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남침
새벽 4시 북한군이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공개된 옛 소련 문서로 스탈린이 이 계획을 승인하고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그날 북한의 무력 공격 중지를 결의했고, 이어 회원국의 군사 지원을 권고했습니다(소련은 회의에 불참).
배경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선 뒤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잇따랐습니다. 남북 모두 무력 통일을 입에 올렸지만, 실제 전쟁 준비는 북쪽이 앞섰습니다. 북한은 소련에게서 전차와 항공기를 들여오고, 중국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부대를 받아들여 병력을 크게 늘렸습니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1950년 초 입장을 바꿨고, 1950년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계획을 승인하며 중국의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김일성은 5월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의 동의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은 1990년대 공개된 옛 소련 문서로 확인됐습니다.
전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개성, 의정부, 춘천 방면으로 빠르게 내려왔습니다. 국군은 휴가와 외출로 병력이 빠져 있었고, 전차를 막을 무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그날(미국 시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열려 북한의 무력 공격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38선 이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6월 27일에는 회원국에게 한국을 도우라고 권고하는 결의를, 7월 7일에는 유엔군 사령부를 세우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소련은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 회의를 거부하고 있어 거부권을 쓰지 못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7일 미 해군·공군의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전쟁은 1953년 7월 정전 협정까지 3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유엔군으로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여러 나라가 의료 지원 등을 보냈고, 1950년 10월에는 중국군이 북한 편으로 참전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생겼다는 추산이 있습니다.
북한은 오랫동안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소련 문서 공개 이후 북한군의 계획적 남침은 학계에서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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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Determines that this action constitutes a breach of the peace; … Calls upon 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 to withdraw forthwith their armed forces to the thirty-eighth parallel”
인물
김일성1912~1994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전쟁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 알아두기
- ‘6·25 전쟁’이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