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이상재 등이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며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총독부의 방해와 가뭄·수해로 모금이 막혔고, 총독부는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대응했습니다.
배경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으로 조선에도 대학을 세울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겼지만, 당시 한국에는 대학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인 지식인들은 민족의 지도자를 길러 낼 고등 교육 기관을 우리 손으로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실력 양성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3·1 운동 뒤 교육열은 크게 높아졌지만, 한국인이 다닐 수 있는 고등 교육 기관은 사립 전문학교 몇 곳뿐이었고 이들도 법적으로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습니다.
전개
1922년 11월 이상재 등이 조선 교육회를 중심으로 발기에 나섰고, 1923년 3월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 총회가 열렸습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로 1천만 원을 모금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과 만주·미주 등에 지방부를 두어 강연과 모금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강연을 감시하고 모금을 방해했으며, 1923~1924년 가뭄과 수해가 겹쳐 모금액이 목표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운동 방향을 두고 내부 의견도 갈렸습니다.
1923년 3월 29일 서울 종로 중앙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발기 총회에는 발기인 1,170명 가운데 462명이 참석했습니다. 총회가 발표한 발기 취지서는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정치·외교·산업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교육이며, 유럽의 문예 부흥과 산업 혁명도 대학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운동은 1924년 무렵 사실상 멈췄습니다. 총독부는 1924년 경성 제국 대학 예과를 열고 1926년 법문학부·의학부를 개설해 대응했습니다. 경성 제대는 일본인 학생 비중이 높았고, 한국인이 세운 대학은 광복 뒤에야 생겼습니다.
학계에서는 총독부가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을 서두른 것을 이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민간이 대학을 세우려던 시도는 좌절됐지만,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광복 뒤 여러 사립 대학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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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人의 運命을 如何히 開拓할가 政治냐 外交냐 産業이냐 勿論 此等事가 모도 다 必要하도다”
인물
이상재1850~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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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 제국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