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제물포) 개항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세 번째 개항장으로 열렸습니다. 이후 외국 상인과 조계지가 몰려들었습니다.
배경
강화도 조약에 따라 열기로 한 두 항구 가운데 하나는 원산이었고, 일본은 나머지 하나로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수도가 가까워 위험하다며 개항을 늦추려 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 뒤 일본의 압력이 커지며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인천은 한강 하구와 가까워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와 사람이 거치는 길목이었습니다. 조정은 외국 군함과 상인이 수도 코앞까지 드나드는 것을 걱정했고, 일본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인천을 원했습니다. 1881년 무렵 조선은 결국 인천 개항을 약속했고, 임오군란의 혼란을 거쳐 개항 시기가 정해졌습니다.
전개
1883년 초 인천(제물포)이 세 번째 개항장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 일본 조계가 설치됐고, 1884년에는 청 조계와 미국·영국·독일 등이 함께 쓰는 각국 공동 조계가 생겼습니다. 1883년에는 관세 업무를 맡는 인천 해관도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 당시 제물포는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이 먼저 들어섰고, 청·일본 조계와 각국 공동 조계가 차례로 자리 잡으며 외국인 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인천 해관은 묄렌도르프가 조직한 조선 해관의 하나로, 수입품에 관세를 매기고 무역량을 기록했습니다. 조계 안에는 영사관과 상점뿐 아니라 외국인 묘지와 교회도 들어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인천은 곧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와 사람의 관문이 돼 조선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 됐습니다. 외국 상인과 영사관, 교회, 호텔이 들어서며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춰 갔습니다.
쌀과 콩 등이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나가고 면직물 등이 들어오면서, 인천은 조선 무역의 중심이 됐습니다. 1899년에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제물포~노량진 구간부터 개통해 두 도시가 더 가까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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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1848~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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