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이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는 두 달 넘게 전국과 만주·연해주·미주로 퍼졌습니다.
- 종교계(천도교·기독교·불교)와 학생이 준비하고 농민·노동자·상인까지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는 사망자를 7,509명으로 적었습니다. 총독부 집계는 이보다 훨씬 적어 자료마다 차이가 큽니다.
- 일제는 이후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꿨고, 독립운동을 이끌 조직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배경
10년 가까운 무단 통치 동안 한국인은 헌병 경찰의 감시와 태형,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 같은 차별적 정책을 겪었습니다. 농민·상인·지식인·종교인 등 거의 모든 계층에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1918년 11월 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파리 강화 회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독립 청원의 기회가 왔다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 국외의 대한 독립 선언, 도쿄의 2·8 독립 선언이 잇달았고,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숨지며 독살 소문이 퍼졌습니다.
전개
준비: 천도교의 손병희·최린 등이 1월부터 운동을 구상했고,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계,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와 손을 잡았습니다. 학생 대표들도 따로 시위를 준비하다 합류했습니다. 종교계 인사 33명이 민족 대표로 이름을 올렸습니다(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최남선이 쓴 독립 선언서는 2월 27일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에서 2만여 장 인쇄돼 전국으로 나뉘어 전달됐습니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폭력 충돌을 걱정해 장소를 탑골 공원에서 인사동의 음식점 태화관으로 바꿨습니다. 오후 2시 무렵 참석한 대표 29명이 독립 선언식을 한 뒤 스스로 총독부에 알려 체포됐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날 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원산 등에서도 동시에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확산: 3월 중순부터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졌고, 사람이 모이는 장날에 만세 시위가 벌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헌병 경찰이 총을 쏘며 진압하자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는 등 충돌이 격해졌습니다.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에 시위가 가장 많았고, 5월까지 이어졌습니다. 서간도·북간도의 한인 사회(3월 13일 용정 시위 등), 연해주, 미국 필라델피아(4월 한인 자유 대회)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해 진압했습니다. 제암리 학살처럼 마을 주민을 집단으로 살해한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피해 규모는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1920)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 체포 4만 6,948명으로 적었습니다. 총독부 집계는 사망자를 수백 명으로 훨씬 적게 잡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공개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 정리해 시위 1,692건, 참여 80만~100만 명, 사망 900여 명으로 집계했으며, 실제 규모는 이보다 컸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3·1 운동은 독립을 곧바로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큰 변화를 낳았습니다. 첫째, 독립운동을 이끌 조직의 필요성이 커져 1919년 4월 상하이에 민주 공화제를 내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둘째, 일제는 헌병 경찰을 앞세운 통치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고 보고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방식을 바꿨습니다. 셋째, 만주·연해주에서 무장 독립 전쟁이 본격화했고, 국내에서는 노동·농민·청년·여성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5·4 운동(1919년 5월) 등 아시아의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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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인물
손병희1861~1922
한용운1879~1944
최남선1890~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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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선언서와 공약 3장
- 오늘날 남은 흔적
- 같은 때 주변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