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문화 통치기

실력 양성 운동과 사회 운동

물산 장려·민립 대학 설립 운동, 소작 쟁의와 형평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됐고, 치안 유지법이 사회주의·독립운동을 옥죄었습니다.

기간
1922.1 ~ 1925.12.31 · 3년 11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사이토
담긴 것
사건 11 · 영상 57 · 영화·드라마 8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4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실력 양성 운동(물산 장려·민립 대학)

최태성 1TV · 16.9만회 · 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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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 실력 양성 운동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20.8 ~ 1924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경성 제국 대학 설립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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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치안 유지법 시행

해설·교양 · 강의

1920년대 저항(심화 속성)

최태성 1TV · 25.6만회 · 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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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2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을 한 강에 정리한 강의입니다.

1919.9.2 ~ 1931.5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치안 유지법 시행

해설·교양 · 다큐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KBS 히스토리 · 8.3만회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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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원봉의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까지를 다룬 KBS 방송입니다.

1919.11.9 ~ 1938.10.10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치안 유지법 시행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8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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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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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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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영화 · 2016· 공식 영상

「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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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3

1923년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황옥 경부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영화 밀정 결말포함 명장면 리뷰 적은 늘 우리 안에 있었다

탄직이 · 26.9만회 ·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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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7· 공식 영상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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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3.9.1 ~ 1926

관동 대지진 뒤 일본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재판정에 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드라마 · 2011· 제목만

「절정」

배경 1925 ~ 1944.1

KBS 3·1절 특집.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

영화 · 2015· 공식 영상

「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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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5

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산군 대호의 아픈 가족사(영화 대호 리뷰)

천화몽 -천개의 영화를 꿈꾸다! · 25.5만회 ·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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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5· 제목만

「청연」

배경 1925 ~ 1933

일제강점기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영화 · 2016· 공식 영상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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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5 ~ 1945.8.15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삶. 사실과 다른 각색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건 연표 11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설치 (~1925), 산미 증식 계획 (~1934), 물산 장려 운동 (~1923), 워싱턴 회의와 독립 청원 (~1922.2)

  1. 1922

    11월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922.11 ~ 1924 · 2년

    이상재 등이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며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총독부의 방해와 가뭄·수해로 모금이 막혔고, 총독부는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대응했습니다.

    배경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으로 조선에도 대학을 세울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겼지만, 당시 한국에는 대학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인 지식인들은 민족의 지도자를 길러 낼 고등 교육 기관을 우리 손으로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실력 양성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3·1 운동 뒤 교육열은 크게 높아졌지만, 한국인이 다닐 수 있는 고등 교육 기관은 사립 전문학교 몇 곳뿐이었고 이들도 법적으로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습니다.

    전개

    1922년 11월 이상재 등이 조선 교육회를 중심으로 발기에 나섰고, 1923년 3월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 총회가 열렸습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로 1천만 원을 모금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과 만주·미주 등에 지방부를 두어 강연과 모금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강연을 감시하고 모금을 방해했으며, 1923~1924년 가뭄과 수해가 겹쳐 모금액이 목표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운동 방향을 두고 내부 의견도 갈렸습니다.

    1923년 3월 29일 서울 종로 중앙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발기 총회에는 발기인 1,170명 가운데 462명이 참석했습니다. 총회가 발표한 발기 취지서는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정치·외교·산업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교육이며, 유럽의 문예 부흥과 산업 혁명도 대학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운동은 1924년 무렵 사실상 멈췄습니다. 총독부는 1924년 경성 제국 대학 예과를 열고 1926년 법문학부·의학부를 개설해 대응했습니다. 경성 제대는 일본인 학생 비중이 높았고, 한국인이 세운 대학은 광복 뒤에야 생겼습니다.

    학계에서는 총독부가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을 서두른 것을 이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민간이 대학을 세우려던 시도는 좌절됐지만,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광복 뒤 여러 사립 대학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2년 2월제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조선에도 대학을 세울 법적 근거가 생겼습니다.
    2. 1922년 11월이상재 등 조선 교육회 인사들이 민립 대학 설립 준비에 나섰습니다.
    3. 1923년 3월 29일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 총회가 열리고 발기 취지서가 발표됐습니다.
    4. 1923년전국과 만주·미주 등에 지방부를 두고 강연회와 모금을 벌였습니다.
    5. 1923~1924년가뭄과 수해, 총독부의 감시가 겹쳐 모금이 목표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6. 1924년총독부가 경성 제국 대학 예과를 열었습니다.
    7. 1926년경성 제국 대학에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개설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吾人의 運命을 如何히 開拓할가 政治냐 外交냐 産業이냐 勿論 此等事가 모도 다 必要하도다”
    —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1923)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정치인가, 외교인가, 산업인가. 물론 이런 일이 모두 다 필요하다. 취지서는 이어서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가장 급한 수단이 교육이라고 말합니다(원문은 띄어쓰기 없이 쓰였습니다).

    인물

    • 이상재1850~1927

      민립 대학 기성회를 이끌었습니다.

      독립협회·YMCA 활동을 한 원로로, 1920년대 여러 민족 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간회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더 알아두기

    경성 제국 대학
    일제가 1924년 서울에 세운 조선 유일의 대학입니다. 일본 제국의 여섯 번째 제국 대학이었고, 광복 뒤 여러 학교와 합쳐져 국립 서울 대학교의 바탕이 됐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이란?

    EBSi · 5,533회 ·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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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의 EBS 강의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4단원 8차시│실력 양성 운동│

    워니비 · 5.1만회 ·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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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 양성 운동의 하나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3역사:) 민립대학 설립운동

    unimong Sa · 652회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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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다룬 중학교 역사 수업입니다.

  2. 1923

    1월

    정치

    국민 대표 회의

    1923.1 ~ 1923.6 · 5개월

    임시 정부의 활동 방향을 두고 상하이에 독립운동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임시 정부를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서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 이후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고(1925)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뽑았으며,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바꿨습니다.

    배경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 들어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일제의 감시로 국내와 연결하던 연통제·교통국 조직이 무너져 자금이 끊겼고, 외교 활동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대통령 이승만이 1919년 미국에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를 청원했던 사실이 알려져 반발이 컸고,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쪽과 외교·실력 양성을 중시하는 쪽의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신채호·박용만 등은 1921년 베이징에서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전개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내외 여러 단체의 대표 120여 명이 모여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는 약 다섯 달 동안 이어졌습니다.

    참석자들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창조파는 임시 정부를 없애고 새 정부를 세우자고 했고, 개조파는 임시 정부를 유지하되 조직과 운영을 고치자고 했습니다. 임시 정부를 그대로 지키자는 쪽은 회의 자체에 거리를 뒀습니다. 끝내 합의하지 못한 채 개조파가 빠져나갔고, 창조파는 따로 새 정부를 세우려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나 소련의 퇴거 요구로 흩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회의가 결렬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떠나 임시 정부의 세력이 크게 줄었습니다. 임시 의정원은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하고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뽑았으며, 헌법을 고쳐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꿨습니다. 1927년에는 다시 국무위원들이 함께 이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9년 2월이승만 등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2. 1921년 4월베이징에서 신채호·박용만 등이 군사 통일 회의를 열고 임시 정부를 비판하며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3. 1921년 5월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4. 1923년 1월 3일상하이에서 국민 대표 회의가 개막했습니다.
    5. 1923년 5월창조파와 개조파가 끝내 합의하지 못하고 개조파가 회의에서 빠져나갔습니다.
    6. 1923년 6월남은 창조파가 따로 새 정부 조직을 선포했습니다.
    7. 1923년 8월 이후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갔으나 소련의 퇴거 요구로 흩어졌습니다.
    8. 1925년 3월임시 의정원이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인물

    • 안창호1878~1938

      개조파를 대표해 임시 정부를 고쳐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독립협회·신민회에서 활동했고,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들었습니다. 임시 정부 내무총장·노동국 총판을 지냈으며, 윤봉길 의거 뒤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93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신채호1880~1936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임시 정부 개편을 주장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논설로 이름을 알린 역사가이자 언론인입니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을 강하게 비판했고, 1923년 의열단의 「조선 혁명 선언」을 썼습니다. 뒤에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김규식1881~1950

      창조파 쪽에 서서 새 정부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가 독립을 호소했고, 임시 정부 외무총장·학무총장 등을 지냈습니다. 광복 뒤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에 나섰으며, 한국 전쟁 때 납북돼 195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창조파와 개조파의 주장

    새 조직이 필요하다고 본 쪽(창조파)

    상하이 임시 정부는 성립 과정에서 대표성이 약했고 외교 중심 노선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무장 투쟁 세력과 여러 지역 대표가 함께 새 최고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임시 정부를 고쳐 쓰자고 본 쪽(개조파)

    3·1 운동으로 세워진 임시 정부의 상징성과 국내외 인정을 버리면 독립운동 전체가 흩어진다고 봤습니다. 정부는 유지하고 인물과 제도를 고쳐 실효성을 높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탄핵과 헌법 재판소

    해설·교양 · 강의

    오늘148_국민 대표 회의 개막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7,494회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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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이 국민 대표 회의 개막을 정면으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82 국민대표회의 개최 - 임시정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KBS 히스토리 · 1.1만회 ·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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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대표 회의와 개조파·창조파 대립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81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다

    KBS 히스토리 · 3,527회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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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대표 회의의 개최와 구성을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3 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민대표회의) | 박기훈

    티클 · 697회 ·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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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정부의 흐름 속에서 국민 대표 회의를 정리합니다.

  3. 운동

    만주 3부 성립

    1923 ~ 1925 · 2년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이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정비돼 각자 관할 지역에서 자치 행정과 군사 활동을 맡았습니다.

    •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이 독립운동가를 잡아 넘기기로 한 미쓰야 협정으로 활동이 크게 위축됐고, 3부는 1920년대 말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재편됐습니다.

    배경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졌던 독립군은 1920년대 초 남·북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다시 세웠습니다.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나눠 맡아 주민에게서 세금을 걷고 행정을 맡으면서 군대를 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한 통의부로 통합을 시도했으나 노선 갈등으로 나뉘었습니다.

    1922년 8월 남만주의 여러 단체가 모여 대한 통의부를 세웠지만, 공화제를 따르며 임시 정부를 받드는 쪽과 대한제국의 황제 체제를 되살리자는 복벽주의 쪽이 부딪혀 의군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통의부 안의 일부 부대는 임시 정부 직할을 내세우며 따로 참의부를 만들었습니다.

    전개

    1923~1925년 사이 세 단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압록강 건너편 지역의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 부대를 내세웠고, 남만주의 정의부는 가장 넓은 지역을 맡았으며, 북만주의 신민부는 김좌진 등 북로 군정서 출신이 중심이 됐습니다.

    세 단체는 각각 입법·행정·사법 기구를 갖춘 자치 정부 형태를 띠었고, 주민 교육과 산업을 돌보면서 국내로 부대를 보내 일본 경찰 기관을 공격했습니다.

    참의부는 1923년 8월, 정의부는 1924년 11월, 신민부는 1925년 3월에 각각 세워졌습니다. 참의부 대원들은 1924년 5월 압록강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의 배를 공격했으나 총독은 무사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 간부들이 일본 경찰의 기습을 받아 참의장 최석순 등 여럿이 전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만주 군벌 장쭤린 측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중국 관헌이 한인 독립운동가를 잡아 일본에 넘기면 상금을 주는 내용이어서 3부의 활동이 크게 위축됐습니다.

    1920년대 말 3부는 통합 운동을 벌였으나 방식을 두고 갈라져, 남만주에는 국민부(조선 혁명당·조선 혁명군),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뒤에 한국 독립당·한국 독립군)로 재편됐습니다. 이 두 부대가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의 주역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2년 8월남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 대한 통의부를 세웠습니다.
    2. 1923년노선 갈등으로 복벽주의 계열의 의군부가 통의부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3. 1923년 8월임시 정부 직할을 내세운 참의부가 세워졌습니다.
    4. 1924년 5월참의부 대원들이 압록강에서 사이토 총독 일행의 배를 공격했습니다.
    5. 1924년 11월남만주의 여러 단체가 통합해 정의부를 세웠습니다.
    6. 1925년 3월북만주에서 김좌진 등이 신민부를 세웠습니다.
    7. 1925년 봄고마령에서 참의부 간부들이 일본 경찰의 기습을 받아 여럿이 전사했습니다.
    8. 1925년 6월총독부와 만주 군벌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9. 1928~1929년3부 통합 논의 끝에 북만주의 혁신 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다시 나뉘어 정비됐습니다.

    인물

    • 오동진1889~1944

      정의부 군사 위원장으로 무장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3·1 운동 뒤 만주에서 광복군 총영 등을 이끌며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습니다. 1927년 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체포됐고, 오랜 옥살이 끝에 1944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습니다.

    • 김좌진1889~1930

      신민부 군사 책임자로 북만주 무장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북로 군정서 총사령관 출신입니다. 신민부를 이끌며 한인 사회의 자치와 군사 훈련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세 단체 한눈에
    참의부(압록강 대안, 임시 정부 직할), 정의부(남만주 지린·펑톈 일대), 신민부(북만주, 김좌진 등). 모두 한인 사회를 다스리는 자치 조직이자 독립군 조직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해설

    만주 독립군의 재정비와 일제의 대응(feat.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 l 일제 강점기 14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2.9만회 ·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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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독립군이 재편된 과정을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항일무장투쟁-11] 자유시 참변, 3부 설립, 미쓰야 협정 그리고 지청천의 한국독립군까지 빠르게.

    황현필 한국사 · 8.6만회 ·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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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자유시 참변 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성립을 다룹니다.

  4. 3.16

    사회

    어린이날 제정과 색동회

    1923.3.16 ~ 5.1 · 47일

    방정환 등이 도쿄에서 어린이 운동 단체 색동회를 만들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뒤, 1923년 5월 1일 조선 소년 운동 협회 주최로 첫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습니다.

    •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쓰이게 한 인물로 꼽히며,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 어린이날은 1946년부터 5월 5일로 날짜가 바뀌었고 1975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됐습니다.

    배경

    1920년대 들어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소년 운동이 확산했습니다. 그때까지 아이는 '애·어린것'처럼 낮춰 불리는 존재였고, 가족 안에서도 독립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개

    방정환은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어 소년 운동을 시작했고, 1923년 3월 16일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어린이 운동 단체 색동회를 결성했습니다. 같은 해 3월 20일에는 개벽사에서 어린이 대상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1923년 5월 1일 조선 소년 운동 협회 주최로 첫 '어린이날' 행사가 서울 천도교당 등에서 열렸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표어를 담은 선전지를 나눠 주며 어린이의 인권을 존중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어린이날은 이후에도 해마다 이어졌고, 1927년에는 날짜가 5월 첫째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광복 뒤 1946년부터 5월 5일로 고정됐고, 1975년부터는 법정 공휴일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1년방정환이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습니다.
    2. 1923년 3월 16일방정환 등이 도쿄에서 색동회 결성을 논의했습니다.
    3. 1923년 3월 20일잡지 『어린이』가 창간됐습니다.
    4. 1923년 3월 30일색동회가 정식으로 창립됐습니다.
    5. 1923년 5월 1일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6. 1946년어린이날이 5월 5일로 고정됐습니다.
    7. 1975년어린이날이 법정 공휴일이 됐습니다.

    인물

    • 방정환1899~1931

      색동회를 만들고 어린이날 제정을 이끌었습니다.

      호는 소파.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로, 아동 문학과 소년 운동에 힘써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쓰이게 했습니다. 지나친 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32세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어린이'라는 말
    그전까지 아이를 가리키던 말은 '애·어린것'처럼 낮잡아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방정환은 '늙은이·젊은이'처럼 어른과 대등한 인격체를 뜻하는 말로 '어린이'를 쓰자고 제안했고, 이 말이 지금까지 굳어졌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어린이'라는 단어와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의 인생 [인물백과사전]

    세상의모든지식 · 7만회 ·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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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기록 · 뉴스

    “해처럼 씩씩하게” 100년 전 방정환의 '어린이' (2023.05.05/뉴스데스크/MBC)

    MBCNEWS · 5,659회 ·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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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4.25

    운동

    형평 운동

    신분제가 법적으로 없어진 뒤에도 차별받던 백정들이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만들어 평등한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배경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법적으로 없어졌지만, 소·돼지를 잡는 일을 하던 백정에 대한 차별은 그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호적에 따로 표시되거나 자녀가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는 일이 있었고, 교회에서 자리를 따로 앉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형평사가 생긴 직접 계기로는, 백정 출신 이학찬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려다 신분 때문에 거절당한 일이 흔히 꼽힙니다. 이를 본 진주의 양반 출신 사회 운동가 강상호가 백정 출신 인사들과 뜻을 모았습니다. 형평사 쪽은 차별받는 백정이 전국에 40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전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백정 출신 장지필·이학찬과 양반 출신 강상호·신현수 등이 조선 형평사를 만들었습니다. ‘형평’은 저울처럼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계급 타파, 모욕적 호칭 폐지, 교육 장려 등을 내걸었고, 이듬해 본부를 서울로 옮기며 전국에 지사·분사를 두었습니다.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형평사원을 습격하는 충돌도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사회주의 계열과 연대해 신간회 등 민족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창립 직후 진주에서는 형평사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쇠고기를 사지 않는 운동을 벌이고, 형평사를 도운 사람들을 ‘새 백정’이라 부르며 공격했습니다. 1925년 8월 경북 예천에서는 형평사 기념식에 몰려온 주민들이 사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에서도 노선 다툼이 있었습니다. 1924년 본부 위치를 두고 진주에 두자는 온건한 진주파(강상호 등)와 서울로 옮기자는 혁신파(장지필 등)가 부딪혔고, 결국 본부는 서울로 옮겨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과 내부 노선 다툼으로 운동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1935년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고 신분 해방보다 회원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단체로 변했습니다. 형평 운동은 한국 인권 운동의 선구로 꼽히며, 진주에는 형평 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933년에는 형평사 청년 회원들이 비밀 결사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대거 검거된 형평 청년 전위 동맹 사건이 일어나 운동의 힘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4년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됐습니다.
    2. 1923년 4월 24~25일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 발기 총회와 창립이 이뤄졌습니다.
    3. 1923년 5월진주에서 창립 축하식이 열렸고, 반대하는 농민들이 쇠고기 불매 등으로 맞섰습니다.
    4. 1924년본부 위치를 둘러싼 진주파와 혁신파의 갈등 끝에 본부를 서울로 옮겼습니다.
    5. 1925년 8월경북 예천에서 형평사 기념식에 주민들이 몰려와 사원들을 폭행했습니다.
    6. 1927년 이후사회주의 계열과 연대하고 신간회 등 민족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7. 1933년형평 청년 전위 동맹 사건으로 청년 회원들이 대거 검거됐습니다.
    8. 1935년형평사가 이름을 대동사로 바꿨습니다.

    사료로 읽기

    “公平은 社會의 根本이요 愛情은 人類의 本良이라. 然함으로 我等은 階級을 打破하며 侮辱的 稱號를 廢止하며 敎育을 獎勵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期함이 本社의 主旨이라”
    — 「조선 형평사 설립 취지문」(1923)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호칭을 없애며 교육을 장려해 우리도 참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이다.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인물

    • 강상호1887~1957

      양반 출신으로 형평사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진주 대안동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정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다 ‘새 백정’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본부 이전 문제 때 진주에 두자는 쪽을 이끌었고, 200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습니다.

    • 장지필

      백정 출신으로 형평사를 함께 세우고 서울 본부 시기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백정 출신 지도자로, 본부를 서울로 옮기자는 혁신파를 이끌며 전국 조직을 키웠습니다.

    더 알아두기

    일본의 수평사
    일본에서도 1922년 차별받던 부락민이 전국 수평사를 만들어 평등을 요구했습니다. 형평사는 수평사와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조선의 신분제

    해설·교양 · 강의

    오늘005_[이벤트 종료] 형평운동의 시작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5,339회 ·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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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이 형평 운동의 시작을 짧게 짚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80 백정 차별과 형평사 운동

    KBS 히스토리 · 1.2만회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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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백정 차별과 형평사 운동을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 진주의 형평운동 [다큐ON-Docu ON] | KBS 250809 방송

    KBS 다큐 · 4,315회 ·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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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 운동을 다룬 KBS 다큐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특별전] 공평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 - 백정 인권증진 운동

    국립진주박물관 JINJU NATIONAL MUSEUM · 1.1만회 ·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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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으로 형평 운동을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국내최초 기록발굴! [형평운동 100주년 특집 다큐] 백정 인권운동가, 장지필 #백정 #진주 #형평운동

    엠키타카 MKTK · 5,136회 · 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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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형평사를 이끈 장지필을 추적한 100주년 특집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백정들의 투쟁 형평사 운동

    역TV · 1.9만회 ·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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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백정들이 형평사를 만들고 싸운 과정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천민 중의 천민! 극한 차별_"백정도 사람이다" 형평운동

    엠장기획 · 12.4만회 · 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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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백정 차별과 형평 운동을 길게 다룬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형평사 창립의 주인공 강상호, 그의 아들을 만나다!! | 뉴스파다 230524 방송 하이라이트

    엠키타카 MKTK · 806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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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형평사 창립을 이끈 강상호의 아들을 만난 지역 방송입니다.

  6. 8월

    운동

    암태도 소작 쟁의

    1923.8 ~ 1924.8 · 1년

    전남 신안 암태도 농민들이 7~8할에 이르던 소작료를 낮추라며 1년 가까이 싸웠고,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배경

    일제강점기 농민 대부분은 남의 땅을 빌려 짓는 소작농이었습니다. 1920년대 전남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렀는데, 지주 문재철은 그 섬의 큰 땅 주인이었습니다.

    지주 문재철은 암태도와 인근 섬에 넓은 땅을 가진 목포 일대의 대지주로, 뒤에 총독부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섬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줄여 달라는 요구가 거듭 거절되자 조직을 만들어 한꺼번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전개

    1923년 8월 서태석 등이 암태 소작인회를 만들어 소작료를 4할로 낮추라고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지주 측과 충돌이 이어지자 경찰이 소작인회 간부들을 잡아 목포로 넘겼습니다.

    1924년 봄과 여름 암태도 농민 수백 명이 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가 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굶으며 석방과 요구 관철을 호소했습니다. 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각지 단체가 지원에 나섰습니다.

    1924년 3월 27일 암태도 면민 대회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지주 집안의 송덕비를 부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4월 22일 소작인들이 송덕비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지주 측과 충돌했고, 경찰은 소작인 50여 명을 연행해 서태석 등 간부를 목포로 넘겼습니다.

    6월 초 400여 명이 목포로 건너가 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며칠 동안 농성했고, 7월 8일부터는 600여 명이 법원 마당에서 굶어 죽기를 각오한 단식 농성(아사 동맹)을 벌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1924년 8월 말 목포 경찰의 중재로 소작료를 4할로 낮추고 고소를 서로 취하한다는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약 1년에 걸친 싸움 끝에 농민이 요구를 관철한 사례로, 이후 다른 섬과 지방의 소작 쟁의에 영향을 줬습니다.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맺은 합의는 소작료를 4할로 정하고, 지주가 소작인회에 2,000원을 기부하며, 밀린 소작료는 3년에 나눠 갚고, 서로 낸 고소를 취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3년 8월서태석 등이 암태 소작인회를 만들고 소작료를 4할로 낮추라고 요구했습니다.
    2. 1923년 가을요구가 거절되자 소작인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3. 1924년 3월 27일면민 대회가 열려 지주 측이 응하지 않으면 송덕비를 부수기로 결의했습니다.
    4. 1924년 4월 22일송덕비를 쓰러뜨리다 지주 측과 충돌했고, 소작인 50여 명이 연행됐습니다.
    5. 1924년 6월 초400여 명이 목포로 건너가 경찰서·법원 앞에서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했습니다.
    6. 1924년 7월 8일600여 명이 목포 법원 마당에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7. 1924년 8월 30일목포경찰서장실에서 소작료 4할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인물

    • 서태석1885~1943

      암태 소작인회를 이끌었습니다.

      암태도 출신으로 면 단위 공직을 지낸 뒤 농민 운동에 나섰습니다. 쟁의 뒤에도 사회 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 문재철

      암태도의 대지주로 소작료 인하 요구에 맞서다 합의에 응했습니다.

      목포 일대의 대지주로 총독부 중추원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뒤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을 벌였습니다.

    더 알아두기

    소작 쟁의
    소작 쟁의는 소작인이 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나 소작권 보장을 요구한 싸움입니다. 1920년대에는 생존권 투쟁 성격이 강했고, 1930년대에는 일제에 맞서는 성격이 더해졌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나의 독립 영웅 l 36 서태석 (역사강사 최태성)

    KBS 히스토리 · 2.1만회 ·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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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암태도 쟁의를 이끈 서태석을 최태성이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남도의 역사이야기] "뭉치어라 작인들아", 암태도 소작쟁의-by 임은우(목포대 사학과)

    목포대 역사TV · 713회 ·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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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대학 사학과가 만든 암태도 소작 쟁의 설명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생존이 걸린 항일 운동' 암태소작쟁의 재평가 -R (220301화/뉴스데스크)

    여수MBC News · 697회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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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암태도 쟁의 참가자들의 유공자 포상을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암태도 소작쟁의#원산총파업(feat.레드벨벳 빨간맛)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5만회 ·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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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농민·노동 운동을 묶어 암태도 소작 쟁의와 원산 총파업을 함께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암태도 소작쟁의 5분만에 완벽정리! (with Clova Dubbing)

    바로알기역사 · 3,524회 ·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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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암태도 소작 쟁의를 5분에 정리한 개인 공부 채널 영상입니다.

  7. 9.1

    사회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도쿄 일대를 덮친 대지진 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과 군경이 많은 조선인을 살해했습니다.

    • 당시 상하이 독립신문은 희생자를 6,661명으로 보도했습니다. 정확한 수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배경

    1923년 9월 1일 정오 무렵 일본 간토(관동) 지방에 규모 7.9로 추정되는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점심을 준비하던 때라 곳곳에서 불이 나 도쿄·요코하마 일대가 크게 불탔고, 사망·실종자가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전개

    혼란 속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헛소문이 퍼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내렸고, 경찰 문서에도 조선인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실려 소문이 더 퍼졌습니다.

    주민들이 만든 자경단은 길목을 막고 발음이 어려운 말을 시켜 보거나 하는 방식으로 조선인을 가려냈고, 죽창·칼 등으로 조선인을 살해했습니다. 군대와 경찰이 학살에 가담한 사례도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인 노동자와 일부 일본인 사회주의자·노동 운동가도 살해됐습니다.

    9월 2일 도쿄 등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9월 3일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으니 엄중히 단속하라는 취지의 전문이 각 지방에 전달됐습니다. 학살은 주로 지진 직후 첫 주에 집중됐습니다.

    같은 시기 노동 운동가들이 경찰서 안에서 살해된 가메이도 사건,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 부부가 헌병 대위 아마카스에게 살해된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지바현 후쿠다무라에서는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의심받은 일본인 행상 일행 9명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희생된 조선인의 정확한 수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상하이 『독립신문』은 6,661명으로 보도했고, 일본 사법성은 이보다 훨씬 적은 수를 발표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부터 조사와 보도를 통제했고, 학살에 가담한 자경단원 일부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오늘날까지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으며,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이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당시 도쿄 제국 대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는 희생자를 2,613명으로 집계했습니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수천 명에서 6천여 명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고, 점심 준비 중이던 곳곳에서 불이 났습니다.
    2. 1923년 9월 1일 밤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른다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3. 1923년 9월 2일도쿄 등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자경단이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4. 1923년 9월 3일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조선인을 단속하라는 전문이 지방에 전달됐습니다. 이 무렵 박열이 ‘보호 검속’으로 붙잡혔습니다.
    5. 1923년 9월 첫 주자경단과 일부 군경이 조선인을 붙잡아 살해하는 일이 집중적으로 벌어졌습니다.
    6. 1923년 9월 6일지바현 후쿠다무라에서 조선인으로 의심받은 일본인 행상 일행 9명이 살해됐습니다.
    7. 1923년 9월 16일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 부부와 어린 조카가 헌병에게 살해됐습니다.
    8. 2023년 9월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에서 추도식이 열리고 진상 규명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인물

    • 박열1902~1974

      대지진 직후 ‘보호 검속’으로 잡혀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경북 문경 출신 무정부주의자로, 일본인 동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22년 넘게 옥살이를 한 뒤 광복 뒤 풀려났습니다. 일본 당국이 학살에서 눈을 돌리려고 사건을 부풀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 요시노 사쿠조1878~1933

      학살 피해를 조사해 희생자 2,613명이라는 집계를 남겼습니다.

      도쿄 제국 대학 교수로 ‘민본주의’를 내세운 다이쇼 시대 민주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상가입니다. 3·1 운동 때 일본의 조선 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고, 대지진 때 학살을 조사한 글은 당국의 검열로 일부가 삭제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날의 추모
    일본 시민 단체들은 해마다 9월 1일 무렵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 등에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열고 있습니다. 2023년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졌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사 속 그날들/풀버전] 관동대지진, 학살의 기억ㅣKBS 190421 방송

    KBS 히스토리 · 3.7만회 ·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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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역사저널 그날의 관동 대지진 학살 편 전체 방송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추적60분 — 조선인을 죽여라, 학살 그 후 100년

    KBS 추적60분 · 5.8만회 · 48:39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과 그 후를 추적한 방송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그 날, 조선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관동대지진’과 재일조선인들의 비극

    지식해적단 · 30.6만회 ·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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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경위를 자세히 풀어 줍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그 날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 "조선인이라서"…간토대학살을 기억하세요? / 비머실록 / 비디오머그

    비디오머그 - VIDEOMUG · 4.1만회 · 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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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비디오머그가 간토 학살의 경위를 정리한 보도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단독]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일기에 쓴 '가해자 이름' / SBS 8뉴스

    SBS 뉴스 · 26.8만회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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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 가해자 이름이 적힌 당시 일기를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관동대학살. 일본 관동 지역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을 모함해 학살한 일본 자경단

    사건탐구 과거탐구 STGT · 1.2만회 ·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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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언비어와 자경단의 학살 경과를 설명합니다.

    창작 · 영화

    일본인이 만든 일제강점기 영화 | 99년만에 드디어 제작된 그 사건의 영화

    무비셀라 CINEMA CLUB · 37.3만회 ·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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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 대지진 학살을 다룬 일본 영화 줄거리 소개라 창작이 섞였습니다.

  8. 1924

    5.2

    정치

    경성 제국 대학 설립

    1924.5.2 ~ 6.12 · 42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전국으로 번지자 총독부가 이를 견제하며 관립 대학을 서둘러 세웠습니다. 예과가 먼저 문을 열었고 법문학부·의학부는 1926년에 개설됐습니다.

    • 개교 초기 한국인 학생 비율은 낮았고, 조선사·조선어 관련 강좌도 일본인 연구자가 주도했습니다.
    • 광복 뒤 경성 제국 대학은 서울대학교로 개편되는 기관 중 하나가 됐습니다.

    배경

    1920년대 초 이상재 등 한국인 유지들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벌이며 한국인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려 했습니다. 총독부는 이를 그대로 두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키우는 구심점이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1923년 11월 조선 제국 대학 창설 위원회를 발족해 관립 대학 설립을 서둘렀고, 1924년 5월 2일 칙령으로 경성 제국 대학 관제를 공포했습니다. 같은 해 2년제 예과가 먼저 문을 열었고, 6월 12일 개교식이 열렸습니다.

    법문학부와 의학부로 이뤄진 학부 과정은 1926년에 개설됐습니다. 일본에 있는 제국 대학과 같은 체계로 운영됐지만, 정원의 상당수를 일본인 학생으로 채우고 한국인 입학은 시험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받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경성 제국 대학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있던 유일한 대학 기관으로 남았습니다. 광복 뒤 1946년 미군정의 국립 서울 대학교 설립안(국대안)에 따라 여러 관립 전문학교와 함께 서울대학교로 통합·개편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2~1923년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2. 1923년 11월총독부가 조선 제국 대학 창설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3. 1924년 5월 2일경성 제국 대학 관제가 공포됐습니다.
    4. 1924년 5월 12일예과 첫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5. 1924년 6월 12일개교식이 열렸습니다.
    6. 1926년법문학부·의학부가 개설됐습니다.
    7. 1946년국대안에 따라 서울대학교로 통합·개편됐습니다.

    인물

    •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총독으로서 민립 대학 운동에 대응해 관립 대학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3대·5대 조선 총독을 지냈습니다. 문화 통치를 내세우면서도 한국인 주도의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은 견제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의 성격

    고등 교육 기회 확대로 보는 쪽

    한반도에 처음으로 대학 수준의 고등 교육 기관을 세워 한국인도 법학·의학 등을 배울 길이 열렸고, 이곳 출신 가운데 광복 뒤 학계를 이끈 인물도 여럿 나왔다고 봅니다.

    민립 대학 운동을 무력화한 견제책으로 보는 쪽

    정원의 상당수를 일본인 학생으로 채우고 한국인 입학은 제한해 사실상 일본인을 위한 대학에 가까웠으며, 한국인 스스로 세우려던 민립 대학의 필요성을 가로막으려는 목적이 컸다고 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한국인에게 고등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정원의 상당수를 일본인 학생으로 채우고 한국인 입학은 제한해, 민립 대학 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성격이 강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서울대학교를 세운 건 조선총독부였다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이 세운 한국 최초의 대학교 서울대의 숨겨진 이야기

    역사돋보기 이영 · 1.9만회 ·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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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925

    4.7

    정치

    임시정부 2차 개헌(국무령제)

    임시 의정원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탄핵한 뒤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령이 내각을 이끄는 의원 내각제로 바꿨습니다.

    • 박은식이 2대 대통령으로 뽑힌 뒤 개헌이 이뤄졌고, 국무령은 임기가 보장된 내각 수반이었습니다.
    • 국무령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1927년 3차 개헌으로 국무위원 여럿이 함께 이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배경

    1923년 국민 대표 회의가 결론 없이 끝난 뒤에도 임시 정부의 운영 방식을 둘러싼 갈등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임시 의정원은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과 미국에 머물며 상하이를 자주 비우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전개

    임시 의정원은 1925년 3월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고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어 그해 4월 7일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령이 내각을 이끄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했습니다.

    국무령은 임시 의정원에서 선출됐고 임기를 보장받는 내각 수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 등이 조각에 어려움을 겪고 사퇴하는 일이 이어지며 정부 구성 자체가 불안정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무령 중심 체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1927년 3차 개헌으로 국무위원 여러 명이 함께 이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임시 정부는 이후 이 체제를 1940년 4차 개헌 때까지 유지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3년 1~6월국민 대표 회의가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2. 1925년 3월임시 의정원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탄핵했습니다.
    3. 1925년 3월박은식이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4. 1925년 4월 7일2차 개헌으로 국무령제가 채택됐습니다.
    5. 1926년이상룡 등 초대 국무령이 조각에 어려움을 겪고 물러났습니다.
    6. 1927년3차 개헌으로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인물

    • 박은식1859~1925

      임시 정부 2대 대통령으로 개헌 국면을 이끌었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한국통사』·『한국 독립운동 지혈사』를 지었습니다. 대통령에 오른 지 반년 만인 1925년 11월 상하이에서 숨졌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탄핵과 헌법 재판소

    해설·교양 · 해설

    (61) 임시정부 2대 대통령 애국계몽사상가 백암 박은식

    사람이야기 역사캐리터치 · 2,445회 · 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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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4.17

    운동

    조선 공산당 창당

    1920년대 들어 확산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창당됐습니다. 여러 차례 검거로 조직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배경

    러시아 혁명 뒤 사회주의 사상이 동아시아로 퍼지면서, 1920년대 초 한국에도 청년·노동·농민 단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단체가 여럿 생겼습니다.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같은 단체들이 서로 경쟁했고,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한국에 하나의 공산당을 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1924년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과 조선 청년 총동맹 같은 전국 조직이 만들어져 사회주의 단체들이 노동자·농민·청년 속으로 활동을 넓혔습니다. 당 창당은 이런 대중 조직을 이끌 지도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기도 했습니다.

    전개

    1925년 4월 17일 화요회 계열이 중심이 돼 서울의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비밀리에 조선 공산당을 창당했습니다. 책임 비서는 김재봉이었고, 다음 날 박헌영 등이 고려 공산 청년회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11월 신의주에서 일어난 사소한 폭행 사건 수사 과정에서 조직이 드러나 1차 검거가 이뤄졌습니다. 이후 1926년 6·10 만세 운동 준비가 발각되며 2차, 1928년까지 3·4차 검거가 이어져 당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거듭했습니다.

    1차 검거는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청년회 회원들이 일으킨 폭행 사건을 경찰이 수사하다 당 문서를 찾아내면서 시작됐습니다. 당은 강달영을 책임 비서로 다시 조직했으나 이듬해 6월 다시 무너졌고, 1926년 말 재건된 3차 당은 1928년 2월, 4차 당은 1928년 7월 검거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1928년 코민테른은 이른바 12월 테제로 조선 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지식인 중심을 벗어나 노동자·농민 속에서 당을 다시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운동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조선 공산당은 광복 직후 박헌영이 다시 세웠습니다.

    1927년 9월부터 열린 조선 공산당 사건 재판에는 100여 명이 한꺼번에 피고로 섰고, 법정에서 고문 사실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4년 4월조선 노농 총동맹과 조선 청년 총동맹이 결성됐습니다.
    2. 1925년 4월 17일서울 아서원에서 조선 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됐습니다. 책임 비서는 김재봉이었습니다.
    3. 1925년 4월 18일박헌영 등이 고려 공산 청년회를 만들었습니다.
    4. 1925년 11월신의주 사건 수사 과정에서 조직이 드러나 1차 검거가 이뤄졌습니다.
    5. 1926년 6월6·10 만세 운동 준비가 발각되면서 2차 검거가 이뤄졌습니다.
    6. 1928년 2월·7월3차·4차 당이 차례로 검거됐습니다.
    7. 1928년 12월코민테른이 12월 테제로 조선 공산당 승인을 취소하고 재조직을 지시했습니다.
    8. 1945년 9월광복 직후 박헌영이 조선 공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인물

    • 김재봉1891~1944

      조선 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를 맡았습니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1차 검거 때 체포돼 6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2005년 독립 유공자로 서훈됐습니다.

    • 박헌영1900~1956

      고려 공산 청년회 책임 비서를 맡았습니다.

      충남 예산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로, 여러 차례 투옥됐습니다. 광복 뒤 조선 공산당과 남조선 노동당을 이끌다 월북해 북한 부수상·외무상을 지냈으나, 한국 전쟁 뒤 김일성 세력에게 숙청돼 처형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 보는 쪽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농민 운동과 학생 운동을 조직하고 치안 유지법으로 가장 많이 처벌받은 세력이었다며, 민족 해방을 위한 운동의 한 흐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광복 뒤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은 독립 유공자로 서훈되고 있습니다.

    목표와 행적을 따져 봐야 한다는 쪽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였고, 목표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광복 뒤 남한 체제에 맞서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인물까지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때 주변에서는
    1921년 중국 공산당,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당됐습니다. 코민테른은 각국에 당을 세우게 하고 그 나라의 지부로 승인하는 방식으로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해설

    한국에 어쩌다가 공산주의가 퍼졌을까? 대부분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공산당의 역사 충격적인 사실 10분 정리

    역사돋보기 이영 · 7.7만회 ·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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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유입 과정을 넓게 다루는 개인 채널로 창당은 일부입니다.

  11. 5월

    정치

    치안 유지법 시행

    천황제와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활동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겨냥했지만 독립운동 전반을 탄압하는 데 쓰였습니다.

    배경

    1925년 일본은 소련과 국교를 맺으면서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같은 해 일본은 보통 선거법을 통과시켰는데, 선거권을 넓히는 대신 체제를 흔드는 운동을 강하게 막으려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미 1919년 4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제령 제7호)이 만들어져 3·1 운동 관련자와 독립운동가를 처벌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법은 최고형이 징역 10년이었고, 단체를 만들거나 가입하는 행위 자체를 겨냥한 법은 아니었습니다.

    전개

    치안 유지법은 1925년 4월 일본에서 공포됐고, 5월 칙령으로 조선·대만 등 식민지에도 시행됐습니다. ‘국체’(천황제)를 바꾸거나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가입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민족 독립을 목표로 한 활동도 ‘국체 변혁’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 법을 적용했습니다. 1928년 개정으로 최고형이 사형으로 높아졌고, 1941년에는 형기를 마친 사람도 다시 가둘 수 있는 예방 구금 제도가 더해졌습니다.

    1936년 12월에는 치안 유지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을 풀려난 뒤에도 감시하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 시행됐습니다. 전향하지 않은 사람은 형기를 마친 뒤에도 계속 감시받거나 다시 갇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과와 의미

    치안 유지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사회 운동가를 처벌하는 가장 주요한 법률로 쓰였습니다. 광복 뒤 1945년 10월 미군정이 폐지했고, 일본에서도 같은 달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시로 폐지됐습니다.

    수양 동우회 사건(1937)과 조선어 학회 사건(1942) 같은 문화·계몽 단체 사건에도 이 법이 적용됐습니다. 한글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까지 ‘국체 변혁’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5년 1월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맺었습니다.
    2. 1925년 3월일본 의회가 보통 선거법을 통과시켰습니다.
    3. 1925년 4월일본에서 치안 유지법이 공포됐습니다.
    4. 1925년 5월칙령으로 조선·대만 등 식민지에도 치안 유지법이 시행됐습니다.
    5. 1928년 6월긴급 칙령으로 법이 개정돼 최고형이 사형으로 높아졌습니다.
    6. 1936년 12월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 시행됐습니다.
    7. 1941년법이 전면 개정돼 형기를 마친 사람도 다시 가둘 수 있는 예방 구금 제도가 들어왔습니다.
    8. 1945년 10월한국에서는 미군정이, 일본에서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시로 법이 폐지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 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 치안 유지법 제1조(1925)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문입니다. 1928년 개정으로 ‘국체 변혁’ 결사를 조직한 사람의 최고형이 사형으로 높아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국체란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국가 체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 독립은 천황의 통치 영역을 줄이는 것이어서 ‘국체 변혁’으로 해석됐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강의

    오늘167_치안유지법 한국 시행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5,210회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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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치안 유지법의 한국 시행을 짚는 짧은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주제별 심화학습 - 치안유지법

    창선고TV · 1,541회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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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치안 유지법을 짧게 정리한 고등학교 한국사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5 일본 치안유지법으로 경기공립중학교 학생 강상규를 체포하다

    KBS 히스토리 · 4,915회 ·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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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치안 유지법으로 체포된 한 학생의 사례를 따라가는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경성뉴스(1925. 2. 19)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 제정되다 #25

    경성뉴스 · 345회 ·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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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뉴스 형식으로 치안 유지법 제정을 재구성했습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4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탄핵과 헌법 재판소

대통령 등 고위 공직자가 헌법·법률을 어기면 국회가 소추하고 헌법 재판소가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대통령 탄핵 소추는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되고, 헌법 재판소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찬성하면 파면됩니다. 소추되면 결정 때까지 권한이 멈춥니다.

헌법 재판소는 1987년 헌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노무현(2004, 기각), 박근혜(2017, 파면), 윤석열(2025, 파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있었습니다.

해설

22분짜리 탄핵 판결문, 딱 핵심만 5분 정리해 봄 / 스브스뉴스

스브스뉴스 SUBUSUNEWS · 229.3만회 ·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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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퍼진,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내건 운동입니다.

노동·농민·청년 운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 됐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에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치안 유지법으로 강하게 탄압했고, 광복 뒤 좌우 대립의 한 축이 됐습니다.

강의

[5.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통합운동 한 눈에 정리! (20년대, 30년대, 40년대) (20분컷 정리)

원유철한국사TV · 1만회 ·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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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뭐가 다른 걸까??? | 정치 외교

지식한잔 · 207.1만회 ·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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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만주·연해주·중국 관내에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으려 한 군대입니다.

의병의 뒤를 이어 신흥 무관 학교 등에서 길러졌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1940년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습니다.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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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l 일제 강점기 16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8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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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1930년대 무장독립전쟁#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암기비법!!(6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4.2만회 ·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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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분제

조선 사회를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눈 신분 질서입니다.

법으로는 양인과 천인 두 신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양반·중인·상민·천민 네 층으로 나뉘었습니다. 노비와 백정 등 천민은 가장 큰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선 후기 납속과 공명첩, 족보 매매 등으로 양반 수가 크게 늘며 신분제가 흔들렸고,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 폐지됐습니다. 그 뒤에도 차별은 이어져 1923년 형평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능

[#어쩌다어른] 상상초월 조선시대 노비의 가격은? 신분 상승을 노리고 주인을 겁탈한 노비의 최후 | #지금꼭볼동영상

디글 :Diggle · 27.7만회 ·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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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4K풀] 신분제에 도전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 영화같은 일대기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조선의 신분제 2부 "노비, 사또가 되다" (KBS_2

KBS 히스토리 · 42.6만회 · 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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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3역사②[5-2~1]사회 변화와 농민의 봉기(1)(feat.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빡공시대 람보쌤 4시간의 기적

빡공시대TV · 29.8만회 · 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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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