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전시 동원기

중일 전쟁과 민족 말살 정책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황국 신민 서사·창씨개명·조선어 교육 폐지를 강요하고 국가 총동원법으로 사람과 물자를 동원했습니다. 임시 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기간
1937.1 ~ 1940.12.31 · 3년 11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미나미
담긴 것
사건 12 · 영상 47 · 영화·드라마 15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4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어쩌다 어른 —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통치와 창씨개명

tvN STORY · 9.9만회 ·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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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민족 말살 통치와 창씨개명을 최태성 강사가 설명합니다.

1937.10 ~ 1940.8.10 · 황국 신민화 정책 → 조선일보·동아일보 폐간

해설·교양 · 다큐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KBS 히스토리 · 8.3만회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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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원봉의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까지를 다룬 KBS 방송입니다.

1919.11.9 ~ 1938.10.10 · 병참기지화 정책 → 조선 의용대 창설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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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병참기지화 정책 → 한국광복군 창설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6일차 3교시 — 1930년대 이후 식민 통치와 저항

최태성 1TV · 59.6만회 ·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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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통치와 저항을 정리한 강의입니다.

1931.9.18 ~ 1945.8.15 · 병참기지화 정책 → 한국광복군 창설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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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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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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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11· 제목만

「절정」

배경 1925 ~ 1944.1

KBS 3·1절 특집.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

영화 · 2016· 공식 영상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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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5 ~ 1945.8.15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삶. 사실과 다른 각색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화 · 2016· 공식 영상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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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창작). 친일 귀족의 저택이 무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넘볼 수 없는 귀족 아가씨를, 끝까지 지킨 남자의 사랑 (결말포함)

라라무비 · 34.9만회 ·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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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7· 제목만

「경성스캔들」

배경 1930 ~ 1938

KBS.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속 독립운동

영화 · 2008· 공식 영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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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만주 벌판의 보물 지도 쟁탈전을 그린 활극(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내부자들'에서 손 잘리기 전 손가락 먼저 잘렸던 병헌이 형 (feat. 손가락 귀신ㅋ)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온갖 TMI 썰 풀어 주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23.8만회 ·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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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2· 공식 영상

「각시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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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4 ~ 1938

KBS. 1930년대 경성의 가면 영웅 이야기(허영만 만화 원작)

영화 · 2016· 공식 영상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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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5 ~ 1945.2

시인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의 청춘과 죽음

영화 · 2008· 제목만

「모던보이」

배경 1937 ~ 1938

1937년 경성의 멋쟁이 청년과 독립운동가의 사랑

드라마 · 2023· 공식 영상

「구미호뎐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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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8

tvN 판타지. 1938년 경성으로 간 구미호 이야기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와.. 미친 합쳐서 3000살ㅋㅋ 신들이 일본 요괴, 한국 잡귀들 참교육하는 판타지 액션 드라마 ≪구미호뎐1938≫1-2화 몰아보기

김시선 · 338.7만회 ·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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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5· 공식 영상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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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8

1938년 경성 기숙학교에서 사라지는 소녀들을 그린 미스터리(창작)

영화 · 2011· 공식 영상

「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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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8 ~ 1944.6

일본군·소련군·독일군으로 끌려다닌 조선인 청년의 전쟁(실화 모티프)

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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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9· 공식 영상

「말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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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42.10.1

조선어 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을 도운 사람들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우리학교에서 일본어를 써야했던 실화, 말모이 리뷰

달빛뮤즈 · 13.9만회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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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연표 12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농촌진흥운동 (~1940),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1944.4.21),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과 예방구금령 (~1941.3.10)

  1. 1937

    경제

    병참기지화 정책

    1937 ~ 1945.8 · 8년

    중일 전쟁을 앞두고 총독부가 조선을 대륙 침략에 필요한 물자와 군수 산업의 기지로 삼은 정책입니다. 농공 병진을 내걸고 북부 지방에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웠습니다.

    • 1938년 이후에는 중공업·기계 공업 등 군수 공업이 강조됐고, 태평양 전쟁 뒤에는 항공기 생산을 중심으로 경금속·철강·석탄 공업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 북부 지방 댐 공사와 탄광·광산에 노동력을 대려고 근로보국대·학생근로동원과 함께 징용이 병행됐습니다.

    배경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일본이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총독부는 조선을 군수 물자를 대는 후방 기지로 삼는 구상을 키워 갔습니다.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농업 중심이던 조선 경제에 공업을 더하는 농공 병진 정책을 내걸었습니다.

    전개

    1936년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 시기부터 이 구상은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본격화됐습니다. 북부 지방에는 수력 발전소와 제련소·화학 공장이 잇따라 들어섰고,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공업·기계 공업 등 군수 공업이 더 강조됐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터진 뒤에는 항공기 생산을 중심 산업으로 삼고 경금속·철강·석탄 공업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노동력을 대려고 근로보국대와 학생 근로 동원에 이어 징용까지 동원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선의 공업 생산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시기에 크게 늘었지만,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생산물과 이익 대부분은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시기에 놓인 공업 기반은 광복 뒤 분단과 맞물려 남북 산업 구조에도 영향을 남겼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1년 9월만주 사변 이후 조선 공업화 정책이 시작됐습니다.
    2. 1936년미나미 지로가 총독으로 부임해 병참기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3. 1937년 7월중일 전쟁이 일어나 군수 공업이 더욱 강조됐습니다.
    4. 1938년국가 총동원법 시행으로 물자·노무 동원이 강화됐습니다.
    5. 1941년 12월태평양 전쟁 발발로 항공기 등 군수 생산이 중심이 됐습니다.
    6. 1945년 8월일본의 항복으로 정책이 끝났습니다.

    인물

    • 미나미 지로1874~1955

      7대 조선 총독으로 병참기지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 총독을 지냈습니다. 황국 신민화 정책과 창씨개명을 강행한 인물로, 광복 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병참기지화 정책과 식민지 공업화 평가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쪽

    이 시기에 놓인 발전소·제철소 등 중화학 공업 기반이 근대적 산업 시설의 토대가 됐고, 그 유산이 광복 뒤 북한 지역 공업화에 일정 부분 이어졌다고 봅니다.

    수탈론에 가까운 쪽

    공업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침략 전쟁 수행이었고, 자본과 기술은 일본 자본이 쥐었으며 한국인 노동자는 강제 동원과 임금 차별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식민지 수탈의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식민지 시기에 놓인 근대적 중화학 공업 기반이 광복 뒤 산업 구조에 영향을 남겼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 그 공업 시설은 전쟁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이익은 일본 자본에 돌아갔으며 노동력은 강제로 동원됐다는 점에서, 수탈의 성격이 짙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4단원 15차시|병참 기지화 정책|민족 말살 통치

    워니비 · 3.9만회 ·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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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7.7

    전쟁

    중일 전쟁

    1937.7.7 ~ 1945.8.15 · 8년 1개월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국을 전면 침략했습니다. 한반도는 전쟁 물자와 사람을 대는 기지로 바뀌었습니다.

    배경

    일본은 1931년 만주 사변으로 만주를 차지하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후 만리장성 이남의 화북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려 했고, 중국 안에서는 1936년 시안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멈추고 함께 일본에 맞서자는 흐름이 커졌습니다.

    전개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노구교) 부근에서 훈련하던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총격이 일어났습니다. 현지에서 정전 교섭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보냈고, 싸움은 전면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일본은 선전 포고 없이 전쟁을 벌여 이를 ‘사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군은 8월 상하이를 공격하고 12월 13일 국민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점령 직후 일본군이 포로와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약탈·성폭행을 저지른 난징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희생자 수는 연구에 따라 수만 명에서 30만 명까지 차이가 큽니다. 1937년 9월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두 번째 합작을 했고, 국민 정부는 충칭으로 옮겨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과 합쳐져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까지 이어졌습니다.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하는 병참 기지가 됐습니다. 북부 지방에 군수 공업이 들어섰고, 국가 총동원법으로 사람과 물자를 끌어갔으며,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는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강요됐습니다.

    독립운동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중국이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자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과 함께 싸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선 의용대(1938)와 한국광복군(1940)이 이 전쟁 가운데 창설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6년 12월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나며, 국민당과 공산당이 함께 일본에 맞서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2. 1937년 7월 7일 밤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총격이 일어났습니다.
    3. 1937년 7월 말일본군이 화북에서 총공격에 나서 베이징과 톈진을 차지했습니다.
    4. 1937년 8월 13일상하이에서 전투가 시작돼 석 달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5. 1937년 9월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합작이 공식화됐습니다.
    6. 1937년 11월상하이가 함락되고 국민 정부가 충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7. 1937년 12월 13일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고, 이후 몇 주 동안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8. 1938년 10월일본군이 우한과 광저우를 차지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장기전으로 굳었습니다.

    인물

    • 장제스1887~1975

      중국 국민 정부를 이끌고 충칭으로 옮겨 장기전을 벌였습니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로, 1928년 북벌을 마무리하며 국민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시안 사건 뒤 공산당과 다시 손잡고 항일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했습니다. 국공 내전에서 진 뒤 대만으로 옮겼습니다.

    • 고노에 후미마로1891~1945

      전쟁이 시작될 때 일본 총리로서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일본 귀족 출신 정치인으로 1937년 6월 총리가 됐습니다. 루거우차오 사건 뒤 화북 파병을 결정했고, 1938년 1월 ‘국민 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협상의 길을 스스로 막았습니다. 국가 총동원법도 그의 내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전쟁 뒤 전범 용의자로 체포 명령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중일 전쟁’이라는 이름
    일본은 당시 이 전쟁을 ‘지나 사변’이라 불렀고, 중국에서는 ‘항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교과서는 ‘중일 전쟁’이라고 씁니다. 1894년의 청일 전쟁과 구분할 때는 ‘제2차 중일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3,800만명 사망, 중국과 일본의 광기어린 대전쟁 "중일전쟁" 요약 [총합본]

    별별역사 · 299.5만회 · 1: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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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중일전쟁 전체 과정을 길게 요약한 조회수 높은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아직도 소문만 무성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 중일 전쟁에 미국이 끼어든 이유는? [전쟁사 읽어드립니다 EP.27] |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

    사피엔스 스튜디오 · 23.6만회 ·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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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임용한 박사가 루거우차오 사건과 전쟁 확대 과정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89년 전 중일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그날의 복수..)ㅣ그날을 보다 EP.19

    보다 BODA · 71.5만회 · 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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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과 난징 학살을 전문가와 함께 다루는 교양 대담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임용한이 알려주는 중일전쟁과 인간성을 상실한 일본군이 지린 악행 난징 대학살|세계 다크투어|JTBC 220908 방송

    교양 Voyage · 276.5만회 · 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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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세계다크투어로 난징대학살 중심이라 전쟁 전체는 일부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중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 ⚡난징 대학살⚡|세계다크투어|JTBC 220908 방송

    교양 Voyage · 21만회 ·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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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JTBC 세계다크투어가 중일전쟁 중 난징 대학살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 2차세계대전 🇯🇵일본편 3화 / 💀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전쟁… 🇹🇼중일전쟁🇯🇵의 시작!

    지식해적단 · 63만회 ·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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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중일전쟁의 시작을 그림과 지도로 풀어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중일전쟁 [도도도]

    도도도 · 60.6만회 ·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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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그림 영상으로 중일전쟁의 발발과 전개를 한 편에 정리합니다.

  3. 9월

    경제

    임시자금조정법과 전시 통제 경제

    1937.9 ~ 1940 · 3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총독부는 임시자금조정법을 적용해 은행의 설비 자금을 군수 공업에 집중시켰습니다. 이후 물자·자금·노무를 계획적으로 배정하는 통제 경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 조선식산은행은 이 법령과 1940년 은행 등 자금운용령에 따라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광공업 대출을 늘리는 은행이 됐고, 광공업 대출액은 1936년 8,032만 원에서 1942년 4억 4,775만 원으로 늘었습니다.
    • 1938년 국가 총동원법 시행 뒤에는 물자·노무·전력의 생산과 배급 전반이 전쟁 수요에 맞춰 통제됐습니다.

    배경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군수 물자 생산에 자금과 자원을 집중해야 했습니다. 총독부도 조선의 금융을 전쟁 수행에 맞춰 다시 짜야 했습니다.

    전개

    1937년 9월 임시자금조정법이 조선에도 적용되면서 은행의 설비 자금 대출이 총독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군수 공업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민간 소비나 비군수 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은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1938년 5월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물자·노무·전력의 생산과 배급 전반이 전쟁 수요에 맞춰 통제됐습니다. 1940년에는 은행 등 자금운용령이 더해져 조선식산은행 등 주요 은행이 총독부의 지시를 받는 군수 자금 공급 창구가 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통제로 광공업 대출액은 1936년 8,032만 원에서 1942년 4억 4,775만 원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통제 경제는 광복 때까지 이어지며 배급제·공출제와 함께 조선인의 일상생활에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7년 7월 7일중일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2. 1937년 9월임시자금조정법이 시행됐습니다.
    3. 1938년 5월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됐습니다.
    4. 1940년은행 등 자금운용령이 시행됐습니다.
    5. 1942년광공업 대출액이 1936년의 다섯 배를 넘는 수준으로 늘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경제 침탈 l 일제 강점기 7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2.5만회 ·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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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0월

    정치

    황국 신민화 정책

    1937.10 ~ 1945.8 · 7년 10개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걸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강요했습니다.

    배경

    중일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한국인을 병사와 노동자로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한국인이 스스로를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여기게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1936년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은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를 통치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전개

    1937년 10월 총독부는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로 시작하는 「황국 신민의 서사」를 만들어 학교와 관공서, 각종 모임에서 외우게 했습니다. 어린이용과 성인용이 따로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왕이 있는 도쿄 쪽을 향해 절하는 궁성 요배, 정오에 전쟁터의 병사를 위해 묵념하는 정오 묵도가 강요됐습니다. 마을마다 신사를 세우게 하고 학생과 주민을 신사 참배에 동원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계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주기철 목사처럼 참배를 거부하다 옥중에서 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 조선어 교육 폐지(1938 제3차 조선 교육령), 지원병 제도(1938), 소학교의 국민학교 개칭(1941), 창씨개명(1940), 한글 신문 폐간(1940)이 같은 흐름에서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국어와 한국식 이름, 고유한 신앙 생활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려는 정책은 1945년 광복까지 계속됐습니다. 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면 벌을 받았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인구 비율은 이 시기에 크게 늘었지만 광복 무렵에도 한국인의 다수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광복 뒤 신사는 대부분 철거됐고, 1946년 미군정 법령으로 창씨한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렸습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1996년에야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6년 8월미나미 지로가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2. 1937년 10월총독부가 「황국 신민의 서사」를 만들어 학교와 각종 모임에서 외우게 했습니다.
    3. 1938년 2월육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돼 그해 4월부터 조선인 지원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 1938년 3월제3차 조선 교육령으로 조선어가 선택 과목이 됐습니다.
    5. 1938년 9월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경찰의 압박 속에 신사 참배를 결의했습니다.
    6. 1940년 2월창씨개명 신고가 시작됐습니다.
    7. 1940년 8월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됐습니다.
    8. 1941년 3월국민학교령이 공포돼 4월부터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었습니다.
    9. 1944년 4월신사 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숨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 「황국 신민의 서사」 아동용(1937),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원문은 일본어입니다. 초등학생은 아동용을, 중등학교 이상 학생과 일반인은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로 시작하는 성인용을 외워야 했습니다.

    인물

    • 미나미 지로1874~1955

      조선 총독으로서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제7대 조선 총독을 지냈습니다. 재임 중 지원병제, 조선어 교육 폐지, 창씨개명 등을 시행했습니다. 전쟁 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 주기철1897~1944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 끝에 숨졌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한 뒤에도 참배를 거부해 여러 차례 투옥됐고, 1944년 평양 형무소에서 숨졌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내선일체의 실제
    ‘하나’를 내세웠지만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누린 것은 아닙니다. 참정권이나 교육 기회, 임금에서 차별은 그대로였고, 의무만 일본인과 같아지는 방향으로 정책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역사학계는 내선일체를 민족 말살 정책의 구호로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6 1940년대 전시 총동원체제와 황국신민화 교육

    KBS 히스토리 · 5,233회 ·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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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영상한국사가 전시 총동원 체제와 황국 신민화 교육을 보여 줍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자막]조선-우리의 후방 1939년 / 일제강점기 전시동원과 황국신민화의 진실

    백년역사CH · 2.5만회 ·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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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39년 일제 선전 영화에 자막을 단 것으로 황민화 선전을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예능

    황국신민화된 학교에서 10살 학생들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활!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2021tail #SBSstory

    SBS STORY · 7,127회 ·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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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꼬꼬무가 황국 신민화된 학교에서 아이들이 겪은 생활을 전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강쌤TV](한국사) 074. 황국 신민화 정책

    역사플레이 · 1,217회 ·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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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내선일체·신사 참배·황국 신민 서사 등 정책을 항목별로 강의합니다.

    사실 기록 · 뉴스

    황국신민서사비가 교정에.. 곳곳에 '친일잔재' -R (190513월/뉴스데스크)

    여수MBC News · 2,409회 ·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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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교정에 남은 황국신민서사비 등 잔재를 다룬 지역 뉴스입니다.

    창작 · 드라마

    빠스껫 볼 Basketball EP.6: 치호의 황국신민 선언 거부

    tvN DRAMA · 1.6만회 ·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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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황국 신민 선언을 거부하는 드라마 장면이라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5. 1938

    사회

    강제 동원(노무·병력·일본군 '위안부')

    1938 ~ 1945.8 · 7년

    전쟁이 길어지자 일제는 한국인을 탄광·공장·군사 시설의 노동자로, 군인과 군무원으로 동원했습니다.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인권을 짓밟혔습니다.

    • 노무 동원은 모집(1939)·관 알선(1942)·징용(1944)으로 점점 강제성이 커졌습니다. 병력 동원은 지원병제(1938)·학도 지원병제(1943)·징병제(1944) 순으로 확대됐습니다.
    • 1993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는 '위안소' 설치·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옛 일본군이 관여했고, 본인 의사에 반해 모집된 경우가 많았다고 인정했습니다.
    •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입니다.

    배경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군인과 노동력이 크게 모자랐습니다.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하면서 한국인을 전쟁에 필요한 인력으로 동원하는 법적 틀이 마련됐습니다.

    전개

    노무 동원은 1939년 ‘모집’으로 시작해 1942년 총독부가 인원을 할당하는 ‘관 알선’, 1944년 국민 징용령에 따른 ‘징용’으로 바뀌며 강제성이 점점 커졌습니다. 한국인은 일본 본토와 사할린, 남양 군도의 탄광·광산·군수 공장·비행장 건설 현장으로 보내졌고, 한반도 안의 공사장과 공장으로도 동원됐습니다.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병력 동원은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에서 시작해 1943년 학도 지원병 제도, 1944년 징병제로 넓어졌습니다. 군인 외에 군무원으로도 많은 사람이 끌려갔습니다. 1944년에는 여자 정신 근로령으로 젊은 여성도 공장에 동원됐습니다.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도 끌려갔습니다. 일본군은 점령지와 전선에 ‘위안소’를 두었고, 취업 사기나 인신매매, 강압 등으로 모집된 여성들이 그곳에서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1993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는 옛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관여했고, 모집이 본인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고 인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국 정부의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위원회는 국내외 동원을 모두 합쳐 연인원 약 780만 명(중복 포함)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했고, 그중 한반도 밖으로 간 노무 동원은 약 100만 명으로 봤습니다. 군인·군무원 동원은 합쳐 2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광복 뒤에도 사할린 등지에 남겨져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피해 배상 문제는 지금도 한일 관계의 핵심 쟁점입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이고, 한국 대법원은 2018년 강제 동원 피해자가 일본 기업에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8년 4월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가 시행되고, 국가 총동원법이 공포됐습니다.
    2. 1939년 9월 무렵일본 기업이 조선에서 노동자를 데려가는 ‘모집’ 방식의 노무 동원이 시작됐습니다.
    3. 1942년 2월총독부가 인원을 할당하고 행정 기관이 사람을 모으는 ‘관 알선’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4. 1943년 10월학도 지원병 제도가 실시돼 대학·전문학교 학생들이 입대했습니다.
    5. 1944년 4월조선에서 처음으로 징병 검사가 실시됐고, 그해 9월부터 징집된 사람들이 입영했습니다.
    6. 1944년 8~9월여자 정신 근로령이 공포되고, 국민 징용령이 조선에 전면 적용됐습니다.
    7. 1991년 8월 14일김학순이 처음으로 실명을 밝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습니다.
    8. 1993년 8월 4일일본 정부가 위안소 설치·관리에 군이 관여했다고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9. 2018년 10월 30일한국 대법원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확정 판결했습니다.
    10. 2023년 3월 6일한국 정부가 정부 산하 재단이 판결금을 대신 지급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 해법을 발표했습니다.

    인물

    • 김학순1924~1997

      1991년 처음으로 실명을 밝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기자 회견을 열어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이 증언으로 숨어 지내던 다른 피해자들의 신고가 이어졌고,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의 인권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8월 14일은 2018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 고노 요헤이1937년 출생

      1993년 관방 장관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일본 자민당 정치인으로,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 장관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위안소 설치·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옛 일본군이 직간접으로 관여했고 모집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고 인정하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혔습니다. 뒤에 중의원 의장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피해 배상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일본 정부·기업의 직접 책임을 강조하는 쪽

    1965년 협정은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다루지 않았으므로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봅니다.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하고 직접 사과·배상해야 피해자의 존엄이 회복된다고 보며, 2015년 위안부 합의와 2023년 제3자 변제 방식도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뤄졌다고 비판합니다.

    외교적 타협과 한국 정부 책임을 강조하는 쪽

    1965년 협정으로 받은 자금이 경제 개발에 쓰였고 한국 정부도 두 차례 보상을 했다는 점을 듭니다. 고령의 피해자가 살아 있을 때 현실적인 구제를 하려면 한국 정부 주도의 해법이 필요하고, 한일 관계를 안정시켜야 안보·경제 협력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정신대(근로 정신대)는 공장 등에 동원된 노동 조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990년대 초에는 위안부를 흔히 ‘정신대’라고 불렀지만, 두 가지는 다른 제도입니다. 오늘날 정부와 학계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붙여 씁니다. 가해자가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시마(군함도)
    나가사키 앞바다의 해저 탄광 섬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됐습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오를 때 일본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이행을 두고 한일 사이에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760만 명 강제동원, 10대 초등학생까지... 일제가 한반도 전역에 남긴 전쟁의 흔적 | KBS 스페셜 20090816 방송

    KBS 다큐 · 2만회 · 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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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KBS 스페셜이 한반도 전역의 강제 동원 흔적과 증언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강제동원] 영상으로 알아보는 일제강제동원의 역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 3,833회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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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강제 동원의 역사를 정리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전쟁과 여성 1부 — 일본군 성노예, 전쟁의 도구였다

    YTN 다큐 · 124.5만회 · 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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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증언으로 다룬 YTN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어쩌다 어른 —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탄광

    사피엔스 스튜디오 · 9.4만회 ·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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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탄광 강제 징용의 실상을 다룬 최태성 강연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열여섯 살이었지│2편. 못다한 이야기│일본군'위안부' 피해 애니메이션│김준기감독

    성평등가족부 · 37만회 ·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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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부처가 만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애니메이션 2편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열여섯 살이었지│1편. 소녀이야기│일본군'위안부' 피해 애니메이션│김준기감독

    성평등가족부 · 22.3만회 ·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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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정부 부처가 만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애니메이션 1편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황현필쌤 직강] 누구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

    아닌밤중에 야간근무 · 2,752회 ·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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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황현필이 라디오에서 강제 동원의 역사를 강의한 영상입니다.

  6. 3월

    정치

    제3차 조선 교육령

    조선어를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으로 바꿔 학교에서 사실상 가르치지 않게 했습니다. 1943년 제4차 교육령으로 완전히 없앴습니다.

    배경

    조선 교육령은 식민지 조선의 학교 제도를 정한 법령입니다. 1911년 제1차, 1922년 제2차 교육령에서는 조선어가 필수 과목이었습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내선일체가 통치 구호가 되면서, 총독부는 학교를 황국 신민을 기르는 곳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1937년 10월 「황국 신민의 서사」가 만들어져 학교마다 아침 조회 때 외우게 했고, 궁성 요배와 신사 참배도 학교 행사가 됐습니다.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는 미나미 총독 아래에서 이런 교육 정책을 설계했습니다. 1938년 2월에는 육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돼, 학교에서 일본어와 군사 훈련을 익힌 청년을 병력으로 쓰려는 계획도 함께 움직였습니다.

    전개

    1938년 3월 제3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4월부터 시행됐습니다. 조선인이 다니던 보통학교·고등 보통학교·여자 고등 보통학교를 일본인 학교와 같은 소학교·중학교·고등 여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교육 목표로 ‘국체 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인고 단련’을 내세웠습니다.

    조선어는 필수에서 선택 과목(수의 과목)이 됐습니다. 형식은 선택이었지만 학교들은 실제로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게 됐고, 교내에서 조선어를 쓰면 벌을 줬습니다. 대신 일본어와 일본 역사, 수신 과목이 강화됐습니다.

    새 교육령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제도를 합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따로 다녔고 조선인 아동의 취학률도 낮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황국 신민 서사 제창, 신사 참배, 근로 봉사가 이어졌고 교련 같은 군사 훈련이 늘었습니다. 학생끼리 조선어를 쓰면 서로 적발하게 하는 벌칙 제도를 둔 학교도 있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1941년 소학교는 국민학교로 바뀌었고, 1943년 제4차 조선 교육령은 조선어 과목을 아예 없애고 수업 연한을 줄이며 학교를 전시 동원 체제에 맞췄습니다. 광복 무렵 한국어로 읽고 쓰는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가 생겨, 광복 직후 국어 교과서 보급과 한글 교육이 시급한 과제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11년 8월제1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조선인에게 짧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을 하도록 했습니다.
    2. 1922년 2월제2차 조선 교육령으로 보통학교 수업 연한을 6년으로 늘리고 대학 설립의 길을 열었습니다. 조선어는 필수였습니다.
    3. 1937년 10월「황국 신민의 서사」가 만들어져 학교에서 외우게 했습니다.
    4. 1938년 3월 4일제3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됐습니다.
    5. 1938년 4월 1일새 교육령이 시행돼 학교 이름이 소학교·중학교·고등 여학교로 바뀌고 조선어가 선택 과목이 됐습니다.
    6. 1941년 4월국민학교령에 따라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었습니다.
    7. 1943년 3월제4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돼 조선어 과목이 없어지고 학교가 전시 동원 체제에 맞춰졌습니다.

    인물

    • 미나미 지로1874~1955

      조선 총독으로서 제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했습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 총독을 지낸 일본 육군 대장입니다. 내선일체를 통치 구호로 내걸고 지원병제·창씨개명 등을 시행했습니다. 전쟁 뒤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 시오바라 도키사부로1896~1964

      총독부 학무국장으로 교육령 개정과 황국 신민 서사 제정을 이끌었습니다.

      일본 내무 관료 출신으로 미나미 총독과 함께 조선에 와 학무국장을 맡았습니다. 교육을 황국 신민화의 수단으로 삼는 정책을 설계한 인물로 꼽힙니다.

    더 알아두기

    학교 이름을 같게 한 이유
    제2차 교육령까지는 조선인 학교와 일본인 학교의 이름과 제도가 달랐습니다. 제3차 교육령은 이름을 일본과 같게 해 ‘차별을 없앴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목적은 조선인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정체성을 심는 데 있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3~고등학생을 위한 한국근현대사 "일제시대" - 11. 민족문화수호운동과 조선교육령 -

    찐히스토리TV · 66회 · 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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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민족 문화 수호와 조선교육령 전반을 다루는 개인 강의입니다.

  7. 5월

    정치

    국가 총동원법 시행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정부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게 한 법이 조선에도 적용됐습니다. 쌀과 금속을 거둬 가는 공출과 식량 배급제가 실시됐습니다.

    배경

    중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바뀌자 일본 정부는 나라 안의 모든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습니다. 1938년 4월 일본 의회가 국가 총동원법을 통과시켰고, 5월부터 시행되면서 칙령으로 조선·대만 등 식민지에도 적용됐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될 때 일본은 몇 달 안에 끝날 것으로 봤지만, 난징을 점령한 뒤에도 중국 국민 정부는 충칭으로 옮겨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전선이 넓어지면서 병력과 군수 물자가 크게 모자라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정부가 통제할 법을 만들었습니다. 의회 안에서도 정부에 너무 큰 권한을 준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군부의 압력 속에 통과됐습니다.

    전개

    이 법은 전쟁을 위해 필요하면 정부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칙령만으로 사람을 징용하고, 물자·가격·임금·기업 활동·언론을 통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1939년 국민 징용령 등 여러 하위 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만들어지고, 10가구 안팎을 묶은 애국반이 생활 말단까지 통제했습니다. 1940년에는 국민 총력 조선 연맹으로 개편됐습니다. 쌀을 정해진 값에 강제로 사들이는 미곡 공출, 식량 배급제가 실시됐고, 전쟁 말기에는 놋그릇·수저·농기구 같은 금속까지 거둬 갔습니다.

    애국반은 반상회를 열어 총독부의 지시를 전하고, 저축과 헌금을 걷고, 배급표를 나눠 주고,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에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배급이 애국반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모임에 빠지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결과와 의미

    한국인의 노동력, 식량, 생활용품이 전쟁을 위해 체계적으로 동원되는 구조가 1945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농민은 수확한 쌀의 상당 부분을 공출로 내놓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강제 동원(노무·병력)도 이 법을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7년 7월중일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2. 1938년 4월 1일일본에서 국가 총동원법이 공포됐습니다.
    3. 1938년 5월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고 조선·대만 등 식민지에도 적용됐습니다.
    4. 1938년 7월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만들어져 마을마다 애국반을 조직했습니다.
    5. 1939년 7월국가 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징용령이 공포됐습니다.
    6. 1939년조선에 큰 가뭄이 들어 쌀 수확이 크게 줄었고, 이후 쌀 공출과 배급 통제가 강화됐습니다.
    7. 1940년 10월국민 총력 조선 연맹으로 개편돼 총독부의 행정 조직과 하나로 움직이게 됐습니다.
    8. 1941년 이후금속류 회수가 본격화돼 놋그릇·수저·교회 종까지 거둬 갔습니다.

    사료로 읽기

    “본법에서 국가 총동원이란 전시(전쟁에 준할 사변의 경우를 포함)에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 국가 총동원법 제1조(1938), 한국어 번역(원문은 일본어)‘사변’을 넣은 것은 일본이 선전 포고 없이 벌인 중일 전쟁을 ‘지나 사변’이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이 법을 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인물

    • 고노에 후미마로1891~1945

      일본 총리로서 국가 총동원법 제정을 이끌었습니다.

      1937년 6월 총리가 돼 중일 전쟁 확대를 결정했습니다. 1940년 두 번째 내각에서는 정당을 해산시키고 대정익찬회를 만들어 전시 체제를 굳혔습니다. 전쟁 뒤 전범 용의자로 체포 명령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미나미 지로1874~1955

      조선 총독으로 총동원 체제를 조선에 적용했습니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과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을 통해 애국반까지 이어지는 동원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뒤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더 알아두기

    공출이란
    정부가 정한 양을 정한 값에 강제로 내게 하는 제도입니다. 값은 시장 가격보다 낮았고 양을 채우지 못하면 집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쌀뿐 아니라 보리·면화·가마니, 금속류, 송탄유(소나무 기름) 원료까지 대상이 됐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55_국가총동원법 공포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7,779회 ·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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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국가 총동원법 공포와 공출·징용을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5 1938년 국가 총동원법에 따른 조선인 강제징용

    KBS 히스토리 · 930회 ·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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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한국사가 총동원법에 따른 조선인 강제 징용을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8 신사참배, 창씨개명, 진주만 기습, 국가 총동원법, 물자 수탈, 강제 징병

    KBS 히스토리 · 1만회 ·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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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참배·창씨개명·총동원법 등을 함께 다루는 KBS 짧은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free19 숟가락까지 빼앗아간 ′국가총동원법′, 가장 악했던 법은?! 170815 EP.66

    O tvN · 3,849회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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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한19가 숟가락까지 거둬 간 국가 총동원법을 짧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티비냥] 악질 수탈 위한 국가총동원법, 가마솥과 숟가락까지 빼앗아 그 앞에서 촬영한 기념 사진│프리한19 170815 #01

    디글 클래식 :Diggle Classic · 8,641회 ·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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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프리한19에서 총동원법 아래 물자 수탈을 소개한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보기만 해도 10점 UP! 한국사 벼락치기|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경제 침탈|민족 말살 통치, 국가 총동원법|한능검|한국사 정리|한국사탐구생활|에

    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9,648회 ·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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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말살 통치 전반을 훑는 수험 강의로 총동원법은 그 일부입니다.

  8. 7월

    정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애국반

    1938.7 ~ 1940.10 · 2년 3개월

    총독부가 전쟁 협력을 다그치려고 만든 관제 조직입니다. 총독부-조선연맹-도연맹-읍면연맹-부락연맹-애국반-개인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통제망을 만들었습니다.

    • 애국반은 10호 안팎을 한 단위로 묶은 최말단 조직으로, 1938년 말 이미 410만 명 가까이가 편성됐습니다.
    • 신사 참배·창씨개명·일본어 사용 같은 정책을 집집마다 실행시키는 통로로 쓰였고,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됐습니다.

    배경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전쟁 협력 태세로 묶어 두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행정 조직보다 더 촘촘한 통제망이 필요했습니다.

    전개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중앙 조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총독부-조선연맹-도연맹-부(군)연맹-읍면연맹-부락(정)연맹-애국반-개인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조직을 갖췄습니다.

    애국반은 10호 안팎을 한 단위로 묶은 최말단 조직으로, 1938년 말 이미 약 410만 명이 편성됐습니다. 신사 참배·궁성 요배·일본어 사용·창씨개명 같은 정책을 집집마다 실행시키고 국방 헌금·공출을 독려하는 통로로 쓰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돼 더 강력한 전시 동원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애국반 조직은 광복 때까지 유지되며 총동원 체제의 말단을 이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7년 7월중일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2. 1938년 7월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됐습니다.
    3. 1938년 말애국반에 약 410만 명이 편성됐습니다.
    4. 1940년 10월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됐습니다.

    인물

    • 미나미 지로1874~1955

      총독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병참기지화 정책과 함께 황국 신민화·창씨개명을 밀어붙인 총독입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재임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9. 10.10

    전쟁

    조선 의용대 창설

    김원봉이 중국 한커우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든 한인 무장 부대입니다.

    • 일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화북으로 간 대원들은 조선 의용군이 됐습니다.

    배경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관내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군과 함께 일본과 싸울 기회를 찾았습니다.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계열 단체들은 1937년 12월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만들고, 중국 국민당 정부에 한인 무장 부대 창설을 요청했습니다.

    전개

    1938년 10월 10일 우한의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가 창설됐습니다. 대장은 김원봉이었고,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 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초기 대원은 약 100여 명으로, 대부분 김원봉이 세운 간부 학교나 중국 군관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의용대는 부대를 나눠 여러 전선의 중국군에 배치됐고, 전투보다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전단·방송), 포로 심문, 정보 수집을 주로 맡았습니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모두 할 줄 아는 대원들의 능력이 쓰임새가 컸습니다.

    1941년 대원 다수가 국민당의 통제를 벗어나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 한국인이 많은 지역으로 가기 위해 황허를 건너 화북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화북 지대를 이뤄 1941년 12월 호가장 전투, 1942년 타이항산 반소탕전 등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윤세주 등이 전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화북으로 간 대원들은 1942년 7월 조선 독립 동맹 아래 조선 의용군으로 재편됐습니다. 충칭에 남은 김원봉과 대원들은 1942년 5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됐습니다. 이로써 중국 관내의 두 무장 세력이 한국광복군으로 일부 합쳐졌습니다.

    조선 의용군 출신들은 광복 뒤 북한으로 들어가 이른바 연안파를 이뤘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의용대의 역사는 남북 어느 쪽에서도 오랫동안 온전히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7년 12월조선 민족 혁명당 등이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했습니다.
    2. 1938년 10월 10일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가 창설됐습니다.
    3. 1938년 10월 말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본부가 구이린으로 옮겼습니다.
    4. 1940년 11월 무렵충칭에서 열린 간부 회의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화북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5. 1941년 봄~여름대원 다수가 황허를 건너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인 타이항산 일대로 옮기고 화북 지대를 이뤘습니다.
    6. 1941년 12월 12일화북 지대가 허베이성 호가장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대원 여럿이 전사하거나 붙잡혔습니다.
    7. 1942년 5월타이항산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포위 공격을 막다 윤세주·진광화가 전사했습니다. 같은 달 충칭의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습니다.
    8. 1942년 7월화북 지대가 조선 독립 동맹 아래 조선 의용군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물

    • 김원봉1898~1958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고 대장을 맡았습니다.

      의열단 단장 출신으로 민족 혁명당을 이끌었습니다.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 부사령관, 임시 정부 군무부장을 지냈습니다. 광복 뒤 월북해 북한 정권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남한에서의 서훈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윤세주1901~1942

      조선 의용대 핵심 간부로 화북에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김원봉과 같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창립 단원입니다. 1942년 5월 타이항산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막다 크게 다쳐 숨졌습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김원봉을 독립 유공자로 서훈할 것인가

    서훈해야 한다는 쪽

    의열단과 조선 의용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이어진 독립운동 공적이 뚜렷하다고 봅니다. 광복 이전의 공적과 이후의 행적을 나눠 평가해야 하며, 월북은 좌우 갈등과 테러가 심했던 광복 직후 정국의 영향도 컸다고 봅니다.

    서훈할 수 없다는 쪽

    월북 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고위직을 지냈고, 6·25 전쟁 때도 북한 정권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을 무겁게 봅니다. 대한민국을 공격한 정권에 공헌한 사람에게 대한민국이 훈장을 줄 수 없다는 현행 기준을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90 조선의용대, 항일무장투쟁의 재개를 알리다

    KBS 히스토리 · 2.3만회 ·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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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창설과 활동을 정면으로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5분정리] 조선의용대의 시작 - 분단이 지워버린 항일투사들 1부 몰아보기 / YTN KOREAN

    YTN korean · 1.1만회 ·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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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TN 다큐 요약판으로 민족혁명당과 조선 의용대 창설을 다룹니다.

  10. 1940

    2.11

    정치

    창씨개명

    1940.2.11 ~ 8.10 · 5개월

    한국인에게 일본식 성과 이름을 쓰도록 한 정책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학교 입학과 관공서 일 처리에서 불이익을 줘 사실상 강제했습니다.

    배경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성(姓)과 본관으로 집안을 나타냈고, 여성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집(이에)을 기준으로 가족 전체가 같은 씨(氏)를 쓰는 제도였습니다. 총독부는 황국 신민화 정책의 하나로 한국의 가족 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고 한국인을 일본인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개

    1939년 11월 조선 민사령이 개정돼,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여섯 달 동안 새로 만든 일본식 씨를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씨를 정하는 ‘창씨’는 모든 가구의 의무였고, 신고하지 않으면 호주의 성을 그대로 씨로 삼게 했습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개명’은 신청해야 하는 선택 사항이었습니다.

    처음 석 달 동안 신고한 가구는 전체의 7.6%에 그쳤습니다. 총독부는 행정 기관과 경찰을 동원하고 유명 인사를 앞세워 신고를 재촉했습니다. 따르지 않는 집의 아이는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거나 교사에게 벌을 받았고, 관공서 일 처리와 식량 배급에서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결국 기한이 끝날 때 전체 가구의 79.3%가 창씨를 신고했습니다.

    총독부는 창씨를 일본식 가족 제도를 들여오는 일이라고 설명했고, 신문과 방송에서 유명 인사들의 창씨를 널리 알렸습니다. 소설가 이광수는 1940년 2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하고 그 이유를 신문에 밝혀 창씨를 권하는 쪽에 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창씨를 거부하며 버틴 사람도 있었고, 성을 바꾸는 것을 조상에 대한 죄로 여겨 목숨을 끊은 사례도 전해집니다. 일본식 씨를 지으면서도 본관이나 원래 성의 글자를 넣어 뿌리를 드러내려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복 뒤 1946년 10월 미군정은 조선 성명 복구령을 내려 창씨한 이름을 원래 성명으로 되돌렸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9년 11월 10일조선 민사령 개정과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이 공포됐습니다.
    2. 1940년 2월 11일창씨 신고 접수가 시작됐습니다. 일본의 건국 기념일인 기원절에 맞춘 날짜였습니다.
    3. 1940년 5월 무렵석 달 동안 신고율이 7.6%에 그치자 총독부가 행정·경찰 조직을 동원해 신고를 재촉했습니다.
    4. 1940년 8월 10일신고 기한이 끝났고, 전체 가구의 79.3%가 창씨를 신고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집은 호주의 성이 그대로 씨가 됐습니다.
    5. 1945년 8월 15일광복으로 창씨개명 제도의 강제력이 사라졌습니다.
    6. 1946년 10월 23일미군정이 조선 성명 복구령을 공포해 창씨한 이름을 원래 성명으로 되돌렸습니다.

    인물

    • 미나미 지로1874~1955

      조선 총독으로서 창씨개명을 시행했습니다.

      내선일체를 통치 구호로 내건 제7대 조선 총독입니다. 창씨개명은 그의 재임 중 대표적인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꼽힙니다.

    • 이광수1892~1950

      창씨를 하고 신문에 창씨를 권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무정』을 쓴 근대 소설가이자 2·8 독립 선언서를 쓴 독립운동가였으나,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 뒤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학병 권유 등 전쟁 협력 활동을 했고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습니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6·25 전쟁 때 납북돼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창씨와 개명은 다르다
    ‘창씨개명’은 두 가지를 합친 말입니다. 창씨는 모든 가구에 강제된 것이고, 개명은 원하는 사람이 수수료를 내고 신청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씨는 일본식인데 이름은 원래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쓴 사람도 많았습니다.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법적으로 창씨 신고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초기 신고율이 매우 낮았다가 행정·경찰 압력 이후 급격히 올랐다는 총독부 자료 자체가, 실제로는 강제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도 강제 정책으로 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해설·교양 · 예능

    최태성 강사 #02 | 왜 당시 조선인들 80%는 창씨개명을 한 걸까, 전쟁이 앗아갔던 우리의 정체성 | #어쩌다어른 #사피엔스

    사피엔스 스튜디오 · 8.1만회 ·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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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최태성 강사가 창씨개명의 배경과 실상을 설명하는 강연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반발한 조상들의 맛깔나는 드립

    사건탐구 과거탐구 STGT · 3.1만회 ·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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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창씨개명에 반발해 지은 이름들을 소개하는 개인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본직격] ‘창씨개명’ 강요, 우리보다 더 당한 민족이 있다

    호사카유지의 일본읽기 · 3,319회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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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호사카 유지가 창씨개명 강요를 다른 민족 사례와 함께 설명합니다.

  11. 8.10

    사회

    조선일보·동아일보 폐간

    총독부가 한글 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했습니다.

    배경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 문화 통치 아래 창간된 민간 한글 신문입니다. 1930년대 후반 전시 체제가 되면서 총독부는 언론을 전쟁 선전 도구로 삼으려 했고, 한글 신문의 존재 자체를 황국 신민화 정책의 걸림돌로 봤습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한 차례 무기 정간을 겪었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신문 검열을 더 엄하게 했고, 두 신문은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싣고 전쟁 관련 선전 기사를 실어야 했습니다. 1938년 일본 본토에서 물자 절약을 이유로 신문사를 합치는 정책이 시작됐고, 1939년 말 이 정책이 조선에도 들어왔습니다. 총독부 내부 문서는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가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함께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존재 때문에 방해받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1940년 초부터 두 신문에 스스로 폐간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명분은 종이 등 물자 절약과 언론 통합이었습니다. 신문사들은 한동안 버텼지만 결국 1940년 8월 10일 두 신문이 함께 폐간됐습니다.

    총독부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만 남긴다는 방침을 세우고, 1939년 말부터 1940년 초까지 두 신문사 사장을 따로 불러 폐간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1940년 1월 경무국 쪽에 폐간 협의에 응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고, 동아일보는 한동안 버텼습니다. 두 신문은 끝내 총독부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문을 닫았고, 윤전기 등 시설을 넘기는 대가와 사원 퇴직금을 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한국어로 된 문예지들도 차례로 사라졌습니다. 1941년 4월에는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됐습니다. 두 신문사는 폐간 뒤에도 회사 조직을 남겨 조선일보는 잡지 『조광』을 계속 냈고, 동아일보는 재산을 관리하는 회사로 남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후 광복 때까지 한글로 된 일간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만 남았습니다.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에 다시 발행을 시작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 3~4월문화 통치 아래 조선일보(3월 5일)와 동아일보(4월 1일)가 창간됐습니다.
    2. 1936년 8월 29일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네 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습니다.
    3. 1937년 11월조선중앙일보가 발행 허가를 잃고 폐간돼, 민간 한글 신문은 두 곳만 남았습니다.
    4. 1939년 말총독부가 두 신문사 사장과 폐간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습니다.
    5. 1940년 1월동아일보 사장 백관수가 폐간 협의에 응하기 어렵다는 뜻을 총독부에 밝혔습니다.
    6. 1940년 8월 10일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함께 폐간됐습니다.
    7. 1945년 11월 23일조선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했습니다.
    8. 1945년 12월 1일동아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했습니다.

    인물

    • 방응모1883~?

      폐간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금광 경영으로 큰돈을 벌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했습니다. 전시 체제에서 국방 헌금과 친일 단체 활동을 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습니다. 6·25 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 김성수1891~1955

      동아일보를 창간한 사주로, 폐간 당시 경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경성방직과 중앙학교·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한 기업인·교육자입니다.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고, 광복 뒤 한국민주당을 이끌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전시에 학병 권유 글을 쓰는 등의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2017년 대법원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폐간 전후 두 신문의 행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탄압받은 민족 언론으로 보는 쪽

    두 신문은 1920~30년대 여러 차례 압수·정간을 당하며 문맹 퇴치(브나로드·문자 보급) 운동과 민족 문화 보급에 힘썼고, 끝내 일제의 강요로 문을 닫았다고 봅니다. 전시 체제의 친일 기사는 검열과 폐간 압박 아래 불가피했던 면이 크다고 봅니다.

    친일 행적을 함께 봐야 한다는 쪽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두 신문이 일왕 사진을 싣고 전쟁 지원과 지원병 참여를 독려하는 기사를 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사주인 방응모와 김성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김성수는 2017년 대법원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됐다는 점도 듭니다. 폐간을 저항의 결과로만 설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짤꾹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00년의 시작 │ 8.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폐간

    역사공장 · 443회 ·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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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신문의 1940년 폐간을 다룬 역사공장 강좌입니다.

  12. 9.17

    전쟁

    한국광복군 창설

    충칭에 자리 잡은 임시 정부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1942년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합류했습니다.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수립 때부터 독립 전쟁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습니다. 윤봉길 의거 뒤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군사 간부를 기를 수 있게 됐고, 1940년 임시 정부가 충칭에 자리 잡으면서 정규군 창설을 서둘렀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워야 광복 뒤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전개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이 열렸습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습니다.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간부 중심으로 출발해 중국 각지에서 한국인 청년을 모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 학도병도 합류했습니다.

    1941년 중국 군사 위원회는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내세워 광복군을 중국군 통제 아래 뒀습니다. 임시 정부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가 꾸준히 개정을 요구해 1944년에 이를 폐지했습니다. 1942년 5월에는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 일부가 제1지대로 편입됐고, 김원봉이 부사령관이 됐습니다. 이범석의 제2지대는 시안에, 김학규의 제3지대는 푸양에 자리 잡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광복군은 1941년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 뒤 연합군과 함께 작전에 나섰습니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보냈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이 먼저 항복했습니다.

    광복 뒤 미군정이 광복군을 군대로 인정하지 않아 대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범석·김홍일 등 광복군 출신이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의 전통을 잇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40년 5월임시 정부를 지지하던 세 정당이 합쳐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습니다.
    2. 1940년 9월 17일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이 열렸습니다.
    3. 1940년 11월총사령부 일부가 전선에 가까운 시안으로 옮겨 병력을 모았습니다.
    4. 1941년 11월중국 군사 위원회가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으로 광복군을 중국군 통제 아래 뒀습니다.
    5. 1942년 5월조선 의용대 본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이 부사령관이 됐습니다.
    6. 1943년 8월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면 전구 공작대를 인도로 보냈습니다.
    7. 1944년 8월9개 준승이 폐지돼 광복군이 임시 정부의 지휘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8. 1945년 5월 무렵시안의 제2지대와 푸양의 제3지대에서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함께 특수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9. 1945년 8월 18일이범석 등이 OSS 요원들과 함께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가 일본군에 막혀 이튿날 돌아갔습니다.

    인물

    • 지청천1888~1957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을 이끈 무장 투쟁 지도자입니다. 광복 뒤 대동청년단을 만들고 제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 이범석1900~1972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맡았습니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중국군에서 복무했습니다. 광복군 제2지대에서 OSS와 합동 훈련을 지휘했습니다. 광복 뒤 조선 민족 청년단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광복군의 실제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독립 전쟁의 의지와 성과를 강조하는 쪽

    어려운 조건에서도 정규군을 만들어 연합군과 함께 싸웠고, 인도·미얀마 전선 파견과 국내 진공 작전 준비로 연합국에 한국의 참전 의지를 보여 줬다고 봅니다. 국군의 뿌리이자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군대라고 평가합니다.

    규모와 조건의 한계를 강조하는 쪽

    병력이 수백 명 수준에 머물렀고 오랫동안 중국군의 통제를 받아 독자적인 대규모 작전을 펴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결과 연합국에게 교전 단체로 인정받지 못했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한국의 발언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독립군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 작전 계획

    KBS 히스토리 · 3.9만회 ·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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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 작전 계획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26_[이벤트 종료] 정부의 정규군,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날입니다.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2만회 ·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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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임시 정부 정규군인 광복군 창설을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역덕이슈 오늘 I 29 광복군, 임시정부의 국군

    KBS 히스토리 · 8,561회 ·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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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히스토리가 광복군 창설 과정과 의미를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국사] ▶한국광복군◀ ▷흐름을 암기비법으로! ◁

    김민석 · 3.7만회 ·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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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창설과 활동 흐름을 정리한 강사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창설 81주년 한국광복군…대한민국 국군의 토대

    KFN 국방뉴스 · 1,461회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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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뉴스가 창설 81주년을 맞아 광복군의 역사를 보도합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민족 말살 통치(황국 신민화)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없애고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한 정책입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걸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강요했습니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없애고 일본식 성명을 쓰게 했으며(창씨개명), 한글 신문을 폐간했습니다.

같은 시기 전쟁을 위해 사람과 물자를 강제로 동원했습니다.

다큐

[자막]조선-우리의 후방 1939년 / 일제강점기 전시동원과 황국신민화의 진실

백년역사CH · 2.5만회 ·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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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상24_집없는천사_황국신민서사

사계절 TV · 3.7만회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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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만주·연해주·중국 관내에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되찾으려 한 군대입니다.

의병의 뒤를 이어 신흥 무관 학교 등에서 길러졌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중국군과 연합해 싸웠고, 1940년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습니다.

만화

독립을 위한 치열한 무장 투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역사만화 94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9만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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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l 일제 강점기 16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5.8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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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1930년대 무장독립전쟁#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암기비법!!(6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14.2만회 ·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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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정부가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자원을 몰아준 경제 성장 계획입니다(1962~1996).

1960년대에는 섬유·가발 같은 경공업과 수출,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화학 같은 중화학 공업에 집중했습니다. 수출 주도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성장의 그늘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경 유착,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지적됩니다.

다큐

영상한국사 I 117 1961년 국토건설사업,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

KBS 히스토리 · 1.9만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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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강의기적, 세계가 경악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짜 비밀

비밀의경제학 · 1.7만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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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