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의거
예순다섯 살(세는 나이, 만 64세)의 강우규가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총독은 피했고 강우규는 이듬해 순국했습니다.
배경
3·1 운동 뒤 일본은 새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를 보냈습니다. 연해주에서는 1919년 나이 든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돕는 노인 동맹단이 결성됐는데, 강우규도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1855년생인 강우규는 의거 당시 64세였습니다. 3·1 운동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진 뒤, 젊은이만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야 한다는 뜻으로 노인 동맹단이 만들어졌고, 강우규는 새 총독의 부임을 노려 직접 국내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전개
강우규는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해 몰래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졌습니다. 총독은 다치지 않았지만 수행원과 경찰, 기자 등 30여 명이 다쳤고 뒤에 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강우규는 현장을 빠져나갔으나 9월 17일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붙잡혔습니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의거는 9월 2일 오후 5시 무렵이었고, 현장에 있던 신문 기자·경찰·철도 관계자 등 37명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가운데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과 경기도 순사 등 2명은 며칠 뒤 숨졌습니다. 총독과 함께 부임한 정무 총감 미즈노 렌타로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강우규는 서울 시내에 숨어 지내며 다시 기회를 노렸으나 붙잡혔습니다. 경성 지방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상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의거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사세시(세상을 떠나며 남기는 시)를 남겼습니다.
결과와 의미
60대의 노인이 새 총독을 부임 첫날 공격한 이 사건은 문화 통치를 내세운 일제에 큰 충격을 줬고, 1920년대 의열 투쟁이 활발해지는 흐름의 시작으로 꼽힙니다. 강우규를 붙잡은 김태석은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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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인물
강우규1855~1920
사이토 마코토1858~1936
김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