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의병
을사늑약에 반대해 다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했고, 최익현은 전북 태인에서 거병했다 붙잡혀 쓰시마에서 숨졌습니다.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으로 활약했습니다.
배경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때 일어났던 을미의병은 아관파천 뒤 대부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겠다며 다시 무기를 드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나타났습니다.
을사늑약 직전인 1905년 가을에도 강원도 원주에서 원용팔이, 충북 단양 일대에서 정운경이 의병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조약 소식이 퍼진 뒤에는 상소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본 유생들이 전국 곳곳에서 격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전개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1906년 5월 의병을 모아 홍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이 대포를 앞세워 공격하자 성이 함락되고 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70대의 원로 유학자 최익현이 1906년 6월 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했습니다. 순창으로 나아갔다가 진압하러 온 부대가 대한제국 진위대라는 것을 알고는 동포끼리 싸울 수 없다며 스스로 전투를 멈췄고, 붙잡혀 쓰시마(대마도)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1907년 1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상도 영해에서는 평민 출신 신돌석이 1906년 봄 의병을 일으켜 경북과 강원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경북 영천에서는 정용기 등이 산남의진을 이끌었습니다.
최익현은 거병하며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글에서 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따졌습니다. 그의 부대는 태인에서 정읍·순창으로 옮겨 가며 수백 명으로 불어났지만, 순창에서 전주·남원의 진위대에 둘러싸이자 해산을 명했습니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 13명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붙잡혔고, 서울로 압송된 뒤 쓰시마로 보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을사의병은 대부분 유생 의병장이 이끌었지만, 신돌석처럼 양반이 아닌 의병장이 나타나 의병의 사회적 기반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랐습니다. 이 흐름은 1907년 군대 해산 뒤 더 큰 규모의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최익현1833~1907
민종식1861~1917
신돌석1878~1908
임병찬1851~1916
더 알아두기
- 의병을 세 시기로 나누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