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문화 통치기

문화 통치와 무장 독립 전쟁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꾼 사이 의열단이 결성되고 한글 신문이 창간됐습니다. 만주의 독립군은 봉오동·청산리에서 이겼지만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었습니다.

기간
1919.9.2 ~ 1921.12.31 · 2년 3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사이토
담긴 것
사건 12 · 영상 72 · 영화·드라마 5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5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최태성 1TV · 3.7만회 · 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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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3·1 운동과 임시 정부 수립을 다룬 고교 한국사 강의입니다.

1919.3.1 ~ 9.11 · 강우규 의거 → 통합 임시 정부 출범

해설·교양 · 강의

실력 양성 운동(물산 장려·민립 대학)

최태성 1TV · 16.9만회 · 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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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 실력 양성 운동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20.8 ~ 1924 · 물산 장려 운동 →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해설·교양 · 다큐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KBS 히스토리 · 8.3만회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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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원봉의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까지를 다룬 KBS 방송입니다.

1919.11.9 ~ 1938.10.10 · 의열단 결성 →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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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강우규 의거 →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해설·교양 · 강의

1920년대 저항(심화 속성)

최태성 1TV · 25.6만회 · 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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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2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을 한 강에 정리한 강의입니다.

1919.9.2 ~ 1931.5 · 강우규 의거 →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영화 · 2019· 공식 영상

「자전차왕 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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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0 ~ 1920

일제강점기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이긴 엄복동 이야기(각색 많음)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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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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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9· 공식 영상

「항거: 유관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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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9.3.1 ~ 1920.9.28

3·1 운동 뒤 서대문 형무소 8호실에서의 1년

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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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영화 · 2019· 공식 영상

「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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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6.7

독립군이 일본군을 골짜기로 끌어들여 이긴 전투

사건 연표 12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회사령 (~1920.4), 조선 태형령 (~1920.3),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설치 (~1925)

  1. 1919

    9.2

    운동

    강우규 의거

    예순다섯 살(세는 나이, 만 64세)의 강우규가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총독은 피했고 강우규는 이듬해 순국했습니다.

    배경

    3·1 운동 뒤 일본은 새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를 보냈습니다. 연해주에서는 1919년 나이 든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돕는 노인 동맹단이 결성됐는데, 강우규도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1855년생인 강우규는 의거 당시 64세였습니다. 3·1 운동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진 뒤, 젊은이만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야 한다는 뜻으로 노인 동맹단이 만들어졌고, 강우규는 새 총독의 부임을 노려 직접 국내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전개

    강우규는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해 몰래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졌습니다. 총독은 다치지 않았지만 수행원과 경찰, 기자 등 30여 명이 다쳤고 뒤에 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강우규는 현장을 빠져나갔으나 9월 17일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붙잡혔습니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의거는 9월 2일 오후 5시 무렵이었고, 현장에 있던 신문 기자·경찰·철도 관계자 등 37명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가운데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과 경기도 순사 등 2명은 며칠 뒤 숨졌습니다. 총독과 함께 부임한 정무 총감 미즈노 렌타로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강우규는 서울 시내에 숨어 지내며 다시 기회를 노렸으나 붙잡혔습니다. 경성 지방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상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의거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사세시(세상을 떠나며 남기는 시)를 남겼습니다.

    결과와 의미

    60대의 노인이 새 총독을 부임 첫날 공격한 이 사건은 문화 통치를 내세운 일제에 큰 충격을 줬고, 1920년대 의열 투쟁이 활발해지는 흐름의 시작으로 꼽힙니다. 강우규를 붙잡은 김태석은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봄연해주에서 노인 동맹단이 결성되고 강우규가 참여했습니다.
    2. 1919년 8월강우규가 폭탄을 지니고 국내로 들어와 서울에 잠입했습니다.
    3.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무렵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37명이 다쳤고 2명이 뒤에 숨졌습니다.
    4. 1919년 9월 17일조선인 경부 김태석에게 붙잡혔습니다.
    5. 1920년 11월 29일 오전서대문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6. 1962년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습니다.
    7. 2011년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 강우규 사세시(1920)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 우리역사넷 수록 번역입니다.

    인물

    • 강우규1855~1920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한의사로 일했습니다. 병합 뒤 북간도와 연해주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교육 운동을 했습니다. 노인 동맹단원으로 의거를 일으켰고,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습니다. 2011년 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 사이토 마코토1858~1936

      부임 첫날 폭탄 공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해군 대장 출신의 3대 조선 총독으로 문화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 김태석

      총독부 경찰의 한국인 경부로 강우규를 체포했습니다.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가를 붙잡고 고문한 경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복 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체포돼 1949년 재판을 받았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추적 – 65세 노인은 왜 폭탄을 던졌나, 노인동맹단과 강우규 / KBS 2009.2.28. 방송

    KBS 히스토리 · 2.4만회 ·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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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강우규 의거와 노인동맹단을 추적한 KBS 역사추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59 강우규. 신임총독 사이코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지다

    KBS 히스토리 · 5,580회 ·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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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남대문역에서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순간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역덕이슈 오늘 I 26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시대의 어른 폭탄을 던지다

    KBS 히스토리 · 4,530회 ·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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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19년 9월 2일 의거를 날짜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망설임 없이 폭탄을 꺼내들다!, MBC 210829 방송

    MBCentertainment · 634회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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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백발의 강우규가 폭탄을 던진 장면을 다룬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 강우규 편

    국가보훈부 · 1.3만회 ·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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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국가보훈부가 만든 강우규 의거 소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백발의 독립투사 왈우 강우규

    KB국민은행 · 1.8만회 ·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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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KB국민은행이 만든 강우규 의사 소개 영상으로 의거를 중심에 둡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일제 총독에 폭탄 투척…‘강우규 의사 의거’ 95주년

    MBCNEWS · 3,120회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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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강우규 의거 95주년을 맞아 그날을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골라봐야지] 독립운동가 이야기② - 잊혀진 영웅들, 그들 모두가 안중근이었다 #강우규 #남자현 #차이나는클라스

    JTBC Voyage · 4.2만회 ·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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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우규와 남자현을 함께 소개합니다.

  2. 9.11

    정치

    통합 임시 정부 출범

    여러 임시 정부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합쳐졌습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됐습니다.

    배경

    3·1 운동 뒤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서울의 한성 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따로 섰습니다. 세 정부의 각료 명단에는 이승만·이동휘·안창호 같은 같은 인물들이 겹쳐 올라 있었고, 독립운동의 힘을 모으려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요구가 컸습니다.

    전개

    1919년 5월 상하이에 온 안창호가 통합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국내에서 13도 대표 이름으로 선포된 한성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는 외교 활동에 유리한 상하이에 두며, 대한 국민 의회는 해산해 임시 의정원에 합치는 방식으로 합의했습니다.

    1919년 9월 11일 임시 의정원은 개정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채택했습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됐고, 입법(임시 의정원)·행정(국무원)·사법(법원)의 삼권 분립을 규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국내·연해주·미주 세력을 아우른 통합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한 국민 의회 일부는 해산 방식에 반발해 연해주에서 의회를 다시 세웠고, 이동휘는 1921년 이승만과의 노선 차이로 국무총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은 대부분 미국에 머물렀고,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두자는 청원을 냈던 사실이 알려져 반발을 샀습니다. 1923년 독립운동 방향을 새로 정하려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지만 임시 정부를 고치자는 쪽(개조파)과 새로 만들자는 쪽(창조파)이 합의하지 못했고, 1925년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3~4월연해주 대한 국민 의회(3월 17일), 상하이 임시 정부(4월 11일), 서울 한성 정부(4월 23일)가 차례로 선포됐습니다.
    2. 1919년 5월안창호가 상하이에 도착해 통합 협상에 나섰습니다.
    3. 1919년 8월 말대한 국민 의회가 통합을 위해 해산을 결의했습니다.
    4. 1919년 9월 11일대한민국 임시 헌법이 공포되고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5. 1919년 11월이동휘 등 국무위원들이 상하이에서 취임했습니다.
    6. 1920년 12월이승만이 상하이에 와서 직무를 보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5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7. 1921년 1월이동휘가 국무총리에서 물러났습니다.
    8. 1923년 1~6월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지만 개조파와 창조파가 맞서 결렬됐습니다.
    9. 1925년 3월임시 의정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해 면직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 /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함. /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함.”
    — 대한민국 임시 헌법 제1조·제2조·제3조(1919년 9월)주권이 인민 전체에 있다는 국민 주권 원칙을 조문에 처음 적었고, 영토를 옛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정했습니다.

    인물

    • 이승만1875~1965

      통합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구미 위원부를 통해 미국 정부와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1925년 면직된 뒤에도 미주에서 활동했고, 광복 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 이동휘1873~1935

      통합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됐습니다.

      한인 사회당을 이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무장 투쟁과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했습니다. 1921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뒤 고려 공산당 활동을 했습니다.

    • 안창호1878~1938

      세 정부의 통합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스스로 낮은 직책인 노동국 총판을 맡아 분열을 막으려 했습니다.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서도 양쪽을 중재하려 애썼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 — 외교냐 무장 투쟁이냐

    외교 활동을 중시한 쪽

    일본과 전력 차이가 큰 상황에서 강대국의 지지를 얻고 국제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 현실적인 길이라고 봤습니다. 이승만 등은 위임 통치 청원도 일본의 지배에서 먼저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었다고 설명했고, 이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쪽은 뒤에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이런 외교 활동이 바탕이 됐다고 봅니다.

    무장 투쟁을 중시한 쪽

    이동휘·신채호 등은 독립은 강대국이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싸워서 얻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위임 통치 청원은 독립 대신 다른 나라의 통치를 요청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신채호는 이를 이유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는 데 반대했습니다. 만주·연해주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데 임시 정부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2024년 고등 한국사] 3-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림쌤의 10분역사 · 14.7만회 · 11:5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여러 임시 정부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교과 강의로 다룹니다.

  3. 11.9

    운동

    의열단 결성

    김원봉 등이 만주 지린에서 만든 무장 투쟁 단체입니다.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처단하는 활동을 폈습니다.

    • 김익상(조선총독부, 1921), 김상옥(종로 경찰서, 1923), 나석주(동양 척식 주식회사, 1926)가 폭탄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1923)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배경

    3·1 운동의 평화적 만세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되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흥 무관 학교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적은 인원으로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계획했습니다.

    전개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윤세주 등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했습니다. ‘정의의 사업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을 담았고, 조선 총독부 고관·군 수뇌·친일파·밀정 등을 처단 대상(7가살)으로, 총독부·동양 척식 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 등을 파괴 대상(5파괴)으로 정했습니다.

    주요 의거로는 1920년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1922년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시도, 1923년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과 서울 시가전, 1924년 김지섭의 도쿄 궁성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식산 은행 폭탄 투척이 있습니다.

    1923년 신채호는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 혁명 선언」을 써서 외교론과 실력 양성론, 자치론을 비판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했습니다. 이 선언은 의열단의 행동 지침이 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의거는 일제에 큰 위협이 됐지만 단원 다수가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의열단은 개인의 폭력 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단원들을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시키는 등 조직적 군사 활동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1932년 난징에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세웠고, 1935년 민족 혁명당, 1938년 조선 의용대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11월 9일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했습니다.
    2. 1920년 9월 14일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3. 1920년 12월 27일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4. 1921년 9월 12일김익상이 서울 남산의 조선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5. 1922년 3월 28일김익상·오성륜·이종암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6. 1923년 1월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이 의열단 선언으로 발표됐습니다.
    7. 1923년 1월 12일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22일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숨졌습니다.
    8. 1924년 1월 5일김지섭이 도쿄 궁성 앞 다리(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9. 1926년 12월 28일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신채호, 「조선 혁명 선언」(1923)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한 선언의 결론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물

    • 김원봉1898~1958 무렵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의백)으로 이끌었습니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신흥 무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의열단, 민족 혁명당, 조선 의용대를 이끌었고, 1942년 조선 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부사령관이 됐으며 임시 정부 군무부장을 지냈습니다. 1948년 남북 협상 때 북쪽에 남아 북한에서 국가 검열상 등을 지냈으나 1958년 무렵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신채호1880~1936

      의열단의 행동 지침인 「조선 혁명 선언」을 썼습니다.

      대한매일신보 논설로 이름을 알린 역사가이자 언론인입니다. 『조선 상고사』 등을 썼고, 뒤에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1928년 붙잡혀 뤼순 감옥에서 1936년 숨졌습니다.

    • 김상옥1890~1923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서울 출신으로 3·1 운동 뒤 암살단을 조직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1923년 1월 폭탄 의거 뒤 여러 날 동안 수백 명의 경찰에 쫓기며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탄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김원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립운동의 공적을 중시하는 쪽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일제 강점기 내내 가장 치열하게 무장 투쟁을 이끈 인물이라고 봅니다. 월북 이전의 독립운동 공적은 그것대로 인정해 독립 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광복 뒤 친일 경찰 출신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월북의 한 원인이 됐다는 점도 듭니다.

    광복 뒤 행적을 함께 봐야 한다는 쪽

    월북 뒤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고 6·25 전쟁 무렵 북한 체제에 참여했으므로, 대한민국이 그를 공식적으로 기리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현행 독립 유공자 서훈 기준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은 제외하고 있어, 서훈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더 알아두기

    의열 투쟁이란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는 뜻으로, 소수의 인원이 폭탄·총기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요인을 처단하는 방식의 독립운동을 말합니다. 의열단뿐 아니라 1931년 김구가 만든 한인 애국단(이봉창·윤봉길 의거)도 같은 방식을 썼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62 의열단의 5파괴 7가살 원칙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KBS 히스토리 · 3,593회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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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의 행동 원칙과 조선 혁명 선언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역덕이슈 오늘 I 28 의열단, 우리의 힘과 피로 싸운다

    KBS 히스토리 · 1.4만회 ·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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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의 투쟁 방식과 주요 의거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고등학교 한국사#의열단 암기비법#무조건 맞출 수 있는 꿀팁!!(9분 순삭 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7.4만회 ·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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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 활동과 인물을 시험 대비로 정리한 교사의 강의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뉴스룸 - 100주년 맞은 항일 비밀결사조식, 의열단 [생방송 아침이 좋다] 20191108

    KBS 교양 · 6,334회 ·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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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 100주년을 맞은 의열단을 소개한 KBS 코너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가슴 벅찬 우리 역사, 의열단

    EBSCulture (EBS 교양) · 4.6만회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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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의 결성과 활동을 짧게 소개한 EBS 캠페인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공무원 한국사 - 20분 끝내기] 무장투쟁(Feat. 홍범도, 김좌진, 서일, 지청천, 양세봉, 김원봉)

    황현필 한능검 · 7.3만회 ·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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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 투쟁 흐름 속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독립운동계의 거물 박용만, 그는 왜 의열단에 암살 당했나 | KBS 20120816 방송

    KBS 다큐 · 11.6만회 · 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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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암살 사건을 다룬 KBS 다큐라 의열단 결성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4. 1920

    경제

    산미 증식 계획

    1920 ~ 1934 · 14년

    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려 한반도에서 쌀 생산을 늘리는 계획입니다. 생산 증가보다 일본으로 나가는 양이 더 많아 한국인 한 사람이 먹는 쌀의 양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부담이 농민에게 돌아가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배경

    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은 공업이 빠르게 커져 도시 인구가 늘었지만 쌀 생산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쌀값이 크게 오르자 1918년 일본 전역에서 쌀 소동이라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내각이 물러났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쌀을 늘려 들여오는 방법으로 식량 문제를 풀려 했습니다.

    전개

    1920년 총독부는 15년 동안 토지를 개량하고 농사 방법을 바꿔 쌀 생산을 크게 늘리겠다는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수지와 물길을 만드는 수리 시설 확충, 밭을 논으로 바꾸는 지목 변경과 개간, 일본 품종 보급, 화학 비료 사용 확대가 중심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지주들이 만든 수리 조합을 통해 진행됐습니다.

    초기 계획이 자금 부족으로 목표에 못 미치자 1926년 계획을 고쳐 다시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과 함께 일본 안의 쌀값이 크게 떨어지고 일본 농민들이 조선 쌀 수입에 반발하자, 총독부는 1934년 계획을 중단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1차 계획(1920~1925)은 약 42만 7천 정보의 토지를 개량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실적이 크게 모자랐고, 1926년부터의 갱신 계획은 목표를 약 35만 정보로 줄이는 대신 정부가 알선하는 저리 자금을 늘려 추진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쌀 생산은 늘었지만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양이 더 빠르게 늘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이 소개하는 통계에 따르면 1930년의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250만 석 늘었으나 같은 기간 일본으로 나간 양은 약 430만 석 늘었습니다. 한국인 한 사람이 먹는 쌀은 1912년 0.77석에서 1926년 0.53석, 1936년 0.38석으로 줄었고,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들여온 조·수수 같은 잡곡으로 메웠습니다.

    수리 조합비와 비료값, 늘어난 세금 부담이 지주를 거쳐 소작농에게 넘어가면서 땅을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일본으로 떠나는 농민이 늘었습니다. 반면 쌀을 많이 팔 수 있는 대지주는 부를 늘렸고, 조선 농업은 쌀 한 가지에 크게 기대는 구조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8년 8월일본 전역에서 쌀값 폭등에 항의하는 쌀 소동이 일어나 데라우치 내각이 물러났습니다.
    2. 1920년조선총독부가 15년 계획의 산미 증식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3. 1925년자금 부족으로 1차 계획의 토지 개량 실적이 목표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4. 1926년산미 증식 갱신 계획을 세워 정부 알선 자금을 늘리고 다시 추진했습니다.
    5. 1929~1930년세계 대공황과 쌀값 폭락으로 일본 농민의 조선 쌀 반입 반대가 커졌습니다.
    6. 1934년총독부가 산미 증식 계획을 중단했습니다.
    7. 1940년전쟁으로 식량이 모자라자 ‘조선 증미 계획’으로 다시 증산을 추진했습니다.

    인물

    •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산미 증식 계획을 시작할 때의 총독입니다.

      일본 해군 대장 출신으로 3·1 운동 뒤 부임해 이른바 문화 통치를 폈습니다. 산미 증식 계획과 함께 교육·언론 정책을 바꿨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산미 증식 계획과 쌀 이출의 성격

    수탈로 보는 쪽

    계획의 목적 자체가 일본의 식량 문제 해결이었고, 한국인은 쌀을 생산하고도 먹지 못한 채 잡곡으로 버텨야 했다고 봅니다. 증산 비용은 농민에게 떠넘기고 이익은 일본과 대지주에게 돌아가 농민이 몰락했으므로, 식민지 농업 수탈의 전형이라고 평가합니다.

    시장을 통한 수출로 보는 쪽

    쌀은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일본 시장에 팔려 나간 것이고, 지주와 농민은 그 대가를 받았다고 봅니다. 1인당 쌀 소비가 줄어든 것은 소득이 지주에게 몰린 분배 구조와 쌀을 팔아 다른 것을 사는 상품화의 결과라고 설명하며, 생산 증가 자체는 농업 기술의 발전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그 이익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더 알아두기

    수출이 아니라 ‘이출’
    당시 기록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쌀을 보내는 것을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외국이 아닌 자국 영토의 일부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군산·목포 같은 항구는 쌀 이출항으로 크게 성장했고, 군산에는 지금도 당시의 은행·세관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일본은 같은 무렵 또 다른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일본인 입맛에 맞는 쌀 품종(봉래미)을 보급해 일본으로 보내는 쌀을 늘렸습니다. 조선과 타이완은 모두 일본 본국의 쌀 부족을 메우는 곳으로 편성됐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산미증식계획이란?

    EBSi · 7,048회 ·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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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미 증식 계획이 무엇인지 설명한 EBS 수능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김제의 쌀이 모두 일본으로?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던 농민들, 산미증식계획의 비극 [역사 읽어드립니다 시즌4 특별판] | 최태성 강사

    사피엔스 스튜디오 · 19.5만회 ·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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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김제 들판을 무대로 산미 증식 계획의 피해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민문연 역사강좌] 제8강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 산미증식계획 ②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 710회 · 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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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미 증식 계획이 누구를 위한 개발이었는지 따지는 강좌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보기만 해도 10점 UP! 한국사 벼락치기|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경제 침탈|문화 통치, 산미 증식 계획|한능검|한국사 정리|한국사탐구생활|에듀윌 한국

    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1만회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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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통치와 경제 침탈을 묶어 정리하고 산미 증식은 그 일부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역사수행] 산미증식계획

    초코파이 · 4,171회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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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미 증식 계획을 짧게 정리한 개인 과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역사|세계사] 일본 근대사 |일본의 쌀소동과 조선의 산미증식계획

    팝콘TV · 2,540회 ·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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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쌀 소동과 산미 증식 계획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5. 3.5

    사회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920.3.5 ~ 4.1 · 28일

    문화 통치 아래 한국인이 발행하는 한글 신문이 허가돼 조선일보(3월 5일)와 동아일보(4월 1일)가 창간됐습니다.

    배경

    1910년 병합 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이 내던 신문을 모두 없애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 남겼습니다. 3·1 운동으로 무력만으로는 지배가 어렵다고 본 일제는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아래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고, 그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제한적으로 신문 발행을 허가했습니다.

    1920년 1월 총독부는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 세 곳의 발행을 허가했습니다. 시사신문은 친일 단체 국민협회의 민원식이 만든 신문이었고, 조선일보도 처음에는 친일 실업가 단체인 대정친목회가 중심이 돼 출발했습니다.

    전개

    조선일보가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가 4월 1일 창간호를 냈습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가 자금을 모아 세웠고 ‘민족의 표현 기관’을 내걸었습니다. 조선일보는 1924년 신석우가 경영권을 넘겨받고 이상재가 사장을 맡으면서 민족주의 성향이 짙어졌습니다.

    신문은 사전 검열을 받았고 기사가 문제 되면 삭제·압수·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는 1920년 9월 일본 왕실의 상징을 비판한 사설로 첫 무기 정간을 당했고,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다시 정간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두 신문은 1920~30년대 민족 운동 소식을 전하고 한글 보급에 나섰습니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문자 보급 운동을,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을 벌여 농촌에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 뒤에는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전쟁 협력 기사도 실었고, 두 신문은 1940년 8월 총독부의 방침으로 함께 폐간됐다가 광복 뒤 복간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8월병합과 함께 『대한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바뀌었고, 한국인이 내는 한글 일간지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2. 1919년 9월 2일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강우규가 그를 노리고 폭탄을 던졌습니다.
    3. 1920년 1월총독부가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 세 곳에 발행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4. 1920년 3월 5일조선일보가 창간호를 냈습니다.
    5. 1920년 4월 1일동아일보가 창간호를 냈습니다. 창간사에서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세 가지 주지를 밝혔습니다.
    6. 1920년 9월동아일보가 일본 왕실의 상징을 비판한 사설로 첫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7. 1924년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넘겨받고 이상재가 사장이 됐습니다.
    8. 1936년 8월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지운 일로 네 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습니다.
    9. 1940년 8월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두 신문이 함께 폐간됐습니다.
    10. 1945년 11~12월광복 뒤 조선일보(11월)와 동아일보(12월)가 다시 신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一) 朝鮮民衆의 表現機關으로 自任하노라 (二) 民主主義를 支持하노라 (三) 文化主義를 提唱하노라”
    — 『동아일보』 창간사(1920년 4월 1일)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둘째,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셋째,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창간사가 밝힌 세 가지 주지로,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에 실려 있습니다.

    인물

    • 김성수1891~1955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습니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경성방직과 중앙학교·보성전문학교를 경영했습니다. 광복 뒤 한국민주당을 이끌었고 1951년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일제 말 학병 권유 글과 연설 등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2017년 대법원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확정해 2018년 건국훈장이 취소됐습니다.

    • 이상재1850~1927

      1924년부터 조선일보 사장을 맡았습니다.

      독립협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YMCA를 이끈 기독교계 원로입니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이끌었고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이 됐으며, 그해 세상을 떠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일제강점기 두 신문의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

    한국인이 발행하는 유일한 한글 일간지로서 검열과 정간을 거듭 당하면서도 민족 운동 소식을 전했고, 문자 보급·브나로드 운동으로 문맹을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봅니다. 말기의 협력 기사는 폐간 위협 속의 강요된 결과였다고 설명합니다.

    타협과 협력을 지적하는 쪽

    처음부터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합법 언론이라 한계가 뚜렷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지원병·징병을 권하는 기사를 적극적으로 실었다고 봅니다. 사주 김성수·방응모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점도 근거로 듭니다.

    더 알아두기

    문화 통치란
    3·1 운동 뒤 1920년대 일제가 내세운 통치 방식입니다.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신문·단체 활동을 일부 허용했지만, 경찰 수는 오히려 늘었고 검열과 치안 유지법으로 감시를 강화했습니다. 친일 세력을 키워 민족 운동을 나누려 했다는 평가도 함께 받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문화 통치

    해설·교양 · 강의

    최태성 강사 #07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창간될 수 있었을까 | #어쩌다어른 #사피엔스

    사피엔스 스튜디오 · 4.7만회 ·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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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어쩌다 어른에서 최태성이 두 신문의 창간 배경을 강연합니다.

  6. 6.7

    전쟁

    봉오동 전투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해 만주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크게 이겼습니다.

    배경

    3·1 운동 뒤 만주와 연해주에는 독립군 부대가 여럿 생겨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본 경찰 주재소·헌병대를 습격했습니다. 일제는 이를 뿌리 뽑으려고 두만강 건너 중국 땅까지 군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1920년 6월 초 독립군 소부대가 함경북도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순찰대를 공격하자, 일본군은 추격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삼둔자 일대에서 먼저 한 차례 교전이 벌어졌고,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가 있던 봉오동(지금의 중국 지린성 투먼시 부근)으로 향했습니다.

    전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은 대한 북로 독군부라는 연합 부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들은 주민을 미리 피신시키고 봉오동 골짜기 양쪽 산에 병력을 숨긴 뒤, 일부 부대가 일본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1920년 6월 7일 일본군이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자 사방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일본군은 몇 시간 동안 버티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독립군 전사자는 4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일본 측 기록은 피해를 훨씬 적게 적고 있어 정확한 규모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처음 거둔 큰 승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 패배 뒤 일제는 만주의 독립군을 대규모로 토벌하기로 하고 병력을 증원했습니다. 이것이 넉 달 뒤 청산리 전투와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6월 4일독립군 소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일대의 일본군 순찰대를 공격하고 돌아갔습니다.
    2. 1920년 6월 6일추격해 온 일본군 부대가 두만강 건너 삼둔자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3. 1920년 6월 6~7일일본군 제19사단이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 추격 대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4. 1920년 6월 7일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을 양쪽 산에 숨어 있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제히 공격했습니다.
    5. 1920년 8월일본군이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뿌리 뽑는 대규모 토벌 계획을 세웠습니다.
    6. 1920년 10월훈춘 사건을 구실로 일본군이 간도에 대거 들어왔고, 청산리 전투와 간도 참변이 이어졌습니다.

    인물

    • 홍범도1868~1943

      대한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평안도 출신으로 포수 생활을 하다 1907년 정미의병 때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치른 뒤 연해주로 옮겼고, 1937년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21년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 최진동1883~1941

      군무 도독부를 이끌고 연합 부대의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봉오동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독립군을 길렀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으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홍범도의 연해주 이후 행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보는 쪽

    의병부터 봉오동·청산리까지 무장 투쟁의 가장 앞에 섰던 인물이며, 소련 공산당 입당은 연해주에서 살아남아 항일 활동을 이어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된 점도 근거로 듭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따져 봐야 한다는 쪽

    1920년대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자유시 참변 무렵 소련 적군 쪽에 섰다는 점을 들어,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2023년 육군사관학교 흉상 이전 논란 때 이 주장이 크게 제기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해설

    한국독립전쟁사 : 봉오동 전투 총정리

    별별역사 · 71.7만회 ·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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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의 경과를 참고 문헌과 함께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2만여 명의 일본군의 총공세에 맞선 홍범도의 전략은?🐯 | #편집자는

    디글 :Diggle · 11.6만회 · 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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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를 이끈 전략을 다룬 교양 예능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나라를 구했지만 잊힌 어느 삼 형제 이야기. 봉오동 전투의 진실|광복절|특집|#골라듄다큐

    EBSDocumentary (EBS 다큐) · 9.3만회 · 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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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봉오동 전투에 참전한 삼 형제를 추적한 E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자랑스러운 전승의 역사, 봉오동 전투와 여천 홍범도 (내레이션 배우 최민식)

    국가보훈부 · 34.9만회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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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을 소개한 국가보훈부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 역사대모험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독립운동 | 홍범도 | 깨비키즈 KEBIKIDS

    깨비키즈 [KEBIKIDS] · 4.6만회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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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함께 그린 애니메이션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골라봐야지] "여기 마지막 조선이야" 독립으로 가는 승리의 기록 '봉오동 전투' 비하인드|방구석1열|JTBC 210228 방송

    JTBC Voyage · 32만회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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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구석1열이 영화 봉오동 전투를 두고 실제 전투를 짚는 장면입니다.

  7. 7월

    정치

    지방 제도 개편(도평의회·부면협의회)

    1920.7 ~ 1920.11 · 4개월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문화 통치를 내세우며 도평의회·부협의회·면협의회 같은 자문 기구를 두고 일부를 선거로 뽑게 했습니다. 3·1 운동 뒤 민심을 달래려는 조치였습니다.

    • 도평의원은 3분의 2가 선거, 3분의 1은 도지사 임명이었고 부협의회는 선거, 면협의회는 지정면만 선거였습니다.
    • 첫 선거는 1920년 11월 12개 부와 24개 지정면에서만 치러졌고, 나머지 면은 도지사가 임명했습니다.

    배경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한 일본은 통치 방식을 헌병 경찰제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꿨습니다. 그 핵심 조치 가운데 하나가 지방 제도를 고쳐 조선인에게 일부나마 참정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전개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1920년 7월 지방 제도를 개편해 도에는 도평의회, 부에는 부협의회, 면에는 면협의회라는 자문 기구를 뒀습니다. 이들은 예산이나 정책을 의결할 권한이 없는 자문 기구였습니다.

    도평의원은 3분의 2를 부·면협의회원의 간접 선거로, 3분의 1은 도지사가 임명하는 방식으로 뽑았습니다. 부협의회원은 직접 선거로 뽑았지만, 면협의회원은 '지정면'(도시화된 면)만 선거를 하고 나머지 면은 도지사가 임명했습니다. 선거권에는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재산 제한이 있었습니다.

    1920년 11월 처음으로 12개 부와 24개 지정면에서 협의회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학교평의회 등 다른 자문 기구도 함께 만들어졌지만, 의결권이 없고 선거권에 제한이 있어 실질적인 지방 자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선거는 한반도에서 치러진 첫 근대적 선거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30년 지방 제도가 다시 개정돼 도회·부회 등에 의결권이 일부 주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9월사이토 마코토가 새 총독으로 부임해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습니다.
    2. 1920년 7월부제·면제·학교조합령 등 지방 제도 개정이 공포됐습니다.
    3. 1920년 10~11월첫 도평의회원·부면협의회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4. 1920년 11월12개 부와 24개 지정면에서 협의회가 구성됐습니다.
    5. 1930년지방 제도가 다시 개정돼 도회·부회·읍회에 의결권이 일부 주어졌습니다.

    인물

    • 사이토 마코토1858~1936

      3대·5대 조선 총독으로 문화 통치를 내세우며 지방 제도를 개편했습니다.

      해군 대장 출신으로 강우규의 폭탄 투척을 피하고 부임했습니다. 신문 발행 허가, 보통 경찰제 전환 등 이른바 문화 통치를 이끌었으나 실질적인 통제는 오히려 촘촘해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20년 지방 제도 개편의 성격

    참정권 확대의 첫걸음으로 보는 쪽

    선거로 뽑는 자문 기구가 처음 생겼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나마 조선인이 지역 정치에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열렸다고 봅니다.

    통치를 위한 회유책으로 보는 쪽

    의결권 없는 자문 기구에 재산에 따른 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져 실질적인 자치와는 거리가 멀었고, 3·1 운동 뒤 민심을 달래고 친일 세력을 키우려는 이른바 문화 통치의 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문화 통치

    평가가 갈리는 부분

    • 3·1 운동 뒤 민심을 달래고 일부나마 참정권을 준 진전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 의결권 없는 자문 기구였고 선거권에도 재산에 따른 제한이 있어 실질적인 지방 자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20년대 문화 통치 l 일제 강점기 4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3.8만회 ·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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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8월

    운동

    물산 장려 운동

    1920.8 ~ 1923 · 3년

    '내 살림 내 것으로'를 내걸고 우리 물건을 쓰자는 운동이 조만식 등의 주도로 평양에서 시작돼 1923년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배경

    1920년대 초 일제는 회사령을 폐지해 일본 자본이 한반도에 쉽게 들어오게 했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값싼 일본 공산품이 밀려들자 막 자라던 한국인 기업들이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는 걱정이 커졌습니다.

    3·1 운동 뒤 독립을 당장 이루기 어렵다고 본 일부 민족 운동가들은 경제·교육으로 실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는 실력 양성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전개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 등이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에 나섰습니다. 1923년 1월에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면서 운동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같은 구호를 내걸고 옷감·음식·생활용품을 국산으로 쓰자고 호소했으며, 금주·금연 운동도 함께 벌였습니다.

    비슷한 무렵 학생들의 자작회, 여성들의 토산 애용 부인회 등도 생겨 가두 행진과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취지서에서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산업의 권리를 우리 손에 쥐어야 생명과 인격, 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강연회와 선전물로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서 쓰자’고 호소했고, 각지에 지방 조직이 생겼습니다.

    운동을 둘러싸고 1923년 동아일보 지면 등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회주의 쪽 논자들은 이 운동이 결국 한국인 자본가의 이익을 늘리는 운동이라고 비판했고, 운동을 지지하는 쪽은 일본 자본에 맞서 민족 경제를 지키는 것이 먼저라고 반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운동은 1923년 무렵 크게 일어났다가 곧 힘을 잃었습니다. 국산품 수요가 늘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값이 올랐고, 한국인 기업의 생산 능력 자체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총독부의 감시도 이어졌고, 조선물산장려회는 1940년 총독부의 명령으로 해산됐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운동의 열기는 크게 줄었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기관지를 내고 강연을 이어 가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중일 전쟁 뒤 전시 통제가 강해지면서 활동할 공간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4월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묶었던 회사령이 폐지돼 신고만 하면 회사를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2. 1920년 8월평양에서 조만식 등이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에 나섰습니다.
    3. 1922~1923년서울에서 학생들의 자작회, 여성들의 토산 애용 부인회가 만들어져 국산품 쓰기를 호소했습니다.
    4. 1923년 1월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됐고, 운동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5. 1923년운동의 성격을 두고 신문 지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6. 1923년 이후국산품 수요가 늘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값이 올랐고, 운동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7. 1940년총독부의 명령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해산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구별할 것 없이 우리가 우리의 손에 산업의 권리, 생활의 제1조건을 장악하지 않으면, 도저히 우리의 생명, 인격,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 「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문입니다. 산업의 주도권을 한국인이 쥐어야 한다는 운동의 목표가 드러납니다.

    인물

    • 조만식1883~1950

      평양에서 물산 장려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기독교 민족 운동가로,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고 ‘조선의 간디’로 불렸습니다.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광복 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으나, 1946년 초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 소련군에 연금됐고 한국 전쟁 중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물산 장려 운동의 성격

    경제 자립 운동으로 보는 쪽

    일본 자본의 공세 속에서 민족 기업과 소비자를 이어 민족 경제의 기반을 지키려 한 대중 운동이었다고 봅니다. 3·1 운동 뒤 민족 운동의 방법을 넓혔다는 의미도 있다고 평가합니다.

    계층적 한계를 지적하는 쪽

    당시 사회주의 계열은 토산품 값이 올라 이익이 한국인 자본가에게 돌아가고, 가난한 민중은 더 비싼 물건을 사야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운동을 이끈 일부 세력이 뒤에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론으로 기운 점도 한계로 듭니다.

    더 알아두기

    회사령 폐지
    회사령은 회사를 세울 때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1910년 법령입니다. 1920년 이를 신고제로 바꾸면서 한국인 회사 설립도 쉬워졌지만, 규모가 큰 일본 자본이 훨씬 빠르게 들어왔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민족 자본을 키우려는 경제 자립 운동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 당시 사회주의 계열은 토산품 값만 올려 자본가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고 비판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물산장려운동이란?

    EBSi · 1만회 ·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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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의 EBS 강의로 물산 장려 운동을 정면으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94 민족기업가 정세권, 침체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활성화시키다

    KBS 히스토리 · 2,713회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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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침체된 물산 장려 운동을 되살린 정세권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일제강점기 '물산 장려 운동' 이란? l #대한외국인 l #MBCevery1 l EP.118

    MBC every1 · 7,047회 ·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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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물산 장려 운동이 무엇인지 퀴즈로 설명하는 예능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물산장려운동부터 #민립대학설립운동#문맹퇴치운동(feat.인피니트-내꺼하자)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3.9만회 ·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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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산 장려·민립 대학·문맹 퇴치를 함께 정리하는 교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기억록] 서장훈, 조만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MBCentertainment · 2만회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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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산 장려 운동을 이끈 조만식을 소개하는 캠페인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93 애국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물산장려운동

    KBS 히스토리 · 1.7만회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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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 계몽·브나로드·물산 장려를 한 편에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시대 변란사] 결국 실패로 돌아간 국산품 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

    문역뜰 · 156회 ·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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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전개와 한계를 설명합니다.

  9. 10월

    사회

    간도 참변(경신참변)

    1920.10 ~ 1921 · 1년

    봉오동에서 패한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없앤다며 간도의 한인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많은 주민이 살해되고 집과 학교가 불탔습니다.

    배경

    봉오동에서 패한 일제는 만주의 독립군을 없애려고 군대를 대규모로 보낼 구실을 찾았습니다. 1920년 10월 초 중국 마적 무리가 훈춘의 일본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는 훈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이를 독립군과 연결 지으며 조선·시베리아·관동주의 병력을 간도로 들여보냈습니다. 중국 측이 개입한 마적 습격을 일본이 유도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훈춘 사건은 1920년 9월과 10월 초 두 차례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습격 때 마적 무리가 훈춘 시가와 일본 영사관 분관을 공격해 건물이 불타고 일본인 사망자도 나왔습니다. 일본은 이를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가담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8월에 세워 둔 간도 지역 토벌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전개

    일본군은 독립군을 쫓는 한편, 독립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간도 곳곳의 한인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이 작전에서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총을 쏘거나 집과 학교·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한 뒤 보복이 더 심해졌습니다.

    특히 용정 부근 장암동에서는 기독교인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가둔 채 불을 지른 일이 있었고, 이 광경은 현장을 찾은 캐나다인 선교사 마틴 등의 기록으로 외부에 알려졌습니다.

    간도에 들어온 병력은 조선에 주둔하던 제19사단을 중심으로, 시베리아에 나가 있던 부대와 관동군 일부까지 합쳐 연구에 따라 1만 8천~2만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쫓는 부대와 마을을 수색하는 부대로 나뉘어 움직였고, 학교·교회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집중적으로 불태웠습니다.

    결과와 의미

    1920년 12월 18일 자 상하이 『독립신문』은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한인 3,469명이 살해되고 민가 3,209채, 학교 36곳, 교회 36곳이 불탔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사 기간 밖의 피해까지 합하면 희생자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북쪽으로 옮겨 가 밀산에 모였다가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고, 이것이 이듬해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졌습니다.

    간도 한인 사회가 세운 학교와 교회가 무너지면서 교육·종교를 바탕으로 한 민족 운동의 기반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현지 선교사들의 보고가 해외로 전해지면서 일본은 국제 여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8월일본군이 간도 지역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웠습니다.
    2. 1920년 9월마적 무리가 훈춘을 처음 습격했습니다(1차 훈춘 사건).
    3. 1920년 10월 초마적 무리가 훈춘 시가와 일본 영사관 분관을 다시 습격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출병 구실로 삼았습니다.
    4. 1920년 10월 중순일본군 대부대가 여러 방면에서 간도로 들어왔습니다.
    5. 1920년 10월 21~26일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6. 1920년 10월 말용정 부근 장암동에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른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7. 1920년 12월 18일상하이 『독립신문』이 한인 3,469명 피살 등 피해 집계를 보도했습니다.
    8. 1921년 초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 땅으로 옮겨 갔습니다.

    인물

    • 스탠리 마틴

      용정에서 장암동 등의 참상을 직접 조사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보낸 의료 선교사로, 한국 이름 ‘민산해’로 불렸습니다. 용정 제창병원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한편 불탄 마을을 찾아가 사진과 글로 피해를 남겼고, 이 기록이 간도 참변을 외부에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경신참변이라는 이름
    1920년이 경신년이어서 경신참변, 또는 경신대토벌이라고도 부릅니다. 간도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일대로, 19세기 후반부터 한인이 많이 이주해 독립운동 근거지가 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다큐

    다큐 시선 - 1920년, 간도_#001

    EBSDocumentary (EBS 다큐) · 3,382회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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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20년 간도에서 벌어진 학살을 다룬 EBS 다큐 1편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 KBS 2021.03.01.

    KBS News · 40.3만회 ·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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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간도 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기록을 발굴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47 훈춘사건, 간도 출병을 위한 일본의 자작극

    KBS 히스토리 · 3,937회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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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간도 출병의 구실이 된 훈춘 사건을 다룹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민간인 수만 명 학살...간도대학살 사진 추가 공개 / YTN

    YTN · 7,098회 ·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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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참변 당시 학살 현장 사진 공개를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독립군에 패한 일본의 잔혹한 보복, 간도참변과 자유시 참변,

    STB 상생방송 역사 · 4.6만회 ·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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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함께 다루는 방송 강연입니다.

  10. 10.21

    전쟁

    청산리 전투

    1920.10.21 ~ 10.26 · 6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연합 부대가 백운평·완루구·어랑촌 등에서 엿새 동안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배경

    봉오동 전투 뒤 일제가 대규모 병력을 보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당국도 일본의 압력으로 독립군에게 근거지를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은 백두산 쪽 산림 지대로 옮겨 가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마주쳤습니다.

    북로 군정서는 1920년 봄 왕청현에 사관 연성소를 세워 군인을 길렀고,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체코 군단에게서 소총과 기관총 등을 사들여 무장을 갖췄습니다. 일본군은 봉오동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제19사단의 아즈마 지대 등을 보내 이동 중인 독립군을 포위하려 했습니다. 여러 부대를 합친 독립군은 약 2천 명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개

    1920년 10월 21일 북로 군정서는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해 들어오는 일본군 선발대를 공격했습니다. 같은 날부터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에서 싸웠습니다. 이어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쉬구, 천보산, 고동하 등지에서 10월 26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가장 큰 싸움은 10월 22일 어랑촌 전투로,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이 함께 일본군 주력과 하루 종일 싸웠습니다. 독립군은 지형을 이용해 매복과 기습을 거듭한 뒤 흩어져 북쪽으로 물러났습니다.

    10월 23일에는 맹개골·만기구·쉬구, 24일에는 천보산, 26일에는 고동하에서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독립군은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소부대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방식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고, 주민들이 몰래 밥을 지어 날라 준 일도 회고록에 남아 있습니다.

    결과와 의미

    임시 정부 측 발표는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해 1,200여 명을 사살했다고 했습니다. 일본 측 기록은 이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적고 있어 연구에 따라 수치가 크게 다르지만, 독립군 무장 투쟁 가운데 가장 큰 승리로 평가됩니다.

    전투 뒤 일본군은 간도의 한인 마을에 보복을 가했고(간도 참변), 독립군은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봄북로 군정서가 왕청현에 사관 연성소를 세워 군인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2. 1920년 9월 무렵사관 연성소가 첫 졸업생을 냈고, 중국 당국의 요구로 독립군 부대들이 근거지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3. 1920년 10월 중순백두산 쪽으로 이동하던 독립군이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 이르렀습니다.
    4. 1920년 10월 21일북로 군정서가 백운평 골짜기에서 일본군 선발대를 매복 공격했고,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에서 싸웠습니다.
    5. 1920년 10월 22일새벽 천수평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한 뒤, 어랑촌에서 일본군 주력과 하루 종일 싸웠습니다.
    6. 1920년 10월 23~24일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7. 1920년 10월 26일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북쪽으로 물러났습니다.
    8. 1920년 12월독립군 부대들이 밀산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만들었습니다.

    인물

    • 김좌진1889~1930

      북로 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대한 광복회에서 활동한 뒤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대종교 계열의 북로 군정서를 이끌며 사관 연성소에서 군인을 길렀습니다. 이후 신민부를 이끌었고, 1930년 북만주에서 공산주의 계열 청년에게 암살됐습니다.

    • 홍범도1868~1943

      대한 독립군을 이끌고 완루구·어랑촌 전투 등을 치렀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이끈 의병 출신 지휘관입니다. 청산리 뒤 러시아로 옮겨 갔습니다.

    • 이범석1900~1972

      북로 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중국 운남 강무당을 졸업한 군인으로, 뒤에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습니다. 광복 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됐습니다. 회고록 『우둥불』로 청산리 전투를 기록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전과 숫자에 대하여
    봉오동·청산리의 일본군 사상자 수는 당시 독립운동 쪽의 발표에 기대고 있고, 일본군 기록은 이를 크게 낮춰 적었습니다. 그래서 학계는 정확한 수보다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이겼다는 사실과 그 의미에 무게를 둡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다큐

    광복절 특별 기획 — 청산리, 전투의 재구성

    KBS대전 · 39.5만회 · 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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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청산리 전투를 재연 영상으로 재구성한 KBS 특집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팩추얼 드라마' 청산리, 전투의 재구성 | KBS 20240815 방송

    KBS 다큐 · 4.3만회 · 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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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참전자 기록으로 청산리 전투를 재구성한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항일무장투쟁-9] 청산리 대첩(김좌진&홍범도) | 황현필

    황현필 한국사 · 31만회 ·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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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김좌진·홍범도 부대의 청산리 전투를 다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찬란한 독립투쟁. 청산리전투 속으로

    건들건들 · 7.4만회 ·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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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청산리 전투의 전개를 그림과 함께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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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함께 그린 짧은 만화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대전 청산리 전투 100주년 특별기획 그때 우리는 하나였다 / KBS대전 20201020 방송

    KBS대전 [CULTURE&DOCUMENTARY] · 6.1만회 · 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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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청산리 전투 100주년 특집으로 공연과 증언을 엮어 전투 설명은 일부입니다.

    창작 · 드라마

    우둥불 1부 밤에만 흐르는 두만강 #김좌진 #홍범도 #청산리대첩 ㅣ 극본 김동현 ㅣ 출연 김영철 문오장 김미숙 이동주 조재훈 최명수 [추억의 영상] KBS방송

    KBS 같이삽시다 · 3.1만회 · 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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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를 그린 옛 KBS 드라마라 창작이 섞였습니다.

  11. 1921

    6.28

    사회

    자유시 참변

    간도 참변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옮겨 간 독립군이 지휘권 다툼 끝에 러시아 적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배경

    간도 참변을 피해 북쪽으로 옮겨 간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말 밀산에서 대한 독립 군단으로 뭉쳤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뒤 내전 중이던 러시아 적군(볼셰비키)의 지원을 기대하고 아무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습니다.

    자유시에는 이미 러시아 한인 무장 부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쪽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쪽으로 나뉘어 누가 한인 부대 전체를 지휘할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밀산에 모인 부대들은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만들었는데, 규모는 약 3,500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1년 초 이들은 우수리강을 건너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옮겨 갔습니다. 김좌진 등 일부 지휘관은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는 데 반대하거나 도중에 만주로 되돌아갔습니다.

    전개

    러시아 공산당 극동 기관은 이르쿠츠크파 쪽이 중심이 된 고려 혁명 군정 의회에 지휘권을 맡겼습니다. 사할린 의용대 등 이에 따르지 않은 부대는 무장 해제를 요구받았습니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과 고려 혁명군이 이를 거부한 부대를 포위해 공격했습니다. 교전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이 죽거나 강에 빠져 숨졌고, 살아남은 이들은 포로가 돼 강제 노역을 하거나 적군에 편입됐습니다.

    고려 혁명 군정 의회의 총사령관은 러시아 적군 지휘관 칼란다리시빌리였습니다. 자유시에 모인 부대 가운데 상당수는 상하이파와 가까운 사할린 의용대 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지휘권 문제는 곧 두 공산주의 계파의 주도권 다툼이 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희생자 수는 기록한 쪽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피해를 입은 쪽의 기록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00여 명으로 나오지만, 공격한 쪽의 보고는 이보다 훨씬 적게 적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만주에서 넘어간 독립군 주력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살아남은 일부는 만주로 돌아가 독립군을 다시 정비했고, 독립운동 안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사이의 불신이 깊어졌습니다.

    살아남은 병력은 이르쿠츠크로 옮겨져 적군 부대로 재편됐습니다. 두 계파는 참변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렸고, 이 일은 뒤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12월밀산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대한 독립 군단으로 뭉쳤습니다.
    2. 1921년 1~3월대한 독립 군단이 이만을 거쳐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했습니다.
    3. 1921년 5월 무렵러시아 공산당 극동 기관이 고려 혁명 군정 의회를 세우고 한인 부대 지휘권을 맡겼습니다.
    4. 1921년 6월 28일무장 해제를 거부한 부대를 러시아 적군과 고려 혁명군이 포위해 공격했습니다.
    5. 1921년 여름포로와 남은 병력이 이르쿠츠크로 옮겨져 적군 부대에 편입됐습니다.
    6. 1922년 이후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이 조직을 다시 세워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이어졌습니다.

    인물

    • 칼란다리시빌리1876~1922

      고려 혁명 군정 의회 총사령관으로 무장 해제를 지휘했습니다.

      조지아 출신 혁명가로, 러시아 내전 때 시베리아에서 빨치산 부대를 이끈 적군 지휘관입니다. 1922년 초 시베리아 북부 작전 도중 전사했습니다.

    • 박일리아

      사할린 의용대를 이끌고 지휘권 이양과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연해주·아무르 일대에서 활동한 한인 무장 부대 지휘관으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쪽과 가까웠습니다. 만주에서 넘어온 독립군 부대 상당수가 그의 부대 쪽에 합류해 있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흔한 오해
    자유시 참변은 일본군과 싸운 전투가 아니라, 러시아 땅에서 한인 무장 세력 사이의 지휘권 다툼에 러시아 적군이 개입해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흑하 사변’이라고도 부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강의

    [자유시참변]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 역사학자 심용환의 약속! 이왕 이렇게 된 것, 더 깊이 역사를 공부하려는 시민들과 함께! | [무묻사] #심용환 #현재사는

    현재사는 심용환 · 15.9만회 · 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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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심용환이 자유시 참변을 깊이 있게 다룬 긴 강연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자유시 참변,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의 비극

    KBS 히스토리 · 4.8만회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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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간도 참변 이후 자유시 참변까지를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독립 영웅들의 갈등과 분열이 난무한 자유시의 비극.. - 끝나지 않는 역사 왜곡,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익주는 역사 · 7.6만회 · 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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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이익주 교수가 자유시 참변과 그 배경을 강의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자유시 참변 때 600명 사망?…군사편찬위도 “과장된 것” / KBS 2023.08.30.

    KBS News · 5,911회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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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자유시 참변 사망자 수 논란을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홍범도와 홍범도 [풀영상] | 창 445회 (KBS 23.12.05)

    KBS시사 · 2만회 · 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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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 논란과 함께 자유시 참변의 실제를 따진 시사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 '자유시 참변' 일본의 사주였을까?

    역사돋보기 이영 · 5,425회 ·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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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자유시 참변의 경과와 배후 논란을 설명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짤막상식]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 자유시 사변이란? / YTN

    YTN · 1.9만회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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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자유시 참변이 무엇인지 짧게 설명한 YTN 영상입니다.

  12. 11월

    외교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1921.11 ~ 1922.2 · 3개월

    미국·영국·일본 등 9개국이 군비 축소와 태평양·극동 문제를 논의한 국제회의입니다. 임시 정부는 대표단을 보내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한국 문제는 정식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 국내에서는 13도 대표 367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워싱턴 대표단에 보내 활동을 뒷받침했습니다.
    • 한국 문제가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 못하면서, 외교 활동만으로 독립을 얻기 어렵다는 인식이 임시 정부 안팎에서 커졌습니다.

    배경

    1921~1922년 미국은 해군력 축소와 태평양·극동 지역의 질서를 논의할 국제회의를 워싱턴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임시 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겪은 것처럼 이번에도 열강에 한국 독립을 호소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전개

    임시 정부는 이승만을 전권대사로 하는 대표단을 워싱턴에 보내 '한국 인민의 요구서'와 독립 청원서를 각국 대표단에 전달했습니다. 국내에서도 13도 대표 367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보내 대표단의 활동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문제는 회의 참가국(미국·영국·일본·프랑스·중국 등 9개국)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참가국이었던 데다, 열강은 동아시아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더 중시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회의는 1922년 2월 해군 군축 조약과 중국 문제에 관한 9개국 조약을 맺으며 끝났고, 한국 독립 문제는 어떤 결론도 얻지 못했습니다. 한국 문제가 정식 의제로 다뤄지지 못하면서, 외교 활동만으로 독립을 얻기 어렵다는 인식이 임시 정부 안팎에서 커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1년 11월 12일워싱턴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2. 1921년 11월임시 정부 대표단이 청원서를 각국 대표단에 전달했습니다.
    3. 1921~1922년국내 13도 대표들의 서명 청원서가 대표단 활동을 뒷받침했습니다.
    4. 1922년 2월 6일회의가 끝나며 해군 군축 조약과 9개국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한국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32. 이승만, 승전 강국 상대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독립외교 또 실패

    오하나 · 6회 ·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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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독립군

만주·연해주·중국 관내에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으려 한 군대입니다.

의병의 뒤를 이어 신흥 무관 학교 등에서 길러졌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1940년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습니다.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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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l 일제 강점기 16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8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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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1930년대 무장독립전쟁#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암기비법!!(6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4.2만회 ·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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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통치

3·1 운동 뒤 일제가 겉으로는 자유를 조금 허용하며 한국인을 나누려 한 1920년대 통치 방식입니다.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한글 신문 발행을 허가했지만, 경찰 수는 오히려 늘었고 신문은 검열을 받았습니다. 일부 한국인을 친일 세력으로 키워 민족 운동을 갈라놓으려 했습니다.

1925년 치안 유지법으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강하게 처벌했습니다.

해설

1920년대 문화 통치 l 일제 강점기 4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3.8만회 ·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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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40분) 무단통치 VS 문화통치 뭐가 더 악랄할까? 한국인들은 맞아야 말을 듣지!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의 잔재 | 사피엔스 월요특강

사피엔스 스튜디오 · 3.7만회 · 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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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빡공시대 중3역사2[2-2](1)문화 통치(2021교육과정)-음질개선판

빡공시대TV · 40.7만회 · 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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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