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개항기

개화 정책의 확대

인천이 열리고 태극기가 국기가 됐습니다. 보빙사를 미국에 보내고 한성순보·전환국·기기창 같은 근대 시설을 세우는 한편, 영국·독일·러시아와도 수교했습니다.

기간
1883.1 ~ 1884.11 · 1년 10개월
누가 다스렸나
임금 고종
담긴 것
사건 7 · 영상 24 · 영화·드라마 5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5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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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인천(제물포) 개항 → 조러 수호 통상 조약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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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인천(제물포) 개항 → 조러 수호 통상 조약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KBS 히스토리 · 95.5만회 ·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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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을 축으로 집권부터 을미사변 무렵까지 다룹니다.

1864.1.21 ~ 1895.10.8 · 인천(제물포) 개항 → 조러 수호 통상 조약

해설·교양 · 강의

7일의 기적 5일차 2교시 — 개항부터 갑신정변까지

최태성 1TV · 79.7만회 ·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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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개항부터 갑신정변까지의 기출 개념을 한 번에 정리한 강의입니다.

1875.9.20 ~ 1885.4.18 · 인천(제물포) 개항 → 조러 수호 통상 조약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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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인천(제물포) 개항 → 조러 수호 통상 조약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드라마 · 2001· 공식 영상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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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66 ~ 1895.10.8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의 일생을 따라 대원군과의 갈등부터 을미사변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드라맛집]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 몰아보기

KBS Drama Classic · 12.3만회 ·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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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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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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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 제목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배경 1873 ~ 1895.10.8

명성황후와 호위 무사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엮은 영화

드라마 · 2014· 공식 영상

「조선총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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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0 ~ 1884.12.6

KBS. 개화기 총을 든 무사의 복수극. 갑신정변 무렵이 배경

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1. 1883

    1월

    경제

    인천(제물포) 개항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세 번째 개항장으로 열렸습니다. 이후 외국 상인과 조계지가 몰려들었습니다.

    배경

    강화도 조약에 따라 열기로 한 두 항구 가운데 하나는 원산이었고, 일본은 나머지 하나로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수도가 가까워 위험하다며 개항을 늦추려 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 뒤 일본의 압력이 커지며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인천은 한강 하구와 가까워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와 사람이 거치는 길목이었습니다. 조정은 외국 군함과 상인이 수도 코앞까지 드나드는 것을 걱정했고, 일본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인천을 원했습니다. 1881년 무렵 조선은 결국 인천 개항을 약속했고, 임오군란의 혼란을 거쳐 개항 시기가 정해졌습니다.

    전개

    1883년 초 인천(제물포)이 세 번째 개항장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 일본 조계가 설치됐고, 1884년에는 청 조계와 미국·영국·독일 등이 함께 쓰는 각국 공동 조계가 생겼습니다. 1883년에는 관세 업무를 맡는 인천 해관도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 당시 제물포는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이 먼저 들어섰고, 청·일본 조계와 각국 공동 조계가 차례로 자리 잡으며 외국인 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인천 해관은 묄렌도르프가 조직한 조선 해관의 하나로, 수입품에 관세를 매기고 무역량을 기록했습니다. 조계 안에는 영사관과 상점뿐 아니라 외국인 묘지와 교회도 들어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인천은 곧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와 사람의 관문이 돼 조선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 됐습니다. 외국 상인과 영사관, 교회, 호텔이 들어서며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춰 갔습니다.

    쌀과 콩 등이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나가고 면직물 등이 들어오면서, 인천은 조선 무역의 중심이 됐습니다. 1899년에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제물포~노량진 구간부터 개통해 두 도시가 더 가까워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6년 2월강화도 조약에서 부산 외에 두 항구를 더 열기로 했습니다.
    2. 1880년원산을 연 뒤 일본이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요구했고, 조선은 개항을 늦추려 했습니다.
    3. 1881년 무렵조선이 몇 해 뒤 인천을 열기로 일본과 합의했습니다.
    4. 1883년 1월인천(제물포)이 세 번째 개항장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5. 1883년인천 해관이 문을 열고 일본 조계가 설정됐습니다.
    6. 1884년청 조계와 각국 공동 조계가 설정됐습니다.
    7. 1899년 9월경인선이 제물포~노량진 구간부터 개통했습니다.

    인물

    •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

      일본 공사로 인천 개항을 요구하고 교섭을 이끌었습니다.

      초대 주조선 일본 공사로 원산·인천 개항 교섭을 맡았고, 임오군란 뒤 제물포 조약을 맺었습니다.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1848~1901

      조선 해관을 조직해 인천 해관 설치를 이끌었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리훙장의 추천을 받아 조선의 외교·세관 고문이 됐습니다. 뒤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다 1885년 해임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조계란
    개항장 안에서 외국인이 머물며 스스로 행정과 치안을 맡도록 떼어 준 구역입니다. 그 안에서는 조선의 행정권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남은 흔적
    인천 중구의 차이나타운 일대가 옛 청 조계, 인근 개항장 거리가 옛 일본 조계였습니다. 옛 일본 은행 건물과 청·일 조계 경계 계단, 자유공원(옛 각국 공원) 등이 남아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20년전 인천 혹은 제물포ㅣ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개항 이후 인천의 변화ㅣ120 years ago, Jemulpo (Incheon)

    대한여지도 Korean Geographic · 9.9만회 ·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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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개항 뒤 제물포의 변화를 옛 사진으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한국사 探] 개항의 관문, 인천의 근대사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 3.8만회 · 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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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개항의 관문 인천의 근대사를 다룬 방송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우리 근현대사와 맞닿아있는 도시 인천의 인천항 개항부터 인천 상륙 작전까지 #highlight #알쓸별잡 EP.5

    이응디귿디귿 · 10.4만회 · 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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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인천항 개항부터 근현대사를 훑는 교양 예능으로 개항은 앞부분입니다.

  2. 경제

    당오전 발행

    재정난을 메우려 상평통보의 5배 가치를 매긴 당오전을 찍었습니다. 실제 가치가 이에 못 미쳐 물가가 올랐습니다.

    배경

    개항 뒤 조선 정부는 외교 사절 파견, 신식 군대, 근대 시설 설치 등으로 쓸 돈이 크게 늘었고, 임오군란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습니다.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두고 김옥균은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자고 주장했고, 청이 보낸 고문 묄렌도르프는 액면가가 높은 화폐를 찍자고 주장했습니다. 조정은 묄렌도르프의 방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김옥균은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민씨 정권 쪽이 반대했고,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차관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개

    1883년 화폐를 만드는 관청인 전환국을 세우고, 상평통보 한 닢의 5배 값을 매긴 당오전을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들어간 구리의 양은 상평통보의 두 배 남짓에 그쳤습니다.

    당오전은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주로 쓰였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평통보가 쓰였습니다. 같은 이름의 돈이 지역에 따라 다른 값으로 돌면서 거래가 복잡해졌고, 당오전의 실제 가치는 갈수록 떨어져 결국 상평통보 한 닢과 비슷한 값으로 거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부는 발행 차익으로 재정을 잠시 메웠지만, 돈의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아 물가가 크게 올랐고 백성의 생활은 어려워졌습니다. 서울과 인근에서 주로 쓰였고, 1890년대 신식 화폐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재정 방안을 두고 벌어진 대립에서 김옥균이 추진한 일본 차관 도입이 실패하자 급진 개화파의 입지가 좁아졌고, 이것이 갑신정변을 서두르게 한 배경의 하나로 꼽힙니다.

    당오전 문제는 화폐를 믿을 수 없게 만들었고, 1894년 신식 화폐 발행 장정으로 은을 기준으로 한 새 화폐 제도가 마련되는 배경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2년 8월제물포 조약으로 일본에 배상금 50만 원을 물게 돼 재정 부담이 커졌습니다.
    2. 1882년 12월청의 추천으로 묄렌도르프가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부임했습니다.
    3. 1883년묄렌도르프의 건의로 당오전 발행이 결정되고, 화폐를 만드는 전환국이 세워졌습니다.
    4. 1883년김옥균이 일본에서 300만 원 차관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5. 1880년대 후반당오전의 실제 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물가가 올랐습니다.
    6. 1894년신식 화폐 발행 장정이 나오며 새 화폐 제도로 바뀌었고, 당오전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인물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1848~1901

      당오전 발행을 건의했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리훙장의 추천을 받아 조선의 외교·세관 고문이 됐습니다. 해관 설립과 전환국 운영에 관여했습니다.

    • 김옥균1851~1894

      당오전 발행에 반대하고 일본 차관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급진 개화파의 지도자입니다. 차관 교섭이 실패한 뒤 입지가 좁아지자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더 알아두기

    당백전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흥선대원군 때(1866) 발행한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100배 값을 매겨 반년 남짓 만에 멈췄습니다. 당오전은 5배로 폭은 작았지만 10년 넘게 쓰이며 물가를 올렸습니다. 둘 다 실제 가치보다 높은 값을 매겨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 한 방식이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상평통보 당오전 수집 정리편

    인생이막(상평통보 금속탐지)KoreaOldCoins · 276회 ·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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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수집한 당오전 동전을 정리하는 영상이라 발행 배경은 거의 없습니다.

  3. 3월

    정치음력 1월

    태극기 국기 제정

    조정이 태극 무늬와 4괘를 그린 기를 나라의 국기로 공포했습니다. 앞서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이 기를 게양했습니다.

    배경

    근대 조약을 맺고 외국과 교류하게 되자 나라를 나타내는 국기가 필요해졌습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을 무렵 국기 문제가 논의됐고, 청은 청의 용 깃발을 본뜬 기를 쓰라고 권했지만 조선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1882년 5월 조미 조약 조인식 무렵 역관 이응준이 태극 무늬를 넣은 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해 여름 미국 해군이 펴낸 세계 각국 깃발 책에 이와 비슷한 ‘조선 국기’ 도안이 실렸습니다. 이 무렵 조선 조정 안에서 태극을 중심으로 한 국기 도안이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전개

    1882년 음력 8월 임오군란 사과 사절로 일본에 가던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배 안에서 태극 무늬와 4괘를 그린 기를 만들어, 일본에 도착해 숙소에 걸었습니다. 이것이 태극기를 공식 사절이 사용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듬해인 1883년 음력 1월(양력 3월 무렵) 조정은 이 태극 4괘 도안의 기를 나라의 국기로 정해 공포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 등의 조언을 들어 기를 만들었다고 자신의 기록 『사화기략』에 적었습니다. 그는 일본 고베에 도착한 뒤인 음력 8월 14일(양력 9월 25일 무렵) 숙소에 이 기를 걸었습니다. 1883년 3월 6일 고종이 이 기를 국기로 공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태극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치며 나라와 독립의 상징이 됐습니다. 다만 괘의 위치나 태극 무늬 모양이 통일되지 않아 여러 형태가 함께 쓰였고, 오늘날의 규격은 1949년에 정해졌습니다.

    고종이 1880년대 후반 외교 고문 데니에게 준 것으로 전하는 ‘데니 태극기’는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가운데 하나로 국가등록문화재입니다. 광복 뒤 1949년 10월 15일 국기 제작법이 고시돼 모양이 통일됐고, 2007년에는 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2년 5월조미 조약 조인식 무렵 역관 이응준이 태극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2. 1882년 여름미국 해군이 펴낸 각국 깃발 책에 태극 도안의 ‘조선 국기’가 실렸습니다.
    3. 1882년 음력 8월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 안에서 태극과 4괘를 그린 기를 만들었습니다.
    4. 1882년 9월 25일 무렵(음력 8월 14일)박영효 일행이 고베 숙소에 이 기를 걸었습니다.
    5.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고종이 태극 4괘 도안의 기를 나라의 국기로 공포했습니다.
    6. 1919년 3월 1일3·1 운동 때 전국에서 태극기가 쓰였습니다.
    7. 1949년 10월 15일국기 제작법이 고시돼 태극과 괘의 모양이 하나로 정해졌습니다.
    8. 2007년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됐습니다.

    인물

    • 박영효1861~1939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길에 태극기를 만들어 게양했습니다.

      철종의 사위로 급진 개화파의 중심인물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망명했고, 갑오개혁 때 내무 대신을 지냈습니다. 병합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부의장 등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습니다.

    • 이응준

      조미 조약 무렵 태극 도안의 기를 처음 만들었다는 설의 주인공입니다.

      조선 후기의 역관(통역관)입니다. 1882년 조약 체결 과정에서 국기가 필요해지자 조정의 지시로 도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소개되면서 태극기 제작 경위를 둘러싼 논의에 이름이 오르게 됐습니다.

    • 고종1852~1919

      1883년 태극 4괘 도안의 기를 국기로 공포했습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입니다. 개항 뒤 외교 관계가 넓어지자 국기 제정을 추진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누가 처음 만들었나
    오랫동안 박영효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0년대에 1882년 조미 조약 무렵 미국 해군이 기록한 태극 도안 깃발 자료가 소개되면서 역관 이응준이 먼저 도안했다는 설도 제기됐습니다. 학계에서는 박영효가 최초 제작자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뉩니다.
    4괘의 뜻
    네 모서리의 괘는 건(하늘)·곤(땅)·감(물)·리(불)를 나타냅니다. 가운데 태극은 음(파랑)과 양(빨강)이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태극기 탄생의 비밀

    효기심 · 54만회 ·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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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태극기 도안의 유래와 국기 제정 과정을 사료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역사채널e - The history channel e_태극기

    EBSCulture (EBS 교양) · 20만회 ·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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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태극기가 국기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EBS 역사채널e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의 역사

    은근한 잡다한 지식 · 39.2만회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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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처음 만든 태극기 모양과 변천 과정을 짧게 정리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북한 국기가 원래 태극기였다고?

    1분만 · 188.4만회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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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북한 국기 이야기라 태극기 제정은 잠깐 나옵니다.

  4. 7월

    외교음력 6월

    보빙사 파견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민영익·홍영식·서광범·유길준 등을 미국에 보냈습니다. 서양에 간 첫 공식 사절단이며, 유길준은 남아서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배경

    1883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따라 미국 공사 푸트가 서울에 부임하자, 조선도 답례와 친선을 위해 사절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청의 간섭을 줄이고 미국과 직접 관계를 넓히려는 고종의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이 서양 나라에 공식 사절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절단에는 청 사람과 일본 사람 통역이 한 명씩 따라갔고, 조선말과 영어를 직접 옮길 사람이 없어 여러 언어를 거쳐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동행하며 사절단의 안내와 통역을 도왔습니다.

    전개

    1883년 음력 6월 전권 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과 유길준·변수 등 수행원이 미국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대륙 횡단 철도로 동부로 가,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했습니다.

    사절단은 약 40일 동안 박람회·공장·농장·우체국·병원·학교·군사 시설 등을 둘러봤습니다. 홍영식 등은 태평양을 건너 먼저 돌아왔고, 민영익·서광범·변수는 유럽을 거쳐 수에즈 운하를 지나 1884년에 귀국했습니다.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했습니다.

    사절단은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9월 18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아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이후 보스턴의 박람회와 워싱턴의 여러 관청을 둘러보며 우편·전신·농업·교육 제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관 최경석은 농업에 특히 관심을 가져 미국의 농기구와 씨앗을 들여왔습니다.

    결과와 의미

    귀국한 사절단의 건의로 우편 업무를 맡는 우정총국이 세워지고, 서양식 농업을 시험하는 농무목축시험장이 만들어졌으며, 미국인 교사를 초빙한 육영 공원 설립도 추진됐습니다.

    한편 같은 서양을 보고 온 사절단 안에서도 민영익은 점진적인 개혁 쪽에, 홍영식·서광범은 급진 개화파 쪽에 서며 이듬해 갑신정변에서 서로 반대편이 됐습니다.

    민영익 일행은 미국 해군 함정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거쳐 돌아와,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돈 기록을 남겼습니다. 홍영식은 귀국 뒤 우정총국 총판을 맡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3년 5월미국 공사 푸트가 서울에 부임해 조미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습니다.
    2. 1883년 7월 16일(음력 6월)민영익·홍영식·서광범 등이 고종에게 하직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 1883년 9월 2일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대륙 횡단 철도로 동부로 향했습니다.
    4. 9월 18일뉴욕의 호텔에서 아서 대통령을 만나 국서를 전했습니다.
    5. 1883년 9~10월보스턴 박람회, 공장, 농장, 우체국, 병원, 학교, 군사 시설 등을 둘러봤습니다.
    6. 1883년 말홍영식 등이 태평양을 건너 먼저 귀국해 보고했습니다.
    7. 1884년 봄민영익·서광범·변수가 유럽을 거쳐 귀국했습니다.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했습니다.
    8. 1884년우정총국이 설치됐고, 그해 12월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인물

    • 민영익1860~1914

      보빙사의 전권 대신으로 사절단을 이끌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민씨 척족의 핵심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개화파와 가까웠으나 귀국 뒤 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쪽에 섰고, 갑신정변 첫날 크게 다쳤다가 알렌의 치료로 살아났습니다. 뒤에 홍콩·상하이 등지에서 지내다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유길준1856~1914

      보빙사 수행원으로 갔다가 미국에 남아 공부한 첫 조선인 유학생이 됐습니다.

      앞서 조사 시찰단을 따라가 일본에서도 공부했습니다. 1885년 귀국한 뒤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연금된 동안 서양 견문과 개혁 구상을 담은 『서유견문』을 썼습니다(1895년 출간). 갑오개혁에 참여했으나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 홍영식1855~1884

      보빙사의 부대신으로 미국을 시찰하고, 귀국 뒤 우정총국 설치를 이끌었습니다.

      조사 시찰단과 보빙사로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급진 개화파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청군에게 살해됐습니다.

    •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1855~1916

      사절단과 함께 미국으로 가며 안내와 통역을 도왔습니다.

      미국 보스턴 출신의 사업가이자 작가입니다. 조선을 다녀온 뒤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펴냈고, 뒤에 천문학자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더 알아두기

    큰절 일화
    사절단이 아서 대통령을 만났을 때 조선의 예법대로 엎드려 큰절을 해 미국 언론이 이를 신기하게 보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보빙사, 그들은 스파이였나?

    KBS 히스토리 · 1.8만회 · 1: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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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빙사의 미국 방문 행적을 추적한 KBS 방송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고종의 미국사절단 보빙사 (報聘使) 1부 그들은 스파이였다 [역사실험] KBS 2012.03.10 방송

    KBS 실험실 · 1.3만회 · 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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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빙사를 다룬 KBS 역사실험 1부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구한말 미국 사절단 보빙사 (報聘使) 2부 조선 운명의 개척자 [역사실험] KBS 2012.03.17 방송

    KBS 실험실 · 9,538회 · 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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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보빙사를 다룬 KBS 역사실험 2부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미국에서 처음 엘리베이터 타고 지진 난줄 알았던 조선 선비들 ㅋㅋ

    보다 BODA · 91.5만회 ·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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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군란 이후 보빙사 파견과 미국 견문을 강연으로 풀어 줍니다.

    해설·교양 · 해설

    [박종인의 땅의 역사] 88.함께 신세계를 봤으되, 너무나도 달랐던 그들: 1883년 미국 보빙사와 실세 민영익-1

    박종인의 땅의 역사 · 2.3만회 ·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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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빙사와 민영익을 다룬 연재 해설입니다.

  5. 10.31

    사회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 창간

    박문국에서 열흘마다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입니다. 순한문으로 쓰였고 정부 소식과 외국 사정을 알렸습니다.

    • 같은 해 최초의 근대 사립 학교 원산학사가 세워졌고, 전환국(화폐)·기기창(무기) 등 근대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배경

    개화 정책을 펴려면 나라 안팎의 사정과 새 제도를 관리와 백성에게 알릴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 일행은 일본의 신문이 여론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신문 발행을 건의했습니다.

    박영효는 1883년 한성 판윤이 된 뒤 신문 발행을 추진했습니다. 일본에서 개화파와 교류한 후쿠자와 유키치 쪽의 도움으로 인쇄 기술자와 조수들이 조선에 왔습니다. 그러나 박영효가 곧 광주 유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계획은 정부 기관이 이어받게 됐습니다.

    전개

    1883년 출판을 맡는 관청 박문국이 세워졌고, 같은 해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 첫 호가 나왔습니다. 열흘마다 한 번씩 나오는 관보 성격의 신문으로, 순한문으로 쓰였습니다. 유길준 등이 창간 준비에 참여했고, 일본에서 데려온 인쇄 기술자들도 도왔습니다.

    지면에는 정부의 법령과 인사 같은 국내 소식과 함께 외국의 정치·경제·과학 소식, 세계 지리 등이 실렸습니다.

    1883년 8월 17일 고종은 통리아문 안에 박문국을 두고 신문을 펴내게 했습니다.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편집과 인쇄를 도왔습니다. 한성순보는 관청과 관리들에게 주로 배포됐고, 서양 여러 나라의 정치 제도, 전기·철도 같은 과학 기술, 세계 각지의 전쟁과 외교 소식까지 다양하게 실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1884년 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면서 발행이 멈췄습니다. 1886년 박문국이 다시 설치돼 국한문을 섞어 쓴 주간 신문 한성주보가 뒤를 이었지만, 재정난으로 1888년 폐간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관리와 지식인이 세계 정세를 알게 하는 데 쓰였습니다. 다만 한문으로만 쓰여 일반 백성이 읽기는 어려웠습니다.

    한성주보는 1886년 1월 25일 창간됐으며, 국한문 혼용 기사와 함께 한글로만 쓴 기사도 실어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광고를 처음 실은 신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2년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 신문이 여론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신문 발행을 건의했습니다.
    2. 1883년 초박영효가 한성 판윤으로 신문 발행을 추진했지만, 곧 자리를 옮기며 중단됐습니다.
    3. 1883년 8월 17일통리아문 안에 박문국이 설치됐습니다.
    4.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한성순보 첫 호가 나왔습니다. 열흘마다 한 번씩 순한문으로 펴냈습니다.
    5. 1884년 12월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 발행이 멈췄습니다.
    6. 1886년 1월 25일박문국이 다시 설치돼 주간 신문 한성주보가 창간됐습니다.
    7. 1888년재정난으로 한성주보가 폐간됐습니다.
    8. 1896년 4월서재필 등이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인물

    • 박영효1861~1939

      신문 발행을 건의하고 한성 판윤으로 창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급진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병합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습니다.

    •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1860~1938

      일본인으로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편집·인쇄를 도왔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로 조선 정부에 고용돼 신문 발간 실무를 맡았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정치인·기업인으로 활동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최초의 민간 신문은 따로 있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펴낸 신문입니다. 민간이 펴낸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96년 서재필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며, 한글로 쓰였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발간 (10월31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47회] / YTN2

    YTN 밀덕스 · 1,254회 ·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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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TN 오늘의 역사 코너로 한성순보 발간을 여러 사건과 함께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근대신문 정리) 한성순보부터 대한매일신보까지 1p로 끝내기! (도식 포함)

    원유철한국사TV · 7,560회 ·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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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순보부터 여러 근대 신문을 한 장으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한성순보와 독립신문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 145회 ·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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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기자박물관이 한성순보와 독립신문을 견주어 소개합니다.

  6. 11.26

    조약

    영국·독일과 수교

    1882년 맺었다가 비준하지 못한 조약을 고쳐 영국·독일과 다시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미 조약보다 조선에 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배경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직후인 1882년 6월, 조선은 영국·독일과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관세율이 너무 높고 무역 조건이 불리하다며 비준을 거부했고, 독일도 이를 따랐습니다.

    1882년 6월 조약은 영국 해군 제독 윌스와 독일 공사 브란트가 청의 도움을 받아 조미 조약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맺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청·일본과 맺은 조약보다 관세가 높고 영사 재판 등 권리가 부족하다며,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전개

    1883년 영국의 주청 공사 파크스와 독일 총영사 차페가 서울에 와서 다시 협상했고, 11월 26일 새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새 조약은 수입품 관세율을 낮추고, 영국·독일 상인이 개항장뿐 아니라 서울에 상점을 열고 허가증을 받아 내륙을 여행하며 장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영국 군함이 조선의 항구를 드나들 권리도 넣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외교를 맡은 독판 민영목이 협상과 서명을 맡았습니다. 새 조약은 수입품 관세율을 대체로 낮추었고, 영국·독일 외교관과 상인의 활동 범위를 넓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미 조약보다 조선에 불리한 조건이었고,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이 조건들이 미국·일본 등 다른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이후 이탈리아(1884),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등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조약에는 천주교 선교를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선교사들의 활동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게 됐습니다.

    1884년 인천에 독일 상사 세창양행이 들어서는 등 서양 상인의 진출이 시작됐고, 영국은 서울 정동에 총영사관을 열었습니다.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을수록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조선이 내준 특권이 여러 나라로 퍼지는 구조가 굳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2년 5월 22일조선이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2. 1882년 6월영국(윌스)·독일(브란트)과 조미 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3. 1882~1883년영국 정부가 조건이 불리하다며 비준을 거부했고, 독일도 뒤따랐습니다.
    4. 1883년 가을파크스와 차페가 서울에 와서 다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5. 1883년 11월 26일영국·독일과 새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6. 1884년비준서가 교환되고 영국 총영사관이 서울에 문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 이탈리아(6월)·러시아(7월)와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7. 1886년 6월프랑스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인물

    •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1828~1885

      영국 대표로 새 조약을 협상하고 서명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영국 외교관입니다. 주일 공사를 거쳐 주청 공사로 있으면서 조선 공사를 겸했습니다.

    • 민영목1826~1884

      조선 측 대표로 영국·독일과의 새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민씨 척족의 대신으로 외교 업무를 맡은 독판교섭통상사무를 지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됐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영수호통상조약 원본 관람: 국제조약의 정의와 종류

    알바트로스 신문 시사 위클리 · 61회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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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조영 조약 원본 관람기로 조약 내용 설명은 짧고 조회수가 적습니다.

  7. 1884

    7.7

    조약

    조러 수호 통상 조약

    청의 간섭을 줄이려 청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와 직접 수교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 문제의 주요 당사국이 됐습니다.

    배경

    임오군란 뒤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과 조정 일부는 다른 강대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맞닿은 러시아는 조선에 관심이 컸지만, 청은 러시아의 진출을 경계해 조러 수교를 주선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얻으면서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됐고, 1860년대부터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옮겨 가는 조선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원했기 때문에, 영국과 청은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하는 것을 특히 경계했습니다.

    전개

    청이 보낸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가 오히려 러시아와의 수교를 적극 주선했습니다. 1884년 7월 7일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조선 대표 김병시가 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조약을 맺었습니다. 내용은 영국·독일과 맺은 조약과 비슷했습니다.

    당시 베베르는 톈진 주재 러시아 영사로, 서울에 와서 조선 측 독판교섭통상사무 김병시와 협상했습니다. 조약은 이듬해 비준됐고, 베베르는 1885년 가을 대리공사 자격으로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베베르가 초대 공사로 서울에 오면서 러시아는 조선 문제의 주요 당사국이 됐습니다. 1885년과 1886년에는 조선이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려 했다는 이른바 조러 밀약설이 두 차례 퍼져 청이 크게 반발했고, 영국은 러시아를 막는다며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뒤에 1895년 삼국 간섭,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며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는 주요 수단이 됐습니다. 1888년에는 조러 육로 통상 장정을 맺어 두만강 부근 경흥에서 육로 무역을 열었습니다.

    첫 번째 조러 밀약설은 1885년 묄렌도르프가 러시아 군사 교관을 데려오려 한 일에서 비롯됐고, 이 일로 묄렌도르프는 해임됐습니다. 1886년 두 번째 밀약설 때는 위안스카이가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며 청과 조선의 관계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0년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얻어 조선과 국경을 맞댔습니다.
    2. 1884년 7월 7일서울에서 베베르와 김병시가 조러 수호 통상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3. 1885년 초묄렌도르프가 러시아 군사 교관 초빙을 추진하며 1차 조러 밀약설이 퍼졌습니다.
    4. 1885년 4월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한다며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5. 1885년 가을조약이 비준되고 베베르가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청의 압력으로 해임됐습니다.
    6. 1886년고종이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2차 조러 밀약설이 돌았습니다.
    7. 1888년 8월조러 육로 통상 장정을 맺어 경흥에서 육로 무역을 열었습니다.

    인물

    • 베베르(Karl I. Waeber)1841~1910

      러시아 대표로 조약에 서명하고 초대 주조선 공사가 됐습니다.

      러시아 외교관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10여 년 동안 조선에 머물렀습니다.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1848~1901

      청이 보낸 고문이면서도 러시아와의 수교를 주선했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청에서 일하다 리훙장의 추천으로 1882년 조선의 외교·세관 고문이 됐습니다. 해관을 설립하고 당오전 발행을 주장했으며,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다 청의 압력으로 1885년 해임됐습니다.

    • 김병시1832~1898

      조선 측 대표로 러시아와의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외교를 맡은 독판교섭통상사무를 지낸 관료로, 뒤에 영의정과 총리대신 등 최고 관직을 지냈습니다. 갑오개혁 무렵에는 급격한 개혁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조공·책봉(사대)

    해설·교양 · 해설

    조러수호통상조약 140주년 기념 전시회 개막식

    Pushkin House Seoul · 900회 ·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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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조약 140주년 기념 전시회 개막식 영상이라 조약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1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조공·책봉(사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왕을 책봉하고 주변국이 조공을 바치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 질서입니다.

형식상의 위계 관계였지만, 조선은 내정과 외교를 스스로 결정해 왔습니다. 임오군란 뒤 청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 '속방'이라는 말을 넣고 내정에 직접 간섭하며 이 관계를 실질적인 지배로 바꾸려 했습니다.

청일 전쟁 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 관계가 끝났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국임을 밝혔습니다.

예능

우리가 몰랐던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삼국시대에도 착한 외교는 없었다' - 안정준 교수|차이나는 클라스|JTBC 220206 방송

교양 Voyage · 1.4만회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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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조공-책봉 제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낳은 동아시아 역사 왜곡! 차이나는 클라스(jtbclecture) 228회 | JTBC 220206 방

교양 Voyage · 1.2만회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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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고구려가 조공을 바쳤다고?!

간다효 · 27.3만회 ·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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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