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갑오개혁기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삼국 간섭 뒤 조선이 러시아에 기울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이어진 을미개혁의 단발령에 반발해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기간
1895.4.25 ~ 1896.2.10 · 9개월
누가 다스렸나
임금 고종
담긴 것
사건 6 · 영상 44 · 영화·드라마 6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7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KBS 히스토리 · 95.5만회 ·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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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을 축으로 집권부터 을미사변 무렵까지 다룹니다.

1864.1.21 ~ 1895.10.8 · 을미개혁 → 을미사변

해설·교양 · 다큐

역사스페셜 —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KBS 히스토리 · 207.7만회 · 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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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미사변 가담자 우범선과 그를 벤 고영근을 다룬 역사스페셜입니다.

1895.10.8 ~ 1903.11 · 을미사변 → 을미의병

해설·교양 · 만화

핵심 in 한국사 — 을미사변, 을미의병, 아관파천

EBSi · 3.8만회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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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미사변·을미의병·아관파천을 애니메이션으로 요약합니다.

1895.10.8 ~ 1897.2.20 · 을미사변 → 을미의병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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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을미개혁 → 을미의병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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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을미개혁 → 을미의병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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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을미개혁 → 을미의병

해설·교양 · 강의

갑오개혁

최태성 1TV · 10만회 ·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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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갑오개혁의 차수별 내용을 정리한 한능검 심화 강의입니다.

1894.7.27 ~ 1896.2 · 을미개혁 → 을미의병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6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드라마 · 2001· 공식 영상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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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66 ~ 1895.10.8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의 일생을 따라 대원군과의 갈등부터 을미사변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드라맛집]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 몰아보기

KBS Drama Classic · 12.3만회 ·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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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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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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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 제목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배경 1873 ~ 1895.10.8

명성황후와 호위 무사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엮은 영화

드라마 · 2010· 공식 영상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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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5.4.10 ~ 1905

SBS.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의사가 된 백정 출신 청년 이야기

영화 · 2017· 제목만

「대장 김창수」

배경 1896 ~ 1898

청년 김구(김창수)가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시절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영화걸작선] 38회 - 대장 김창수

거의없다 · 64.7만회 ·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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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연표 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2차 갑오개혁 (~1895.7)

  1. 1895

    10월

    정치

    을미개혁

    1895.10 ~ 1896.2 · 4개월

    을미사변 뒤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개혁을 이어 갔습니다. 태양력을 쓰기로 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삼았고, '건양' 연호를 정했습니다.

    • 종두법을 시행하고 우체사와 소학교를 세웠으며, 친위대(서울)와 진위대(지방)를 뒀습니다.

    배경

    을미사변 뒤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한 새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유길준·정병하·조희연 등 친일 성향 인사가 요직을 맡았고, 러시아·미국과 가까운 인사들은 물러나거나 피신했습니다. 이 내각은 중단된 개혁을 서둘러 이어 갔습니다.

    새 내각은 일본인 고문관의 조언을 받으며 3차 김홍집 내각 때 준비하던 제도들을 한꺼번에 시행했습니다. 삼국 간섭 뒤 가라앉았던 일본의 영향력이 을미사변으로 다시 커진 상태였고, 왕비 시해로 민심은 매우 나빴습니다.

    전개

    1895년 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여러 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 음력을 버리고 태양력을 쓰기로 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삼았고, 새 연호 ‘건양’을 정했습니다. 종두법을 시행하고 우편 업무를 맡는 우체사를 두었으며, 소학교를 세웠습니다. 군제를 바꿔 서울에는 친위대, 지방에는 진위대를 두었습니다.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는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습니다.

    태양력은 음력 1895년 11월 16일 다음 날을 곧바로 1896년 1월 1일로 삼는 방식으로 시행되어, 그해 음력 섣달까지 한 달 반가량이 달력에서 건너뛰었습니다. 우편 사무는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문을 닫은 지 약 10년 만인 1895년에 우체사를 통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에 단발령이 겹치면서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정부가 의병 진압을 위해 친위대를 지방으로 보낸 사이,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났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정병하 등은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단발령은 강제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태양력 등 여러 제도는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관청은 이후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썼지만, 민간에서는 오랫동안 음력으로 명절과 제사를 지냈습니다. 친위대·진위대로 개편한 군제는 대한제국기에 다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한 새 내각이 섰습니다.
    2. 1895년 가을서울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두는 군제 개편과 소학교령 등이 시행되었습니다.
    3. 1895년 11월 28일고종을 궁 밖으로 모셔 내려던 춘생문 사건이 실패했습니다.
    4. 1895년 12월 30일 (음력 11월 15일)단발령이 내려지고, 양력 사용과 새 연호 ‘건양’이 발표되었습니다.
    5. 1896년 1월 1일태양력이 시행되고 건양 연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6. 1896년 1월~2월단발령에 반발한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7. 1896년 2월 11일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면서 김홍집 내각이 무너졌습니다.

    인물

    • 김홍집1842~1896

      총리대신으로 을미개혁을 이끌었습니다.

      갑오개혁부터 여러 차례 내각을 이끈 온건 개화파입니다. 아관파천 뒤 역적으로 몰려 피신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고, 광화문 부근에서 군중에게 살해되었습니다.

    • 유길준1856~1914

      내부대신으로 단발령 등 개혁을 앞장서 추진했습니다.

      『서유견문』을 쓴 개화 사상가입니다.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7년 귀국 뒤 흥사단(한성) 등을 통해 교육 운동을 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을미개혁을 어떻게 볼까

    근대 제도의 정착을 강조하는 쪽

    태양력, 종두법, 우편, 소학교 같은 제도는 사람들의 생활을 근대적으로 바꾼 조치였고, 대부분 대한제국기 이후에도 유지되었다고 봅니다.

    정당성과 추진 방식의 문제를 강조하는 쪽

    왕비가 살해된 직후 일본의 영향 아래 선 내각이 민심을 살피지 않고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봅니다. 특히 단발령을 강제로 시행해 개혁 전체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고 평가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음력과 양력연호

    해설·교양 · 해설

    역덕이슈 오늘 I 44 건양원년, 을미개혁과 상투전쟁

    KBS 히스토리 · 9,475회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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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건양 연호와 태양력 채택, 단발령 반발을 다룬 KBS 짧은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기본별개념4]_ 21-2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 21강 개항기(동학 농민 운동~대한 제국)|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PT 분절

    최태성 1TV · 1.1만회 ·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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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최태성 한능검 강의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함께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명성황후 시해와 을미 개혁 l 근대 한국사 17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4.2만회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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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을미개혁을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보기만 해도 10점 UP! 한국사 벼락치기 근대개혁 편|갑오개혁, 을미개혁|한능검 공부|한국사 정리|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4.1만회 ·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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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비교해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14강-③ 갑오개혁·을미개혁|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능검 기본서 심화 핵심강의|한능검 무료강의|최한나 교수|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에듀윌 한국사능력검정 · 1.7만회 · 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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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갑오·을미개혁을 함께 다루는 긴 강의입니다.

  2. 10.8

    정치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 건청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러시아에 기울자 이를 되돌리려 한 일이었습니다.

    • 일본은 관련자들을 자국으로 불러 재판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어 줬습니다.

    배경

    삼국 간섭 뒤 조선 정부가 러시아에 가까워지자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잃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일본은 이 흐름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895년 9월 전임 이노우에 가오루의 뒤를 이어 군인 출신 미우라 고로가 조선 주재 공사로 부임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교관이 훈련시킨 훈련대를 해산하려 했습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일본은 조선 군대 안의 영향력을 잃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전개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미우라 공사의 계획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낭인, 공사관원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 훈련대 일부도 동원되었습니다. 궁을 지키던 시위대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막다가 홍계훈 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침입자들은 궁궐 깊숙이 고종과 왕비가 머물던 건청궁으로 들이닥쳐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도 이때 살해되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미국인 교관 다이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등 외국인이 이를 목격해 증언했습니다.

    사건 직후 일본은 조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꾸미려 했고, 친일 성향의 새 내각이 섰습니다. 새 정부는 한동안 왕비를 폐위하는 조칙까지 발표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외국인 목격 증언으로 일본의 개입이 알려지며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일본은 미우라 등 관련자 수십 명을 본국으로 불러 히로시마에서 재판했습니다. 그러나 1896년 1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가담자로 지목된 조선인 몇 명만 처형되었습니다.

    왕비 시해에 대한 분노는 곧이어 내려진 단발령과 합쳐져 을미의병을 불렀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명성황후는 1897년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고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5년 4월 23일삼국 간섭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흔들렸습니다.
    2. 1895년 9월 1일미우라 고로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습니다.
    3. 1895년 10월 7일조선 정부가 훈련대 해산 방침을 일본 측에 알렸습니다.
    4.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광화문으로 들어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했습니다.
    5. 1895년 10월 10일새 내각이 왕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조칙을 발표했습니다.
    6. 1895년 10월 중순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일본이 미우라를 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7. 1895년 11월 26일왕후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8. 1896년 1월 20일히로시마 재판에서 미우라 등 관련자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9. 1897년 11월대한제국 선포 뒤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인물

    • 미우라 고로1847~1926

      일본 공사로 을미사변을 계획하고 지휘했습니다.

      육군 중장 출신으로 외교 경험 없이 조선 공사로 부임했습니다. 히로시마 재판에서 풀려난 뒤 일본 정계에서 추밀원 고문 등을 지내며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 명성황후1851~1895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견제하려다 시해되었습니다.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1866년 고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민씨 척족과 함께 정치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임오군란 때 궁을 피해 목숨을 건졌고, 청·러시아 등 외세를 이용한 외교를 폈습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일본 측에 의해 궁으로 끌려 들어와 사건의 명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명성황후와 오랫동안 대립했습니다. 사건 뒤 잠시 정계에 나왔으나 곧 물러났고, 189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우범선1857~1903

      훈련대 대대장으로 사건에 가담했습니다.

      사건 뒤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3년 일본에서 망명객 고영근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농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명성황후를 어떻게 평가할까

    외교적 노력과 반일 입장을 높이 보는 쪽

    강대국 사이에서 청·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한 적극적인 외교가로 봅니다. 개화 정책을 지지했고 일본이 그를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 살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역할을 보여 준다고 평가합니다.

    민씨 척족 정치의 문제를 강조하는 쪽

    민씨 일족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관직 매매와 부패가 심해졌고, 왕실의 굿·제사 등에 많은 재정이 쓰였다고 지적합니다. 외세를 번갈아 끌어들이는 외교가 오히려 열강의 간섭을 키웠으며,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도 이 시기의 실정이 있었다고 봅니다.

    흥선대원군은 얼마나 관여했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보는 쪽

    대원군이 사전에 일본 측과 접촉해 거사에 동의했으며, 명성황후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고 봅니다.

    일본에 이용당했다고 보는 쪽

    일본이 사건을 조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보이게 하려고 대원군을 억지로 끌어냈으며, 대원군은 왕비 살해까지 동의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가해 주체는 확정된 사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갈리지만,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계획하고 일본군과 낭인이 궁궐에 침입해 왕비를 살해했다는 사실은 당시 목격자 증언과 일본 측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민비’와 ‘명성황후’
    살아 있을 때는 왕비였고, ‘명성황후’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며 황후로 추존된 이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민비’로 불렸는데, 이를 낮춤말로 보는 시각이 많아 오늘날에는 대부분 ‘명성황후’라 부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역사스페셜 — 러시아 비밀문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

    KBS 히스토리 · 139.8만회 · 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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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러시아 문서로 을미사변 당일 상황을 추적한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특별기획 110년 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 2부 사죄, 그리고 진실 / KBS 2005.10.9 방송

    KBS 히스토리 · 19.3만회 · 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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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사료를 추적한 KBS 특별기획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근대25] 을미사변(2) 국모와 이완용, 일본(10분 숨안쉬어지는ver.)

    황현필 한국사 · 57.5만회 ·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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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을미사변 전개와 가담자를 다룬 황현필 강의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의외로 쉬워서 놀랐다"‥명성황후 시해 가담자의 편지 (2021.11.17/뉴스투데이/MBC)

    MBCNEWS · 4.6만회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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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시해 가담자의 편지가 발견됐다는 MBC 뉴스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한 사건 '을미사변' (역사만화 81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5.6만회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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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을미사변을 정면으로 다룬 어린이 역사 만화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을미사변! 명성황후의 끔찍한 비극 |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 vs 일본 vs 러시아 힘대결 | 어린이 조선왕조실록 | 초등 이야기 한국사 조선시대 지니스쿨 역사

    지니스쿨 역사 GeniSchool History · 141.5만회 ·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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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미사변 전후 정세와 명성황후 시해를 그린 어린이 만화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을미사변 당신이 몰랐던 세 가지 사실

    이강민의 잡지사 · 7.9만회 ·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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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을미사변의 목격자와 뒷이야기를 다룬 라디오 해설입니다.

    창작 · 드라마

    제중원 27회 — 눈앞에서 왕비가 시해당하다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6,180회 ·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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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을미사변을 그린 장면입니다. 주인공 시점은 창작입니다.

    1895.10.8 · 주인공이 을미사변 현장에서 왕비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입니다(SBS 17분 축약본).드라마 「제중원」(2010)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창작 · 드라마

    제중원 26회 — 왕비를 해치려고 일본군이 궁궐에 들이닥치다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6,151회 ·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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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을미사변 당일 궁궐에 들이닥치는 장면입니다.

    1895.10.8 · 을미사변 당일 일본군과 낭인이 궁궐에 들어오는 장면입니다(SBS 18분 축약본).드라마 「제중원」(2010)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창작 · 영화

    영화 [영웅] 김고은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

    CJ ENM Movie · 440.3만회 ·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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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을 겪은 창작 인물의 노래 장면입니다.

    1895.10.8 ·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잃은 궁녀 설희가 그날을 잊지 않겠다며 부르는 노래 장면입니다.영화 「영웅」(2022)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3. 11.28

    정치음력 10월 12일

    춘생문 사건

    을미사변 뒤 친일 내각 아래 사실상 갇혀 있던 고종을 궁 밖으로 모셔 내려던 계획입니다. 밀고로 실패했지만, 석 달 뒤 아관파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배경

    을미사변 뒤 고종은 친일 성향 내각과 일본의 감시 속에 경복궁에 사실상 갇혀 지냈습니다. 독살을 두려워해 외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었다고 전할 정도였습니다. 궁궐 경비를 맡은 친위대도 새 내각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궁 밖으로 피신한 친미·친러 성향 관료들과 고종에게 충성하는 시종·무관들은 고종을 궁 밖으로 모셔 내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을미사변 뒤 친미·친러 성향 관료들은 외국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에, 이완용·이윤용 등은 미국 공사관에 머물며 고종 측과 연락했습니다.

    전개

    1895년 11월 28일(음력 10월 12일) 새벽, 시종 임최수와 참령 이도철 등이 친위대 일부 병력을 이끌고 경복궁 동북쪽 춘생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재순·이범진·이윤용·이완용 등 관료들이 계획에 관여했고, 언더우드·에비슨·헐버트 등 미국인 선교사들과 미국·러시아 공사관 측도 고종의 안전을 위해 이 움직임을 알고 돕거나 궁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거사에 가담하기로 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가 이를 미리 알려 계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임최수·이도철 등은 붙잡혀 처형되었고, 여러 관련자가 유배되거나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계획은 친위대 병력으로 궁에 들어가 친일 성향 대신들을 몰아내고 고종을 궁 밖으로 모셔 내는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병력은 새벽 춘생문 앞에 이르렀지만, 안에서 문을 열어 주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궁 안의 정부 측 병력이 이미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일본은 이 사건을 크게 선전했습니다. ‘외국인도 조선 궁궐에 개입했다’는 논리로 을미사변에 대한 비판을 흐리려 했고, 사건 뒤 을미사변 관련자 처리도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한편 고종 측은 궁궐을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석 달 뒤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이뤄졌습니다.

    사건 관련자에 대한 재판은 1895년 12월에 열렸습니다. 같은 시기 을미사변에 가담한 혐의를 받은 조선인 몇 명도 처형되었는데, 일본인 가담자들이 히로시마 재판에서 풀려난 것과 대비되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습니다.
    2. 1895년 10월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 이완용 등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3. 1895년 11월 28일 (음력 10월 12일) 새벽임최수·이도철 등이 친위대 병력을 이끌고 춘생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내부 밀고로 실패했습니다.
    4. 1895년 말임최수·이도철 등이 처형되고 관련자들이 유배되었습니다.
    5. 1895년 12월 30일단발령이 내려져 민심이 더 크게 흔들렸습니다.
    6. 1896년 2월 11일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이뤄졌습니다.

    인물

    • 이범진1852~1911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으며 거사를 계획한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고종의 측근 관료로, 춘생문 사건 실패 뒤에도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손잡고 아관파천을 주도했습니다.

    • 이도철?~1895

      친위대 참령으로 병력을 이끌고 춘생문으로 진입하려 했습니다.

      고종에게 충성한 무관으로, 거사 실패 뒤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뒷날 을미사변에 맞선 충신으로 추모되었습니다.

    •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미국인 선교사로 고종의 안전을 위해 궁 안에 머물며 사건에 관여했습니다.

      1885년 조선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새문안 교회와 연희 전문학교(오늘날 연세대학교)를 세웠습니다.

    더 알아두기

    춘생문
    경복궁 동북쪽 담장에 있던 문입니다. 궁 안쪽 깊은 곳과 가까워,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 쪽으로 들어가기 쉬운 길이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변란사] 친미파가 주도한 실패한 친위 쿠테타인 춘생문(春生門) 사건

    문역뜰 · 274회 ·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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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생문 사건의 경과와 인물을 자세히 다룬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경복궁 춘생문 터, 고종 탈출 시도 실패의 현장! 민비 시해 이후 조선 몰락의 시작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

    AK HISTORY TV · 52회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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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생문 터를 찾아 탈출 시도의 실패를 설명한 짧은 개인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고종이 궁궐을 탈출한 진짜 이유와 고종을 도운 최악의 친일파

    오늘의 역사 · 220회 ·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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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고종 탈출 시도로 묶어 설명합니다.

  4. 12.30

    사회음력 11월 15일

    단발령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습니다. 고종이 먼저 머리를 잘랐지만 '신체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는 유교 윤리와 충돌해 큰 반발을 불렀습니다.

    배경

    조선 사람들에게 상투는 성인 남성의 표시이자 예의의 상징이었습니다.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효경』의 가르침에 따라 머리를 자르는 것은 불효로 여겨졌습니다.

    개화파 관료들은 위생에 좋고 활동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단발을 추진했습니다. 을미사변 뒤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혁을 서두르며 이를 법령으로 시행했습니다.

    일본은 1871년 머리 모양을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포고를 내 관리·군인부터 단발이 퍼졌습니다. 서양과 일본에서 짧은 머리는 근대 국가 국민의 모습으로 여겨졌고, 조선 개화파도 이를 따르려 했습니다.

    전개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이 내려졌습니다. 같은 날 고종과 세자가 먼저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어 관리와 군인부터 시작해 백성에게도 단발을 강요했고, 서울 성문과 길목에서 순검이 행인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 상투를 잘릴까 봐 서울 출입을 꺼렸다고 합니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수천 년 굳은 습관을 바꾸기 어렵고 민심이 흔들릴 것이라며 반대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습니다. 지방에서는 단발을 강요하던 관찰사·군수가 의병에게 처단되는 일도 벌어졌는데, 춘천 관찰사 조인승이 그런 예입니다.

    결과와 의미

    단발령은 을미사변에 대한 분노와 합쳐져 전국적인 반발을 불렀고,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을미의병). 1896년 2월 아관파천 뒤 새 정부는 단발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 뜻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단발은 이후 개화와 근대를 상징하는 행동이 되었고, 1900년대에 걸쳐 점차 널리 퍼졌습니다.

    을미의병은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김산의 허위 등 유생이 이끌었고, 유인석 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아관파천 뒤 고종이 의병 해산을 권하는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 해산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1년일본이 단발을 허용하는 포고를 냈습니다.
    2. 1895년 12월 30일 (음력 11월 15일)단발령이 내려지고, 고종과 세자가 먼저 머리를 잘랐습니다.
    3. 1895년 12월 31일 무렵관리·군인부터 단발이 강요되었고, 서울 거리에서 순검이 행인의 상투를 자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4. 1896년 1월 1일태양력과 건양 연호가 시행되었습니다.
    5. 1896년 1월 4일내부가 단발의 이유를 밝히는 고시를 냈습니다.
    6. 1896년 1월~2월유생들이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을미의병).
    7. 1896년 2월 11일아관파천 뒤 새 정부가 단발을 각자의 뜻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 『효경』 개종명의장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단발령 반대론의 가장 큰 근거가 된 구절입니다.
    “이번 단발은 위생에 이익이 되고 일을 할 때 편하기 위하여 우리 성상 폐하께오서 정치 개혁과 국가의 부강함을 도모하고자 솔선하여 표준을 보이심이라.”
    — 내부 고시(1896년 1월 4일)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

    인물

    • 최익현1833~1906

      단발령에 강하게 반대한 대표적 유학자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로 대원군을 물러나게 했고, 강화도 조약에도 도끼를 메고 반대 상소를 올린 위정척사파 유학자입니다. 단발령에 맞서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널리 전합니다. 1906년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유길준1856~1914

      내부대신으로 단발령 시행을 책임졌습니다.

      개화 사상가이자 을미개혁의 핵심 관료입니다. 단발령 강행으로 민심의 큰 반발을 샀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단발령을 어떻게 볼까

    필요한 생활 개혁이었다고 보는 쪽

    상투는 위생과 활동에 불편했고, 군대·경찰 같은 근대 조직을 만들려면 복식과 머리 모양의 정비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실제로 단발은 몇십 년 안에 자연스럽게 퍼졌으니 방향 자체는 시대의 흐름에 맞았다고 평가합니다.

    시기와 방식이 문제였다고 보는 쪽

    왕비가 살해된 지 두 달도 안 되어, 일본의 영향 아래 선 내각이 사람들이 몸의 일부로 여긴 상투를 강제로 자르게 한 것은 민심을 거스른 조치였다고 봅니다. 그 결과 개화 정책 전체가 ‘일본식 강요’로 받아들여지고 의병 봉기와 정권 붕괴를 불렀다고 평가합니다.

    더 알아두기

    단발의 명분
    단발령을 알리는 조칙에는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에 편리하다’는 취지가 담겼습니다. 새 연호 ‘건양’을 쓰기로 한 발표와 같은 시기에 나와, 새 제도를 시작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80 단발령 - 고종이 머리카락을 자르다

    KBS 히스토리 · 1.1만회 ·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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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 시행 과정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이야기 한국사 - 19강 일본이 단발령을 강요한 까닭 _#002

    EBS Learning · 8,019회 ·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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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EBS 이야기 한국사로 일본이 단발령을 강요한 까닭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조선시대] 역사채널e - 민족의 자존심과 경제까지 뒤흔든 단발령

    클래스로그 · 1.8만회 ·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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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을 다룬 EBS 역사채널e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81 면암 최익현,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KBS 히스토리 · 6,721회 ·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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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에 맞선 최익현과 당시 반발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단발령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43회

    법률방송 · 3.1만회 · 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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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단발령 한 가지만 다룬 강연이며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조선시대 단발령의 숨겨진 진실 | 공무원 한국사

    공무원 첫 시작은 공단기, 공단기로 끝! · 67.4만회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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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 실시 배경을 짧게 설명하는 강사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민족을 상징하는 상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문사 · 25.8만회 ·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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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투의 기원과 역사를 다루고 단발령은 끝부분에만 나옵니다.

  5. 1896

    1.1

    사회

    태양력 사용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아 태양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연호도 '건양'으로 바꿨습니다.

    배경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은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이 쓰던 태양력(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외교 문서와 행정 날짜를 국제 기준에 맞추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조선은 청에서 들여온 시헌력을 공식 달력으로 썼습니다. 시헌력은 달의 차고 기움을 기준으로 달을 나누고 해의 움직임에 맞춘 24절기를 함께 적는 태음태양력으로, 조선은 17세기 중반 효종 때부터 이를 써 왔습니다. 달력을 정해 반포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황제의 권한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청의 달력을 버리고 새 달력을 쓰는 것은 청과의 사대 관계를 끊는다는 뜻도 담고 있었습니다.

    이웃 일본은 이미 1873년 1월 1일부터 태양력을 쓰고 있었고, 조선에 와 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 해관(세관)도 양력으로 일했습니다. 조약 문서나 외교 공문에 날짜를 두 가지로 적어야 하는 불편이 컸습니다.

    전개

    정부는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때 새 연호 ‘건양(建陽)’을 정했는데, ‘양력을 세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이 중국 연호 대신 독자 연호를 쓴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그 전에는 ‘개국 기년’을 썼습니다).

    태양력을 쓰겠다는 방침은 1895년 음력 9월 조칙으로 먼저 나왔고,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과 함께 건양 연호를 쓴다는 조칙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음력 1895년 11월 17일이 곧 1896년 1월 1일, 곧 건양 원년 1월 1일이 됐습니다. 음력으로는 아직 한 해가 한 달 반가량 남아 있던 때에 공식 달력은 새해를 맞은 것입니다.

    결과와 의미

    관청의 공문서와 신문 등은 차츰 양력을 쓰게 됐지만, 왕실 제사와 민간의 명절·농사는 오랫동안 음력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연표에서 1895년 이전 사건은 음력 날짜와 양력 날짜가 다르게 전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단발령은 거둬들여졌지만, 양력 사용은 공식 제도로 남았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연호를 ‘광무’로 바꾼 뒤에도 정부는 양력을 기준으로 삼았고, 민간에 배포하는 달력에는 양력과 음력 날짜를 함께 적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653년조선이 청의 시헌력을 공식 달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 1873년 1월 1일일본이 태양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3. 1895년 음력 9월김홍집 내각이 태양력을 쓰겠다는 방침을 조칙으로 밝혔습니다.
    4.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단발령과 함께 새 연호 ‘건양’을 쓴다는 조칙이 내려졌습니다.
    5. 1896년 1월 1일음력 1895년 11월 17일에 해당하는 이날을 건양 원년 1월 1일로 삼아 양력을 시행했습니다.
    6. 1896년 2월 11일아관파천으로 을미개혁 내각이 무너졌지만 양력 사용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7. 1897년 8월연호가 ‘건양’에서 ‘광무’로 바뀌었습니다.
    8. 1912년 1월 1일중화민국이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채택했습니다.

    인물

    • 김홍집1842~1896

      총리대신으로 을미개혁을 이끌며 양력 사용과 건양 연호 제정을 추진했습니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며 『조선책략』을 들여온 온건 개화파 관료입니다. 갑오·을미개혁 때 여러 차례 내각을 이끌었고,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살해됐습니다.

    • 유길준1856~1914

      을미개혁 때 내부대신으로 양력 도입과 단발령 등 제도 개편을 실무에서 추진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개화 지식인으로, 서양 문물을 소개한 『서유견문』을 썼습니다.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7년 돌아와 교육·계몽 활동을 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설날이 두 번 있던 시절
    양력이 공식 달력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음력 설을 쇠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뒤 정부는 오랫동안 양력 설을 권장했고, 음력 설은 1985년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됐다가 1989년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일본은 메이지 유신 뒤인 1873년 태양력으로 바꾸었고, 중국은 청이 무너진 뒤 중화민국이 세워진 1912년 1월 1일부터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삼았습니다. 동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 한국은 일본보다 23년 늦고 중국보다 16년 이르게 양력을 받아들였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음력과 양력연호

    해설·교양 · 강의

    오늘094_태양력 시행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3,537회 ·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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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을미개혁의 태양력 시행을 정면으로 다룬 강의입니다.

  6. 1월

    운동

    을미의병

    1896.1 ~ 1896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유인석·이소응 등이 이끌었고, 아관파천 뒤 고종이 해산을 권하는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 흩어졌습니다.

    배경

    1895년 10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끈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왕비(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뒤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영향 아래 을미개혁을 밀어붙였고,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는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까지 내렸습니다.

    유학을 따르던 선비들에게 국모의 죽음은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었고, 단발은 부모에게 받은 몸을 훼손하는 일이자 오랑캐 풍속을 강요받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사건이 겹치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옛 제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전개

    의병은 1895년 말부터 1896년 초에 걸쳐 경기·강원·충청·경상·전라 등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지도부는 대부분 이름난 유생이었고, 병사는 농민과 포수 등이었습니다.

    유인석은 제천에서 일어나 충주성을 점령하고 친일 관료로 지목된 관찰사를 처단했습니다. 이소응은 춘천에서, 김복한·이설은 홍주에서, 기우만은 장성에서, 허위는 김천에서, 노응규는 진주에서 의병을 이끌었습니다. 의병들은 단발을 강요한 지방관을 처단하고 일본군 수비대·전신선 등을 공격했습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단발령이 사실상 철회되자, 고종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리고 선유사를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의병은 이 무렵 흩어졌고, 유인석 부대는 관군과 맞서다 서간도(만주)로 옮겨 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을미의병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무장한 첫 대규모 의병으로, 이후 을사의병(1905)·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지는 항일 의병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의병 일부는 해산한 뒤에도 활빈당 같은 무장 조직으로 남아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반면 유생 지도부와 농민 병사 사이에는 신분 의식 차이가 있어, 지도부가 해산을 결정하면 부대 전체가 흩어지는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5년 10월 8일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끈 무리가 경복궁 건청궁에 들어가 왕비를 살해했습니다(을미사변).
    2.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단발령이 내려지고, 고종과 왕태자가 먼저 상투를 잘랐습니다. 같은 날 이듬해부터 양력을 쓰고 연호를 ‘건양’으로 한다는 발표도 나왔습니다.
    3. 1896년 1월경기 이천·강원 춘천 등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춘천 의병은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했습니다.
    4. 1896년 2월 7일영월에 있던 유인석이 전국에 격문 「격고팔도열읍」을 돌려 의병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5. 1896년 2월 11일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단발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의병에게 해산을 권했습니다.
    6. 1896년 2월 중순유인석 부대가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습니다.
    7. 1896년 봄~여름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충주·제천에서 밀려난 유인석 부대는 북쪽으로 옮겨 가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지역 의병도 대부분 이 무렵 흩어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國母之讎已是切齒, 慘酷尤甚, 君父之尊又見毁形.”
    — 유인석,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1896)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함이 더욱 심해져 임금께서 머리를 깎이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 참고)

    인물

    • 유인석1842~1915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주성을 점령한 을미의병의 대표 지도자입니다.

      화서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위정척사 유학자입니다. 해산 조칙 뒤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만주로 건너갔으며, 1910년에는 연해주에서 13도 의군 도총재로 추대됐습니다. 말년까지 해외에서 항일 활동을 하다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소응1852~1930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단발을 강요한 관찰사를 처단했습니다.

      강원도 춘천 출신 유학자로, 이항로 학파에 속했습니다. 을미의병이 흩어진 뒤 유인석과 함께 만주로 옮겨 가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을미의병의 성격

    국권 수호 운동으로 보는 쪽

    외국 군대가 왕비를 살해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무기를 든 첫 항일 무장 투쟁이며, 뒤의 의병 전쟁과 독립군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보수적 한계를 짚는 쪽

    지도부가 신분 질서와 옛 제도를 지키는 데 무게를 두어 근대 개혁 자체에 반대했고, 평민 출신 의병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한계가 있었으며, 국왕의 해산 명령에 곧바로 흩어진 점도 그 성격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위정척사란
    ‘바른 것(성리학 질서)을 지키고 사악한 것(서양·일본의 문물과 종교)을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1860년대 통상 반대, 1880년대 개화 반대 상소로 이어져 온 유생들의 사상이 을미의병에서 무장 투쟁으로 나타났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의병

    해설·교양 · 강의

    [항일무장투쟁 1] 을미의병 - 유인석, 이소응, 기우만, 허위 | 황현필

    황현필 한국사 · 10.9만회 ·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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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유인석·이소응 등 을미의병 의병장을 다룬 황현필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19 을미사변과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KBS 히스토리 · 2.9만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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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을미의병 때 활동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친일내각 해산과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자! 을미의병 칼을 잡은 선비들

    역사돋보기 이영 · 6,762회 ·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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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을미의병이 일어난 까닭과 전개를 정리한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2차시│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워니비 · 5만회 ·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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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을미·을사·정미의병을 함께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의병항쟁의 모든것#을미의병부터정미의병까지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2.4만회 ·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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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의병 전체를 정리합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음력과 양력

달의 모양을 기준으로 한 달력(음력)과 해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달력(양력)입니다.

조선이 쓰던 달력은 달의 차고 기움으로 달을 정하고 윤달을 넣어 계절을 맞추는 태음태양력이었습니다. 1896년 1월 1일부터 나라의 공식 달력을 태양력으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1895년 이전 사건은 기록된 음력 날짜와 양력 날짜가 한 달 넘게 차이 납니다. 이 연표는 순서가 뒤섞이지 않도록 모두 양력으로 적고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표시했습니다.

해설

양력과 음력은 어떻게 다른가요?

3분차이 · 8.8만회 ·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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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왜 설날 날짜는 매년 제멋대로일까? 음력은 사실 '달'만 보는 달력이 아니다 (태음태양력의 반전)

안될과학 Unrealscience · 7.4만회 ·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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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임금이 즉위한 해를 기준으로 해를 세는 이름입니다.

조선은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써 왔습니다. 갑오개혁 때 청의 연호 대신 조선 건국 해를 기준으로 한 '개국' 기년을 썼고, 을미개혁 때 '건양'(1896)이라는 독자 연호를 정했습니다.

대한제국은 '광무'(1897~1907), 순종 때 '융희'(1907~1910)를 썼습니다. 스스로 연호를 쓰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해설

연호, 서기(AD), 기원전, 세기 아는척하기 (눈부심주의) #상식史전

두선생의 역사공장 · 4.6만회 ·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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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시호, 묘호, 연호 |'임금님을 부를 때'에 대하여

두선생의 역사공장 · 1.9만회 ·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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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일어나 싸운 민간 군대입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이어진 전통입니다. 근대에는 을미의병(1895, 을미사변·단발령), 을사의병(1905, 을사늑약), 정미의병(1907,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유생이 이끌었지만 을사의병부터 신돌석 같은 평민 의병장이 나왔고, 정미의병 때는 해산된 군인이 합류해 전투력이 커졌습니다. 1909년 남한 대토벌 이후 많은 의병이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이 됐습니다.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2차시│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워니비 · 5만회 ·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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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역덕이슈 오늘 I 22 윤희순, 붓과 총을 든 여성 의병장

KBS 히스토리 · 4.7만회 ·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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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선 '항일 의병 운동' (역사만화 87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11.9만회 ·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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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