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시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굴욕 외교'라며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절정에 이르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배경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 마련과 미국의 요구를 배경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습니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 장관이 청구권 금액의 큰 틀에 합의한 메모가 알려지자,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없이 돈으로 과거를 덮는다는 비판이 커졌습니다.
전개
1964년 3월 24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대일 굴욕 외교 반대’를 내걸고 시위에 나섰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야당과 사회단체는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5월 20일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군사 정부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며 정권 퇴진까지 요구했습니다.
6월 3일 서울에서만 1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와 광화문 일대까지 진출했습니다. 정부는 그날 밤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습니다.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 검열이 시작됐으며 학생과 정치인 수백 명이 체포됐습니다.
5월 말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며 투쟁 수위를 높였고, 6월 3일에는 서울의 여러 대학 학생들이 정오 무렵부터 거리로 나섰습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 일대까지 몰려갔고, 구호도 한일 회담 반대에서 박정희 정부 퇴진으로 바뀌었습니다.
계엄 아래에서 시위 주동자들은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고려대 학생 대표였던 이명박도 이때 구속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비상계엄은 7월 29일 해제됐습니다. 회담 책임자로 지목된 김종필은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한일 회담은 잠시 늦춰졌지만 1965년 6월 조약이 조인됐고, 그해 8월 비준 반대 시위 때는 위수령이 발동됐습니다. 이 시위에 참여한 세대는 뒷날 ‘6·3 세대’로 불리며 정치권에 여럿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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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김종필1926~2018
이명박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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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인민 혁명당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