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무단 통치기

국권 피탈 직후와 무단 통치

조선총독부가 헌병 경찰을 앞세워 통치하고 회사령·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했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무너졌고,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연해주에 기지를 세웠습니다.

기간
1910.8.29 ~ 1914.12.31 · 4년 4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담긴 것
사건 9 · 영상 40 · 영화·드라마 1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7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90분) — 고종의 충신이던 이완용은 왜 매국노가 되었나

디글 · 272.7만회 · 1:35:4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 독립 협회부터 을사늑약까지 다룹니다.

1896.7.2 ~ 1910.8.29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KBS 히스토리 · 129.6만회 · 47:1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이완용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시기를 인물 중심으로 봅니다.

1896.7.2 ~ 1910.8.29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해설·교양 · 다큐

국권 침탈 100년 1편 — 1910 나라를 잃다

KBS 히스토리 · 18.2만회 · 48:3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사늑약부터 병합 조약 체결까지 국권 상실 과정을 다룹니다.

1905.11.17 ~ 1910.8.29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6일차 1교시 — 1910년대 식민 통치와 저항

최태성 1TV · 77.2만회 · 20:5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10년대 무단 통치와 국내외 저항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10.8.29 ~ 1919.4.11 · 조선총독부 설치 → 조선 태형령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토지 조사 사업 → 조선 태형령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 설립과 105인 사건

KBS 히스토리 · 2.2만회 · 3:29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신민회 설립과 105인 사건을 함께 정리한 짧은 다큐입니다.

1907.4 ~ 1912 · 토지 조사 사업 → 조선 태형령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영화 · 2019· 공식 영상

「자전차왕 엄복동」

유튜브 앱에서 보기

배경 1910 ~ 1920

일제강점기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이긴 엄복동 이야기(각색 많음)

사건 연표 9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신민회 결성 (~1911), 한국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8.29)

  1. 1910

    경제

    토지 조사 사업

    1910 ~ 1918 · 8년

    토지 조사령(1912)에 따라 정해진 기간 안에 땅 주인이 직접 신고하게 해 소유권을 확정한 사업입니다. 총독부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세를 걷었습니다.

    • 왕실 땅과 공공 기관 땅, 마을 공동 소유 땅 상당수가 총독부 소유가 됐고, 일부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에 넘겨졌습니다.
    • 소유권만 인정되고 농민이 관습적으로 누려 온 경작권은 인정되지 않아 소작농의 처지가 불안해졌습니다.

    배경

    조선 후기에도 땅을 사고팔고 문서(문기)로 소유를 증명하는 관행이 있었지만, 나라 전체의 토지를 측량해 소유자를 한 장부에 올린 근대적 등기 제도는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은 1898년 양지아문, 1901년 지계아문을 세워 양전·지계 사업을 벌였으나 러일 전쟁 무렵 중단됐습니다.

    일본은 병합 전인 1910년 3월 대한제국 정부 안에 토지 조사국을 두게 했고,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식민지를 운영할 재정의 중심인 지세(땅에 매기는 세금)를 안정적으로 걷고, 토지 거래를 법으로 보장해 일본인의 토지 투자를 쉽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전개

    1912년 8월 토지 조사령이 공포됐습니다. 땅 주인은 정해진 기간 안에 주소·이름·토지의 위치와 면적 등을 적어 직접 신고해야 했고(신고주의), 조사원이 측량한 뒤 소유자를 정해 토지 대장과 지적도를 만들었습니다. 소유권을 두고 다툼이 생기면 총독부 기구가 심사해 결정했습니다.

    궁방전·역둔토처럼 왕실과 관청에 속했던 땅, 주인이 분명하지 않은 산림과 마을 공유지는 국유지로 편입됐습니다. 이런 땅 가운데 일부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일본인 농업 회사·이주민에게 싼값에 불하됐습니다. 사업은 1918년 11월 마무리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전국 토지의 소유자·면적·지가가 장부로 정리되면서 총독부의 지세 수입이 크게 늘었고, 토지는 등기된 소유권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거래되는 상품이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만 법으로 인정됐고, 조선 후기 농민이 관습적으로 누리던 도지권 같은 경작권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지주는 소작인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됐고, 소작료 부담도 무거워져 1920년대 소작 쟁의가 늘어나는 배경이 됐습니다. 국유지로 편입된 땅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온 농민들 사이에서는 소유권 분쟁이 잇따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7월대한제국이 양지아문을 세워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 1901년 10월지계아문을 두어 땅 주인에게 관에서 인정하는 소유 증서(관계)를 내주기 시작했지만, 러일 전쟁 무렵 사업이 멈췄습니다.
    3. 1910년 3월병합 전 통감부의 영향 아래 대한제국 정부 안에 토지 조사국이 설치됐습니다.
    4. 1910년 9월병합 직후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이 토지 조사국의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5. 1912년 8월 13일토지 조사령(제령 제2호)이 공포돼 땅 주인이 정해진 기간 안에 소유지를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6. 1914년 3월지세령이 공포돼 새로 만든 장부의 지가를 기준으로 지세를 매기게 됐습니다.
    7. 1918년 5월산림을 따로 조사하는 조선 임야 조사령이 공포됐습니다.
    8. 1918년 11월토지 조사 사업이 마무리됐습니다. 임야 조사는 192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 성명·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字番號), 사표(四標), 등급, 지적(地積),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 조사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단 국유지는 보관 관청이 임시 토지 조사국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 토지 조사령 제4조(1912)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입니다. ‘신고주의’를 규정한 조문으로, 사표는 땅의 동서남북 경계, 결수는 세금을 매기는 단위를 뜻합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조선 총독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10년 통감으로 와서 병합을 처리하고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폈고, 1916년 일본 총리가 됐다가 1918년 쌀 소동으로 물러났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의 성격

    수탈의 과정으로 보는 쪽

    복잡한 신고 절차와 짧은 기한 때문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의 땅, 그리고 공유지·왕실 땅이 대거 국유지가 됐고, 이것이 동척과 일본인에게 넘어갔다고 봅니다. 농민의 경작권을 없애 지주 중심의 식민지 지주제를 굳혔고, 지세를 늘려 식민 통치 비용을 한국인에게 떠넘긴 사업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근대적 소유 제도의 확립에 주목하는 쪽

    1990년대 이후 남아 있는 토지 대장과 신고 서류를 분석한 연구들은 신고하지 않아 빼앗긴 민간 토지는 생각보다 적었고, 대부분의 민유지는 원래 주인에게 소유권이 인정됐다고 봅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유지 분쟁과 경작권 부정이었으며, 사업 자체는 근대적 소유권과 등기 제도를 만든 측면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이 제도가 식민 통치를 위해 설계됐다는 점은 이쪽 연구자들도 인정합니다.

    더 알아두기

    흔한 오해 — ‘국토의 40%를 빼앗았다’
    예전 교과서와 대중서에는 토지 조사 사업으로 전 국토의 40% 가까이가 총독부 소유가 됐다는 설명이 자주 실렸습니다. 이 숫자는 산림·임야까지 포함한 국유지 비율을 경작지 약탈 규모처럼 읽은 것이라는 지적을 받아, 지금 교과서는 규모를 단정하지 않는 쪽으로 서술이 바뀌었습니다.
    임야 조사 사업
    토지 조사 사업은 주로 논밭과 대지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산림은 1918년 조선 임야 조사령에 따라 1924년까지 따로 조사했고, 이때도 마을 공동 산림 상당수가 국유림이 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토지 소유권을 근대적 제도로 확정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 총독부가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농민의 권리가 약해진 수탈 과정이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신고하지 않아 빼앗긴 땅의 규모는 연구마다 추정이 다릅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이란?

    EBSi · 9,771회 · 13:2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토지 조사 사업이 무엇인지 설명한 EBS 수능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등인강/중3 역사] 무단통치의 실시_일제의 토지조사사업 - 수박씨닷컴 윤미 선생님

    비상교육 온리원 레슨 · 1만회 · 7:2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무단 통치 단원에서 토지 조사 사업을 설명하는 중학 인강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10년대 일제 토지 조사 사업 l 한국사 일제 강점기 2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5.1만회 · 4:1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토지 조사 사업의 방식과 결과를 정리한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반일종족주의 반박 1편] 토지조사사업이 수탈이 아니라고??

    황현필 한국사 · 31.9만회 · 19:35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수탈 여부 논쟁을 반박하는 강의로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2. 10.1

    정치

    조선총독부 설치

    일본 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가 문을 열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총독은 입법·행정·사법·군대 통수권을 모두 쥐었습니다.

    • 군인인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맡는 헌병 경찰제를 실시했습니다.
    • 조선 태형령(1912)으로 한국인에게만 매질 처벌을 했고, 관리와 교사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습니다.

    배경

    1910년 8월 29일 한국 병합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었습니다. 을사늑약 뒤 서울에 있던 통감부는 일본의 보호국 통치 기구였는데, 병합 뒤에는 식민지 전체를 직접 다스릴 새 기구가 필요했습니다.

    병합에 앞서 일본은 치안권부터 손에 넣었습니다. 1910년 6월 대한제국의 경찰 사무를 일본에 맡긴다는 각서가 맺어져 통감부 아래 경무총감부가 전국 경찰을 지휘했고, 한국 주차 헌병대 사령관이 경무 총장을 겸했습니다. 병합 뒤 총독부의 헌병 경찰 체제는 이 조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전개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관제가 공포되고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문을 열었습니다. 통감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청사는 처음에 남산의 옛 통감부 건물을 썼고, 경복궁 앞에 지은 새 청사는 1926년 완공됐습니다.

    총독은 일본 천황에게 직접 속하고 육해군 대장 가운데서 임명됐습니다. 법률을 대신하는 명령(제령)을 낼 수 있었고, 행정·사법·군 통수권을 모두 가졌습니다. 아래에 정무 총감이 행정을, 경무 총감이 치안을 맡았습니다. 한국인 고위층을 모은 중추원을 두었지만 실권 없는 자문 기구였습니다.

    1910년대에는 군사 경찰인 헌병이 일반 경찰 업무까지 맡는 헌병 경찰제가 시행됐습니다. 헌병 경찰은 재판 없이 벌금·태형 등을 내리는 즉결 처분권을 가졌고, 관리와 교사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찼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무단 통치기’라고 부릅니다.

    지방 행정은 13도 아래 부·군·면으로 짜였고, 도 장관과 군수 자리에 일부 한국인을 앉히기도 했지만 실무와 경찰은 일본인이 쥐었습니다. 1914년에는 부·군·면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해 군과 면의 수를 크게 줄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선총독부는 1945년 광복 때까지 35년 동안 한반도를 다스린 최고 통치 기구였습니다. 총독은 모두 8명(사이토 마코토가 두 차례 재임해 재임 기준 9차례)이었고 모두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이었습니다. 1919년 이후 문관도 총독이 될 수 있게 규정이 바뀌었지만 실제로 문관 총독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6월대한제국의 경찰 사무를 일본에 맡기는 각서가 맺어져 통감부가 전국 경찰권을 쥐었습니다.
    2. 1910년 8월 22일한국 병합 조약이 조인됐습니다.
    3. 1910년 8월 29일조약이 공포되고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었습니다. 총독부가 문을 열 때까지 통감부가 통치를 이어 갔습니다.
    4. 1910년 9월 30일조선총독부 관제와 중추원 관제 등이 공포됐습니다.
    5. 1910년 10월 1일조선총독부가 문을 열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6. 1919년 8월3·1 운동 뒤 관제가 바뀌어 헌병 경찰제가 보통 경찰제로 바뀌고, 총독의 군대 통솔 조항이 빠졌습니다.
    7. 1926년 10월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지은 새 청사가 완공됐습니다.
    8. 1945년 9월 9일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서울의 총독부 청사에서 미군에게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총독은 천황에 직예하며 위임된 범위 안에서 육해군을 통솔하여 조선 방비를 관장한다.”
    — 조선총독부 관제 제3조(1910)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가 인용한 번역입니다. ‘직예’는 중간 기관 없이 천황에게 곧바로 속한다는 뜻입니다. 이 조항은 1919년 관제 개정 때 삭제되고, 필요할 때 군 사령관에게 병력을 청구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입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육군 대신을 지냈습니다. 총독으로서 헌병 경찰 체제와 토지 조사 사업, 회사령 등을 시행했고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를 무너뜨렸습니다. 1916년 일본 총리가 됐습니다.

    •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

      헌병대 사령관 겸 경무 총장으로 헌병 경찰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일본 육군 군인으로 러일 전쟁 때 유럽에서 러시아 혁명 세력을 지원하는 공작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0년부터 한국 주차 헌병대 사령관과 경무 총장을 겸해 의병 진압과 헌병 경찰 제도를 이끌었고, 뒤에 타이완 총독을 지내다 1919년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세워진 총독부 청사는 광복 뒤 미군정청, 대한민국 정부 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가 시작돼 1996년 마무리됐고, 첨탑 등 일부 부재는 독립기념관에 옮겨 전시돼 있습니다. 철거 당시 ‘치욕의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무단 통치(헌병 경찰)

    해설·교양 · 해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이 아니라 남산에 있었다고? | 뚜벅뚜벅 EP.10

    장르가 머니? · 8.7만회 · 13:3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1910년 남산에 처음 선 총독부 청사와 설치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4단원 2차시│1910년대 일제강점기│무단통치

    워니비 · 8.6만회 · 6:04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총독부 설치로 시작된 1910년대 무단 통치를 정리한 강의입니다.

  3. 12월

    경제

    회사령

    1910.12 ~ 1920.4 · 9년 4개월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법령입니다. 한국인의 회사 설립과 민족 자본 성장을 막는 효과를 냈고, 1920년 신고제로 바뀌었습니다.

    배경

    개항 이후 한국인 상인과 지주들은 근대적 회사를 세우기 시작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은행·해운·철도 회사도 생겼습니다. 병합 직후 총독부는 식민지 경제를 통제할 장치를 마련하려 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한천일은행 같은 한국인 은행과 상회사가 세워지고 있었지만, 병합 무렵 일본인 상공업자들도 조선에 진출해 회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총독부는 식민지의 산업을 총독의 손으로 관리하고, 일본 본국 산업과 경쟁하는 공업이 조선에서 제멋대로 커지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전개

    1910년 12월 제령으로 회사령이 공포돼 1911년 1월부터 시행됐습니다. 조선에서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허가 조건을 어기거나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총독이 회사를 해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 본국에서는 회사 설립이 신고만으로 가능했으므로 조선에만 적용되는 제도였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29일 제령 제13호로 제정돼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됐습니다. 조선 밖(일본 포함)에서 세운 회사가 조선에 지점을 내는 것도 허가 대상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회사령이 시행된 9년여 동안 조선 안의 회사 설립 신청은 676건이었고 이 가운데 556건(약 82%)이 허가됐습니다. 이미 세워진 회사에 대한 해산 명령은 7건이었습니다. 본점 기준으로 1911년 한국인 회사는 27개(전체의 17.8%), 일본인 회사는 109개(71.7%)였고, 1920년에는 한국인 회사 99개(18.2%), 일본인 회사 414개(76.1%)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1910년대 한국인이 세운 회사는 수가 적고 규모도 작았습니다. 허가제는 1920년 4월 폐지돼 신고제로 바뀌었고, 이후 일본의 큰 자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이 무렵 경성 방직 같은 한국인 기업도 세워졌습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호황을 누린 일본 자본이 조선 진출을 원하게 되고, 3·1 운동 뒤 통치 방식이 바뀌면서 회사령은 1920년 3월 31일로 폐지되고 4월 1일부터 신고제가 시행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12월 29일회사령이 제령 제13호로 공포됐습니다.
    2. 1911년 1월 1일회사령이 시행돼 조선에서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3. 1911년본점 기준 한국인 회사 27개, 일본인 회사 109개로 집계됐습니다.
    4. 1914~1918년1차 세계 대전 호황으로 일본 자본이 크게 불어나 조선 진출 요구가 커졌습니다.
    5. 1919년 10월김성수 등이 경성 방직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6. 1920년 4월 1일회사령이 폐지되고 회사 설립이 신고제로 바뀌었습니다. 이해 한국인 회사는 99개, 일본인 회사는 414개였습니다.

    사료로 읽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 회사령 제1조(1910)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입니다.
    “회사가 본령 혹은 본령에 기초해 발표된 명령 및 허가의 조건을 위반하거나 공공의 질서 및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령할 수 있다.”
    — 회사령 제5조(1910)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입니다. 세운 뒤에도 총독이 회사를 닫을 수 있게 한 조항입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총독으로 회사령을 제령으로 공포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입니다. 헌병 경찰 체제와 토지 조사 사업을 함께 시행했습니다.

    • 김성수1891~1955

      회사령이 폐지되기 직전인 1919년 10월 경성 방직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전북 고창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1932년 보성 전문학교를 인수했습니다. 광복 뒤 한국 민주당을 이끌었고 1951년 부통령에 선출됐습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의 학병 권유 등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2017년 대법원이 그 일부를 친일 반민족 행위로 인정한 판결을 확정해 이듬해 건국 훈장이 취소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회사령의 목적

    민족 자본 억압에 초점을 두는 쪽

    허가권을 총독이 쥐어 한국인의 회사 설립을 막고 한국인 자본이 성장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 효과였다고 봅니다. 한국을 일본의 원료 공급지·상품 시장으로 묶어 두는 1910년대 경제 정책의 하나로 이해합니다.

    총독부의 경제 통제 전반에 초점을 두는 쪽

    회사령은 일본인 회사에도 똑같이 적용됐고, 투기성 회사 난립을 막고 총독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관리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봅니다. 실제로 허가 신청을 한 한국인 회사의 상당수는 허가를 받았다는 연구도 있어, 민족 차별보다는 총독부 중심의 통제 경제 성격을 강조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147_회사령 공포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4,507회 · 3:2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이 회사령 공포 하나를 짚어 설명하는 짧은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1920년대 회사령과 관세의 폐지가 미친 영향은?

    EBSi · 2,963회 · 2:35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회사령 폐지가 미친 영향을 설명한 EBS 수능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보기만 해도 10점 UP! 한국사 벼락치기|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경제 침탈|헌병 경찰, 토지 조사 사업, 회사령|한능검|한국사 정리|한국사탐구생활|에

    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6,654회 · 6:08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1910년대 통치와 경제 침탈을 묶어 정리하고 회사령은 그중 하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토지조사사업 그리고 #회사령

    라떼이즈홀스 · 2,080회 · 17:1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토지 조사 사업과 함께 회사령의 내용과 목적을 다룹니다.

  4. 1911

    정치

    105인 사건

    1911 ~ 1912 · 1년

    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꾸며 신민회 회원 등 600여 명을 체포하고 105명을 유죄로 만든 사건입니다. 신민회는 이 일로 해체됐습니다.

    • 재판 과정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 낸 사실이 드러났고, 2심에서 대부분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배경

    1907년 결성된 비밀 결사 신민회는 안창호·양기탁·이승훈·전덕기 등이 주도해 학교(대성 학교·오산 학교)와 회사를 세우고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회원은 평안도·황해도의 기독교인과 상공인, 교사가 많았습니다.

    1910년 말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붙잡힌 이른바 안악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서북 지방의 민족 운동 세력 전체를 뿌리 뽑으려 했습니다.

    전개

    1911년 총독부는 신민회 회원들이 1910년 말 서북 지방을 지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만들어 평안도 일대 기독교인과 교사·학생 등 600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심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1912년 9월 1심에서 122명 가운데 105명이 유죄를 선고받아 ‘105인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법정에서 피고들이 고문 사실을 폭로했고, 선교사들이 이를 해외에 알려 국제 여론이 나빠졌습니다. 1913년 3월 2심 경성 복심 법원은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 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이 6명도 1915년 2월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민회는 이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사실상 해체됐습니다.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민족 운동은 크게 위축됐고, 이후 독립운동은 비밀 결사와 국외 활동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작된 혐의였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총독부의 무단 통치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도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12월안명근이 평양역 부근에서 붙잡혔습니다(안악 사건).
    2. 1911년 9월총독 암살 모의 혐의로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 서북 지방 인사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시작돼 600여 명이 붙잡혔습니다.
    3. 1911년 가을선천의 기독교 학교 교사와 학생들까지 잇따라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
    4. 1912년 9월 28일경성 지방 법원이 기소된 122명 가운데 105명에게 징역 5~10년을 선고했습니다.
    5. 1913년 3월경성 복심 법원이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윤치호 등 6명만 유죄로 했습니다.
    6. 1913년 10월상고와 다시 열린 재판을 거쳐 6명의 형이 확정됐습니다.
    7. 1915년 2월남은 6명이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인물

    • 윤치호1865~1945

      신민회 관련자로 기소돼 최종적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개화파 지식인이자 기독교계 지도자입니다. 1915년 풀려난 뒤 3·1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전쟁 협력 활동에 앞장서 1945년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됐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습니다. 60년 가까이 쓴 영문 일기는 당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 양기탁1871~1938

      신민회의 중심 인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총무로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풀려난 뒤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 등에서 활동했고, 임시 정부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 이승훈1864~1930

      오산 학교 설립자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평안도 정주의 상인 출신으로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돼 오산 학교를 세웠습니다. 풀려난 뒤 1919년 기독교 대표로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해 다시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105인 사건은 조작이었다! | 역사채널e - 105인 사건의 진실

    EBS · 1.1만회 · 3:2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05인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다룬 EBS 역사채널e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자투리]105인사건의진실

    송쌤한국사 · 1.8만회 · 4:3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역사채널e의 105인 사건 편을 옮겨 쓴 강의 자료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가 조작한 희대의 사건: 105인 사건의 충격적인 전말

    러브 히스토리 - 역사유튜브 · 1,194회 · 15:1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총독 암살 모의 조작부터 판결까지 전말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105인 사건_최고독립단체 신민회_제24편 한국근대사_삼각산통신

    삼각산통신 · 580회 · 8:2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신민회 인사 대량 체포로 이어진 105인 사건을 다룹니다.

  5. 운동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1911 ~ 1914 · 3년

    신민회 인사들이 남만주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웠습니다. 연해주에는 권업회와 대한 광복군 정부(1914), 하와이에는 박용만의 대조선 국민 군단(1914)이 섰습니다.

    배경

    국내에서 의병 투쟁이 일본군에 밀리고 병합으로 국권을 잃자,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가 덜한 국외에 한인 마을을 만들고 학교와 군사 훈련 기관을 세워 장기적으로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구상을 세웠습니다. 비밀 결사 신민회가 1910년 무렵 이 방침을 정했습니다.

    만주(서간도·북간도)와 연해주에는 19세기 후반부터 가난과 흉년을 피해 건너간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기지를 세우기에 알맞았습니다.

    전개

    서간도: 이회영 여섯 형제가 가문의 재산을 처분하고 1910년 겨울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안동의 유학자 이상룡도 뒤따랐습니다. 1911년 봄 류허현 삼원보에 자치 단체 경학사를 세우고, 그해 신흥 강습소를 열었습니다. 신흥 강습소는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커져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길러 냈습니다.

    북간도: 1906년 이상설이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고, 1908년 김약연 등이 명동 학교를 열었습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 신한촌에 1911년 권업회가 조직됐고, 1914년 이상설·이동휘 등이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협력하게 되면서 러시아 당국이 한인 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미주: 1910년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돼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가 됐고, 1914년 박용만이 하와이에 대조선 국민 군단을 만들어 농장에서 일하며 군사 훈련을 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1912년 신규식이 동제사를 세웠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때 세운 기지와 학교에서 자란 사람들이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만주 무장 투쟁의 중심이 됐습니다. 상하이·연해주·미주의 단체들은 1919년 임시 정부 수립의 바탕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6년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민족 교육 기관 서전서숙을 세웠습니다.
    2. 1908년김약연 등이 북간도 명동촌에 명동 학교(처음 이름은 명동 서숙)를 열었습니다.
    3. 1910년신민회 간부들이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4. 1910년 겨울이회영 여섯 형제 일가가 재산을 처분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습니다.
    5. 1911년 봄서간도 류허현 삼원보에서 자치 단체 경학사가 세워지고, 이어 신흥 강습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6. 1911년 12월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됐습니다.
    7. 1914년연해주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이 세워졌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러시아 당국이 권업회 등 한인 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8. 1919년신흥 강습소가 신흥 무관 학교로 커졌습니다.

    인물

    • 이회영1867~1932

      여섯 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습니다.

      서울의 명문가 출신으로 신민회 회원이었습니다. 망명 뒤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가문이 몰락했고, 뒤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32년 만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뤼순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동생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습니다.

    • 이상룡1858~1932

      경학사 사장을 맡아 서간도 한인 사회를 이끌었습니다.

      경북 안동의 유학자로, 병합 뒤 종가의 재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 옮겼습니다. 서로 군정서를 이끌었고 1925년 임시 정부 국무령에 선출됐습니다.

    • 이상설1870~1917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연해주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습니다. 이후 연해주에서 13도 의군, 성명회, 권업회 활동을 했고 신한 혁명당을 조직했습니다. 1917년 니콜스크에서 병으로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신흥 무관 학교
    1911년 신흥 강습소로 시작해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참변 무렵 문을 닫았습니다. 배출한 인원은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수천 명으로 전해지며, 졸업생들은 서로 군정서·북로 군정서와 이후 광복군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청 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습니다. 신규식 등 한국 망명객들은 쑨원의 혁명 세력과 교류하며 중국 안에서 독립운동의 지원을 얻으려 했고, 이것이 상하이 동제사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47 신민회와 이회영 형제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KBS 히스토리 · 1.8만회 · 4:59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신민회의 국외 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 운동 l 일제 강점기 9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4.2만회 · 6:41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만주·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운 과정을 다뤄 국외 기지 건설에 더 맞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능검대비#1910년대 국내, 국외 독립운동 암기비법(10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6.9만회 · 10:42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서간도·북간도·연해주의 1910년대 국외 기지를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독립운동│광복│석주 이상룡│플래시│애니메이션 │딩동TV 독립운동

    딩동TV · 3.7만회 · 22:00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삼원보에 자리 잡은 이상룡의 독립운동을 그린 애니메이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대한 한국 조선 독립 광복 혁명 군 어우 세상에 | 독립운동 총정리 벼락치기 한능검

    공부돼지 · 29.6만회 · 22:43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독립운동 단체 전반을 몰아 정리하는 강의라 국외 기지는 일부입니다.

  6. 2월

    경제

    조선은행 설립과 화폐 발행

    1911.2 ~ 1911.8 · 6개월

    1909년 세워진 대한제국의 한국은행이 조선은행법 공포에 따라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식민지의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이 됐습니다.

    • 1910년 1,180여만 원이던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1945년 8월 49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 조선은행권 발행은 식민 통치 비용을 대고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쓰였습니다.

    배경

    대한제국은 1909년 11월 한국은행법에 따라 한국은행을 세웠습니다. '한국'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일은행 한국 총지점이 맡던 화폐 발행 업무를 넘겨받아 만든 기관으로, 을사늑약 뒤 통감부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1910년 8월 병합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뒤에도 화폐 발행 업무는 이 은행이 그대로 맡았습니다. 총독부는 식민지 경제를 하나의 화폐권으로 묶고 재정을 뒷받침할 안정된 발권 은행이 필요했습니다.

    전개

    1911년 2월 조선은행법이 공포되고 그해 8월 15일 한국은행은 이름을 조선은행으로 바꿨습니다. 조선은행은 한반도 안에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은행이 됐고, 일본이 세력을 넓힌 만주·관동주에서도 조선은행권이 함께 쓰였습니다.

    한국은행이 1910년 12월 처음 찍어 낸 1원권을 시작으로 5원·10원권 화폐가 이어졌고, 이름이 바뀐 뒤에도 이 화폐 도안은 한동안 그대로 쓰이다가 차츰 조선은행권 도안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선은행은 광복 때까지 한반도의 화폐 발행을 독점했습니다. 1910년 1,180여만 원이던 발행고는 1945년 8월 49억 원까지 늘었는데, 특히 중일 전쟁 이후 군수 자금을 대려고 발행량이 가파르게 늘었습니다. 조선은행권은 식민 통치 비용을 대고 일본의 대륙 침략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쓰였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9년 11월대한제국이 한국은행법을 공포해 한국은행을 세웠습니다. 통감부의 영향 아래 있던 사실상의 중앙은행이었습니다.
    2. 1910년 8월 29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었지만 한국은행은 그대로 화폐 발행 업무를 이어 갔습니다.
    3. 1910년 12월한국은행이 1원권 은행권을 처음 발행했습니다.
    4. 1911년 2월조선은행법이 공포됐습니다.
    5. 1911년 8월 15일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6. 1937년 이후중일 전쟁이 길어지며 군수 자금 수요가 늘어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가파르게 늘었습니다.
    7. 1945년 8월발행고가 49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더 알아두기

    지금의 한국은행과는 다른 기관
    대한제국의 '한국은행'(1909)과 광복 뒤 세워진 대한민국의 '한국은행'(1950)은 이름이 같지만 다른 기관입니다. 조선은행은 광복 뒤에도 한동안 남한의 중앙은행 구실을 하다가, 1950년 한국은행법에 따라 새로 세워진 한국은행에 업무를 넘기고 해체됐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단독]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자료 공개‥“대일 배상청구 자료” (2021.10.05/뉴스데스크/MBC)

    MBCNEWS · 4.9만회 · 2:43

    유튜브 앱에서 보기

  7. 8.23

    정치

    제1차 조선 교육령

    한국인에게는 보통학교 4년 등 일본인보다 짧은 학제를 적용하고, 실업 교육과 일본어 교육을 중심에 둔 교육령입니다. '충량한 신민'을 기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배경

    대한제국 말기에는 애국 계몽 운동으로 수천 곳의 사립 학교가 세워져 민족 교육을 했습니다. 총독부는 교육을 식민 통치에 맞게 바꾸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인 교육을 ‘시세와 민도에 맞게’ 한다는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통감부 시기인 1908년 8월 대한제국 정부는 사립 학교령을 공포해 사립 학교를 세울 때 학부 대신의 인가를 받게 하고, 교과서도 정부가 검정하거나 인가한 것만 쓰게 했습니다. 병합 뒤 조선 교육령은 이 통제를 식민지 교육 체계 전체로 넓힌 것입니다.

    전개

    1911년 8월 23일 제1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11월부터 시행됐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충량한 국민’을 기르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한국인이 다니는 보통학교는 4년(사정에 따라 3년), 고등 보통학교는 4년, 여자 고등 보통학교는 3년으로 정했습니다.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가 6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짧았습니다.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조선어는 한문과 묶인 한 과목이 됐습니다. 대학 교육에 관한 규정은 없었고 실업 교육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같은 해 사립 학교 규칙, 1918년 서당 규칙을 만들어 사립 학교와 서당도 통제했습니다.

    조선 교육령은 1911년 8월 23일 일본 천황의 칙령(제229호)으로 공포됐습니다. 보통학교 입학 나이는 8세 이상으로 정했고, 고등 보통학교를 마친 뒤에 갈 수 있는 곳은 실업 학교나 전문학교뿐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조선 안에서 대학 교육을 받을 길은 없었습니다.

    1915년 3월 사립 학교 규칙이 개정돼 사립 학교도 관공립 학교와 같은 교과 과정을 따르게 하고, 성경 등 종교 과목을 정규 교과로 가르치지 못하게 했으며, 교원은 일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 규정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사립 학교 수는 1910년대 동안 크게 줄었습니다. 3·1 운동 뒤인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으로 보통학교가 6년으로 늘고 대학 설립 규정이 생겼으며, 이후 1938년·1943년 교육령 개정을 거치며 조선어 교육이 사라지고 황국 신민화 교육이 강화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8년 8월대한제국 정부가 사립 학교령을 공포해 사립 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바꿨습니다.
    2. 1911년 8월 23일제1차 조선 교육령이 칙령으로 공포됐습니다.
    3. 1911년 10월사립 학교 규칙이 공포됐습니다.
    4. 1911년 11월조선 교육령이 시행됐습니다.
    5. 1915년 3월개정 사립 학교 규칙으로 사립 학교의 교과 과정과 교원 자격을 더 엄격하게 묶었습니다.
    6. 1918년 2월서당 규칙이 공포돼 서당을 열 때도 도 장관에게 신고하게 했습니다.
    7. 1922년 2월제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보통학교가 6년제가 되고 대학 설립 규정이 생겼습니다.

    사료로 읽기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터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 /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한다.”
    — 제1차 조선 교육령 제2조·제3조(1911)우리역사넷의 번역입니다. ‘교육에 관한 칙어’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교육의 근본으로 삼은 1890년 일본의 교육 칙어를 말합니다. ‘시세와 민도에 맞게’는 한국인에게 낮은 수준의 교육만 준다는 근거로 쓰였습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총독으로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의 초대 조선 총독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실용적인 초등·실업 교육을 짧게 하고 일본어 보급과 충성하는 국민 양성을 앞세우는 교육 정책을 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공무원 기출 | 공무원 한국사 "조선교육령" 기출 문제로 정리하기! 해커스 공무원 한국사 이중석 -

    공무원 교육1위 해커스공무원 · 2,162회 · 13:05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조선교육령 전체를 기출로 정리하며 1차는 일부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주제별 심화 학습 일제시대 조선교육령

    창선고TV · 485회 · 7:1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조선교육령 전반을 다루는 학교 수업 영상입니다.

  8. 1912

    운동

    독립 의군부 조직

    고종의 밀명을 받은 임병찬이 조직한 비밀 단체입니다. 일본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 했고, 왕정을 되살리는 복벽주의를 내걸었습니다.

    배경

    병합 뒤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의병 출신 유학자들은 비밀리에 국권 회복을 준비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황제를 다시 세우는 복벽주의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전개

    1906년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은 1912년 무렵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며 비밀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13년 전라도에서 조직을 시작해 1914년 초에는 ‘대한 독립 의군부’라는 이름으로 전국 조직을 갖추려 했습니다.

    의군부는 총독과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고, 전국에서 동시에 시위와 의병 투쟁을 벌여 일본을 압박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914년 5월 조직원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임병찬은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로 독립 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됐다고 하며, 이듬해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으로 직함이 올라갔습니다. 옛 관료 이인순 등이 서울과 연락을 맡았습니다.

    1914년 2월 서울에서 조직 편제가 완성돼 각 도·군의 대표를 정했습니다. 총대표 27명과 각 도·군 대표 302명을 합쳐 329명이 이름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의병장 출신과 유생이 많았고, 호남을 중심으로 경기·강원 지역까지 조직이 퍼졌습니다.

    의군부는 조선 총독과 일본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 등에게 투서를 보내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다고 따지고, 국권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방식을 먼저 쓰려 했습니다. 1914년 5월 조직원 김창식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드러났고, 임병찬은 5월 말 스스로 경무 총감을 찾아가 국권 반환을 요구하다 체포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임병찬은 체포된 뒤 거문도에 유배됐다가 1916년 그곳에서 숨졌습니다. 독립 의군부는 실제 행동에 이르지 못했지만, 병합 뒤 국내에서 전국 규모로 조직된 비밀 결사 가운데 이른 사례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6년 6월임병찬이 최익현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쓰시마에 유배됐습니다.
    2. 1912년 9월고종의 밀조를 받아 독립 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이 됐다고 전해집니다.
    3. 1913년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으로 직함이 오르고 호남 지역 조직이 꾸려졌습니다.
    4. 1914년 2월서울에서 전국 조직의 편제가 완성되고 각 도·군 대표가 정해졌습니다.
    5. 1914년 5월조직원 김창식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드러났습니다. 임병찬은 경무 총감을 찾아가 국권 반환을 요구하다 체포됐습니다.
    6. 1914년임병찬이 보안법 위반으로 거문도에 유배됐습니다.
    7. 1916년 5월임병찬이 거문도 유배지에서 숨졌습니다.

    인물

    • 임병찬1851~1916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며 독립 의군부를 조직했습니다.

      전북 옥구 출신 유학자이자 관리로, 1906년 최익현과 함께 태인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쓰시마에 유배됐습니다. 풀려난 뒤 독립 의군부를 이끌다 다시 체포돼 거문도에서 유배 생활 중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1910년대 초 독립운동에는 황제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주의(독립 의군부, 신한 혁명당)와 국민이 주권을 갖는 공화국을 세우자는 공화주의(대한 광복회, 대동단결 선언)가 함께 있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민주 공화제를 택하면서 공화주의가 독립운동의 주된 흐름이 됐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 일대기 2분 정리ㅣ한국의 성씨 평택 임씨 인물사ㅣSTB상생방송

    STB상생방송 · 1,859회 · 1:49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독립 의군부를 이끈 임병찬의 생애를 2분으로 요약했습니다.

  9. 3월

    정치

    조선 태형령

    1912.3 ~ 1920.3 · 8년

    재판 없이 헌병 경찰이 한국인에게만 매질 처벌을 할 수 있게 한 법령입니다. 3·1 운동 뒤 폐지됐습니다.

    배경

    매로 볼기를 치는 태형은 조선 시대의 기본 형벌이었지만,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형벌 제도로 바뀌는 과정에서 줄여 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본국에서는 이미 폐지된 형벌이었습니다.

    1910년 12월 공포된 범죄 즉결례로 경찰서장과 헌병 분대장은 가벼운 범죄에 대해 재판 없이 징역·구류·태형·벌금을 곧바로 매길 수 있었습니다. 조선 태형령은 여기에 태형을 폭넓게 쓸 수 있는 근거를 더했습니다.

    전개

    1912년 3월 총독부는 제령으로 조선 태형령을 공포해 4월부터 시행했습니다.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조선인에게 형을 태형으로 바꿔 매길 수 있게 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의 범죄 즉결례에 따라 경찰서장이나 헌병 분대장이 재판 없이 곧바로 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태형은 헌병 경찰의 일상적인 처벌 수단이 됐습니다. 3·1 운동 때 붙잡힌 사람들도 태형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선 태형령은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13호로 공포돼 4월 1일부터 시행됐습니다. 벌금·과료를 받은 사람이 조선 안에 일정한 주소가 없거나 재산이 없다고 인정되면 태형으로 바꿀 수 있었고, 선고 뒤 5일 안에 벌금을 다 내지 못한 경우에도 태형으로 바꿨습니다. 징역·구류 하루나 벌금 1원을 태 1대로 계산했습니다.

    태형은 태로 볼기를 치는 방식으로, 30대 이하면 한 번에 치고 30대를 넘을 때마다 한 번씩 나눠 쳤으며 하루에 한 번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집행은 감옥이나 즉결 관서 안에서 비밀리에 하도록 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3·1 운동 뒤 통치 방식을 바꾸면서 조선 태형령은 1920년 폐지됐습니다.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 형벌이었다는 점에서 무단 통치를 대표하는 제도로 꼽힙니다.

    3·1 운동 뒤 총독부는 1919년 10월 폐지안을 올렸고, 조선 태형령은 1920년 4월 1일 폐지됐습니다. 이후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형벌 체계가 적용됐지만, 경찰의 즉결 처분 권한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0년 12월범죄 즉결례가 공포돼 경찰서장·헌병 분대장이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2. 1912년 3월 18일조선 태형령(제령 제13호)이 공포됐습니다.
    3. 1912년 4월 1일조선 태형령이 시행됐습니다.
    4. 1919년 3~5월3·1 운동 때 붙잡힌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즉결로 태형을 받았습니다.
    5. 1919년 10월총독부가 태형령 폐지안을 올렸습니다.
    6. 1920년 4월 1일조선 태형령이 폐지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집행한다. / 본령은 조선인에 한해 적용한다.”
    — 조선 태형령 제11조·제13조(1912)조선총독부 관보(1912년 3월 18일)에 실린 조문의 번역입니다.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 형벌이었음을 조문이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인물

    •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총독으로 조선 태형령을 공포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의 초대 조선 총독으로,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폈습니다.

    • 사이토 마코토1858~1936

      3대 총독으로 부임한 뒤 태형령 폐지를 추진했습니다.

      일본 해군 대장 출신으로 3·1 운동 뒤 부임해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웠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무단 통치(헌병 경찰)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3 서대문 형무소, 조선 태형령, 태형 부활

    KBS 히스토리 · 1.1만회 · 1:37

    유튜브 앱에서 보기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서대문 형무소와 함께 태형령과 그 부활을 짧게 다룹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무단 통치(헌병 경찰)

1910년대 일제가 군인인 헌병에게 경찰 일을 맡겨 폭력으로 다스린 통치 방식입니다.

헌병 경찰은 재판 없이 즉결 처분과 태형을 할 수 있었고, 교사와 관리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찼습니다. 한국인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거의 누릴 수 없었습니다.

3·1 운동으로 이런 통치가 한계에 부딪히자 일제는 1919년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방식을 바꿨습니다.

만화

무력으로 조선을 통치한 '무단 통치' (역사만화 90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3.1만회 · 2:53

유튜브 앱에서 보기

해설

1910년대 일제 무단 통치 l 한국사 일제 강점기 1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9.4만회 · 6:01

유튜브 앱에서 보기

다큐

영상한국사 I 01 일본, 헌병경찰제와 무단통치 실시를 강제병합 전에 계획하다

KBS 히스토리 · 2.4만회 · 2:47

유튜브 앱에서 보기

독립군

만주·연해주·중국 관내에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으려 한 군대입니다.

의병의 뒤를 이어 신흥 무관 학교 등에서 길러졌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1940년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습니다.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유튜브 앱에서 보기

해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l 일제 강점기 16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8만회 · 6:29

유튜브 앱에서 보기

강의

#1930년대 무장독립전쟁#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암기비법!!(6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4.2만회 · 6:39

유튜브 앱에서 보기

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