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흥선대원군 집권기

경복궁 중건과 개혁 착수

비변사를 없애 의정부를 되살리고 법전 『대전회통』을 펴냈습니다. 만동묘를 철폐하고, 원납전을 거둬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습니다.

기간
1865.1 ~ 1865.12.31 · 11개월
누가 다스렸나
임금 고종 · 실권 흥선대원군
담긴 것
사건 4 · 영상 20 · 영화·드라마 2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6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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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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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KBS 히스토리 · 95.5만회 ·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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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을 축으로 집권부터 을미사변 무렵까지 다룹니다.

1864.1.21 ~ 1895.10.8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5일차 1교시 — 흥선 대원군

최태성 1TV · 83.2만회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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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집권기 기출 개념을 한 교시에 훑는 한능검 강의입니다.

1864.1.21 ~ 1873.12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고종을 왕으로 만들었을까

tvN D ENT · 74만회 · 2: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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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집권 과정과 정책을 길게 다룬 벌거벗은 한국사입니다.

1864.1.21 ~ 1873.12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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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대전회통』 편찬 →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2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영화 · 2018· 공식 영상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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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40 ~ 1868.5

흥선대원군(이하응)과 세도 가문 장동 김씨가 왕이 날 명당을 두고 다투는 이야기. 남연군 묘 이장이 소재(창작 섞임)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명당 가이드 리뷰 by 발없는새

발없는새 · 4.7만회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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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사건 연표 4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비변사 축소·폐지와 의정부 기능 회복 (~1865)

  1. 1865

    정치

    『대전회통』 편찬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들을 하나로 정리한 조선의 마지막 통일 법전입니다. 2년 뒤에는 행정 규정을 모은 『육전조례』(1867)를 펴냈습니다.

    배경

    조선의 기본 법전은 1485년 완성된 『경국대전』입니다. 이후 새 법이 생길 때마다 『속대전』(1746), 『대전통편』(1785) 같은 법전이 덧붙여졌고, 그 뒤 80년 동안 나온 왕명과 규정은 따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법이 지금 유효한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법전을 새로 모을 때마다 앞 법전을 없애지 않고 덧붙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같은 일을 두고 여러 법전의 규정이 엇갈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관리들은 판결이나 행정을 할 때 여러 책을 함께 뒤져야 했고, 이 틈을 타 아전들이 유리한 규정만 골라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개

    흥선대원군은 법과 제도를 정비해 국가 기강을 세우려 했습니다. 1865년 조두순·김병학 등이 주관해 『대전통편』 이후의 법령을 보태 『대전회통』을 완성했습니다. 이·호·예·병·형·공의 육전 체제는 그대로 두고, 각 조문에 옛 법전과 새로 바뀐 내용을 함께 실었습니다.

    1867년에는 각 관청의 실무 규정을 모은 『육전조례』를 펴내 법전을 보완했습니다.

    『대전회통』은 조문마다 출처를 표시했습니다. 『경국대전』 조문은 ‘원(原)’, 『속대전』은 ‘속(續)’, 『대전통편』은 ‘증(增)’, 새로 더한 내용은 ‘보(補)’라고 적어, 한 조문이 언제 생기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전회통』은 조선의 마지막 통일 법전이 됐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식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기본 법전으로 쓰였습니다. 비변사 폐지, 삼군부 부활과 함께 대원군의 국가 체제 정비를 보여 주는 사업입니다.

    갑오개혁 뒤에도 새 법령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에서는 한동안 『대전회통』의 규정이 참고됐습니다. 오늘날에는 조선 400여 년 법제의 변화를 한 권에서 추적할 수 있는 자료로 연구에 널리 쓰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485년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이 완성됐습니다.
    2. 1746년영조 때 이후의 법령을 모은 『속대전』이 나왔습니다.
    3. 1785년정조 때 두 법전을 합치고 새 법을 더한 『대전통편』이 나왔습니다.
    4. 1865년『대전통편』 이후 80년 동안의 법령을 보태 『대전회통』을 완성했습니다.
    5. 1867년관청별 실무 규정을 모은 『육전조례』를 펴냈습니다.
    6. 1894년갑오개혁으로 근대식 관제와 법령이 도입되면서 『대전회통』 체제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인물

    • 조두순1796~1870

      영의정으로 『대전회통』 편찬을 총괄했습니다.

      양주 조씨 출신의 문신으로, 철종 때부터 정승을 지냈고 대원군 집권 초기 영의정으로 대원군의 제도 정비를 뒷받침했습니다.

    • 김병학1821~1879

      좌의정으로 편찬을 함께 주관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 출신이지만 대원군과 가까워 집권기 내내 요직을 지냈습니다. 대원군이 세도 가문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일부를 끌어안았음을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더 알아두기

    회통(會通)이란
    ‘모아서 두루 통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 시기의 법전을 한 권에 모아 서로 맞춰 볼 수 있게 했다는 의미가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조선의 법전

    해설·교양 · 강의

    한국 전통문화 산책 제5강 — 대전회통

    울산연구원 평생교육연구실 · 131회 ·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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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대전회통의 규정 내용을 살피는 지역 강좌라 편찬 경위는 적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흥선대원군 암기법 (대전회통, 비변사 폐지 등)

    스타강사 김민 · 997회 ·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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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흥선대원군 정책 전반의 암기법 강의로 대전회통은 한 항목입니다.

  2. 정치

    만동묘 철폐

    명나라 황제를 제사하며 노론 세력의 근거지 노릇을 하던 충청도 화양동 만동묘를 없앴습니다. 서원 정리의 시작이었고 유생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배경

    만동묘는 1704년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 세워진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을 제사했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뜻에 따라 그 제자 권상하 등이 세웠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뒤에도 명을 섬기는 의리를 지킨다는 상징이 되면서 만동묘와 옆의 화양서원은 노론 유생들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화양서원은 제사 비용을 명목으로 ‘묵패’라는 문서를 보내 지방민과 관청에 돈과 물자를 요구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불러다 벌을 주기도 해 원성이 컸습니다.

    ‘만동’이라는 이름은 황하가 만 번 꺾여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습니다. 명에 대한 의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같은 해 숙종은 창덕궁 후원에 명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세워 나라 차원의 제사도 시작했습니다.

    전개

    흥선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의 제사를 중단시키고 철폐했습니다. 명 황제의 제사는 궁궐 안의 대보단에서 지내고 있으니 따로 지낼 필요가 없다는 명분이었습니다.

    만동묘 철폐는 서원 정리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원군은 이어 서원이 가진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며 단계적으로 정리를 넓혀 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가장 영향력 있던 노론 근거지를 먼저 없앤 이 조치는 이후 전국적인 서원 정리로 이어졌습니다. 유생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대원군이 물러난 뒤인 1874년 만동묘는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제사가 금지되고 건물이 헐렸습니다.

    만동묘 철폐는 대원군과 노론 유생 사이의 갈등이 처음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화양동은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구곡 계곡으로, 남아 있던 터를 바탕으로 근래에 만동묘와 화양서원 건물이 복원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689년송시열이 사약을 받기 전 명 황제를 제사할 사당을 세우라는 뜻을 제자들에게 남겼습니다.
    2. 1695년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이 화양동에 세워졌습니다.
    3. 1704년권상하 등이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습니다. 같은 해 창덕궁 후원에는 대보단이 세워졌습니다.
    4. 18~19세기만동묘와 화양서원이 노론 유생의 중심지가 되고, 묵패로 돈과 물자를 거둬 원성을 샀습니다.
    5. 1865년흥선대원군이 만동묘 제사를 중단시키고 철폐했습니다.
    6. 1871년화양서원을 비롯해 47곳을 뺀 전국 서원이 정리됐습니다.
    7. 1874년대원군이 물러난 뒤 유생들의 요구로 만동묘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인물

    • 송시열1607~1689

      만동묘 건립의 뜻을 남긴 노론의 영수입니다.

      17세기 조선 성리학과 정치를 이끈 인물로, 명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복수를 주장했습니다. 예송 논쟁 등으로 남인과 대립했고 1689년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가 은거한 화양동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세워졌습니다.

    • 권상하1641~1721

      스승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만동묘를 세웠습니다.

      송시열의 대표적인 제자로 노론 학맥을 이었습니다. 충청도 청풍 일대에서 학문을 가르쳤고, 그의 문하에서 호락논쟁을 벌인 한원진·이간 등이 나왔습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만동묘의 제사를 중단시키고 철폐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집권기에 노론 세력과 서원의 특권을 줄이는 정책을 폈습니다. 젊은 시절 화양동에서 모욕을 당해 만동묘를 미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더 알아두기

    화양동 묵패
    화양서원이 검은 도장을 찍어 보낸 통지서를 말합니다. 제사에 필요하다며 돈이나 곡식을 바치라는 내용이었고, 수령도 함부로 거절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서원이 향촌을 괴롭힌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서원

    해설·교양 · 다큐

    [UHD] 우암 송시열과 화양구곡(만동묘가 있던 곳)

    국가유산채널 · 1.6만회 ·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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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0% · 간접 관련추천 ★★★★★

    송시열과 화양구곡 풍경을 소개하는 영상이라 만동묘 철폐는 다루지 않습니다.

  3. 정치

    경복궁 중건

    1865 ~ 1868 · 3년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여 년 비어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었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는 사업이었지만 비용과 노동력 부담이 백성에게 돌아갔습니다.

    • 공사비를 대려고 원납전을 거두고, 실제 가치보다 액면이 훨씬 큰 당백전을 찍어 물가가 크게 올랐습니다.
    • 도성 문을 지나는 사람에게 통행세를 받고 백성을 공사에 동원했습니다.

    배경

    경복궁은 1395년 조선을 세운 태조가 지은 법궁(으뜸 궁궐)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뒤로 왕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을 쓰며 경복궁을 다시 짓지 못했습니다. 공사 규모가 너무 커서 여러 차례 논의만 되다 그쳤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면 조선 건국의 상징인 경복궁을 되살려야 한다고 봤습니다. 1865년 음력 4월 신정왕후의 명으로 공사를 맡을 영건도감이 설치됐습니다.

    전개

    공사는 1865년 시작돼 1868년 음력 7월 고종이 새 궁궐로 옮길 때까지 이어졌습니다(세부 공사는 그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처음에는 왕실 친척과 관리들이 원납전을 내고 백성도 자원해 일손을 보태면서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1866년 음력 3월 공사장에 큰불이 나 모아 둔 목재가 타 버리면서 비용이 크게 늘었습니다. 조정은 원납전을 사실상 강제로 걷고, 논밭 1결마다 세금을 더 매기는 결두전, 도성 문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받는 통행세(문세)를 거뒀습니다. 목재를 구하려고 전국의 큰 나무와 양반 집안 묘지의 나무까지 베어 왔고, 1866년 말에는 당백전을 찍었습니다.

    공사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지휘하는 영건도감이 맡았고, 전국에서 목수·석수 같은 장인과 일꾼이 올라왔습니다. 1867년 말 근정전·경회루·강녕전·교태전 등 주요 전각이 모습을 갖췄고, 고종이 옮겨 온 뒤에도 공사는 이어져 영건도감은 1872년에야 해산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근정전·경회루·강녕전 등 수백 동의 건물을 갖춘 궁궐이 다시 섰습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가장 큰 국가 사업이었고 왕실의 권위를 눈으로 보여 주는 결과물이 됐습니다.

    그 대가로 나라 재정이 고갈되고 물가가 크게 올랐으며 양반과 백성 모두의 불만이 쌓였습니다.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을 비판할 때 원납전·당백전 문제를 앞세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592년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탔습니다. 이후 270여 년 동안 궁궐 터로만 남았습니다.
    2. 1865년 4월(음력)신정왕후의 명으로 영건도감이 설치되고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원납전 모금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3. 1866년 3월(음력)공사장에 큰불이 나 쌓아 둔 목재가 타 버렸습니다. 이후 목재를 구하려 전국의 큰 나무를 베어 왔습니다.
    4. 1866년 11월(음력)모자란 재원을 메우려고 당백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5. 1867년근정전·경회루 등 주요 전각이 완성됐습니다.
    6. 1868년 7월(음력)고종이 창덕궁에서 새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7. 1872년남은 공사를 마무리하고 영건도감을 해산했습니다.
    8. 1873년 11월(음력)최익현이 상소에서 원납전·당백전 등 중건 과정의 부담을 비판했고, 대원군이 물러났습니다.

    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경복궁 중건을 주도했습니다.

      고종 즉위 뒤 10년 동안 정치를 이끈 고종의 아버지입니다. 왕실의 권위 회복을 가장 앞에 둔 정책 방향이 경복궁 중건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 신정왕후 조씨(조대비)1808~1890

      수렴청정 중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영건도감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고종을 후계로 정한 대왕대비입니다. 중건 결정은 그의 이름으로 내려졌고, 새 궁궐에는 그가 머물 자경전이 지어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경복궁 중건은 필요한 사업이었나

    왕권 회복을 위한 상징 사업으로 보는 쪽

    세도 정치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 국가의 구심점을 세우려면 법궁 복원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270여 년 폐허로 남은 궁궐을 되살려 오늘날까지 남는 문화유산을 만들었다는 점도 평가합니다.

    시기와 방식을 문제 삼는 쪽

    서양 세력이 다가오고 재정이 어려운 때에 막대한 돈과 노동력을 궁궐 공사에 쏟아부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강제 모금과 악화 발행으로 민생과 경제를 흔들었고, 대원군이 민심을 잃는 가장 큰 원인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의 경복궁
    대원군이 다시 지은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고 앞쪽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습니다. 1990년부터 복원 사업이 진행돼 총독부 건물은 1995~1996년 철거됐고 지금도 복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역사의 강 · 3.1만회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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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경복궁 중건 과정을 짧게 설명하는 해설로 중건 사건에 더 맞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흥선 대원군, 역사 노래, 중3 역사, 경복궁 중건, 병인양요 I 열공뮤직

    열공뮤직 · 12.8만회 ·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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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흥선대원군 정책을 노래로 외우게 하는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다큐온] 복원 30년을 맞은 2021년!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이 다시 서기까지 (KBS 210604 방송)

    KBS 다큐 · 85.2만회 · 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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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현대의 경복궁 복원 사업을 다루고 고종 때 중건은 배경으로만 나옵니다.

    해설·교양 · 예능

    경복궁은 명작이다? 우리가 몰랐던 경복궁의 재밌는 디테일들! | #벌거벗은한국사 유홍준의 궁궐 투어 1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 150만회 · 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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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경복궁 건축의 디테일을 소개하고 대원군 중건은 잠깐 나옵니다.

  4. 5월

    경제음력 4월

    경복궁 중건 착공과 원납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시작하며 '스스로 원해서 내는 돈'이라는 뜻의 원납전을 거뒀습니다. 이름과 달리 사실상 강제로 걷어 원성이 컸습니다.

    배경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지만 나라 창고는 비어 있었습니다. 조정은 세금을 새로 매기는 대신 백성과 관리가 스스로 돈을 내게 하는 방식을 먼저 택했습니다.

    1865년 음력 4월 초 신정왕후가 경복궁을 다시 짓겠다는 뜻을 밝히자 대신들 사이에서 비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공사는 곧바로 결정됐습니다. 조정은 공사를 맡을 기관으로 영건도감을 두고 흥선대원군이 이를 직접 이끌게 했습니다.

    전개

    1865년 음력 4월 공사를 맡을 영건도감이 설치되고 착공과 함께 원납전 모금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왕실 종친과 고위 관리들이 앞장서 돈을 냈고, 많이 낸 사람에게는 벼슬이나 상을 줬습니다.

    공사가 길어지고 1866년 화재로 비용이 늘자 모금은 점점 강제로 바뀌었습니다. 지방관이 할당액을 채우려고 부유한 백성에게 돈을 내라고 압박했고, 돈을 내고 벼슬을 얻는 사례가 늘면서 매관매직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일손은 처음에 각 지방에서 스스로 올라온 백성과 한양 주민이 보탰고, 이들이 일하며 부른 노래가 오늘날 경기 민요 ‘경복궁 타령’으로 전해진다고 봅니다. 공사가 길어지자 자원 부역만으로는 모자라 지방마다 일꾼을 할당해 올려 보내게 했습니다.

    원납전만으로 비용을 대기 어려워지자 조정은 논밭 1결마다 세금을 더 걷는 결두전, 도성 문을 드나드는 사람과 물건에 매기는 문세를 새로 거뒀습니다. 원납전으로 모인 돈은 수백만 냥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결과와 의미

    원납전은 공사비의 큰 몫을 댔지만, 이름과 실제가 다르다는 뜻으로 ‘원망하며 내는 돈(怨納錢)’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에서도 원납전은 대원군 정치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꼽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5년 4월(음력)신정왕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영건도감이 설치됐습니다. 곧바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2. 1865년 봄~여름왕실 종친과 고위 관리들이 앞장서 원납전을 냈고, 많이 낸 사람에게 벼슬과 상을 줬습니다.
    3. 1866년 3월(음력)공사장 화재로 목재가 불타 비용이 크게 늘었습니다.
    4. 1866년원납전 모금이 할당과 강요로 바뀌고, 결두전·문세 같은 새 세금이 더해졌습니다.
    5. 1873년 11월(음력)최익현이 상소에서 원납전을 대원군 정치의 폐단으로 들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을축 4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했네.”
    — 경기 민요 ‘경복궁 타령’(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록 가사)을축년은 공사를 시작한 1865년입니다. 흔히 쓰는 ‘갑자 을축’을 ‘을축 갑자’로 뒤집어 부른 것이 공사가 거꾸로 됐다는 불만을 담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영건도감을 이끌며 원납전 모금과 공사를 지휘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1864~1873년 실권을 쥐었습니다. 경복궁 중건을 왕실 권위 회복의 상징으로 여겨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더 알아두기

    원납전이란
    ‘스스로 원해서 바치는 돈(願納錢)’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기부금이었지만 실제로는 할당과 강요가 따랐습니다. 같은 발음을 빌려 ‘원망하며 내는 돈’이라고 비꼬는 말이 퍼졌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한국사 능력 시험 필수 문제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의 시행 목적은?! 경복궁 중건의 비밀

    디글 :Diggle · 2.2만회 ·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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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중건의 목적과 원납전 징수를 다룬 벌거벗은 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사저널 그날 뒷담화 — 경복궁 중건의 비밀, 원납전과 당백전

    KBS 교양 · 5,262회 ·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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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당백전 발행을 다룬 짧은 뒷이야기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조선 왕조의 대표 궁궐 경복궁 (역사만화 48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8.3만회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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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궁궐 자체를 소개하고 대원군 중건은 거의 안 나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의 구조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 5.6만회 ·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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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25% · 간접 관련추천 ★★★★★

    경복궁 건물 구조 소개로 중건 사업과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조선의 법전

조선을 다스리는 기본 법을 모은 책들입니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1485)이 기본 법전이었고, 그 뒤 『속대전』(영조), 『대전통편』(정조)으로 보완됐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모두 정리해 조선의 마지막 통일 법전 『대전회통』(1865)을 펴냈습니다.

다큐

KBS HD역사스페셜 – 사형수는 왕에게 보고하라, 경국대전 / KBS 20060505 방송

KBS 히스토리 · 18.5만회 · 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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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한국사 시간여행 - 다시 고쳐지지 않을 법전, 경국대전(상)_#001

EBS 키즈 · 14.9만회 ·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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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선현의 제사를 지내고 유학을 가르치던 조선의 사립 교육 기관입니다.

1543년 백운동 서원을 시작으로 전국에 세워져 지방 양반의 교육과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됐습니다. 왕이 이름을 내려 준 사액 서원은 토지와 노비를 받고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19세기에는 수백 곳으로 늘어나 면세 특권으로 나라 재정을 줄이고 붕당의 근거지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71년 47곳만 남기고 정리했습니다.

도산 서원·옥산 서원 등 9곳은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됐습니다.

다큐

당쟁과 비리 이전 서원의 '진짜' 모습 (SUB)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25.9만회 ·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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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200초로 즐기는 한국의 유네스코 등재유산] 성리학 전파의 뿌리, 한국의 서원

문화포털 · 3.4만회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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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소수서원 1부 조선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을 가다

국가유산채널(K-Heritage Channel) · 4.6만회 ·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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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