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임시 정부 수립을 논의할 대상 단체를 두고 대립했습니다. 소련은 신탁 통치에 반대한 단체를 빼자고 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들어 반대해 결렬됐습니다.
배경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임시 정부 수립을 돕는 공동 위원회를 열어야 했습니다. 1946년 1월 두 나라 대표가 서울에서 예비 회담을 열었고,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정식으로 열렸습니다. 미국 대표는 아널드 소장, 소련 대표는 슈티코프 중장이었습니다.
전개
위원회가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임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어느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인가’였습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단체, 곧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인 우익 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협의 대상은 주로 좌익 단체가 됩니다.
미국은 의견을 밝혔다는 이유로 단체를 빼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다며 반대했습니다. 4월에는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한 단체와 협의한다는 타협안(공동 성명 제5호)이 나왔지만, 서명한 우익 단체가 이후에도 반탁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느냐를 두고 다시 맞섰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위원회는 5월 초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로 한반도 전체에 하나의 임시 정부를 세우는 길이 크게 막혔습니다. 한 달 뒤 이승만의 정읍 발언처럼 남쪽만이라도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왔고, 이에 맞서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위원회 결렬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한반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례로도 꼽힙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테렌티 슈티코프1907~1964
아치볼드 아널드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결렬의 책임은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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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석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