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고종이 이상설·이준·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했습니다.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준은 현지에서 숨졌습니다.
배경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조약이 황제의 뜻과 무관하게 강요된 것이라는 점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 했습니다. 1906년에는 헐버트 등을 통해 무효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러시아 황제가 초청 의사를 비친 적이 있었기에, 고종은 이 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처지를 호소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전개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정사로,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을 부사로 하는 신임장을 주었습니다. 이준은 1907년 4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났고, 두 사람은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했습니다. 세 사람은 6월 하순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회의는 6월 15일에 이미 시작됐습니다. 특사들은 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를 찾아가 참석을 요청하고, 일본의 부당함을 적은 호소문을 각국 대표단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 있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절당했습니다. 일본은 물론 영국도 반대했고, 러시아도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돕지 않았습니다.
특사들은 회의장 밖에서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은 7월 초 각국 언론인들이 모인 국제 협회 모임에서 연설해 한국의 사정을 알렸고, 이는 현지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숨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특사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특사 파견을 을사늑약 위반이라며 고종의 책임을 추궁했고, 결국 7월 고종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어 정미 7조약과 군대 해산이 뒤따랐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압박 속에 특사들에게 궐석 재판으로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국하지 못한 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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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From 1884, up to the present, all the Powers guaranteed and recognised our independence.”
인물
이상설1870~1917
이준1859~1907
이위종1887~?
호머 헐버트1863~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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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두기
- 만국 평화 회의란
- 같은 때 주변에서는
- 호소문을 실어 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