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 두 나라 군대가 함께 물러나자는 조선의 요구를 거부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새 정부를 세우고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배경
전주 화약 뒤 조선은 청·일 두 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안을 내밀며 청과의 종속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따로 두어 스스로 개혁하겠다며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7월 들어 오토리 공사는 개혁안을 내밀고 기한을 정해 답을 요구했습니다. 7월 20일에는 청군을 물러가게 하고 청과 맺은 통상 장정을 폐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며 7월 22일까지 답하라고 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스스로 개혁하겠다며 분명한 답을 피하자 일본은 무력을 쓰기로 했습니다.
전개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벽,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의 지휘 아래 일본군이 경복궁에 들이닥쳤습니다. 궁을 지키던 조선 군사와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곧 고종의 명으로 저항을 멈췄고, 일본군은 궁궐과 서울의 주요 시설을 장악했습니다.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궁으로 불러들여 정무를 맡겼습니다. 이어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새 내각이 섰고, 개혁 기구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습니다. 새 정부는 청과 맺은 통상 장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일본은 아산의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 내는 형식을 갖췄습니다.
일본군은 새벽 서쪽 영추문 등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궁궐 수비병과 한동안 총격전이 벌어졌고, 일본군은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 일대까지 장악했습니다. 이어 조선군의 무기를 거두고 서울의 조선군 병영까지 차지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틀 뒤 일본 해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 함대를 공격하며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영향 아래 놓였고, 곧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동학 농민군이 음력 9월 다시 봉기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8월 20일 조일 잠정 합동 조관을, 8월 26일 조일 맹약을 맺게 했습니다. 맹약에 따라 조선은 청일 전쟁을 치르는 일본군에게 식량과 인부 등의 편의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오토리 게이스케1833~1911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더 알아두기
- ‘갑오변란’이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