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

제3공화국이 출범해 6·3 시위 속에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에 전투 부대를 보냈습니다.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과 수출 주도 성장이 본격화했습니다.

기간
1963.12.17 ~ 1967.12.31 · 4년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박정희
담긴 것
사건 7 · 영상 48 · 영화·드라마 8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8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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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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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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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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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4· 공식 영상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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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0.12.15 ~ 1983.11.14

흥남 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까지 한 사람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황정민 주연 천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 비하인드 스토리, 옥에 티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50만회 ·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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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1· 제목만

「빛과 그림자」

배경 1960 ~ 1980

MBC. 1960~70년대 쇼 비즈니스와 정치 이야기

드라마 · 2008· 공식 영상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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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0 ~ 1990

MBC. 탄광촌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형제의 운명

영화 · 2004· 제목만

「효자동 이발사」

배경 1960 ~ 1979.10.26

청와대 이발사의 눈으로 본 권위주의 시대를 풍자

영화 · 2015· 공식 영상

「쎄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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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7 ~ 1972

1960~70년대 음악 감상실 쎄시봉과 포크 음악 청춘

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6),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1977)

  1. 1964

    6.3

    운동

    6·3 시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굴욕 외교'라며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절정에 이르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배경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 마련과 미국의 요구를 배경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습니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 장관이 청구권 금액의 큰 틀에 합의한 메모가 알려지자,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없이 돈으로 과거를 덮는다는 비판이 커졌습니다.

    전개

    1964년 3월 24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대일 굴욕 외교 반대’를 내걸고 시위에 나섰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야당과 사회단체는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5월 20일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군사 정부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며 정권 퇴진까지 요구했습니다.

    6월 3일 서울에서만 1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와 광화문 일대까지 진출했습니다. 정부는 그날 밤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습니다.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 검열이 시작됐으며 학생과 정치인 수백 명이 체포됐습니다.

    5월 말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며 투쟁 수위를 높였고, 6월 3일에는 서울의 여러 대학 학생들이 정오 무렵부터 거리로 나섰습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 일대까지 몰려갔고, 구호도 한일 회담 반대에서 박정희 정부 퇴진으로 바뀌었습니다.

    계엄 아래에서 시위 주동자들은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고려대 학생 대표였던 이명박도 이때 구속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비상계엄은 7월 29일 해제됐습니다. 회담 책임자로 지목된 김종필은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한일 회담은 잠시 늦춰졌지만 1965년 6월 조약이 조인됐고, 그해 8월 비준 반대 시위 때는 위수령이 발동됐습니다. 이 시위에 참여한 세대는 뒷날 ‘6·3 세대’로 불리며 정치권에 여럿 진출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2년 11월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청구권 금액의 큰 틀이 합의됐습니다.
    2. 1964년 3월 24일서울의 대학생들이 ‘대일 굴욕 외교 반대’를 내걸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3. 1964년 5월 20일서울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르며 정권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4. 1964년 5월 30일서울대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5. 1964년 6월 3일대규모 시위가 서울 도심을 메웠고, 밤에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6. 1964년 6월김종필이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7. 1964년 7월 29일비상계엄이 해제됐습니다.
    8. 1964년 8월중앙정보부가 1차 인민 혁명당 사건을 발표했습니다.
    9. 1965년 6월 22일한일 기본 조약이 조인됐습니다.
    10. 1965년 8월 26일비준 반대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에 위수령이 발동됐습니다.

    인물

    • 김종필1926~2018

      ‘굴욕 외교’ 비판의 표적이 돼 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오히라 일본 외무 장관과 청구권 금액의 큰 틀을 합의한 당사자입니다. 이듬해 귀국해 다시 공화당의 중심인물이 됐습니다.

    • 이명박1941~

      고려대 학생 대표로 시위를 이끌다 내란 선동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뒤에 현대건설 사장, 서울 시장을 거쳐 제17대 대통령(2008~2013)이 됐습니다. 퇴임 뒤 뇌물·횡령 혐의로 2020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됐고, 2022년 12월 특별 사면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1차 인민 혁명당 사건
    시위가 한창이던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 혁명당’이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관련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50년 뒤인 2015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1974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계엄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471호-수도 서울에 계엄령 선포

    KTV 아카이브 · 11.4만회 ·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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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64년 6월 한일 회담 반대 시위로 서울에 선포된 계엄령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59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일어나다

    KBS 히스토리 · 1.4만회 ·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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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역사다시보기 - 한일회담반대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_Kdemocracy · 6,487회 ·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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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정리한 영상입니다.

  2. 9월

    외교

    베트남 파병

    1964.9 ~ 1973.3 · 8년 6개월

    의료·태권도 교관단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 전투 부대(청룡·맹호·백마 부대)를 보냈습니다. 8년여 동안 연인원 30만 명이 넘게 파병됐고 5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 1966년 브라운 각서로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와 경제 원조를 약속했습니다.

    배경

    1960년대 들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면서 동맹국들에 참전을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파병을 통해 한미 동맹을 굳히고 주한 미군 일부가 베트남으로 옮겨 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며, 경제적 이익도 기대했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 미국 방문 때 이미 파병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전개

    1964년 9월 이동 외과 병원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단을 시작으로, 1965년 3월 비둘기 부대(건설 지원단)가 갔습니다. 1965년 10월 해병 청룡 부대와 육군 맹호 부대(수도 사단), 1966년 9월 백마 부대(제9사단)가 차례로 파병되면서 한국군은 한때 5만 명 가까이 주둔했습니다.

    1966년 3월 미국은 추가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 장비 현대화, 파병 비용 부담, 한국 기업의 베트남 사업 참여, 추가 차관 등을 약속하는 ‘브라운 각서’를 한국에 전달했습니다.

    1973년 1월 파리 평화 협정이 맺어지자 한국군은 3월 23일까지 모두 철수했습니다. 1964년부터 약 8년 반 동안 연인원 약 32만 명이 파병됐고, 국방부 집계로 5,099명이 전사하고 1만 1천여 명이 다쳤습니다.

    결과와 의미

    군인과 기술자들의 송금, 군수품 납품, 한국 기업의 건설·운송 사업으로 이른바 ‘베트남 특수’가 생겨 경제 개발에 쓰였습니다. 한진·현대 등 여러 기업이 이때 해외 사업 경험을 쌓았습니다. 한국군은 장비 현대화를 이뤘고 한미 동맹은 더 긴밀해졌습니다.

    반면 많은 전사자와 함께, 귀국 뒤 고엽제 후유증을 겪는 참전 군인이 많았습니다. 또 1968년 퐁니·퐁녓 마을 사건 등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퐁니·퐁녓 사건 피해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2023년 1심과 2025년 1월 항소심은 모두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가 상고해 2026년 9월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4년 8월통킹만 사건 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습니다.
    2. 1964년 9월이동 외과 병원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단이 첫 파병 부대로 베트남에 갔습니다.
    3. 1965년 3월건설 지원단인 비둘기 부대가 파병됐습니다.
    4. 1965년 10월해병 청룡 부대와 육군 맹호 부대가 도착하며 전투 부대 파병이 시작됐습니다.
    5. 1966년 3월미국이 추가 파병의 대가를 약속한 ‘브라운 각서’를 한국에 전달했습니다.
    6. 1966년 9월백마 부대(제9사단)가 파병됐습니다.
    7. 1968년 1~2월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구정 공세를 벌였고, 2월에는 퐁니·퐁녓 마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8. 1973년 1월 27일파리 평화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9. 1973년 3월 23일한국군 철수가 끝났습니다.
    10. 1975년 4월 30일사이공이 함락되며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습니다.

    인물

    • 채명신1926~2013

      1965~1969년 주월 한국군 초대 사령관으로 파병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 5·16에도 참여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미군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 지휘권을 갖도록 협상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장군 묘역이 아닌 파월 장병 묘역에 묻혔습니다.

    • 윈스럽 브라운1907~1987

      주한 미국 대사로 추가 파병의 대가를 담은 ‘브라운 각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미국 외교관으로 1964~1967년 주한 대사를 지냈습니다. 각서에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 파병 경비 부담, 한국 기업의 베트남 사업 참여, 차관 제공 등이 담겼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베트남 파병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국익을 지킨 선택으로 보는 쪽

    주한 미군 철수를 막고 한미 동맹을 굳혀 안보를 지켰으며, 파병 대가로 얻은 원조와 외화가 경제 개발과 군 현대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참전 군인들은 국가의 요청에 따라 희생한 사람들로 마땅히 예우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희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쪽

    남의 나라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그 목숨과 건강을 외화와 바꿨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또 베트남 민간인 피해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참전 군인의 명예와 부딪히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고엽제란
    미군이 밀림의 나뭇잎을 말려 죽이려고 뿌린 제초제입니다. 여기에 섞인 다이옥신 때문에 참전 군인과 현지 주민에게 암·피부 질환 등 후유증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는 1993년부터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지원법이 시행됐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타이·필리핀에도 파병을 요청했고 이들 나라도 부대를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군 규모가 미군 다음으로 컸습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 안에서 반전 여론이 커졌고, 1969년 닉슨 독트린으로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 개입을 줄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한미 동맹을 다지고 '베트남 특수'로 경제 성장의 자금을 얻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많은 전사자와 고엽제 피해, 민간인 피해 의혹이 남아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스페셜 – 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 / KBS 2003.5.24 방송

    KBS 히스토리 · 297.7만회 · 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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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파병 결정 과정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다큐멘터리극장 – 외교비화, 월남파병 이렇게 이루어졌다 / KBS 19940529 방송

    KBS 히스토리 · 26.8만회 · 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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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월남 파병의 외교 비화를 다룬 1994년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최초의 해외파병 베트남전! '월남특수' 약 10억 달러를 '여기'에 썼다?! (KBS 20130525 방송)

    KBS 다큐 · 215.8만회 · 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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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베트남 파병과 월남 특수를 다룬 KBS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544호-맹호와 청룡(부산 출발)

    KTV 아카이브 · 15.1만회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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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65년 맹호부대가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출발하는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586호-백마부대 환송

    KTV 아카이브 · 7.3만회 ·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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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66년 증파된 백마부대 환송식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538호-파월 청룡부대 결단

    KTV 아카이브 · 5.1만회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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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65년 파병 전투부대 청룡부대 결단식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66호-청룡부대 개선

    KTV 아카이브 · 1.8만회 ·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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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72년 청룡부대 주력이 철수해 부산항에 귀국하는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1968년 베트남, 한날한시에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 스브스뉴스

    스브스뉴스 SUBUSUNEWS · 37.7만회 ·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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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한국군 관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증언을 다룬 리포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다큐멘타리 월남전선 -1부-(맹호5호작전 외 다수)

    Veterans TV · 20.3만회 · 1: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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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당시 한국군 작전을 담은 옛 기록 영화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594호-월남전 지원국 정상회담

    KTV 아카이브 · 29.8만회 ·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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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966년 마닐라 베트남전 참전국 정상회담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패전사 이야기 38편 : 베트남전 한국군 최대의 패배 - 안케패스 전투 (1972)

    패전사 · 30.8만회 ·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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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철수 직전 안케패스 전투를 다룬 전쟁사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30분만에 알아보는 "베트남전쟁" 완벽 요약 [베트남전쟁 몰아보기]

    별별역사 · 494.7만회 · 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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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베트남 전쟁 전체를 요약해 한국군 파병은 일부입니다.

  3. 1965

    6.22

    조약

    한일 기본 조약(국교 정상화)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었습니다.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은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 등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 앞서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청구권 금액의 큰 틀이 합의됐습니다.
    • 2018년 대법원은 강제 동원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으로 사라지지 않았다고 판결했고, 일본 정부는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이라 지금도 갈등이 이어집니다.

    배경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은 1951년 미국의 주선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1953년 일본 대표 구보타가 ‘일본의 통치가 한국에 이익을 줬다’는 취지로 발언해 회담이 4년 넘게 끊기는 등, 식민 지배의 성격과 청구권 문제에서 양측이 크게 맞섰습니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이 급했고, 미국도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협력 체제를 원해 양국에 타결을 요구했습니다. 1962년 11월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 장관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청구권의 큰 틀에 합의했습니다(김종필·오히라 메모).

    전개

    6·3 시위 등 거센 반대 속에서도 회담은 계속됐고,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경제 협력, 어업,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4개 협정이 조인됐습니다. 14년, 모두 일곱 차례의 회담 끝의 결과였습니다.

    청구권 협정에서 일본은 10년에 걸쳐 무상 3억 달러, 장기 저리 정부 차관 2억 달러를 제공하고, 민간 상업 차관 3억 달러 이상을 주선하기로 했습니다. 양국은 이로써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확인했습니다.

    국회는 1965년 8월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단독으로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비준 반대 시위가 커지자 정부는 서울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조약은 12월 18일 발효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두 나라는 광복 20년 만에 국교를 맺었습니다. 청구권 자금은 포항 제철(지금의 포스코), 경부 고속 도로, 소양강 댐 등 기간산업과 사회 간접 자본 건설에 쓰였습니다.

    조약에는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나 ‘배상’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고, 독도 문제도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제2조는 1910년 이전 조약들이 ‘이미 무효’라고 적었는데,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일본은 당시에는 유효했으나 이제는 무효라고 서로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일본 기업의 불법적 강제 동원에 대한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며 반발했고 두 나라 관계가 크게 나빠졌습니다. 2023년 한국 정부는 국내 재단이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는 해법을 내놓았고, 이를 둘러싼 평가도 엇갈렸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1년 10월미국의 주선으로 한일 예비 회담이 시작됐습니다.
    2. 1953년 10월일본 대표 구보타의 식민 지배 옹호 발언으로 회담이 결렬돼 4년 넘게 끊겼습니다.
    3. 1962년 11월김종필과 오히라 외무 장관이 청구권 금액의 큰 틀에 합의했습니다.
    4. 1964년 3~6월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퍼졌고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5. 1965년 2월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 장관이 서울을 방문해 기본 조약에 가조인했습니다.
    6. 1965년 6월 22일도쿄에서 한일 기본 조약과 4개 협정이 조인됐습니다.
    7. 1965년 8월국회가 야당 불참 속에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반대 시위가 커지자 서울에 위수령이 발동됐습니다.
    8. 1965년 12월 18일조약이 발효되며 두 나라가 대사관을 두게 됐습니다.
    9. 2018년 10월대법원 전원 합의체가 강제 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한일 기본 조약 제2조(1965)‘이미’를 두고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 일본은 당시에는 유효했으나 한국 정부 수립 등으로 효력을 잃었다고 해석합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 청구권·경제 협력 협정 제2조 1항(1965)강제 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여기에 포함되는지를 두고 오늘날까지 논쟁이 이어집니다.

    인물

    • 김종필1926~2018

      중앙정보부장으로 오히라와 청구권 금액의 큰 틀을 합의했습니다.

      5·16의 기획자이자 공화당 창당 주역입니다. 메모가 알려진 뒤 ‘굴욕 외교’ 비판의 표적이 돼 1964년 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났습니다.

    • 오히라 마사요시1910~1980

      일본 외무 장관으로 김종필과 청구권 합의를 이끌었습니다.

      일본 자민당 정치인으로 외무 장관, 대장 장관을 거쳐 1978~1980년 총리를 지냈습니다. 1972년 외무 장관으로 중일 국교 정상화에도 참여했습니다.

    • 이동원1926~2006

      외무부 장관으로 1965년 6월 도쿄에서 한일 기본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964년 외무부 장관이 돼 한일 회담 막바지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뒤에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옳은 선택이었나

    현실적 선택으로 보는 쪽

    냉전 속에서 이웃 나라와 언젠가는 국교를 맺어야 했고,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구권 자금과 일본의 기술·시장이 고도성장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당시 한국의 협상력으로는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과거사 정리를 놓쳤다고 보는 쪽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사죄가 빠진 채 경제 협력 자금으로 문제를 덮었고,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개인 청구권 문제를 모호하게 남겨 지금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됐다고 봅니다. 정권이 개발 자금을 서두른 나머지 협상을 서둘렀다고 비판합니다.

    강제 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나

    남아 있다고 보는 쪽

    2018년 대법원 판결처럼 청구권 협정은 두 나라 사이의 재정·민사상 채권 채무를 정리한 것일 뿐,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직결된 강제 동원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까지 없앤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해결됐다고 보는 쪽

    일본 정부의 입장이자 판결의 소수 의견처럼, 협정이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명시했으므로 한국 정부가 받은 자금으로 국내에서 보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정부도 1970년대와 2000년대에 국내법으로 일부 보상을 한 바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고 국교를 정상화한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525호-한.일 협정 정식 조인

    KTV 아카이브 · 4,211회 ·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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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65년 한일 협정이 정식 조인되는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가려진 진실, 한일협정ㅣ KBS 200728 방송

    KBS 히스토리 · 4.6만회 ·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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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한일 협정 체결의 숨은 사정을 다룬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사죄와 반성x) ′한일협정′은 ′경제 협력′의 의미..! 차이나는 클라스 118회

    교양 Voyage · 1.3만회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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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청구권 협정의 성격을 짧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미니다큐 |한일 청구권 협정이 뭐길래? #강제징용피해자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KBS 다큐 · 6,553회 ·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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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한일 청구권 협정의 내용과 쟁점을 다룬 KBS 미니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한일수교 50주년특집 독도밀약설을 추적하다 [역사실험] KBS 2015.04.21 방송

    KBS 실험실 · 1.5만회 · 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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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수교 협상 속 독도 밀약설을 추적한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한역오]①6월22일…한일 국교정상화 협정, '설계자'는 미국이었다

    CBS노컷뉴스 · 2,617회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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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교 정상화 협정과 미국의 역할을 짚은 CBS 해설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人터view] 부당한 약속, 1965 한일협정 / YTN

    YTN · 8,171회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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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1965년 한일 협정의 체결 과정과 한계를 다시 짚은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개인 청구권 미해결"‥1965년 한·일 공감 (2023.04.07/뉴스투데이/MBC)

    MBCNEWS · 2,543회 ·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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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1965년 협정 당시 개인 청구권 문제에 대한 양국 인식을 다룬 보도입니다.

  4. 1967

    경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7 ~ 1971 · 4년

    산업 구조 근대화와 자립 경제 확립을 내걸고 화학·철강·기계 공업 건설과 식량 자급, 수출 확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계획 기간 연평균 경제 성장률 9.6%를 기록했습니다.

    • 수출을 1965년 1억 7,500만 달러에서 1971년 5억 5,000만 달러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 미국·서독 전문가단과 함께 계획을 수립해 1966년 8월 대통령 승인을 받았습니다.

    배경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으로 전력·석탄 같은 기간산업과 도로·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을 어느 정도 갖춘 정부는, 이어지는 계획에서 산업 구조 자체를 근대화하고 수출을 본격적으로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제1차 계획 기간에 예상보다 높은 성장률을 거두면서 정부와 경제 관료 사이에 좀 더 과감한 목표를 세워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도 배경이 됐습니다.

    전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 관계 부처 장관과 경제과학심의회, 기획조정실뿐 아니라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와 미국·서독 고문단이 함께 작업해 1966년 8월 대통령 승인을 받았습니다.

    식량 자급화와 산림 녹화, 화학·철강·기계 공업 건설에 의한 산업 고도화, 1970년까지 수출 10억 달러 달성, 고용 확대와 국민 소득의 비약적 증대, 과학 기술 진흥과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수출은 1965년 1억 7,500만 달러에서 최종 연도인 1971년 5억 5,000만 달러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고, 연평균 수출 증가율 21%를 계획했습니다. 산업 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 방향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계획 기간 동안 연평균 경제 성장률 9.6%, 연평균 수출 증가율 33.7%, 연평균 수입 증가율 27.3%를 기록해 애초 목표를 웃돌았습니다. 이 성과는 이어지는 중화학 공업화 중심의 제3차 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6년 8월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대통령 승인을 받았습니다.
    2. 1967년계획이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3. 1970년목표로 했던 수출 1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4. 1971년계획이 끝나며 연평균 9.6%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5. 1972년중화학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뒤를 이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란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시행된 정부 주도 경제 계획입니다. 1980년대 들어 이름이 '경제 사회 발전 계획'으로 바뀌었고,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들어선 뒤인 1996년 7차 계획을 끝으로 정부 주도 계획 경제 방식은 막을 내렸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설·교양 · 해설

    670000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 박정희 6대 대통령 당선

    삽질꽁기 · 55회 ·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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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7

    정치

    신민당 창당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 전당 대회를 열고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유진오를 대표위원으로 추대했습니다.

    • 이후 자유당·한국독립당 세력을 흡수해 제3·4공화국 시기 제1야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1980년 신군부의 정당 해산 조치로 없어졌습니다.

    배경

    제3공화국 출범 뒤 야당은 옛 민주당 신파·구파의 후신인 민정당·민주당 등으로 갈라져 힘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1965년 두 세력이 민중당으로 합쳤지만 노선 차이로 곧 신한당이 갈라져 나가면서 야당은 다시 분열됐습니다.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분열된 야당으로는 박정희 정부와 맞서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야권 통합 요구가 강하게 일었습니다.

    전개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은 통합 전당 대회를 열고 두 당의 통합을 만장일치로 선언하며 당명을 신민당으로 정했습니다.

    신민당은 전 대통령 윤보선을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헌법학자 유진오를 대표위원으로 추대했습니다. 5월 3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패했습니다.

    이후 신민당은 옛 자유당·한국독립당 세력까지 흡수하며 제3·4공화국을 통틀어 대표적인 제1야당으로 자리 잡았고, 3선 개헌 반대 투쟁과 유신 체제에 맞서는 재야·학생 운동과 보조를 맞추며 야당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민당은 1979년 김영삼 총재 제명과 YH 사건, 부마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유신 체제 붕괴 과정의 중심에 섰습니다. 1980년 신군부의 정당 해산 조치로 사라졌고, 1985년 신한민주당이 옛 신민당의 이름과 정신을 이어받으며 다시 등장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5년 5월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해 민중당이 만들어졌습니다.
    2. 1966년민중당에서 신한당이 갈라져 나가며 야권이 다시 분열됐습니다.
    3. 1967년 2월 7일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 전당 대회를 열어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4. 1967년 5월 3일신민당 후보 윤보선이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했습니다.
    5. 1970년대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체제 반대 투쟁을 주도했습니다.
    6. 1979년 8월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YH 사건을 비판하다 그해 10월 국회에서 제명됐습니다.
    7. 1980년신군부의 정당 해산 조치로 신민당이 사라졌습니다.

    인물

    • 유진오1906~1987

      신민당 창당 때 대표위원을 맡았고 이후 총재(1967~1970)를 지냈습니다.

      제헌 헌법 초안을 마련한 헌법학자로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고, 고려대 총장을 거쳐 정계에 들어와 야당을 이끌었습니다.

    • 윤보선1897~1990

      신민당 창당과 함께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됐습니다.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냈고, 5·16 이후에는 재야와 야당을 오가며 박정희 정부에 맞선 대표적 인물이 됐습니다.

  6. 3월

    경제

    대우실업 창립

    김우중이 대도 섬유의 도재환과 함께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웠습니다. 트리코트 원단을 싱가포르에 수출하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 1970년대 들어 대우건설·대우증권·대우전자·대우조선 등을 잇달아 세우며 대우 그룹으로 커졌습니다.
    • 197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배경

    1960년대 중반 섬유 무역업에 종사하던 32살의 김우중은 대도 섬유의 도재환과 함께 새 회사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정부가 수출 실적에 따라 세제·금융 혜택을 몰아주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펴던 시기여서, 무역업은 자본이 크지 않아도 빠르게 몸집을 키울 수 있는 분야였습니다.

    당시 한국 섬유 산업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춰 가고 있었고, 트리코트 같은 니트 원단은 해외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으로 수출하기에 알맞은 품목이었습니다.

    전개

    1967년 3월 김우중과 도재환은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웠습니다. 회사 이름은 도재환이 몸담았던 대도 섬유의 '대'와 김우중의 이름에서 딴 '우'를 합쳐 지었습니다.

    창업 첫해 트리코트 원단을 싱가포르에 수출해 58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고, 이후 인도네시아·미국 등으로 시장을 넓히며 섬유 수출 전문 무역 회사로 빠르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1970년대 들어 대우건설·대우증권·대우전자·대우조선 등을 잇달아 세우거나 인수하며 빠르게 그룹으로 커졌고, 1974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과 맞물려 짧은 시간에 종합 무역 상사에서 종합 그룹으로 몸집을 키운 사례로 꼽힙니다.

    결과와 의미

    대우는 현대·삼성·엘지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차입 경영으로 몸집을 불린 끝에 1999년 외환 위기 속에서 그룹이 해체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7년 3월김우중과 도재환이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웠습니다.
    2. 1967년창업 첫해 트리코트 원단을 싱가포르에 수출해 58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습니다.
    3. 1972년 무렵대우건설(당시 대우개발) 등을 세우며 건설업에 진출했습니다.
    4. 1974년수출 1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5. 1978년대우조선(옥포조선소)을 인수해 중공업에도 진출했습니다.
    6. 1999년무리한 차입 경영의 후유증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됐습니다.

    인물

    • 김우중1936~2019

      대우실업을 창립하고 대우그룹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로 잘 알려진 기업인으로, 수출 중심의 공격적 경영으로 대우를 재계 상위권 그룹으로 키웠으나 1999년 그룹 해체와 함께 해외 도피·귀국·수감을 겪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던 대우는 어떻게 한순간에 사라졌는가 | 모던코리아 - 대망 | KBS 20191107 방송

    KBS 다큐 · 42.2만회 · 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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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5.3

    정치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재선됐습니다. 이어진 총선에서는 부정 선거 논란이 일었습니다.

    배경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목표를 넘겨 끝나 가면서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과를 앞세워 재선에 나섰습니다. 야권은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쳐 신민당을 만들고 윤보선을 다시 후보로 세웠습니다.

    전개

    1967년 5월 3일 선거에서 박정희는 약 568만 표, 윤보선은 약 452만 표를 얻어 박정희가 약 116만 표 차로 재선됐습니다. 4년 전 15만 표 차보다 격차가 훨씬 벌어졌습니다.

    이어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은 전체 175석 가운데 129석을 얻어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대리 투표, 공개 투표, 돈 봉투 등 부정이 드러나 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여러 대학이 휴교했습니다. 박정희는 부정이 드러난 공화당 당선자 일부를 제명했습니다.

    투표율은 83.6%였고 득표율은 박정희 51.4%, 윤보선 40.9%였습니다. 박정희는 고속 도로 건설 등 ‘조국 근대화’ 구상을 앞세웠고, 윤보선은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 부정부패를 비판했습니다. 4년 전보다 격차가 크게 벌어진 데에는 제1차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과가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6·8 총선 결과 공화당은 지역구 102석과 전국구 27석, 신민당은 지역구 28석과 전국구 17석, 대중당은 1석을 얻었습니다. 선거 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번졌고, 여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민당은 선거 결과에 항의해 한동안 국회 등원을 거부했습니다. 공화당이 개헌선을 넘은 의석을 확보하면서, 두 번까지만 연임할 수 있게 한 헌법을 고쳐 3선을 가능하게 하려 한다는 의심이 커졌고, 이는 1969년 3선 개헌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7년 2월민중당과 신한당이 합쳐 신민당을 만들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정했습니다.
    2. 1967년 5월 3일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약 116만 표 차로 재선됐습니다.
    3. 1967년 6월 8일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175석 중 129석을 얻었습니다.
    4. 1967년 6월 중순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대학가로 번졌고 여러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5. 1967년 6월박정희 대통령이 부정이 드러난 공화당 당선자 일부를 제명했습니다.
    6. 1967년 하반기신민당이 등원을 거부하다 여야 협상 끝에 국회에 들어갔습니다.
    7. 1969년3선 개헌이 추진됐습니다.

    인물

    • 유진오1906~1987

      야권 통합 신민당의 대표로 윤보선에게 대통령 후보를 맡기고 총선을 이끌었습니다.

      헌법학자이자 소설가로 1948년 제헌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했고, 고려대 총장을 지냈습니다. 1969년 3선 개헌 때는 신민당 총재로 당 해산이라는 방법까지 쓰며 반대했습니다.

    • 윤보선1897~1990

      신민당 후보로 박정희와 두 번째로 맞섰다가 졌습니다.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야당 지도자로, 1963년에 이어 다시 박정희에게 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6·8 부정 선거
    1967년 국회의원 선거를 흔히 ‘6·8 부정 선거’라고 부릅니다. 공무원의 선거 개입과 금품 살포가 광범위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621호-박정희 대통령 재선

    KTV 아카이브 · 2.5만회 ·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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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된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제6대 대통령 선거.67. 5.3. 박정희 대통령 내외, 윤보선 후보 내외, 섬 사람 교통의 어러움 무릅쓰고 선거, 농민들도 주권 행사.

    월천TV · 2.7만회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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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67년 5월 3일 투표 현장을 담은 옛 뉴스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제6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 수많은 유권자들 . 후보 연설하는 박정희. 윤보선 후보. 제6대 대통령 선거일 1967년 5월3일, 박정희 대통령 당선.

    월천TV · 5,201회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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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제6대 대선 유세와 투표 장면을 담은 옛 뉴스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630호-박정희 제6대 대통령 취임

    KTV 아카이브 · 24.8만회 ·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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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제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을 담은 대한뉴스 원본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계엄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때 군대가 행정·사법 일부를 맡는 제도입니다.

헌법상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영장 제도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특별히 제한할 수 있습니다. 국회가 재적 과반수 찬성으로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해제해야 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은 4·19 혁명, 5·16, 유신, 부마 항쟁, 12·12와 5·18, 2024년 12·3 비상계엄 등에 선포됐습니다.

해설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부터 해제까지 3분 정리 / 스브스뉴스

스브스뉴스 SUBUSUNEWS · 304.7만회 ·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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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정부가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자원을 몰아준 경제 성장 계획입니다(1962~1996).

1960년대에는 섬유·가발 같은 경공업과 수출,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화학 같은 중화학 공업에 집중했습니다. 수출 주도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성장의 그늘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경 유착,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지적됩니다.

다큐

영상한국사 I 117 1961년 국토건설사업,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

KBS 히스토리 · 1.9만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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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강의기적, 세계가 경악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짜 비밀

비밀의경제학 · 1.7만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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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