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대한제국기

을사늑약과 국권 수호 운동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가 들어섰습니다. 의병이 다시 일어났고, 애국 계몽 단체와 국채 보상 운동, 비밀 결사 신민회가 국권 회복에 나섰습니다.

기간
1905.9.6 ~ 1907.5 · 1년 8개월
누가 다스렸나
황제 고종 · 통감 이토 히로부미(1906~)
담긴 것
사건 7 · 영상 55 · 영화·드라마 4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7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다큐

국권 침탈 100년 1편 — 1910 나라를 잃다

KBS 히스토리 · 18.2만회 · 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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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사늑약부터 병합 조약 체결까지 국권 상실 과정을 다룹니다.

1905.11.17 ~ 1910.8.29 ·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90분) — 고종의 충신이던 이완용은 왜 매국노가 되었나

디글 · 272.7만회 · 1: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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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 독립 협회부터 을사늑약까지 다룹니다.

1896.7.2 ~ 1910.8.29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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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KBS 히스토리 · 129.6만회 ·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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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이완용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시기를 인물 중심으로 봅니다.

1896.7.2 ~ 1910.8.29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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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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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해설·교양 · 만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선 항일 의병 운동(역사만화 87화)

공부왕찐천재 · 11.9만회 ·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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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을사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의병 운동을 설명하는 만화입니다.

1905.11 ~ 1909 · 을사의병 → 신민회 결성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4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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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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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0· 공식 영상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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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5.4.10 ~ 1905

SBS.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의사가 된 백정 출신 청년 이야기

영화 · 2002· 제목만

「YMCA 야구단」

배경 1905 ~ 1905.11.17

을사늑약 무렵 조선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를 코미디로

영화 · 2004· 제목만

「도마 안중근」

배경 1907 ~ 1910.3.26

안중근의 의병 활동부터 하얼빈 의거·순국까지를 그린 영화(창작 섞임)

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화폐 정리 사업 (~1909)

  1. 1905

    11월

    운동

    을사의병

    1905.11 ~ 1906 · 1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다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했고, 최익현은 전북 태인에서 거병했다 붙잡혀 쓰시마에서 숨졌습니다.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으로 활약했습니다.

    배경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때 일어났던 을미의병은 아관파천 뒤 대부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겠다며 다시 무기를 드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나타났습니다.

    을사늑약 직전인 1905년 가을에도 강원도 원주에서 원용팔이, 충북 단양 일대에서 정운경이 의병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조약 소식이 퍼진 뒤에는 상소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본 유생들이 전국 곳곳에서 격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전개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1906년 5월 의병을 모아 홍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이 대포를 앞세워 공격하자 성이 함락되고 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70대의 원로 유학자 최익현이 1906년 6월 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했습니다. 순창으로 나아갔다가 진압하러 온 부대가 대한제국 진위대라는 것을 알고는 동포끼리 싸울 수 없다며 스스로 전투를 멈췄고, 붙잡혀 쓰시마(대마도)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1907년 1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상도 영해에서는 평민 출신 신돌석이 1906년 봄 의병을 일으켜 경북과 강원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경북 영천에서는 정용기 등이 산남의진을 이끌었습니다.

    최익현은 거병하며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글에서 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따졌습니다. 그의 부대는 태인에서 정읍·순창으로 옮겨 가며 수백 명으로 불어났지만, 순창에서 전주·남원의 진위대에 둘러싸이자 해산을 명했습니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 13명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붙잡혔고, 서울로 압송된 뒤 쓰시마로 보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을사의병은 대부분 유생 의병장이 이끌었지만, 신돌석처럼 양반이 아닌 의병장이 나타나 의병의 사회적 기반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랐습니다. 이 흐름은 1907년 군대 해산 뒤 더 큰 규모의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가을원주의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 등이 을사늑약 직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2. 1905년 11월 18일을사늑약이 조인됐습니다.
    3. 1906년 봄신돌석이 경북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4. 1906년 5월민종식 부대가 충남 홍주성을 점령했습니다.
    5. 1906년 5월 말일본군이 홍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6. 1906년 6월 초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했습니다.
    7. 1906년 6월 중순순창에서 진위대와 마주친 최익현이 전투를 멈추고 붙잡혔습니다.
    8. 1906년 여름최익현·임병찬이 쓰시마로 끌려갔습니다.
    9. 1907년 1월최익현이 쓰시마에서 숨졌습니다.
    10. 1907년 8월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이 정미의병으로 커졌습니다.

    인물

    • 최익현1833~1907

      70대의 나이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경기 포천 출신 유학자로, 1873년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로 대원군 하야의 계기를 만들었고,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쓰시마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숨졌으며,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집니다.

    • 민종식1861~1917

      충남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문과에 급제해 이조 참판을 지낸 관리 출신입니다. 홍주성 함락 뒤 숨어 지내다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돼 진도로 유배됐고, 뒤에 풀려났습니다.

    • 신돌석1878~1908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경북·강원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했습니다.

      경북 영해 출신입니다. 태백산 일대를 오가며 싸워 ‘태백산 호랑이’라 불렸습니다. 1908년 말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에게 살해됐습니다.

    • 임병찬1851~1916

      최익현의 참모로 태인 거병을 준비하고 함께 쓰시마로 끌려갔습니다.

      전북 옥구 출신으로 낙안 군수 등을 지냈습니다. 쓰시마 유배에서 풀려난 뒤 1912년 무렵 고종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했고, 1914년 붙잡혀 거문도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의병을 세 시기로 나누는 이유
    교과서는 구한말 의병을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으로 나눕니다. 각각 을미사변·단발령, 을사늑약, 군대 해산이라는 계기가 달랐고, 참여한 사람과 전투력도 시기마다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의병

    해설·교양 · 강의

    [짤꾹사] 의병, 대한제국을 지킨 민초들 │ 5. 을사의병

    역사공장 · 506회 ·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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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을사의병의 배경과 전개를 따로 다룬 짧은 강좌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을사조약 체결 후 우리 한국인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을사오적을 처벌하라! 을사의병 한국 최초의 상민 의병장

    역사돋보기 이영 · 7,652회 ·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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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을사의병과 신돌석을 중심으로 다룬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항일의병운동(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스튜디오 115 (STUDIO 115) · 4,206회 ·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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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을미·을사·정미의병을 함께 가르치는 강의입니다.

  2. 11.17

    조약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

    일본이 군대로 궁궐을 에워싼 가운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게 한 조약입니다.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에서 을사늑약이라 부릅니다.

    • 고종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고, 조약문에는 황제의 서명과 국새가 없습니다.
    • 찬성한 대신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됐습니다.

    배경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90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 동맹, 포츠머스 조약으로 미국·영국·러시아에게서 한국 지배에 대한 양해를 얻었습니다. 1904년 한일 의정서와 제1차 한일 협약으로 이미 군사 거점과 고문 정치의 발판도 마련해 둔 상태였습니다.

    남은 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겨받아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 대사로 서울에 보냈습니다.

    전개

    이토는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해 15일 고종을 만나 조약안을 내밀었습니다. 고종은 대신들과 의논하겠다며 즉답을 피했습니다.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대신들을 따로 불러 압박했습니다.

    11월 17일 일본군이 경운궁(덕수궁) 주변과 서울 시내에 배치된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렸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이토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한국 주차군 사령관과 함께 궁궐로 들어와 대신들에게 한 사람씩 찬반을 물었습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다 회의장에서 끌려 나갔고,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했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문구 수정 등을 조건으로 찬성하는 쪽에 섰습니다.

    일본 측은 과반 찬성을 이유로 조약이 성립했다고 보고, 11월 18일 새벽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공사가 조약문에 기명 날인했습니다. 외부의 도장은 일본 측이 가져다 찍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약문에는 고종의 서명이나 국새가 없고, 조약의 정식 명칭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는 도쿄의 일본 외무성이 맡게 됐고, 서울에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통감이 주재하게 됐습니다. 외국 공사관들은 곧 서울에서 철수했고,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낼 길을 잃었습니다.

    소식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민영환·조병세 등의 자결, 상소와 철시가 이어졌고, 전국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조약이 무효라는 친서를 헐버트 등을 통해 외국에 보냈고, 1907년 헤이그 특사도 파견했습니다.

    찬성한 다섯 대신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뒤에 일본에게서 작위를 받는 등 일제 통치에 협력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11월 9일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2. 1905년 11월 10일이토가 고종을 만나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했습니다.
    3. 1905년 11월 15일이토가 고종에게 조약안을 내밀고 승낙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대신들과 의논하겠다며 미뤘습니다.
    4. 1905년 11월 16일이토가 대신들을 숙소로 불러 조약에 찬성하라고 설득했고, 하야시 공사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따로 만났습니다.
    5. 1905년 11월 17일 오후일본군이 경운궁 주변을 둘러싼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렸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6. 1905년 11월 17일 밤이토가 하세가와 사령관과 함께 중명전에 들어와 대신들에게 한 사람씩 찬반을 물었습니다. 한규설은 반대하다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7. 1905년 11월 18일 새벽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공사가 조약문에 기명 날인했습니다.
    8. 1905년 11월 20일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습니다.
    9. 1905년 11월 30일민영환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10. 1906년 2월 1일서울에 통감부가 문을 열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온전하게 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 을사늑약 제2조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대한제국이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권리, 곧 외교권을 잃게 된 조항입니다.

    인물

    • 이토 히로부미1841~1909

      특파 대사로 서울에 와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이 됐습니다.

      일본의 초대 총리로,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한 정치가입니다. 을사늑약 뒤 통감으로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했고, 1909년 통감에서 물러난 뒤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됐습니다.

    • 한규설1848~1930

      참정대신(내각 수반)으로서 끝까지 조약에 반대했습니다.

      무관 출신으로 여러 대신을 지냈습니다. 조약에 반대하다 파면됐고, 병합 뒤 일본이 준 남작 작위를 거절했습니다. 뒤에 조선 교육회 등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박제순1858~1916

      외부대신으로서 조약문에 기명 날인했습니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조약 직후 참정대신이 됐습니다.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병합 조약에도 찬성했고, 병합 뒤 일본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 이완용1858~1926

      학부대신으로서 조약 찬성을 주도했습니다.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에서 일하고 독립협회 창립에도 관여했으나, 을사늑약 이후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1907년 총리대신이 돼 고종 퇴위와 정미 7조약, 1910년 병합 조약에 앞장섰고, 병합 뒤 백작·후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을사늑약은 법적으로 유효했나

    처음부터 무효라고 보는 쪽

    한국 정부와 한국 학계 다수의 입장입니다. 군대로 궁궐을 둘러싼 채 대신 개인을 협박해 얻어 낸 조약은 국제법상 강박에 의한 조약으로 무효이고, 황제의 위임장·비준·서명이 없으며 조약 명칭조차 없어 형식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고 봅니다. 1935년 미국 하버드 대학 법대의 국제법 연구 보고서도 이 조약을 강박에 의한 무효 조약의 예로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유효했다고 보는 쪽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일본 학계 일부의 견해입니다. 당시 국제법과 관행에서는 강대국이 힘을 배경으로 맺은 조약도 흔히 유효하게 취급됐고, 외교권 이양 같은 조약에 반드시 비준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열강도 이를 인정해 공사관을 철수했으므로 체결 당시에는 법적으로 성립했다고 봅니다. 부당함과 별개로 합법성은 따로 따져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고종의 책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권을 지키려 끝까지 애쓴 점을 보는 쪽

    고종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직후부터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외국에 보내고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는 등 할 수 있는 외교 수단을 끝까지 썼다고 봅니다. 군사력 차이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황제 한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통치 책임을 묻는 쪽

    조약 당일의 대응만이 아니라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재정을 어지럽히고 군대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으며, 황제권 강화에 치중해 개혁 세력을 억누른 결과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대신들에게 결정을 미루고 분명한 거부를 문서로 남기지 않은 점도 비판합니다.

    더 알아두기

    이름이 여러 개인 까닭
    조약문에 제목이 없어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일본은 ‘제2차 일한 협약’ 또는 ‘을사 보호 조약’이라 불렀고, 한국에서는 강제로 맺었다는 뜻에서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옛 교과서에는 ‘을사조약’이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중명전
    조약이 강요된 곳은 덕수궁 안의 중명전입니다. 지금은 덕수궁 돌담 밖 정동에 떨어져 있으며, 복원을 거쳐 을사늑약 관련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을사늑약 강제 체결 당일 시간대별 재구성

    KBS 히스토리 · 5.4만회 ·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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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을사늑약 체결 당일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35_[이벤트종료] 일제의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 '을사늑약'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2.9만회 ·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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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중명전에서 강압적으로 맺은 을사늑약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순간 을사늑약💧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모든 분야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된 대한제국 | #샾잉

    샾잉 #ing · 2.6만회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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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벌거벗은 한국사에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추리 – 을사조약 왜 무효인가 / KBS 19951118 방송

    KBS 히스토리 · 1.6만회 · 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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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을사조약이 왜 무효인지 따진 KBS 역사추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KBS 역사스페셜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이렇게 만들어졌다 / KBS 20011103 방송

    KBS 히스토리 · 3.9만회 · 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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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을사늑약 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다룬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조약 '을사늑약' (역사만화 85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3.5만회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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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을사늑약 체결을 정면으로 다룬 어린이 역사 만화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을사늑약 3분 요약 노래

    유요 · 53.9만회 ·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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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사늑약 체결 과정을 노래로 요약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120년 전 모든 걸 끝내버린 불평등 조약

    은근한 잡다한 지식 · 9.8만회 ·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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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사늑약의 체결과 내용을 백과사전 자료로 정리한 해설입니다.

    창작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4회 — 다섯 명의 매국노 '을사오적'

    tvN DRAMA · 195.1만회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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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을사오적을 그린 드라마 장면이라 인물 행동에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1905.11.17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창작 · 영화

    YMCA 야구단(2002) 예고편

    KoreaFilm · 2.1만회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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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0% · 간접 관련추천 ★★★★★

    을사늑약 무렵이 배경인 야구 코미디 예고편으로 사건은 다루지 않습니다.

    1905.11.17 · 을사늑약 무렵 황성 YMCA 야구단 이야기를 코미디로 그린 영화의 예고편입니다.영화 「YMCA 야구단」(2002)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3. 11.20

    운동

    시일야방성대곡과 민영환 자결

    1905.11.20 ~ 11.30 · 11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시일야방성대곡)'를 실어 조약을 규탄했습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11월 30일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배경

    을사늑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은 1905년 11월 18일 이후 서울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용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신문이 가장 먼저 그 실상을 전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나오던 신문은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이었고,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신문 기사를 미리 검열하고 있었습니다. 조약 체결 과정이 강압적이었다는 사실은 궁궐 안에 있던 대신과 관리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전개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실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 평화를 말하며 조약을 강요한 것과, 이에 찬성한 대신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배포됐고,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은 체포됐습니다.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도 이 논설을 옮겨 실어 널리 알렸습니다.

    원로 대신들은 조약 파기와 오적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조병세 등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상소했으나 해산당했고, 11월 30일 국민과 외국 공사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원로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도 뒤따라 자결했습니다.

    황성신문은 평소 3천 부 정도를 찍었으나, 이 논설이 실린 호는 1만 부 가까이 인쇄돼 이른 새벽 서울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장지연은 그날 새벽 신문사에서 체포돼 경무청에 갇혔고, 황성신문은 이후 석 달 가까이 발행이 중지됐습니다. 논설은 조약을 거부하지 못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 꾸짖고, 이천만 동포가 남의 노예가 됐다고 탄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민영환은 유서 세 통을 남겼습니다. 하나는 이천만 동포에게, 하나는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에게, 또 하나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습니다. 동포에게 남긴 글에서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모아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라고 당부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영환의 자결은 큰 충격을 주어 조문 행렬이 이어졌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을사늑약 반대 여론은 이후 을사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 여름 민영환이 숨진 방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신문들이 이를 크게 보도했고, 사람들이 몰려와 이를 구경했습니다. 을사늑약에 항의해 목숨을 끊은 사람은 관리뿐 아니라 군인과 평민 가운데서도 나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11월 18일 새벽을사늑약이 조인됐습니다.
    2. 1905년 11월 20일 새벽‘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황성신문이 검열 없이 서울 곳곳에 배포됐습니다.
    3. 1905년 11월 20일장지연이 체포되고 황성신문이 정간됐습니다.
    4. 1905년 11월 하순조병세·민영환 등 원로와 관리들이 조약 파기와 오적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5. 1905년 11월 30일민영환이 유서 세 통을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6. 1905년 12월 초조병세·홍만식·이상철 등이 뒤따라 목숨을 끊었습니다.
    7. 1906년 2월황성신문이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8. 1906년 여름민영환의 옛집에서 대나무가 돋았다는 ‘혈죽’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사료로 읽기

    “嗚乎痛矣며 嗚乎憤矣라. 我二千萬爲人奴隷之同胞여.”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우리역사넷 번역)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行將殄滅生存競爭之中矣. 夫要生者必死 期死者得生 諸公豈不諒.”
    — 민영환의 유서(1905)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의 와중에서 모두 없어질 것이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음을 기약하는 자는 살 것이니, 제공(諸公)들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우리역사넷 번역)

    인물

    • 장지연1864~1921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을사늑약을 규탄했습니다.

      경북 상주 출신 언론인·유학자로, 황성신문 주필과 사장을 지냈습니다. 대한 자강회를 만드는 데도 참여했습니다. 1910년대 후반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일제 통치를 긍정하는 글을 실은 일로 뒤에 친일 논란이 일었고, 2011년 정부가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를 결정해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 민영환1861~1905

      을사늑약에 항의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명성황후의 친척(민씨 척족)으로 여러 대신 자리를 두루 지냈습니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 전권 공사로 다녀왔고, 서구 제도를 접한 뒤 개혁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숨진 방의 바닥에서 대나무가 자랐다는 ‘혈죽’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어니스트 베델1872~1909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반대 여론을 알렸습니다.

      한국 이름은 배설입니다. 영국인이라 일본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논조를 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소송으로 재판을 받는 등 시달리다 1909년 서울에서 병으로 숨졌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장지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항일 언론 활동을 중시하는 쪽

    시일야방성대곡과 애국 계몽 활동으로 을사늑약 반대 여론을 이끈 공이 분명하고, 말년의 글은 식민 통치 아래 생계와 압박 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생애 전체의 공을 지울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말년 행적을 무겁게 보는 쪽

    앞선 공적이 있더라도 총독부 기관지에 일제 통치를 긍정하는 글을 여러 차례 실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독립유공자로 기리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실렸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67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세계에 알리다

    KBS 히스토리 · 4,196회 ·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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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시일야방성대곡을 대한매일신보가 알린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국사이야기, 시일야방성대곡

    EBSCulture (EBS 교양) · 1.7만회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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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시일야방성대곡을 짧게 소개하는 EBS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을사늑약에 분개해 목숨 바친 '민영환' 선생!

    [팟빵] 최욱의 매불쇼 · 29.4만회 · 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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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의 생애를 다룬 팟캐스트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역사실험] 을사늑약을 반대해 자결한 민영환의 순국한 장소에 자라난 대나무가 있었다? [스펀지] | KBS 20071110 방송

    KBS 실험실 · 4,990회 ·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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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민영환이 순국한 자리에서 자랐다는 혈죽 이야기를 다룬 KBS 스펀지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을사늑약 항거’ 민영환 동상 60여 년 만에 제자리 찾는다 / KBS 2022.08.30.

    KBS News · 2,784회 ·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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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민영환 동상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KBS 보도로 자결 배경을 짚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시일야방성대곡 : '목 놓아 통곡'하고 친일파가 되다!

    한국사 시간에 세계사 여행 · 3,509회 ·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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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시일야방성대곡 뒤 장지연의 친일 행적에 초점을 둡니다.

  4. 1906

    2.1

    정치

    통감부 설치

    을사늑약에 따라 서울에 통감부가 들어서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됐습니다. 외교뿐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했습니다.

    배경

    을사늑약 제3조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통감을 서울에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고 정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12월 통감부와 이사청 설치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통감은 일본 외무성이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직접 속한 자리로 정해졌습니다. 조약 문구에는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고 적혔지만, 통감이 황제를 따로 만날 권리까지 갖게 돼 처음부터 내정에 손을 댈 여지가 컸습니다. 러일 전쟁 이후 서울과 주요 도시에는 일본군이 머물고 있었고, 재정·외교·경찰 분야에는 이미 일본이 추천한 고문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전개

    1906년 2월 1일 서울 남산 기슭 왜성대(지금의 예장동 일대)에서 통감부가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기 전까지는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통감 대리를 맡았고, 이토는 3월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는 일본 영사관을 바꾼 이사청이 설치됐습니다.

    통감은 조약 문구상 외교만 맡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모은 ‘시정 개선 협의회’를 열어 재정·교육·경찰 등 내정 전반을 지휘했습니다. 통감은 필요하면 한국 주둔 일본군에 출동을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사청은 서울·인천·부산·원산·목포·마산·군산·평양 등 일본인이 많이 사는 개항장과 도시에 설치됐습니다. 이사관은 일본인에 관한 사무뿐 아니라 그 지역의 한국 지방관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통감부 안에는 총무부·농상공부·경무부 등이 두어져, 외교를 넘어 산업과 치안까지 다루는 조직으로 짜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1907년 정미 7조약 뒤에는 통감이 법령 제정과 고위 관리 임명까지 승인하게 돼 대한제국 정부는 사실상 통감부의 지휘를 받게 됐습니다.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로 이어졌고, 1910년 병합 뒤 통감부는 조선 총독부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11월 18일을사늑약 제3조로 통감을 두기로 했습니다.
    2. 1905년 12월일본이 통감부와 이사청 설치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3. 1906년 2월 1일서울 남산 왜성대에서 통감부가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통감 대리를 맡았습니다.
    4. 1906년 3월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부임하고, 대한제국 대신들을 모은 시정 개선 협의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5. 1907년 7월 24일정미 7조약으로 통감이 법령 제정과 고위 관리 임명까지 승인하게 됐습니다.
    6. 1909년 6월소네 아라스케가 제2대 통감이 됐습니다.
    7. 1910년 5월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됐습니다.
    8. 1910년 10월 1일통감부가 조선 총독부로 바뀌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폐하의 아래에 한 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며,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은밀히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 을사늑약 제3조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통감을 두는 근거가 된 조항입니다. 문구상으로는 외교만 맡게 돼 있었습니다.

    인물

    •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초대 통감(1906~1909)으로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습니다.

      일본 초대 총리이자 을사늑약을 강요한 인물입니다. 통감 재임 중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맺게 했습니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

      한국 주차군 사령관으로서 이토가 부임하기 전까지 통감 대리를 맡았습니다.

      러일 전쟁 때부터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했고, 을사늑약 때 군대로 궁궐을 압박했습니다. 뒤에 제2대 조선 총독(1916~1919)이 되어 3·1 운동을 진압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통감 관저 터
    남산 기슭의 통감 관저는 1910년 병합 조약이 조인된 곳입니다.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서울 중구 예장동에는 이를 알리는 표지석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세계사 속의 한국 근현대사 4강 (2) : 러일전쟁과 통감부의 통치

    성천아카데미 · 89회 · 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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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러일전쟁 뒤 통감부가 어떻게 통치했는지 다루는 교양 강좌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뒷담화] 총독이 아닌 통감, 이토 히로부미,역사저널 그날

    KBS 교양 · 722회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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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역사저널 그날에서 통감 이토의 위상을 짧게 짚는 뒷이야기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2월1일 오늘의 역사 (1906년, "조선을 무너뜨린 첫걸음, 통감부의 설치")

    짧히스토리_ShortHistory · 298회 ·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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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통감부 설치일을 중심으로 을사늑약 이후 흐름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근현대사] 1906 (통감부 설치) |한국사 암기법 | 공무원 단기 공부법|한능검 암기

    단호박암기한국사V 한국사 암기법 · 848회 ·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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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906년 통감부 설치를 암기용으로 짧게 정리한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통감부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시정개선을 할 계획[역사 바로보기] #62

    Modernity모더니티 · 245회 ·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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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이토 통감이 내정 간섭을 어떻게 계획했는지 풀어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통감부 초대통감 - 이토 히로부미

    지성의숲 : 성필원 작가 · 2,309회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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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이토 히로부미의 이력을 소개하며 통감 부임을 그 일부로 다룹니다.

  5. 4월

    운동

    대한 자강회

    1906.4 ~ 1907.8 · 1년 4개월

    교육과 산업을 키워 나라의 힘을 기르자는 애국 계몽 단체입니다.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이다 해산됐습니다.

    배경

    을사늑약 뒤 무력 항쟁과 다른 방법으로 국권을 되찾으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으므로,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기른 뒤 독립을 되찾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활동을 애국 계몽 운동이라 부릅니다.

    1905년에 만들어진 헌정 연구회는 입헌 정치를 연구하는 단체였는데, 일진회와 대립하다 통감부 압박으로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구성원들이 중심이 돼 새 단체를 세웠습니다.

    전개

    1906년 4월 윤효정·장지연·심의성 등이 대한 자강회를 만들었고, 윤치호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서울 본회 아래 전국에 지회를 두고 강연회를 열었으며, 『대한 자강회 월보』를 펴내 교육 보급과 식산흥업(산업 육성)을 주장했습니다. 의무 교육 실시와 악습 폐지 등도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 퇴위가 추진되자 대한 자강회는 반대 운동에 나섰습니다. 통감부는 이를 이유로 1907년 8월 보안법에 따라 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대한 자강회는 매달 연설회를 열고 서울과 지방 곳곳에 지회를 두었습니다. 월보는 1906년 7월부터 펴냈습니다.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가 고문으로 참여했는데, 이 때문에 단체의 활동 범위와 태도가 통감부가 허용하는 선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07년 7월 고종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회원들은 종로 등지에서 연설하며 군중과 함께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통감부는 같은 달 공포한 보안법을 근거로 8월 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 자강회는 1907년 11월 대한 협회로 이어졌습니다. 대한 협회는 이후 정치 활동에서 점차 온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치적 결사를 통한 공개 활동이 막히자 일부 인사들은 비밀 결사인 신민회로 옮겨 갔습니다.

    뒤를 이은 대한 협회는 남궁억 등이 이끌었고, 교육·산업 진흥과 정당 활동을 내걸었습니다. 대한 자강회의 강연과 월보는 학교 설립 운동과 신문·잡지의 계몽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5월입헌 정치를 연구하는 헌정 연구회가 세워졌습니다.
    2. 1906년 4월헌정 연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한 자강회가 창립되고 윤치호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3. 1906년 7월『대한 자강회 월보』가 창간됐습니다.
    4. 1907년 7월고종 퇴위에 반대하는 연설과 시위에 나섰습니다.
    5. 1907년 7월 27일집회·결사를 통제하는 보안법이 공포됐습니다.
    6. 1907년 8월통감부가 대한 자강회를 강제로 해산했습니다.
    7. 1907년 11월후신 단체인 대한 협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夫邦國之獨立은 惟在自强之如何耳라”
    — 대한 자강회 취지서(1906)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무릇 나라의 독립은 자강(自强)에 달려 있다.(우리역사넷 번역)

    인물

    • 윤치호1865~1945

      대한 자강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개화파 인물입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출옥 뒤 일제에 협력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일제 말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됐습니다. 그가 60년 가까이 쓴 일기는 근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 장지연1864~1921

      대한 자강회 창립에 참여하고 강연과 글로 계몽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언론인입니다.

    • 윤효정1858~1939

      헌정 연구회와 대한 자강회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대한제국 관리 출신으로 입헌 정치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대한 자강회가 해산된 뒤 대한 협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의 관계

    서로 보완한 두 흐름으로 보는 쪽

    실력 양성과 무장 투쟁은 방법이 달랐을 뿐 국권 회복이라는 목표가 같았고, 신민회처럼 두 방법을 모두 추구한 단체도 있었다고 봅니다. 1910년대 만주 독립군 기지는 두 흐름이 합쳐진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노선 차이와 한계를 강조하는 쪽

    계몽 운동가 상당수가 의병을 ‘폭도’로 보거나 무장 투쟁을 무모하다고 비판했고, 실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는 논리는 당장의 저항을 미루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일부 인사가 뒤에 일제 통치에 순응하거나 협력한 것도 이 한계와 관련 있다고 평가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애국 계몽 운동

    해설·교양 · 강의

    국권 수호 운동 | 애국계몽운동(보안회,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 박기훈

    티클 · 458회 ·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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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보안회·헌정 연구회와 함께 대한 자강회를 짧게 정리한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별별기적]_ 6교시 경제적 구국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 / 5일 개항기|7일의 기적

    최태성 1TV · 68.9만회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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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최태성이 경제적 구국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을 묶어 기출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민족의 힘을 키워 나라를 지키려 한 '애국 계몽 운동' (역사만화 88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8만회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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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애국 계몽 운동 전반을 그린 만화로 대한 자강회는 그중 하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개항기 17강 애국 계몽 운동 '시험에 나오는 핵심만 요약' 신민회/보안회/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

    아빠 한국사 · 1,198회 ·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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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애국 계몽 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대한 자강회를 짚습니다.

  6. 1907

    2월

    운동

    국채 보상 운동

    1907.2 ~ 1908 · 1년

    일본에서 빌린 나랏빚 1,300만 원을 국민이 모아 갚자는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담배를 끊고 반지를 내놓는 등 각계가 참여했지만 통감부의 탄압으로 멈췄습니다.

    • 국채 보상 운동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이 됐습니다.

    배경

    통감부는 화폐 정리와 시설 개선 등의 명목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서 돈을 빌리게 했습니다. 1907년 무렵 나랏빚은 약 1,300만 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빚이 늘수록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깊어진다는 걱정이 커졌습니다.

    전개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 서상돈과 사장 김광제가 국민이 힘을 모아 나랏빚을 갚자고 제안했습니다. 2천만 동포가 석 달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으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이 호응하면서 운동은 서울과 전국으로 빠르게 퍼졌고, 서울에는 국채 보상 기성회 등 여러 모금 단체가 생겼습니다. 양반과 상인, 노동자와 기생, 여성과 어린이까지 참여했습니다. 여성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았고, 해외 동포들도 성금을 보냈습니다.

    통감부는 운동을 방해했습니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모금액 횡령 혐의로 구속했는데,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운동은 이미 크게 위축됐습니다.

    운동을 알린 취지서는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이튿날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대구에서는 여성들이 패물을 내놓자는 모임을 따로 꾸렸고, 서울과 지방에서도 부인 단체들이 잇따라 생겼습니다. 운동은 1907년 4월부터 연말 사이에 가장 활발했고, 특히 6~8월에 성금이 가장 많이 모였습니다.

    통감부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을 재판에 넘겨 처벌받게 하는 등 운동의 중심인 신문을 압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운동은 모금 목표에 이르지 못한 채 1908년 무렵 사실상 멈췄습니다. 모인 돈의 처리를 두고도 단체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성별을 넘어 전 국민이 참여한 경제적 국권 수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게 평가됩니다. 관련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7년 2월 중순대구 광문사 특별회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이 국채 보상을 제안했습니다.
    2. 1907년 2월 21일대한매일신보에 국채 보상 취지서가 실렸습니다.
    3. 1907년 2월 22일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가 설립됐습니다.
    4. 1907년 4월~12월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고, 6~8월에 성금이 가장 많이 모였습니다.
    5. 1908년 5~6월통감부의 요구로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이 재판에 넘겨져 처벌받았습니다.
    6. 1908년 7월양기탁이 모금액 횡령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7. 1908년 9월양기탁에게 무죄가 선고됐지만 운동은 이미 크게 위축됐습니다.
    8. 2017년 10월국채 보상 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인물

    • 서상돈1850~1913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을 처음 제안했습니다.

      대구의 상인 출신 실업가이자 천주교 신자입니다.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고, 국채 보상 운동에 많은 돈을 내놓았습니다.

    • 김광제1866~1920

      광문사 사장으로서 서상돈과 함께 운동을 발의했습니다.

      충남 보령 출신으로 관직을 지낸 뒤 대구에서 광문사를 운영했습니다. 운동 이후에도 계몽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 양기탁1871~1938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운동을 확산시키고 모금을 맡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총무로 베델과 함께 신문을 이끌었습니다. 신민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고, 105인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른 뒤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1997년 금 모으기 운동
    1997년 외환 위기 때 국민이 금을 모아 나라 빚을 갚는 데 보태자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때 국채 보상 운동이 자주 함께 언급됐습니다. 대구에는 국채 보상 운동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1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이 된 대한매일신보

    KBS 히스토리 · 6,238회 ·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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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한매일신보가 이끈 국채 보상 운동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국채보상운동'

    TV나라사랑 · 5,060회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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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이달의 독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소개한 국가보훈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큰별쌤의 오늘 — 나라 빚을 갚자! 국채 보상 운동

    최태성 2TV · 2.3만회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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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 보상 운동의 배경과 전개를 최태성 강사가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차이나는 클라스 — 일본을 떨게 한 국채 보상 운동

    교양 Voyage · 1.5만회 ·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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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 보상 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을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1전의 기부 | 국채보상운동 애니메이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 1만회 ·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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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든 모금 참여 애니메이션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다시 보는 국채보상운동 / YTN

    YTN · 6,130회 ·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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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의 시작과 의미를 되짚은 YTN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심용환의 역사 토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국채보상운동 [생방송 아침이 좋다] 20190816

    KBS 교양 · 847회 ·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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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심용환이 국채보상운동의 전개를 설명하는 KBS 교양 코너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6차시│상권 수호 운동탈│국채 보상 운동

    워니비 · 2.8만회 ·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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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상권 수호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을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헤이그 특사|국채보상운동|역사가 술술|역사|한국사|2편 모아보기|[EBS놀이터]

    EBS 키즈 · 2.6만회 ·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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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 특사와 국채 보상 운동을 묶은 어린이 영상입니다.

  7. 4월

    운동

    신민회 결성

    1907.4 ~ 1911 · 4년

    안창호·양기탁 등이 만든 비밀 결사로, 국권을 되찾아 공화정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대성 학교·오산 학교를 세우고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배경

    을사늑약 뒤 대한 자강회 같은 공개 단체들은 통감부의 통제 아래 활동에 한계를 겪었습니다. 공개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곧 국권 회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비밀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이끌던 안창호가 귀국하면서 이 구상이 구체화됐습니다.

    전개

    1907년 4월 무렵 안창호와 양기탁을 중심으로 이동휘·이갑·이동녕·전덕기·이승훈 등이 비밀 결사 신민회를 만들었습니다. 회원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받았고, 회원끼리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하도록 조직을 짰습니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고, 태극 서관과 도자기 회사 등을 운영해 교육과 산업을 키우려 했습니다. 청년 학우회를 조직해 인재를 길렀습니다.

    1909~1910년 무렵에는 국내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등이 서간도 삼원보로 옮겨 가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직은 양기탁이 총감독, 이동녕이 총서기, 전덕기가 재무, 안창호가 집행원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원은 평안도·황해도의 신흥 상공인과 기독교인, 교사·언론인이 많았고, 규모는 수백 명에서 80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대성 학교는 1908년 평양에서 문을 열었고, 오산 학교는 1907년 말 정주에서 개교했습니다. 태극 서관은 서울·평양·대구에서 책을 펴내고 팔았으며, 평양의 자기 회사는 민족 자본으로 공장을 세워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며 수많은 인사를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신민회는 해체됐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 공화정 구상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05인 사건은 1910년 말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으다 붙잡힌 일을 계기로 일제가 서북 지방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12년 1심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2심에서는 윤치호·양기탁·안태국·임치정·이승훈·옥관빈 6명만 유죄가 되고 나머지는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내외에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7년 2월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했습니다.
    2. 1907년 4월 무렵양기탁·안창호 등이 비밀 결사 신민회를 만들었습니다.
    3. 1907년 12월이승훈이 평북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습니다.
    4. 1908년평양에 대성 학교가 문을 열고, 태극 서관이 세워졌습니다.
    5. 1909년청년 학우회가 조직됐습니다.
    6. 1910년 봄간부들이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고 안창호 등이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7. 1911년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등이 서간도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습니다.
    8. 1911년 가을일제가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을 체포하면서 신민회 조직이 무너졌습니다.
    9. 1912~1913년재판 끝에 윤치호·양기탁 등 6명이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신민회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완고하고 부패한 국민 생활을 개혁할 새로운 사상이 시급히 필요하며, 우둔한 국민을 깨우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이 시급히 필요하고”
    — 대한신민회 취지서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취지서는 일본 경찰이 입수해 일본어로 옮긴 문서로 전해집니다.

    인물

    • 안창호1878~1938

      신민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성 학교를 세웠습니다.

      평남 강서 출신으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만들었습니다. 병합 뒤 망명해 흥사단을 세우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으며,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병으로 숨졌습니다.

    • 양기탁1871~1938

      대한매일신보 사옥을 거점으로 신민회를 조직했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뒤에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으며 임시 정부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 이승훈1864~1930

      평북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습니다.

      평안도의 상인 출신 실업가입니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공화정 목표가 가진 의미
    을사늑약 이전의 개혁 운동은 대부분 황제권 아래의 입헌 군주제를 구상했습니다. 신민회가 공화정을 목표로 내건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서 공화주의가 등장한 초기 사례로 꼽힙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 설립과 105인 사건

    KBS 히스토리 · 2.2만회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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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신민회 설립과 105인 사건을 함께 정리한 짧은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10분컷한국사][#한국사능력검정] 일제 강점기 신민회│설민석

    설민석 Seol Min Seok · 3.5만회 ·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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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민석이 신민회의 목표와 활동을 짧게 정리한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34 이회영 일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서다

    KBS 히스토리 · 2.3만회 ·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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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신민회 간부회의 뒤 만주로 떠난 이회영 일가를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제강점기 이전 마지막 희망이었던 단체, 신민회가 꿈꾸었던..

    역사돋보기 이영 · 2,961회 ·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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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신민회가 꿈꾼 공화정과 활동을 정리한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애국계몽운동#신민회를 중심으로(7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3만회 ·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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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 계몽 운동을 신민회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국채보상운동과 신민회, 애국계몽운동 | 핵심 in 한국사

    EBSi · 2.5만회 ·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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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 보상 운동과 신민회를 함께 다룹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의병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일어나 싸운 민간 군대입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이어진 전통입니다. 근대에는 을미의병(1895, 을미사변·단발령), 을사의병(1905, 을사늑약), 정미의병(1907,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유생이 이끌었지만 을사의병부터 신돌석 같은 평민 의병장이 나왔고, 정미의병 때는 해산된 군인이 합류해 전투력이 커졌습니다. 1909년 남한 대토벌 이후 많은 의병이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이 됐습니다.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2차시│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워니비 · 5만회 ·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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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역덕이슈 오늘 I 22 윤희순, 붓과 총을 든 여성 의병장

KBS 히스토리 · 4.7만회 ·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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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선 '항일 의병 운동' (역사만화 87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1.9만회 ·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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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계몽 운동

교육·언론·산업으로 나라의 실력을 길러 국권을 지키자는 운동입니다.

을사늑약 전후 보안회·헌정 연구회·대한 자강회·신민회 같은 단체가 이끌었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펴내고 민족 자본을 키웠으며, 국채 보상 운동도 이 흐름에 속합니다.

무력 투쟁을 한 의병과 방법은 달랐지만, 둘 다 국권 회복을 목표로 했고 뒤에 독립운동의 두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강의

[심화별개념2]_31-3 애국 계몽 운동 / 31강 개항기(국권 침탈과 저항)|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최태성 1TV · 13.8만회 ·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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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민족의 힘을 키워 나라를 지키려 한 '애국 계몽 운동' (역사만화 88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0.8만회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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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