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제2공화국

제2공화국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내각 책임제 헌법 아래 장면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억눌렸던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시기였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9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기간
1960.4.27 ~ 1961.5.15 · 1년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윤보선 · 국무총리 장면
담긴 것
사건 6 · 영상 26 · 영화·드라마 8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8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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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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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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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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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4· 공식 영상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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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0.12.15 ~ 1983.11.14

흥남 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까지 한 사람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황정민 주연 천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 비하인드 스토리, 옥에 티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50만회 ·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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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24· 공식 영상

「정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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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6 ~ 1960

tvN. 1950년대 여성 국극 배우를 꿈꾸는 소녀

드라마 · 2011· 제목만

「빛과 그림자」

배경 1960 ~ 1980

MBC. 1960~70년대 쇼 비즈니스와 정치 이야기

드라마 · 2008· 공식 영상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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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0 ~ 1990

MBC. 탄광촌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형제의 운명

영화 · 2004· 제목만

「효자동 이발사」

배경 1960 ~ 1979.10.26

청와대 이발사의 눈으로 본 권위주의 시대를 풍자

사건 연표 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원조 경제와 삼백 산업 (~1960)

  1. 1960

    4.27

    정치

    허정 과도 정부

    1960.4.27 ~ 1960.8 · 4개월

    외무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과도 정부를 이끌며 새 헌법과 총선을 준비했습니다.

    배경

    1960년 4·19 혁명으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고 다음 날 사임서를 국회에 냈습니다. 3·15 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4월 28일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었습니다. 부통령 자리까지 비면서 헌법에 따라 수석 국무 위원인 외무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습니다. 허정은 이승만이 물러나기 직전인 4월 25일 무렵 외무 장관에 임명돼 있었습니다.

    전개

    허정 과도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새 헌법과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질서를 지키고 선거를 관리하는 데 두었습니다. 이를 두고 허정은 ‘혁명적 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한다’는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국회는 6월 15일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허정은 새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이후 대통령 권한 대행은 잠시 민의원 의장 곽상훈이 맡았다가 6월 23일 다시 허정에게 돌아왔습니다.

    과도 정부는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 선거를 치렀고, 8월 12일 국회가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8월 19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으면서 약 넉 달의 과도기가 끝났습니다. 이승만은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났고 1965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짧은 기간이었지만 헌정 질서가 무너지지 않은 채 권력이 넘어가도록 관리했습니다. 반면 부정 선거 관련자와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 축재 환수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문제는 뒤이은 장면 정부의 부담으로 넘어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4월 19일서울 도심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했고, 오후에 서울 등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2. 1960년 4월 25일대학 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거리 행진에 나섰습니다. 이 무렵 허정이 외무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3. 1960년 4월 26일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냈고, 국회는 3·15 선거를 무효로 하고 내각 책임제로 개헌한 뒤 총선을 치르자는 시국 수습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4. 1960년 4월 27일이승만이 사임서를 국회에 내면서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습니다.
    5. 1960년 4월 28일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 안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6. 1960년 5월 29일이승만이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7. 1960년 6월 15일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해 공포됐고, 허정은 새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8. 1960년 7월 29일과도 정부가 관리한 민의원·참의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9. 1960년 8월 19일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으면서 과도 정부의 역할이 사실상 끝났습니다.

    인물

    • 허정1896~1988

      외무 장관으로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며 과도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부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독립운동 단체 활동을 했고 광복 후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사회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서울 시장 등을 지냈습니다. 5·16 뒤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63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야권 단일화에 힘을 보탰습니다.

    • 이승만1875~1965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이튿날 사임서를 국회에 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제3대 대통령입니다. 3·15 부정 선거와 4·19 혁명으로 물러난 뒤 1960년 5월 하와이로 건너갔고, 1965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곽상훈

      민의원 의장으로서 1960년 6월 잠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습니다.

      제헌 국회 의원 출신 정치인입니다. 4·19 직후 민의원 의장에 올랐고, 새 헌법 공포 뒤 허정이 국무총리가 되는 사이 짧게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과도 정부의 ‘비혁명적 방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안정적 관리를 평가하는 쪽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군이나 특정 세력이 권력을 잡지 않고 헌법 절차에 따라 개헌과 총선을 치러 권력을 넘겼다는 점을 높이 봅니다. 과도 정부가 처벌까지 밀어붙였다면 법적 근거 없는 보복이 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개혁의 지연을 비판하는 쪽

    이승만 정부의 각료였던 인물이 과도 정부를 맡아 부정 선거 책임자 처벌과 부정 축재 환수를 미뤘고, 그 결과 혁명의 요구가 제도로 이어지지 못하고 뒤에 소급 입법이라는 무리한 방식이 필요해졌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대통령 권한 대행이란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헌법이 정한 순서에 따라 다른 사람이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것입니다. 1960년 당시에는 부통령, 그다음 국무 위원 순서였는데 부통령 자리가 비어 수석 국무 위원인 외무 장관이 맡았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51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허정 과도정부 출범

    KBS 히스토리 · 7,161회 ·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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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이승만 하야와 허정 과도 정부 출범을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63호-과도내각구성

    KTV 아카이브 · 4,614회 ·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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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60년 허정 과도 내각 구성을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52 이승만의 망명과 내각제개헌안 국회통과

    KBS 히스토리 · 2,735회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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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영상한국사에서 과도 정부 시기 망명과 개헌안 통과를 다룹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64호-허 장관 기자회견

    KTV 아카이브 · 1,997회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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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과도 정부를 이끈 허정 장관의 기자 회견을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4월 28일] "허정 과도정부 출범" / "유진산 신민당 총재 별세" | 오늘의 의정사 | 국회방송

    NATV 국회방송 · 1,645회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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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국회방송 오늘의 의정사에서 과도 정부 출범을 짧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이승만 하야 후 대한민국 1편(허정과도정부)

    낭천 · 1,399회 ·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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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허정 과도 정부를 짧게 정리한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2. 5월

    운동

    사회 운동과 통일 운동의 분출

    1960.5 ~ 1961.5 · 1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교원 노조가 결성되고,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 학생 회담을 추진했습니다.

    배경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는 반공을 이유로 노동 운동, 교사 단체, 통일 논의가 크게 제한됐습니다. 1958년에는 평화 통일론을 내건 진보당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됐습니다(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4·19 혁명으로 이런 제약이 풀리자 오래 억눌렸던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전개

    1960년 5월 초·중등 교사들이 교원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전국 조직으로 커졌습니다. 은행·언론 등 여러 분야에서 노동조합이 새로 생겼고, 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유족회를 만들어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학생들은 관제 학생 조직을 없애고 부정 축재자 처벌,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통일 논의도 활발해졌습니다. 7·29 총선에 나선 혁신 정당들과 여러 단체가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을 내놓았고, 1960년 9월 민족 자주 통일 중앙 협의회(민자통)가 결성됐습니다. 11월 서울대 학생들이 민족 통일 연맹을 만든 뒤 여러 대학으로 퍼졌고, 1961년 5월에는 남북 학생 회담을 제안하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장면 정부는 시위를 규제하는 법과 반공 임시 특별법을 추진했으나, 혁신계와 학생들이 ‘2대 악법’이라 부르며 반대 시위를 벌여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주당 정부는 질서 회복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5·16 군사 정변 세력은 이 시기의 혼란과 급진적 통일 운동을 정변의 명분으로 들었고, 정변 직후 교원 노조와 혁신계·통일 운동 관계자 다수가 구속됐습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1961년 사형됐다가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5월대구 등지의 초·중등 교사들이 교원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해 곧 전국 조직으로 커졌습니다.
    2. 1960년 여름여러 지역에서 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회가 만들어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3. 1960년 7월 29일총선에 나선 혁신 정당들이 민의원에서 한 자릿수 의석에 그쳤습니다.
    4. 1960년 9월혁신계와 사회단체가 민족 자주 통일 중앙 협의회(민자통)를 결성했습니다.
    5. 1960년 11월서울대 학생들이 민족 통일 연맹을 만들었고 다른 대학으로 퍼졌습니다.
    6. 1961년 2월혁신계 논조의 민족일보가 창간됐습니다.
    7. 1961년 3월반공 임시 특별법과 시위 규제법을 ‘2대 악법’이라 부르며 반대하는 시위가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벌어졌습니다.
    8. 1961년 5월학생 단체들이 남북 학생 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9. 1961년 5월 16일 이후군사 정변 직후 교원 노조, 혁신계, 통일 운동 관계자가 대거 구속됐고 민족일보는 폐간됐습니다.
    10. 1961년 12월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형이 집행됐습니다.
    11. 2008년 1월조용수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 남북 학생 회담을 제안한 학생들의 구호(1961)

    인물

    • 조용수1930~1961

      민족일보를 창간해 혁신계의 통일 논의를 실었다가 정변 뒤 사형됐습니다.

      일본에서 재일 동포 사회 활동을 하다 귀국해 1960년 총선에 혁신계 후보로 나섰습니다. 1961년 민족일보 사장으로 신문을 냈으나 5·16 직후 체포돼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처형됐습니다. 2008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60~1961년의 운동 분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보는 쪽

    억압됐던 노동·교육·통일 논의가 합법적 공간에서 드러난 것은 민주주의가 넓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시위의 혼란은 과장됐으며 이를 군사 정변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사회 불안을 강조하는 쪽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진 시위와 급진적인 통일 구호가 분단과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사회에 큰 불안을 줬고, 정부가 이를 수습하지 못해 정치적 불안정이 깊어졌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혁신계란
    당시 사회 민주주의나 평화 통일을 내세운 정치 세력을 통틀어 부르던 말입니다. 사회 대중당, 한국 사회당 등이 있었지만 7·29 총선에서는 의석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3. 6.15

    정치

    제3차 개헌(내각 책임제)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 원수로, 실권은 국무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갖는 내각 책임제와 민의원·참의원 양원제로 바꿨습니다.

    배경

    4·19 혁명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려 장기 집권과 부정 선거로 이어졌다는 반성을 낳았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내각 책임제를 주장해 왔고, 혁명 뒤 국회에서도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이 대세가 됐습니다.

    전개

    국회는 1960년 6월 15일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같은 날 공포됐습니다. 대통령은 국회 양원 합동 회의에서 뽑는 임기 5년의 상징적 국가 원수가 되고, 행정권은 민의원의 신임을 받는 국무총리와 국무원이 맡게 됐습니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운영됐습니다.

    기본권 보장도 강화됐습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금지했고, 헌법 재판소를 두도록 했으며, 중앙 선거 위원회를 헌법 기관으로 만들고 경찰의 정치적 중립 규정을 넣었습니다. 지방 자치 단체장을 주민이 뽑도록 한 것도 이때입니다.

    개헌안은 4월 26일 국회의 시국 수습 결의에 따라 국회가 구성한 헌법 개정 기초 위원회가 만들었습니다. 6월 15일 민의원 표결에서는 재석 211명 가운데 208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했습니다. 발췌 개헌(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이 절차 논란을 남긴 것과 달리, 이 개헌은 헌법이 정한 절차를 지켜 이뤄진 첫 개헌으로 꼽힙니다.

    국회 구성도 자세히 정했습니다. 민의원은 임기 4년으로 소선거구에서 뽑고, 참의원은 임기 6년으로 도 단위에서 뽑되 3년마다 절반을 새로 뽑게 했습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해 민의원의 동의를 받도록 했고,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한 선거인단이 뽑도록 해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헌법 재판소는 대통령·대법원·참의원이 각각 3명씩 고른 심판관 9명으로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헌법에 따라 7·29 총선이 치러지고 제2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다만 헌법 재판소는 법률이 만들어지고 재판관 구성이 진행되던 중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실제로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국회는 1960년 11월 한 차례 더 헌법을 고쳐 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 근거를 넣었고(제4차 개헌), 헌법 재판소법은 1961년 4월에야 공포됐습니다. 5·16 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는 1961년 6월 국가 재건 비상 조치법을 공포해 이 헌법의 여러 조항 효력을 멈췄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4월 26일이승만 하야 성명 당일 국회가 내각 책임제 개헌과 총선 실시를 결의했습니다.
    2. 1960년 5월국회 헌법 개정 기초 위원회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마련해 공고했습니다.
    3. 1960년 6월 15일민의원이 재석 211명 중 찬성 208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같은 날 공포됐습니다.
    4. 1960년 7월 29일새 헌법에 따라 민의원·참의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5. 1960년 8월 12일양원 합동 회의가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6. 1960년 11월 29일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 근거를 넣은 제4차 개헌이 공포됐습니다.
    7. 1961년 4월헌법 재판소법이 공포됐지만 재판소 구성은 끝나지 못했습니다.
    8. 1961년 6월 6일군사 정부가 국가 재건 비상 조치법을 공포해 헌법의 여러 조항 효력이 멈췄습니다.

    더 알아두기

    내각 책임제(의원 내각제)란
    국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해 행정을 맡고, 국회가 불신임하면 내각이 물러나는 제도입니다. 영국·일본·독일 등이 쓰고 있습니다. 한국 헌정사에서 내각 책임제가 시행된 것은 제2공화국 시기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69호-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

    KTV 아카이브 · 2,279회 ·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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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60년 국회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55 제2공화국 출범과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

    KBS 히스토리 · 1.3만회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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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제2공화국 출범과 민주당 갈등이 중심이고 3차 개헌은 배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 제2공화국 ] 대한민국 선거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2,419회 ·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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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제2공화국 선거 제도를 설명하며 내각 책임제 개헌은 일부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1분으로 요약하는 대한민국 헌법개정사 - 3차 개헌

    신동욱헌법 · 1,056회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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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헌법 강사가 3차 개헌 내용을 1분으로 요약합니다.

  4. 7.29

    정치

    7·29 총선거

    민주당이 압승했습니다. 국회는 8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배경

    제3차 개헌으로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을 새로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여당이던 자유당은 4·19 이후 사실상 무너졌고, 야당이던 민주당이 가장 유력한 정당이었습니다.

    전개

    1960년 7월 29일 민의원(233석)과 참의원(58석) 선거가 함께 치러졌습니다. 민주당은 민의원 175석, 참의원 31석을 얻어 크게 이겼습니다. 사회 대중당 등 혁신 정당은 민의원에서 한 자릿수 의석에 그쳤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함 소각 등 선거 관련 소동이 일어나 재선거를 치렀습니다.

    8월 12일 양원 합동 회의에서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에 뽑혔습니다. 윤보선은 같은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지만 민의원 인준에서 부결됐고, 두 번째로 지명된 신파의 장면이 8월 19일 인준을 받았습니다.

    투표율은 84% 안팎이었습니다. 민의원에서 민주당 다음으로 많은 의석을 얻은 것은 무소속(49석)이었고, 사회 대중당 4석, 자유당 2석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참의원에서는 민주당 31석, 무소속 20석이었습니다.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에는 민주당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과 옛 자유당 출신이 적지 않았습니다.

    총리 인준은 표 몇 장 차이로 갈렸습니다. 윤보선은 8월 16일 김도연을 지명했으나 이튿날 민의원 표결에서 111표로 과반(114표)에 3표가 모자라 부결됐습니다. 8월 18일 다시 지명된 장면은 19일 표결에서 117표를 얻어 과반(115표)을 겨우 넘겼습니다. 무소속 의원들의 표를 어느 쪽이 더 끌어오느냐가 승부를 갈랐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주당이 권력을 잡았지만, 총리 인준 과정에서 신파와 구파가 정면으로 맞서면서 당이 둘로 나뉘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 구파는 이후 따로 신민당을 만들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7월 29일민의원 233석, 참의원 58석을 뽑는 선거가 전국에서 함께 치러졌습니다.
    2. 1960년 8월 12일양원 합동 회의에서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에 뽑혔습니다.
    3. 1960년 8월 16일윤보선 대통령이 같은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습니다.
    4. 1960년 8월 17일김도연 인준안이 111표를 얻는 데 그쳐 과반에 3표가 모자라 부결됐습니다.
    5. 1960년 8월 19일두 번째로 지명된 신파 장면이 117표로 인준을 받았습니다.
    6. 1960년 8월 23일장면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7. 1961년 2월구파가 민주당을 떠나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인물

    • 윤보선1897~1990

      양원 합동 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뽑혔습니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공부했고, 광복 후 서울 시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민주당 구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5·16 뒤 1962년 대통령에서 물러났고, 1963년과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야당 후보로 나서 박정희에게 졌습니다.

    • 김도연1894~1967

      구파 몫의 첫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됐으나 민의원 인준에서 3표 차로 부결됐습니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고, 광복 후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인준이 부결된 뒤 구파를 이끌고 신민당을 만들었습니다.

    • 장면1899~1966

      두 번째 총리 후보로 지명돼 117표로 인준을 받았습니다.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인준 뒤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민주당 신파와 구파
    구파는 1955년 민주당 창당 때 한국 민주당 계열에서 온 사람들(윤보선·김도연 등)이고, 신파는 자유당 탈당파·관료 출신 등 뒤에 합류한 사람들(장면 등)입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함께 싸웠지만 집권이 가까워지자 자리를 두고 크게 부딪혔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74호-7.29 총선거

    KTV 아카이브 · 138회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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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7·29 총선거 투표 모습을 찍은 1960년 대한뉴스 원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71호-7.29 총선거를 앞두고

    KTV 아카이브 · 59회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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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을 앞둔 1960년 대한뉴스 원본입니다.

  5. 8.23

    정치

    장면 내각 출범

    1960.8.23 ~ 1961.5.18 · 8개월

    민주당 장면이 국무총리가 돼 내각을 꾸렸습니다.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지방 자치를 확대했지만, 민주당 안의 신파와 구파 갈등이 심했습니다.

    배경

    7·29 총선에서 이긴 민주당은 신파의 장면을 국무총리로 세웠습니다. 장면 내각은 4·19 혁명의 요구(부정 선거 처벌, 민주화)와 전후의 빈곤 문제(실업, 식량난)를 함께 풀어야 했습니다.

    전개

    1960년 8월 23일 출범한 장면 내각은 ‘경제 제일주의’를 내걸었습니다. 실업자를 공공 토목 사업에 고용하는 국토 건설 사업을 시작했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안을 마련했습니다. 12월에는 서울 시장·도지사와 시·읍·면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는 지방 선거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불안했습니다. 구파는 1960년 10월 무렵 따로 교섭 단체를 만들고 1961년 2월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장면 내각은 약 9개월 동안 여러 차례 개각했고, 거의 매일 이어지는 시위와 부정 선거 처벌을 둘러싼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 몸을 숨겼다가 5월 18일 나와서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습니다.

    지방 자치도 크게 넓혔습니다. 1960년 11월 지방 자치법을 고쳐 12월 12일 서울시·도 의회 의원, 19일 시·읍·면 의회 의원, 26일 시·읍·면장, 29일 서울 시장·도지사 선거를 차례로 치렀습니다. 한 달 사이 선거가 네 번 이어지면서 투표율은 계속 떨어져 마지막 서울 시장 선거는 40%에 못 미쳤습니다.

    경제 정책에서도 논란이 컸습니다. 1961년 2월 미국과 맺은 한미 경제 기술 원조 협정은 원조 사용에 대한 미국의 감독을 넓혔다는 이유로 혁신계와 학생들의 반대 시위를 불렀습니다. 같은 해 봄 시작한 국토 건설 사업에는 대학 졸업자 2천여 명을 공개 채용해 국토 건설 요원으로 현장에 보냈습니다.

    결과와 의미

    제2공화국은 9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장면 내각이 준비한 경제 개발 계획은 군사 정부가 이어받아 수정한 뒤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행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8월 19일장면이 민의원에서 117표로 국무총리 인준을 받았습니다.
    2. 1960년 8월 23일장면 내각이 출범하고 ‘경제 제일주의’를 내걸었습니다.
    3. 1960년 10월 무렵민주당 구파가 따로 교섭 단체를 만들어 여당이 사실상 둘로 나뉘었습니다.
    4. 1960년 11월 29일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을 위한 제4차 개헌이 공포됐습니다.
    5. 1960년 12월서울 시장·도지사와 시·읍·면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는 지방 선거가 네 차례 치러졌습니다.
    6. 1961년 2월한미 경제 기술 원조 협정이 체결됐고,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7. 1961년 3월시위 규제법·반공 임시 특별법 추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8. 1961년 5월 16일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장면 총리는 서울 혜화동의 수녀원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9. 1961년 5월 18일장면이 모습을 드러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습니다.

    인물

    • 장면1899~1966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서울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교육자로 일하다 광복 후 제헌 국회 의원, 초대 주미 대사,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1956년 부통령에 당선돼 이승만 정부와 맞섰습니다. 5·16 이후 정치 활동이 금지됐고 196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윤보선1897~1990

      대통령으로서 구파를 이끌며 장면 내각과 자주 맞섰고, 5·16 때는 진압 병력 동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실권은 없었지만 구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정변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 1962년 3월 물러났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장면 정부는 무능했나

    통치 실패를 강조하는 쪽

    당내 분열로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고, 시위와 치안 불안에 대처하지 못했으며, 군 내부의 불만과 쿠데타 움직임을 알면서도 막지 못해 민주 정부를 지키지 못했다고 봅니다.

    짧은 기간과 조건을 강조하는 쪽

    혁명 직후의 폭발적 요구 속에서 9개월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언론 자유와 지방 자치를 넓히며 경제 개발 계획을 준비하는 등 민주적 방식으로 과제를 풀려 했다고 봅니다. ‘무능한 정부’라는 평가는 정변 세력이 명분을 위해 키운 면이 있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78호-제2공화국 초대 내각 구성

    KTV 아카이브 · 1.7만회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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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공화국 장면 내각 구성을 담은 1960년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4]_ 39-2 장면 정부 / 39강 현대(민주주의의 발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PT

    최태성 1TV · 2.3만회 ·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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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이 장면 정부의 정책과 한계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심화별개념1]_ 39-2 장면 정부 / 39강 현대(민주주의의 발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최태성 1TV · 7만회 ·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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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정부를 다룬 최태성 강사의 한능검 개념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에 벌어진 일. 장면 내각 l 한국 현대사 2부 & 한국 현대사 12부(소주제 기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1.8만회 ·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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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내각 시기를 그림으로 짧게 정리한 해설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은] 장면 제2공화국 국무총리 선출 (1960.8.19.) / KBS 2022.08.19.

    KBS News · 1,323회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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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국무총리 선출을 짧게 되짚은 KBS 리포트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능검대비특강#의원내각제-장면 내각 뭐가 시험에 나올까?(7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4.2만회 ·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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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내각의 시험 포인트를 짧게 정리한 강의입니다.

  6. 11.29

    정치

    제4차 개헌(소급 입법)

    3·15 부정 선거 관련자와 4·19 때 발포 책임자 등을 처벌할 수 있도록 소급 입법 근거를 헌법에 넣었습니다.

    배경

    4·19 혁명 뒤 국민의 요구는 3·15 부정 선거 책임자와 시위대에 발포한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법으로는 처벌 근거가 부족했고, 1960년 10월 법원이 발포 책임자 등 관련자 다수에게 가벼운 형을 선고하거나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4·19 부상 학생들이 국회 의사당에 들어가 농성하는 등 거센 항의가 일어났고, 국회는 특별 처벌을 위한 헌법 개정에 나섰습니다.

    1960년 10월 8일 서울 지방 법원은 4·19 당시 발포 사건 등 관련자 재판에서 상당수 피고인에게 무죄나 가벼운 형을 선고했습니다. 사흘 뒤인 10월 11일 4·19 부상 학생들이 민의원 의사당 단상을 점거하고 ‘혁명 입법’을 요구했고, 국회는 개헌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전개

    국회는 헌법 부칙에 특별법 근거를 넣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1960년 11월 29일 공포됐습니다. 3·15 부정 선거 관련자,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람, 4월 26일 이전에 반민주 행위를 한 사람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소급 입법을 허용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법, 부정 축재 특별 처리법 등이 만들어졌고, 이를 다룰 특별 재판소와 특별 검찰부가 설치됐습니다.

    개헌안은 10월 17일 민의원에 제출돼 민의원과 참의원을 차례로 통과했습니다. 부칙에는 3·15 선거와 관련해 부정행위를 한 사람, 그 부정행위에 항의하는 국민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을 처벌할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항과, 이를 다룰 특별 재판소와 특별 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특별 재판소는 1961년 봄부터 재판을 진행했지만 5·16 군사 정변으로 중단됐고, 이후 처벌은 군사 정부가 맡았습니다. 이 개헌은 형벌 불소급이라는 법의 원칙과 혁명적 정의의 요구가 부딪힌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3·15 부정 선거를 총지휘한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특별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던 중 5·16을 맞았고, 군사 정부가 세운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61년 12월 형이 집행됐습니다. 이처럼 제2공화국이 마련한 처벌 체계는 군사 정부로 넘어가며 성격이 바뀌었고, 부정 축재 처리도 군사 정부가 기업인들에게 벌과금 일부를 공장을 지어 내게 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0년 10월 8일서울 지방 법원이 4·19 발포 사건 등 관련자 다수에게 무죄나 가벼운 형을 선고했습니다.
    2. 1960년 10월 11일4·19 부상 학생들이 민의원 의사당 단상을 점거하고 혁명 입법을 요구했습니다.
    3. 1960년 10월 17일소급 처벌 근거를 담은 개헌안이 민의원에 제출됐습니다.
    4. 1960년 11월 29일제4차 개헌이 공포됐습니다.
    5. 1960년 12월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법, 특별 재판소·특별 검찰부 조직법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6. 1961년 봄특별 재판소가 재판을 시작했고, 4월에는 부정 축재 특별 처리법이 만들어졌습니다.
    7. 1961년 5월 16일군사 정변으로 특별 재판소 재판이 중단됐고, 처벌은 군사 정부의 혁명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8. 1961년 12월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 등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인물

    • 최인규1919~1961

      3·15 부정 선거를 총지휘한 내무부 장관으로, 소급 입법에 따른 처벌의 대표 대상이 됐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뒤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고, 1959년 내무부 장관이 돼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한 부정 선거를 계획했습니다. 4·19 뒤 구속돼 재판을 받았고, 5·16 뒤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돼 1961년 12월 집행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소급 처벌 개헌은 정당했나

    불가피했다고 보는 쪽

    기존 법으로는 국가 권력을 이용한 대규모 범죄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었고, 처벌 없이 넘어가면 혁명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봅니다. 헌법 자체에 근거를 둔 만큼 법치의 틀 안에서 한 조치였다고 봅니다.

    법치 원칙을 걱정하는 쪽

    행위 당시에 없던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근대 법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며, 정치 상황에 따라 누구든 소급 처벌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소급 입법이란
    법을 만들기 전에 있었던 행위에까지 새 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형사 처벌에서는 ‘행위 당시의 법률로만 처벌한다’는 형벌 불소급 원칙 때문에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진퇴양난의 장면정부 1편(소급입법 개헌)

    낭천 · 949회 · 9:2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장면 정부의 소급 입법 개헌을 다룬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1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정부가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자원을 몰아준 경제 성장 계획입니다(1962~1996).

1960년대에는 섬유·가발 같은 경공업과 수출,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화학 같은 중화학 공업에 집중했습니다. 수출 주도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성장의 그늘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경 유착,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지적됩니다.

다큐

영상한국사 I 117 1961년 국토건설사업,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

KBS 히스토리 · 1.9만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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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강의기적, 세계가 경악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짜 비밀

비밀의경제학 · 1.7만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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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