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보도 연맹 사건
전쟁 초기 군과 경찰이 좌익 전향자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과 예비 검속된 사람들을 재판 없이 집단 처형한 사건입니다. 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의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현대›6·25 전쟁
1950.6.25
현대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과 중국군이 참전하며 국제전이 됐습니다. 전선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오간 뒤 38도선 부근에서 굳었고, 1953년 정전 협정으로 멈췄습니다.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밀정」
「대호」
「암살」
「여명의 눈동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인천상륙작전」
「국제시장」
「고지전」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주 4·3 사건 (~1954.9.21)
1950
6월
전쟁 초기 군과 경찰이 좌익 전향자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과 예비 검속된 사람들을 재판 없이 집단 처형한 사건입니다. 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의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6.25
새벽 4시 북한군이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공개된 옛 소련 문서로 스탈린이 이 계획을 승인하고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6.28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려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는데, 다리 위의 피난민이 희생됐고 서울 시민 상당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6.28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인민재판으로 공무원·경찰·우익 인사 등을 처형했고, 후퇴하면서 대전 형무소 등에서 수감자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7.5
처음 투입된 미 지상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습니다.
7.26
충북 영동 노근리 철교 부근에서 미군이 피난민을 향해 공중 폭격과 사격을 해 많은 민간인이 숨졌습니다. 2001년 미국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8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따라 최후 방어선을 쳤습니다. 다부동 전투 등으로 대구와 부산을 지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9.15
맥아더가 지휘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반격과 맞물려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9.28
국군과 유엔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10.1
국군이 10월 1일 38도선을 넘었고(지금의 국군의 날),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일부 부대는 압록강 초산까지 닿았습니다.
10.19
중국 인민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고, 10월 25일 국군과 첫 교전을 벌였습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11.27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미 해병 제1사단 등이 영하 30도 안팎의 혹한 속에 포위한 중국군과 싸우며 흥남으로 철수했습니다.
12월
중국군 참전 뒤 급히 소집한 국민 방위군 간부들이 보급품과 예산을 빼돌려, 후방으로 이동하던 장정 다수가 굶주림과 추위, 병으로 숨졌습니다. 관련 간부들은 처형됐습니다.
12.15
포위된 국군·유엔군과 함께 피난민 약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배로 철수했습니다.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한 번에 1만 4천여 명을 태웠습니다.
1951
1.4
중국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내주고 평택~삼척 선까지 물러났습니다.
2.9
지리산 일대 공비 토벌 작전 중 국군 제11사단 일부 부대가 경남 거창 신원면 주민을 통비 혐의로 몰아 집단 학살했습니다. 희생자는 719명으로 확인됐습니다.
3.15
유엔군이 반격해 서울을 다시 되찾았습니다. 이후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오르내렸습니다.
7월
회담이 이어지는 동안 조금이라도 유리한 경계선을 얻으려 백마고지·펀치볼·단장의 능선 등에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습니다.
7.10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돼 판문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군사 분계선과 포로 송환 방식을 두고 2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1952
5.25
국회 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연행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개헌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켰습니다.
1953
6.18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과 상의 없이 북한 송환을 거부한 반공 포로 2만 7천여 명을 석방했습니다.
7.27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군·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이 정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가 정해졌고, 한국 정부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