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13개월 밀린 급료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받은 구식 군인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도시 빈민이 합세해 일본 공사관과 궁궐을 습격했고, 흥선대원군이 잠시 다시 권력을 잡았습니다.
- 명성황후는 궁을 빠져나가 충주로 피신했습니다.
- 청은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크게 늘었습니다.
배경
개항 뒤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 곡물값이 오르면서 서울 백성의 살림이 어려워졌습니다. 정부는 개화 정책에 돈을 쓰는 한편 재정난이 겹쳐, 구식 군대에 줄 급료를 13개월이나 주지 못했습니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과 비교되며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민씨 척족이 요직을 차지하고, 군인 급료를 맡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 쪽 관리들의 부정이 알려지면서 불만은 정권에 대한 분노로 번졌습니다.
전개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무렵 한 달 치 급료로 나온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 양도 모자라자, 군인들이 담당 관리와 충돌했습니다. 주동자가 잡혀가자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뜻을 전했습니다.
봉기한 군인들에게 서울 왕십리·이태원 일대의 빈민들이 합세했습니다. 이들은 민겸호 등 고위 관리의 집을 부수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죽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습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제물포로 달아나 영국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군중은 창덕궁에 들어가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했습니다.
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해 궁을 빠져나가 충주 장호원 일대로 피신했습니다. 고종은 사태 수습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겼고,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없애고 5군영을 되살렸으며,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왕비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본이 군함과 병력을 보내오자, 조선 조정의 요청과 청의 판단에 따라 청도 우창칭(오장경)이 이끄는 약 3천 명의 군대를 보냈습니다. 음력 7월 13일(양력 8월 26일) 청군은 흥선대원군을 청군 진영으로 불러 붙잡아 톈진으로 압송했고, 곧이어 군란 가담자를 진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은 약 한 달 만에 끝났고,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원군은 청 바오딩에 3년 동안 유폐됐다가 1885년에 돌아왔습니다.
청은 군대를 서울에 머물게 하고 마젠창(마건상)과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보냈으며,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했습니다.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됐습니다.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을 맺어 배상금을 물고 일본군의 서울 주둔을 허용했습니다. 청과 일본 두 나라 군대가 서울에 함께 머물게 됐고, 조정 안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온건 개화파와 청의 간섭에 반대하는 급진 개화파가 갈라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명성황후 민씨1851~1895
민겸호1838~1882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임오군란의 성격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 정권의 평가
더 알아두기
- ‘임오’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