방에는 양을 기르게 한 정책입니다. 1929년 영국이 보호 무역으로 돌아서 원면·양모 수입길이 막히자 조선을 대체 공급지로 삼았습니다.

    • 193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해마다 예산 20만 원을 들여 호주에서 면양을 들여와 북부 지방에서 기르게 했습니다.
    • 목화와 양모는 평상복만이 아니라 군복에도 쓰이는 재료였습니다.

    배경

    일본 방직 산업은 원면과 양모를 주로 수입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영국이 식민지·자치령을 묶은 블록 경제로 돌아서면서 일본으로 오던 원면·양모 수입길이 좁아졌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1932년부터 조선을 원료 공급지로 삼는 남면북양 정책을 폈습니다. 남부 지방 농가에는 목화 재배를, 북부 지방 농가에는 면양 사육을 장려했습니다.

    1934년부터는 10년 계획을 세워 해마다 예산 20만 원을 들여 호주에서 면양을 들여왔습니다. 처음 5년은 북부 지방에서 씨를 늘리고, 다음 5년은 조선 전역에서 10만 마리까지 기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정책으로 생산된 목화와 양모는 일본 방직 자본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름은 부업 장려였지만 실제로는 총독부가 정한 할당량에 맞춰 재배·사육을 사실상 강제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9년영국이 블록 경제로 돌아서며 일본의 원면·양모 수입길이 좁아졌습니다.
    2. 1932년남면북양 정책이 시작됐습니다.
    3. 1934년10년 면양 증식 계획이 마련됐습니다.
    4. 1930년대 중반목화·양모 생산이 늘었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남면북양 정책의 성격

    농가의 부업 장려로 보는 쪽

    당시 총독부는 이 정책을 농가 소득을 늘리는 부업 장려 사업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일부 농가에는 새로운 수입원이 됐습니다.

    원료 공출을 위한 강제 정책으로 보는 쪽

    군복 등 군수용 옷감 수요까지 겹치며 총독부가 정한 재배·사육 목표를 사실상 강제했고, 생산물 대부분이 일본 방직 자본으로 흘러가 조선 농가에 남는 이익은 적었다고 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농가에 새로운 부수입원을 만들어 줬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 '부업'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 목화 재배와 면양 사육을 강제해 농가의 남는 노동력을 짜낸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매일 아침 떠먹는 한국사 용어_ 남면북양 | 사회탐구 용어사전-한국사 | EBSi 고교강의

    EBSi · 1,694회 ·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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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기록 · 기록

    일제의 '남면북양정책' 기록영상 발굴 / YTN

    YTN · 1,388회 ·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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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8

    운동

    이봉창 의거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천황이 탄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명중하지 못했지만 중국 신문들이 이를 보도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였습니다.

    배경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어려운 형편 속에 여러 일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살았지만 차별을 겪으며 민족의식을 품게 됐고, 1931년 초 상하이의 임시 정부를 찾아가 김구를 만났습니다. 일본 사정에 밝고 일본어가 능숙한 그는 한인 애국단의 첫 거사를 맡았습니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의 점원과 용산역 철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고,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습니다. 1928년 교토에서 열린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로 된 편지를 지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갇힌 일이 민족의식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해집니다.

    전개

    이봉창은 1931년 12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는 선서를 하고 폭탄 두 개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앞(사쿠라다몬 부근)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은 천황이 탄 마차가 아니라 다른 마차 근처에서 터져 천황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됐습니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은 태극기 앞에서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한다’는 선서문을 쓰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사진을 찍었습니다. 며칠 뒤 상하이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본 수도 한가운데서 천황을 노렸다는 사실이 크게 알려졌습니다. 중국 국민당 계열 신문들이 ‘불행히 명중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보도하자 일본이 강하게 항의했고, 중·일 사이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1월 말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의거는 넉 달 뒤 윤봉길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사건 직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직을 표명했으나 천황이 받아들이지 않아 유임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1년이봉창이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습니다.
    2. 1925년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3. 1928년교토의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 편지를 지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4. 1931년 1월상하이의 임시 정부를 찾아가 김구를 만났습니다.
    5. 1931년 12월 13일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를 하고 폭탄 두 개를 받았습니다.
    6. 1931년 12월 중순상하이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7. 1932년 1월 8일도쿄 경시청 앞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8. 1932년 1월 28일중일 사이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9. 1932년 9월비공개 재판에서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10. 1932년 10월 10일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처형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 이봉창 선서문(1931년 12월 13일)나는 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한인 애국단의 한 사람이 되어 적국의 우두머리를 죽이기로 맹세합니다.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인물

    • 이봉창1901~1932

      도쿄에서 일본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광복 뒤 1946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국내로 돌아와 윤봉길·백정기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 김구1876~1949

      한인 애국단을 이끌며 거사를 준비시켰습니다.

      임시 정부의 지도자로, 『백범일지』에 이봉창과의 만남과 거사 준비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효창공원 삼의사 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의사의 묘가 있고,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실 가묘가 비어 있습니다. 김구의 묘도 같은 공원에 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김구를 감동시킨 이봉창의 결의! 일왕 암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 #벌거벗은한국사 이봉창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 18.9만회 · 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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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8%추천 ★★★★★

    벌거벗은 한국사가 이봉창의 결의부터 의거 당일까지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사 속 그날들/풀버전] 이봉창과 윤봉길 feat. 김구ㅣKBS 190623 방송

    KBS 히스토리 · 1.3만회 · 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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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역사저널 그날 풀버전으로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김구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독립운동가? 이봉창은 왜 일본행을 택했나! | #벌거벗은한국사 이봉창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 33.5만회 ·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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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벌거벗은 한국사 이봉창 편으로 생애와 의거를 자세히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TV조선 영상실록 영웅 이봉창

    CM NETWORKS · 7.8만회 ·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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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방송사 영상실록으로 이봉창의 생애와 의거를 짧게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만화

    전세계에 알린 독립의지 | 역사대모험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독립운동 | 광복절 | 윤봉길 | 이봉창 | 깨비키즈 KEBIKIDS

    깨비키즈 [KEBIKIDS] · 17만회 ·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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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어린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함께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80분) 그들이 바라는 건 오로지 독립뿐이었다!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대한 제국의 영웅 안중근&김구&이봉창&윤봉길의 치열했던 그날 |

    디글 :Diggle · 28만회 · 1: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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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여러 의사 편을 이어 붙인 모음이라 이봉창 의거는 한 부분입니다.

    창작 · 영화

    친일파로 살아남기: 이봉창

    파라독스 스튜디오 · 100.3만회 ·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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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이봉창을 소재로 한 창작 단편 영상이라 사실 학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6. 2월

    외교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

    1932.2 ~ 1932.10 · 8개월

    만주 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한 중국의 요청으로 영국 리튼 경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꾸려져 만주를 조사했습니다. 조사단은 1932년 6월 말 조선도 방문했습니다.

    • 보고서는 일본군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볼 수 없고 만주국도 스스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 일본은 이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채택되자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습니다.
    • 재만 한인의 처지도 보고서에 다뤄졌는데, 만주 사변 뒤 일본이 한인을 앞세워 만주 침략의 명분으로 삼으려 한 정황이 지적됐습니다.

    배경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자 중국은 이를 국제연맹에 제소했습니다. 국제연맹은 진상을 조사할 조사단을 꾸리기로 했습니다.

    전개

    영국의 리튼 백작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은 1932년 2월 유럽을 출발해 일본·중국을 거쳐 4월 만주에 들어갔고, 6주 동안 현지를 조사했습니다. 조사단은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조선도 방문해 재만 한인의 처지를 살폈습니다.

    조사단은 1932년 9월 보고서를 완성해 10월 국제연맹에 제출했습니다. 보고서는 일본의 군사 행동을 정당방위로 볼 수 없고, 만주국은 현지 주민의 자발적 의사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제연맹 총회가 1933년 2월 이 보고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자 일본은 반발해 그달 국제연맹을 탈퇴했습니다. 국제연맹은 이후 일본의 확장을 막을 실질적인 힘을 보여 주지 못했고, 이는 국제 사회의 집단 안보 체제가 무력함을 드러낸 사례로 꼽힙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1년 9월 18일만주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2. 1931년 12월중국의 제소로 국제연맹 이사회가 조사단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3. 1932년 2월리튼 조사단이 유럽을 출발했습니다.
    4. 1932년 4~5월조사단이 만주 현지 조사를 벌였습니다.
    5. 1932년 6월 말~7월 초조사단이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6. 1932년 10월국제연맹에 보고서가 제출됐습니다.
    7. 1933년 2월국제연맹 총회가 보고서를 채택했고, 일본이 반발해 국제연맹을 탈퇴했습니다.

    인물

    • 빅터 불워리턴(리튼 경)1876~1947

      조사단 단장으로 만주 현지 조사를 이끌었습니다.

      영국의 정치인·외교관으로 인도 총독 대리를 지낸 경력이 있었습니다. 조사 보고서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이후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 점령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만주사변'으로 일본 국토의 3배가 되는 중국 영토를 차지하다! 이후 국제 연맹의 결론은?? #벌거벗은세계사

    tvN Joy · 2.4만회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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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4.29

    운동

    윤봉길 의거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등을 처단했습니다.

    • 이 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생겼습니다.
    • 임시 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후 8년 동안 중국 각지를 옮겨 다녔습니다.

    배경

    1931년 만주 사변 뒤 중국 안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해 7월 만보산 사건이 과장 보도되면서 조선에서 화교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고, 중국인들 사이에는 한국인이 일본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자금과 사람이 모두 줄어 존립이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만들어 일본 요인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같은 달 일본은 상하이를 공격해(상하이 사변) 5월 정전 협정 전까지 이 도시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전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윤봉길은 고향에서 야학과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갔고, 1932년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 애국단에 들어갔습니다. 의거 며칠 전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쓰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천장절)과 상하이 사변 승리를 함께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윤봉길은 식장에 들어가 단상을 향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가 숨졌고,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이 크게 다쳤습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붙잡혀 일본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일본으로 옮겨진 뒤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총살돼 순국했습니다.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의거 직후 일본은 상하이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뒤쫓았고, 안창호가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됐습니다. 김구는 이 일이 한인 애국단의 계획이었다는 성명을 내고 피신했으며,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을 때까지 옮겨 다녔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는 이 의거 뒤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운동을 공식·비공식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뤄양 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돼 독립군 간부를 길렀고, 이 흐름은 뒷날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습니다. 중국 안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1년 10월 무렵김구가 상하이에서 일본 요인 처단을 맡을 비밀 조직으로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습니다.
    2. 1932년 1월 8일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이 도쿄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일왕 행렬에 폭탄을 던졌으나 일왕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3. 1932년 1월 28일일본군이 상하이의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4. 1932년 4월 26일윤봉길이 한인 애국단에 들어가 선서문을 쓰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5. 1932년 4월 29일 오전훙커우 공원 천장절·전승 기념식 도중 단상에 폭탄을 던졌고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같은 날 프랑스 조계에서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6. 1932년 5월 5일일본과 중국이 상하이 정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단상에서 다친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는 이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7. 1932년 5월상하이 파견군 군법 회의가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8. 1932년 12월 19일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의 육군 작업장 부근에서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9. 1946년 7월가나자와에서 찾은 유해가 이봉창·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돌아와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윤봉길 선서문(1932년 4월 26일, 보물로 지정된 윤봉길 유품)‘적성’은 참된 정성을 뜻합니다. 의거 사흘 전에 쓴 선서문으로, 김구의 한인 애국단이 단원마다 이런 선서를 받았습니다.

    인물

    • 윤봉길1908~1932

      훙커우 공원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충청남도 예산 사람으로, 3·1 운동 뒤 일본식 학교를 그만두고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고향에서 야학을 열고 농민 계몽 모임(월진회)을 꾸렸으며, 1930년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순국 뒤 가나자와에 묻혔다가 1946년 유해가 국내로 돌아와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습니다.

    • 김구1876~1949

      한인 애국단을 이끌며 의거를 계획하고 지원했습니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동학 농민 운동, 신민회 활동을 거쳐 1919년 임시 정부에 참여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임시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주석이 됐습니다. 광복 뒤 남북 협상 등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벌이다 1949년 안두희의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윤봉길은 폭탄 두 개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단상에 던진 것은 물통 모양의 폭탄이었고, 도시락 모양의 폭탄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것이었지만 붙잡히면서 쓰지 못했습니다.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말은 흔한 오해입니다.
    남아 있는 흔적
    상하이 훙커우 공원(오늘날 루쉰 공원)에는 의거를 기념하는 매정(梅亭)이 있습니다. 충남 예산에는 생가와 기념관인 충의사가 있고, 서울 양재동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매헌’은 윤봉길의 호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History e,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던지지 않았다

    EBSCulture (EBS 교양) · 34만회 ·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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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역사채널e가 도시락 폭탄 오해를 바로잡으며 의거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광복 80년 특별기획 ‘나의 친구 윤봉길’

    KBS대전 [CULTURE&DOCUMENTARY] · 13.5만회 ·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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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KBS대전 특집으로 윤봉길이 훙커우 의거에 이르는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풀스토리 l #어쩌다어른 l #tvN인사이트

    tvN STORY 티비엔 스토리 · 46.8만회 ·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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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어쩌다 어른에서 설민석이 상하이 의거 전 과정을 강연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의거 91주년…던진 폭탄조차 잘못 알려진 '의사 윤봉길' / SBS 8뉴스

    SBS 뉴스 · 9.1만회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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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SBS 8뉴스가 의거 91주년에 잘못 알려진 폭탄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 그 현장인 홍커우 공원에 가다! | 한국사 또모험 ep.6

    설쌤TV · 5만회 ·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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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설쌤TV 무빙툰으로 훙커우 공원 의거 현장을 찾아갑니다.

    해설·교양 · 예능

    "아빠가 되니까 차마 못 보겠다..." 형돈을 울린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 발품사 | 20260826 방송

    MBC PLAYGROUND · 42.1만회 · 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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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MBC 교양 예능이 윤봉길의 의거와 유서를 따라갑니다.

    창작 · 영화

    친일파로 살아남기: 윤봉길

    파라독스 스튜디오 · 51.2만회 · 4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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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윤봉길을 소재로 한 창작 단편 영상이라 사실 학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8. 7월

    경제

    농촌진흥운동

    1932.7 ~ 1940 · 8년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농촌에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고 소작 쟁의를 가라앉히려고 벌인 관제 농촌 운동입니다. '자력갱생'을 내걸고 마을마다 농촌진흥회를 만들었습니다.

    • 도·군·읍면 단위로 농촌진흥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 마을 단위 농촌진흥회를 조직해 농가별로 생활 개선 계획을 세우게 했습니다.
    • 식량 자급 계획과 부채 정리 계획을 마을마다 세우게 했습니다.

    배경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으로 조선 농촌이 극심한 어려움에 빠지자 사회주의 사상과 소작 쟁의가 농촌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이를 그대로 두면 식민 통치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전개

    우가키는 1932년 7월 도지사 회의에서 농촌진흥운동의 방향을 밝혔고, 9월 조선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규정이, 10월에는 농산어촌 진흥에 관한 통첩이 마련되며 운동이 공식화됐습니다. '자력갱생'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도·군·읍면 단위로 농촌진흥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 마을 단위로 농촌진흥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을마다 농가별로 식량을 자급하고 빚을 갚아 나가는 계획을 세우게 하고, 근면·절약·협동을 강조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총독부는 이 운동으로 농민의 불만을 다독이려 했지만 소작 제도 자체는 그대로 뒀습니다. 운동은 1930년대 말 전시 체제로 넘어가며 노동력·식량 동원을 뒷받침하는 조직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1940년 국민총력운동에 흡수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2년 7월우가키 총독이 도지사 회의에서 농촌진흥운동의 방향을 밝혔습니다.
    2. 1932년 9월 30일조선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규정이 공포됐습니다.
    3. 1932년 10월 8일농산어촌 진흥에 관한 정무총감 통첩이 내려졌습니다.
    4. 1930년대 중반마을 단위 농촌진흥회가 전국에 조직됐습니다.
    5. 1940년운동이 국민총력운동에 흡수됐습니다.

    인물

    • 우가키 가즈시게1868~1956

      6대·7대 조선 총독으로 농촌진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두 차례 조선 총독을 지냈습니다. 농공 병진과 병참기지화 정책의 기틀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농촌진흥운동의 성격

    농가 자립을 도운 정책으로 보는 쪽

    빚 정리 계획과 생활 개선 지도를 통해 궁핍에 빠진 농가가 살림을 추스르도록 실질적으로 도운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체제 안정을 위한 통제책으로 보는 쪽

    지주제라는 근본 원인은 그대로 둔 채 농민에게 근면과 절약만 요구했고,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을 막고 농촌을 촘촘한 관제 조직으로 편성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평가가 갈리는 부분

    • 농가 스스로 살림을 일으키도록 도운 자력갱생 운동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 지주제는 그대로 둔 채 농민에게 근면과 절약만 요구해 소작 문제의 근본 원인은 비켜 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새마을운동 다시보기|4. 새마을운동과 일제시기 농촌진흥운동 [짤꾹사/짧고굵은역사이야기]

    역사공장 · 496회 ·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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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2.10

    경제

    조선 소작 조정령

    1932.12.10 ~ 1933.2.1 · 54일

    잦아지는 소작 쟁의를 법원의 조정으로 억누르려 한 법령입니다. 일본의 소작 조정법을 본떴지만 소작인 단체가 조정에 끼어드는 것은 막았습니다.

    • 소작 위원회를 두되 법원의 지도를 받게 했고, 조정 기관은 사실상 법원뿐이었습니다.
    • 소작 쟁의는 이 법령 시행 뒤에도 줄지 않아 1932년 300여 건에서 1937년 약 3만 건으로 오히려 크게 늘었습니다.

    배경

    1920년대부터 소작 쟁의가 잦아지자 총독부는 강제 진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법으로 다루는 방안을 찾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24년 소작 조정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1932년 12월 10일 조선 소작 조정령을 공포하고 이듬해 2월 1일부터 시행했습니다. 일본의 소작 조정법을 본떴지만, 일본과 달리 소작인·지주 단체가 조정에 참여하는 조정 위원회 제도는 두지 않고 법원을 조정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지역마다 소작 위원회를 둬 법원의 지도를 받게 하고, 분쟁이 생기면 소작인이나 지주가 법원에 조정을 신청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소작인 단체의 조직적인 개입을 막고 법원이라는 다가서기 어려운 기관에 조정을 맡긴 탓에, 시행 뒤에도 소작 쟁의는 줄지 않고 1932년 300여 건에서 1937년 약 3만 건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총독부는 결국 1934년 더 강한 내용의 조선 농지령을 마련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4년일본에서 소작 조정법이 시행됐습니다.
    2. 1932년 12월 10일조선 소작 조정령이 공포됐습니다.
    3. 1933년 2월 1일조선 소작 조정령이 시행됐습니다.
    4. 1933~1937년소작 쟁의 건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5. 1934년조선 농지령이 새로 마련됐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85 일제의 쌀 수탈에 항거해 소작쟁의가 일어나다

    KBS 히스토리 · 3,871회 ·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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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933

    10.29

    사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발표

    조선어 학회가 한글 맞춤법의 기준을 정해 발표했습니다. 이어 표준어를 정하고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배경

    한글은 오랫동안 글자마다 적는 방법이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같은 말을 ‘먹어’와 ‘머거’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기도 하고 뜻을 살려 적기도 했으며, 아래아(ㆍ)를 쓸지 말지도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국문 연구소가 원칙을 논의했지만 결실을 보기 전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어 연구회는 1921년에 만들어져 1931년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학회는 1930년 12월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기로 결의하고 위원을 뽑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전개

    위원들은 약 3년 동안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며 원칙과 세칙을 다듬었습니다. 1933년 10월 29일, 당시 한글날로 기념하던 날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했습니다. 통일안은 표준말을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게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말의 뜻을 이루는 부분(어간과 어미, 체언과 조사)을 밝혀 적는 방식입니다.

    학회는 이어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표준어를 정하고,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정리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1929년부터 추진하던 우리말 사전 편찬에 속도를 냈습니다.

    처음 위원은 권덕규·김윤경·이극로·이윤재·이희승·최현배 등 12명이었고, 뒤에 6명을 더해 18명이 됐습니다. 이들은 1932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개성에 모여 초안을 한 조목씩 검토하는 첫 번째 독회를 열었고, 1933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서울 화계사에서 두 번째 독회를 열어 수정안을 다듬었습니다. 마지막 정리는 9명의 정리 위원이 맡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통일안은 신문·잡지·출판사가 차례로 받아들이면서 사실상의 표준이 됐습니다. 광복 뒤 교과서와 공문서도 이 원칙을 따랐고, 1988년 문교부가 고시한 오늘날의 「한글 맞춤법」도 이 통일안의 뼈대를 이어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1년 12월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2. 1926년 11월조선어 연구회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을 처음 정했습니다.
    3. 1930년 12월 13일조선어 연구회 총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기로 결의하고 위원 12명을 뽑았습니다.
    4. 1931년 1월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5. 1932년 12월 말~1933년 1월 초위원 18명이 개성에서 초안을 검토하는 첫 번째 독회를 열었습니다.
    6. 1933년 7월 말~8월 초서울 화계사에서 두 번째 독회를 열어 수정안을 확정했습니다.
    7. 1933년 10월 29일당시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했습니다.
    8. 1936년 10월『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해 표준어를 정했습니다.
    9. 1940년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내놓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
    — 『한글 마춤법 통일안』 총론 제1항(1933)철자법은 글자를 적는 방법, 어법은 말의 규칙을 뜻합니다. 오늘날 「한글 맞춤법」 제1항도 거의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표준말은 大體로 現在 中流 社會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 『한글 마춤법 통일안』 총론 제2항(1933)표준말을 대체로 지금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정한다는 뜻입니다. 1988년 표준어 규정은 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바꿨습니다.

    인물

    • 최현배1894~1970

      조선어 학회 핵심 회원으로 통일안 제정에 참여했습니다.

      주시경에게 배운 국어학자로,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습니다. 『우리말본』을 써 우리말 문법을 체계화했습니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광복 뒤 미군정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교과서를 만들며 한글 전용을 주장했습니다.

    • 이극로1893~1978

      조선어 학회를 이끌며 통일안과 사전 편찬을 주도했습니다.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29년 귀국해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을 이끌었습니다. 조선어 학회 사건 때 가장 무거운 징역 6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48년 남북 협상 때 북으로 가서 남았고, 북한에서 언어 정책 관련 요직을 맡았습니다.

    더 알아두기

    맞춤법을 둘러싼 당시의 논쟁
    조선어 학회의 방식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박승빈 등이 만든 조선어학연구회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쪽에 더 가까운 표기를 주장하며 통일안을 반대했습니다. 받침을 늘리고 뜻을 밝혀 적는 조선어 학회 방식은 배우기 어렵다는 비판과, 말의 뜻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다는 옹호가 맞섰고, 결국 통일안이 널리 쓰이면서 정착했습니다.
    한글날 날짜
    한글날은 1926년 ‘가갸날’로 시작됐고 날짜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1933년 무렵에는 양력 10월 29일을 기념일로 삼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뒤 1945년부터 10월 9일로 정해졌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한글을 지켜낸 위인들을 아시나요? (feat.조선어학회)

    교육부 · 1.1만회 · 3:2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조선어학회 활동을 소개하며 맞춤법 통일안은 일부입니다.

  11. 1934

    4.11

    경제

    조선 농지령

    1934.4.11 ~ 10.20 · 6개월

    소작 기간을 최소 3년으로 정하고 지주가 정당한 사유 없이 소작 계약을 해지하지 못하게 한 법령입니다. 소작 조정령만으로는 쟁의를 막지 못하자 총독부가 마련했습니다.

    • 40개 조로 이뤄졌고 1934년 4월 제령 제5호로 공포돼 그해 10월 20일부터 시행됐습니다.
    • 이 법령 시행 뒤에도 소작 쟁의는 줄지 않고 1937년까지 오히려 늘었습니다.

    배경

    소작 조정령만으로는 소작 쟁의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총독부는 소작인의 최소한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넓혔습니다.

    전개

    1934년 4월 11일 제령 제5호로 조선 농지령이 공포돼 그해 10월 20일부터 시행됐습니다. 모두 40개 조로 이뤄졌으며, 소작 기간을 최소 3년으로 정하고 지주가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을 해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소작료를 둘러싼 분쟁이 생기면 부윤·군수·도사가 조정에 나설 수 있게 했고, 소작인이 함부로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 절차도 마련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소작인의 경작권을 법으로 보장한 첫 사례로 꼽히지만, 소작료 상한을 정하지는 않아 지주 중심의 소작 질서 자체는 유지됐습니다. 시행 뒤에도 소작 쟁의는 줄지 않고 1937년까지 오히려 늘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2년 12월조선 소작 조정령이 먼저 시행됐습니다.
    2. 1934년 4월 11일조선 농지령(제령 제5호)이 공포됐습니다.
    3. 1934년 10월 20일조선 농지령이 시행됐습니다.
    4. 1934~1937년시행 뒤에도 소작 쟁의 건수가 계속 늘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조선 농지령의 성과와 한계

    진전으로 보는 쪽

    소작인의 최소한의 경작권을 처음으로 법에 담아, 지주가 마음대로 소작인을 바꾸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고 봅니다.

    한계가 컸다고 보는 쪽

    소작료 상한 같은 핵심 요구는 담지 않았고 시행 뒤에도 소작 쟁의가 오히려 늘어난 데서 보듯, 지주 중심의 소작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소작인의 최소한의 경작권을 처음으로 법에 담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소작료 상한 같은 핵심 요구는 담지 않아 지주 중심의 소작 질서를 유지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 조선농민 총동맹, 조선농지령, 혁명적 농민조합 | 박기훈

    티클 · 615회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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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5.7

    사회

    진단학회 창립

    이병도·손진태·이윤재·송석하 등 한국인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언어·문학을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연구하자며 만든 학회입니다. 일본인 중심의 청구학회 등 관학에 맞서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 학회지 『진단학보』를 펴내 연구 성과를 한글로 발표했습니다.
    • 중일 전쟁 뒤 전시 통제가 심해지며 활동이 위축됐다가 광복 뒤 다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배경

    일제강점기 한국사·한국어·한국 문학 연구는 주로 총독부가 후원하는 조선사 편수회나 일본인 학자 중심의 청구학회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한글로 발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자랐습니다.

    전개

    이병도·손진태·이윤재·송석하·이상백·조윤제 등이 1934년 5월 7일 진단학회를 창립했습니다. 이름의 '진단(震檀)'은 우리나라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학회는 학회지 『진단학보』를 펴내 역사학·국어국문학·민속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한글로 발표했습니다. 관학 중심의 연구와 달리 문헌 고증에 바탕을 둔 실증적 연구를 지향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진단학회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통제가 심해지며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가, 광복 뒤 다시 활동을 재개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4년 5월 7일진단학회가 창립됐습니다.
    2. 1934년 11월학회지 『진단학보』 창간호가 나왔습니다.
    3. 1930년대 후반전시 통제가 심해지며 활동이 위축됐습니다.
    4. 1945년 광복 뒤학회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인물

    • 이병도1896~1989

      진단학회 창립을 주도한 역사학자입니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사학을 공부했고, 조선사 편수회에 촉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습니다. 광복 뒤 서울대 교수로 오래 재직하며 한국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13. 1935

    7월

    운동

    민족 혁명당 결성

    김원봉·지청천·조소앙 등 여러 계열이 힘을 합쳐 난징에서 만든 정당입니다. 뒤에 노선 차이로 조소앙·지청천 등이 탈당했고,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따로 세웠습니다.

    배경

    1930년대 초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은 여러 단체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920년대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된 뒤 임시 정부의 힘은 약해졌고,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이 각자 활동했습니다. 만주 사변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 커졌습니다. 1932년에는 여러 단체가 연락 기구인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전개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의 다섯 단체가 합쳐 민족 혁명당을 세웠습니다. 김원봉·김규식·지청천·조소앙 등이 참여했고, 실제 주도권은 조직력이 강한 의열단 계열의 김원봉 쪽에 있었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임시 정부를 어떻게 할지가 큰 문제였습니다. 새 정당 쪽에서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자는 주장도 나왔고, 김구는 이에 반대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창당 두 달 만인 1935년 9월 조소앙 등이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다시 세웠고, 1937년에는 지청천 계열도 떠나 조선혁명당을 만들었습니다. 김구는 1935년 11월 한국 국민당을 따로 세워 임시 정부를 지켰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족 혁명당은 1937년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해 말 다른 좌파 계열 단체와 함께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만들었습니다. 이 연맹이 1938년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한편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쪽은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로 뭉쳐, 중국 관내 독립운동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두 진영은 1939년 통합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지만, 1940년대 들어 조선 민족 혁명당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 연합 정부가 이뤄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2년 11월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 등이 연락 기구인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2. 1935년 7월 5일난징에서 다섯 단체가 합쳐 민족 혁명당을 세웠습니다.
    3. 1935년 9월조소앙 등이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4. 1935년 11월김구가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만들어 임시 정부를 지켰습니다.
    5. 1937년 봄지청천 계열이 떨어져 나가 조선혁명당을 만들었고,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6. 1937년 8월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세 정당 등이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7. 1937년 12월조선 민족 혁명당 등이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했습니다.
    8. 1939년 5월김구와 김원봉이 함께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내 통합을 제안했지만, 그해 여름 여러 정당의 통일 회의는 결렬됐습니다.
    9. 1942년 10월조선 민족 혁명당 인사들이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들어가면서 임시 정부의 좌우 합작이 시작됐습니다.

    인물

    • 김원봉1898~1958

      민족 혁명당 창당을 주도하고 실질적 지도자가 됐습니다.

      1919년 의열단을 만들어 일제 요인 암살·관공서 파괴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세워 간부를 길렀고, 1938년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임시 정부 군무부장이 됐습니다. 광복 뒤 1948년 북한으로 가서 국가검열상 등을 지냈으나 1958년 무렵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조소앙1887~1958

      창당에 참여했다가 두 달 만에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했습니다.

      삼균주의를 체계화한 임시 정부의 대표적 이론가로, 외무부장을 오래 맡았습니다. 광복 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 지청천1888~1957

      한국독립당 계열을 이끌고 합류했다가 1937년 탈당했습니다.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나온 장교였으나 3·1 운동 뒤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을 지휘했습니다. 1930년대 초 한국 독립군을 이끌고 한중 연합 작전을 벌였고,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습니다. 광복 뒤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민족 혁명당의 통합 시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통일 전선의 의미를 강조하는 쪽

    좌우 여러 단체를 하나의 정당으로 묶은 첫 시도였다는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념보다 독립이라는 목표를 앞세웠고, 이때의 경험이 1940년대 임시 정부의 좌우 연합과 광복군 통합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합니다.

    분열의 계기가 된 점을 강조하는 쪽

    임시 정부 해체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창당 직후부터 핵심 세력이 빠져나갔고, 결과적으로 중국 관내 독립운동이 임시 정부 쪽과 민족 혁명당 쪽 두 진영으로 굳어졌다고 봅니다. 통합이 특정 계열의 주도권 확보 수단이 됐다는 당시의 비판도 함께 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88 민족혁명당의 결성과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KBS 히스토리 · 6,059회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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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민족혁명당 결성 과정을 정면으로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민족 혁명당 & 조선 민족 전선 연맹 l 일제 강점기 17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5.8만회 ·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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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민족 혁명당과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함께 정리한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민족혁명당 이후 독립운동단체의 변화 파이널 정리

    후늴리리야 · 3,081회 ·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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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민족혁명당 결성 이후 단체들의 변화를 정리한 개인 강의형 해설입니다.

  14. 11월

    정치

    한국 국민당 결성

    김구가 이동녕·이시영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지키자는 세력을 모아 만든 정당입니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 합류하지 않은 임시 정부 옹호 세력이 중심이 됐습니다.

    • 이로써 독립운동 진영은 김원봉 중심의 민족 혁명당과 김구 중심의 한국 국민당이라는 두 큰 정당 체제를 이루게 됐습니다.
    • 한국 국민당은 이후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과 함께 1940년 한국 독립당으로 합쳐졌습니다.

    배경

    1935년 7월 민족 혁명당이 여러 독립운동 정당·단체를 합쳐 결성되자, 임시 정부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본 인사들은 이 합류에 반대했습니다.

    전개

    김구는 이동녕·이시영·조완구·차이석·송병조·김붕준·엄항섭·조성환 등과 함께 1935년 11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습니다. 임시 정부를 지키고 지지한다는 공통 기반 위에 모인 정당이었습니다.

    이로써 독립운동 진영은 김원봉이 중심이 된 민족 혁명당과 김구가 중심이 된 한국 국민당이라는 두 큰 정당 체제를 이루게 됐습니다. 한국 국민당은 임시 정부의 여당과 같은 구실을 하며 임시 의정원에서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국 국민당은 이후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재건파),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과 함께 1940년 5월 충칭에서 하나의 한국 독립당으로 통합됐습니다. 이 통합 한국 독립당은 광복 때까지 임시 정부의 중심 정당 역할을 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5년 7월민족 혁명당이 결성됐습니다.
    2. 1935년 11월김구 등이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습니다.
    3. 1937년중일 전쟁 발발 뒤 임시 정부 옹호 세력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힘을 모았습니다.
    4. 1940년 5월한국 국민당·한국 독립당·조선 혁명당이 통합 한국 독립당으로 합쳐졌습니다.

    인물

    • 김구1876~1949

      한국 국민당을 결성해 임시 정부 옹호 세력을 모았습니다.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기획했고, 임시 정부 주석과 한국광복군 창설을 이끌었습니다. 광복 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애쓰다 1949년 암살됐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사 최대 라이벌, 김구vs이승만ㅣKBS 230122 방송

    KBS 히스토리 · 14.6만회 ·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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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936

    7월

    사회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1936.7 ~ 1944.4.21 · 7년 9개월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은 신사 참배 강요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38년부터 여러 차례 검속·투옥됐습니다. 1939년 노회가 그를 파면하고 교회를 폐쇄했고,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했지만, 주기철을 비롯한 일부 목회자와 신도는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 신사 참배를 거부한 목회자 중에는 옥사하거나 광복 뒤까지 옥고를 치른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배경

    1930년대 후반 총독부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 참배를 모든 종교·교육 기관에 강요했습니다. 기독교계 다수는 신사 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닌 국가 의례로 받아들여 따랐지만, 십계명의 우상 숭배 금지와 어긋난다고 보아 거부하는 목회자와 신도도 있었습니다.

    전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던 주기철은 1936년 7월 부임 이후 신사 참배 반대를 공개적으로 밝혀 감시 대상이 됐습니다. 1938년 4월 첫 검속으로 체포된 뒤 여러 차례 투옥과 석방을 반복했습니다.

    1938년 9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했지만, 주기철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939년 12월 평양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하고 산정현교회를 폐쇄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주기철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목회자 가운데는 그처럼 옥사하거나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른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6년 7월주기철이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2. 1938년 4월신사 참배 반대로 첫 검속을 당했습니다.
    3. 1938년 9월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했습니다.
    4. 1939년 12월평양노회가 주기철을 파면하고 산정현교회를 폐쇄했습니다.
    5. 1944년 4월 21일주기철이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6. 2006년대한예수교장로회가 주기철의 복권을 결의했습니다.

    인물

    • 주기철1897~1944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됐습니다. 산정현교회에서 신사 참배 반대 설교를 계속하다 여러 차례 투옥됐고,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한국 개신교계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로 꼽힙니다.

    더 알아두기

    신사 참배를 둘러싼 교단의 결정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가결은 총회장 등 지도부가 경찰의 압박 속에 표결에 부친 결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복 뒤 이 결정에 대한 반성과 신사 참배 거부자들의 복권 문제는 교단 안에서 오래 논의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해설·교양 · 해설

    “우리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_주승중 목사

    크리스톡 · 2,258회 ·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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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8.9

    사회

    손기정 우승과 일장기 말소 사건

    1936.8.9 ~ 8.25 · 17일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시상식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가 무기 정간을 당했습니다.

    배경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스포츠는 한국인이 일본인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드문 분야였습니다. 손기정은 신의주에서 태어나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1935년 마라톤 비공인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어서 올림픽에는 일본 대표로 나가야 했습니다.

    전개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습니다. 같은 조선 출신 남승룡이 3위에 올랐습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은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의 신문들은 우승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8월 13일 무렵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일장기가 흐릿하게 보이도록 손본 사진을 실었고, 8월 25일 동아일보는 이길용 기자 등이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실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관련 기자들을 체포해 조사했고,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동아일보는 이듬해 6월에야 다시 발행할 수 있었고, 송진우 사장 등 간부가 물러났으며 관련 기자들은 언론계에서 쫓겨났습니다.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끝내 복간하지 못하고 1937년 폐간됐습니다.

    손기정의 우승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줬고, 일장기 말소는 언론이 할 수 있는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다만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공식 기록에서 손기정의 국적은 지금도 당시 출전 국가인 일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5년 11월 3일도쿄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 마라톤에서 2시간 26분 42초로 당시 세계 최고 기록(비공인)을 세웠습니다.
    2. 1936년 8월 9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에 올랐습니다.
    3. 1936년 8월 13일 무렵조선중앙일보가 가슴의 일장기가 흐릿하게 보이도록 손본 사진을 실었습니다.
    4. 1936년 8월 25일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시상식 사진을 실었습니다.
    5. 1936년 8월 29일조선 총독부가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습니다.
    6. 1937년 6월동아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했습니다.
    7. 1937년 11월휴간 중이던 조선중앙일보가 발행 허가를 잃고 폐간됐습니다.

    인물

    • 손기정1912~2002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며 달리기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승 뒤 일제의 감시를 받아 선수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광복 뒤 육상 지도자로 서윤복(1947 보스턴 마라톤 우승) 등을 길렀고, 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 선수단 기수를 맡았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왔습니다.

    • 이길용1899~?

      동아일보 체육 기자로 일장기 말소를 주도했습니다.

      한국 스포츠 기자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언론계에서 쫓겨났습니다. 6·25 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은 그의 이름을 딴 체육 기자상을 주고 있습니다.

    더 알아두기

    손기정의 청동 투구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기로 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는 당시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않고 독일 박물관에 보관됐습니다. 50년 뒤인 1986년에야 손기정에게 돌아왔고, 보물로 지정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습니다.
    일장기 말소는 한 번이 아니었다
    흔히 동아일보 사건만 알려져 있지만,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일장기를 흐리게 한 사진을 실었다는 것이 연구로 확인됐습니다. 두 신문 모두 이 일로 정간·폐간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역덕이슈 오늘 I 75 1936년 8월 9일,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수상

    KBS 히스토리 · 4.5만회 ·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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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 우승을 다룬 KBS 히스토리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꼬무 87회 요약] 일장기를 가슴에 단 마라토너, 조국을 위해 다시 한 번 달리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45.8만회 ·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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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꼬꼬무 요약판으로 일장기를 단 마라토너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손기정은 어떻게 일제의 대표가 되었나 / 손기정의 증언 '난 일본을 위해 뛴 것이 아니다' [역사실험] KBS 1996.07.21 방송

    KBS 실험실 · 1.3만회 · 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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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KBS 역사실험이 손기정 본인 증언으로 우승과 그 뒤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올림픽 영웅을 죄인마냥 끌고 간 일제 경찰! 손기정의 활동을 차단한 결정적인 이유 | #벌거벗은한국사 손기정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 1.7만회 ·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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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손기정 편 벌거벗은 한국사로 우승과 일제의 감시까지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잇슈067_금메달 리스트의 일장기를 지워라! |히스토리잇슈

    최태성 2TV · 3,679회 ·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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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이 일장기 말소 사건을 짧게 정리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광복절 다시 보는 손기정의 질주 / KBS뉴스(News)

    KBS News · 1.2만회 ·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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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KBS 뉴스가 광복절에 1936년 베를린 우승을 되짚습니다.

    해설·교양 · 만화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손기정

    구구퐁키즈 99pong · 5,131회 ·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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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으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광복절 다시 보는 손기정의 질주

    올스 · 16.8만회 ·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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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과 그 뒤 이야기를 짧게 담은 개인 영상입니다.

  17. 12.12

    정치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과 예방구금령

    1936.12.12 ~ 1941.3.10 · 4년 2개월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형 집행이 끝난 뒤에도 감시·구금할 수 있게 한 두 법령입니다. 1936년 보호관찰령이 감시 제도를 두었고, 1941년 예방구금령은 영장 없이 계속 가둘 수 있게 했습니다.

    • 보호관찰령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집행 유예·형 집행 종료·가석방된 사람을 2년 동안 보호 관찰소가 감시하게 했습니다.
    • 예방구금령은 재판 없이 검찰과 경찰의 판단만으로 계속 구금할 수 있게 해 인권 침해가 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배경

    1925년 제정된 치안 유지법은 사회주의·독립운동을 단속하는 데 주로 쓰였습니다. 총독부는 형을 마친 사람이 다시 활동에 나서는 것을 막을 더 강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전개

    1936년 12월 12일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이 공포됐습니다.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집행 유예·형 집행 종료·가석방된 사람을 담당 보호관찰소가 2년 동안 감시하며 사상 전향을 유도하는 제도였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 통제가 더 강해지면서 1941년 3월 10일 조선 사상범 예방구금령이 시행됐습니다. 이 법령은 재판이나 법원의 영장 없이도 검찰과 경찰의 판단만으로 계속 구금하거나 행동을 제한할 수 있게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두 법령은 형을 이미 마친 사람까지 감시·구금할 수 있게 해 근대적 형사 사법의 기본 원칙을 벗어난 조치로 평가받습니다. 이 제도는 광복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5년 5월치안 유지법이 조선에 시행됐습니다.
    2. 1936년 12월 12일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이 공포됐습니다.
    3. 1938년각지에 사상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4. 1941년 3월 10일조선 사상범 예방구금령이 시행됐습니다.
    5. 1945년 8월광복과 함께 두 법령의 효력이 사라졌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치안유지법 - 생각이 죄였다. #치안유지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이육사 #조선청년

    hit친인생-longform · 35회 ·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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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독립군

만주·연해주·중국 관내에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으려 한 군대입니다.

의병의 뒤를 이어 신흥 무관 학교 등에서 길러졌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1940년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습니다.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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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l 일제 강점기 16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8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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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1930년대 무장독립전쟁#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암기비법!!(6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4.2만회 ·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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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퍼진,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내건 운동입니다.

노동·농민·청년 운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 됐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에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치안 유지법으로 강하게 탄압했고, 광복 뒤 좌우 대립의 한 축이 됐습니다.

강의

[5.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통합운동 한 눈에 정리! (20년대, 30년대, 40년대) (20분컷 정리)

원유철한국사TV · 1만회 ·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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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뭐가 다른 걸까??? | 정치 외교

지식한잔 · 207.1만회 ·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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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없애고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한 정책입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걸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강요했습니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없애고 일본식 성명을 쓰게 했으며(창씨개명), 한글 신문을 폐간했습니다.

같은 시기 전쟁을 위해 사람과 물자를 강제로 동원했습니다.

다큐

[자막]조선-우리의 후방 1939년 / 일제강점기 전시동원과 황국신민화의 진실

백년역사CH · 2.5만회 ·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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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상24_집없는천사_황국신민서사

사계절 TV · 3.7만회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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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