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문화 통치 실시
3·1 운동 뒤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한국인이 발행하는 한글 신문을 허가했습니다.
- 경찰 수와 경찰 관서는 오히려 늘었고, 신문은 검열을 받아 기사 삭제·정간이 잦았습니다.
- 일부 한국인을 자문 기구에 참여시켜 친일 세력을 키우고 민족 운동을 갈라놓으려 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일제강점기›문화 통치기
1919.9.2
일제강점기
3·1 운동 뒤 일제는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한글 신문 발행을 허용했지만, 치안 유지법으로 감시는 더 촘촘해졌습니다. 무장 투쟁·실력 양성 운동·사회주의 운동이 함께 전개됐습니다.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별별 역사 기차 — 만세 운동의 영웅, 유관순 열사
실력 양성 운동(물산 장려·민립 대학)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1920년대 저항(심화 속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봉오동 전투」
「밀정」
「박열」
「대호」
「덕혜옹주」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회사령 (~1920.4)
1919
9월
3·1 운동 뒤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한국인이 발행하는 한글 신문을 허가했습니다.
9.2
65세의 강우규가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총독은 피했고 강우규는 이듬해 순국했습니다.
9.11
여러 임시 정부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합쳐졌습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됐습니다.
11.9
김원봉 등이 만주 지린에서 만든 무장 투쟁 단체입니다.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처단하는 활동을 폈습니다.
1920
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려 한반도에서 쌀 생산을 늘리는 계획입니다. 생산 증가보다 일본으로 나가는 양이 더 많아 한국인 한 사람이 먹는 쌀의 양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3.5
문화 통치 아래 한국인이 발행하는 한글 신문이 허가돼 조선일보(3월 5일)와 동아일보(4월 1일)가 창간됐습니다.
6.7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해 만주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크게 이겼습니다.
8월
'내 살림 내 것으로'를 내걸고 우리 물건을 쓰자는 운동이 조만식 등의 주도로 평양에서 시작돼 1923년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10월
봉오동에서 패한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없앤다며 간도의 한인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많은 주민이 살해되고 집과 학교가 불탔습니다.
10.21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연합 부대가 백운평·완루구·어랑촌 등에서 엿새 동안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광복절 특별 기획 — 청산리, 전투의 재구성
광복절 특별 기획 — 청산리, 전투의 재구성
1921
6.28
간도 참변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옮겨 간 독립군이 지휘권 다툼 끝에 러시아 적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영상한국사 — 자유시 참변,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의 비극
영상한국사 — 자유시 참변,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의 비극
1922
11월
이상재 등이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며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총독부의 방해와 가뭄·수해로 모금이 막혔고, 총독부는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대응했습니다.
1923
1월
임시 정부의 활동 방향을 두고 상하이에 독립운동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임시 정부를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서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이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정비돼 각자 관할 지역에서 자치 행정과 군사 활동을 맡았습니다.
4.25
신분제가 법적으로 없어진 뒤에도 차별받던 백정들이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만들어 평등한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8월
전남 신안 암태도 농민들이 7~8할에 이르던 소작료를 낮추라며 1년 가까이 싸웠고,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9.1
도쿄 일대를 덮친 대지진 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과 군경이 많은 조선인을 살해했습니다.
추적60분 — 조선인을 죽여라, 학살 그 후 100년
추적60분 — 조선인을 죽여라, 학살 그 후 100년
1925
4.17
1920년대 들어 확산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창당됐습니다. 여러 차례 검거로 조직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습니다.
5월
천황제와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활동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겨냥했지만 독립운동 전반을 탄압하는 데 쓰였습니다.
1926
6.10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학생들이 서울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측의 준비는 사전에 발각됐지만 학생 조직이 시위를 이어 갔습니다.
함성이 하나로, 대한을 이루다 — 6·10 만세 운동
함성이 하나로, 대한을 이루다 — 6·10 만세 운동
1927
2.15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만든 일제강점기 최대의 합법 민족 운동 단체입니다. 회장은 이상재였고 전국에 지회를 뒀습니다.
큰별쌤의 오늘 — 신간회 창립
큰별쌤의 오늘 — 신간회 창립
1929
1월
영국인이 운영하는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폭행한 일을 계기로 원산 노동자들이 석 달 넘게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국내외에서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11.3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로 충돌이 벌어졌고,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로 번졌습니다. 이듬해 봄까지 전국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별별 역사 기차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별별 역사 기차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31
7월
만주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 공사를 두고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이 충돌했습니다. 국내 신문의 과장 보도로 국내 화교를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 많은 중국인이 숨졌습니다.
역사 속 그날들 —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김구
역사 속 그날들 —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