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일제강점기› 문화 통치기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

순종의 장례일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이 신간회로 힘을 합쳤습니다. 원산 총파업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기간
1926.1 ~ 1931.9.17 · 5년 8개월
누가 다스렸나
조선 총독 사이토 → 야마나시 → 사이토
담긴 것
사건 16 · 영상 67 · 영화·드라마 10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4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역사 속 그날들 —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김구

KBS 히스토리 · 3.2만회 · 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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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한인 애국단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다룬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1931 ~ 1932.4.29 · 신간회 해소 → 브나로드 운동

해설·교양 · 강의

1920년대 저항(심화 속성)

최태성 1TV · 25.6만회 · 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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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2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을 한 강에 정리한 강의입니다.

1919.9.2 ~ 1931.5 · 6·10 만세 운동 →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 농성

해설·교양 ·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SBS 달리 · 112.5만회 ·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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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홍범도의 무장 투쟁과 유해 귀환을 함께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1907.8 ~ 1943 · 6·10 만세 운동 → 브나로드 운동

해설·교양 · 다큐

일제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원봉

KBS 히스토리 · 8.3만회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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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원봉의 의열단부터 조선 의용대까지를 다룬 KBS 방송입니다.

1919.11.9 ~ 1938.10.10 · 6·10 만세 운동 → 브나로드 운동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0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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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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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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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영화 · 2017· 공식 영상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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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3.9.1 ~ 1926

관동 대지진 뒤 일본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재판정에 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드라마 · 2011· 제목만

「절정」

배경 1925 ~ 1944.1

KBS 3·1절 특집.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

영화 · 2005· 제목만

「청연」

배경 1925 ~ 1933

일제강점기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영화 · 2016· 공식 영상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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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5 ~ 1945.8.15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삶. 사실과 다른 각색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화 · 2016· 공식 영상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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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창작). 친일 귀족의 저택이 무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넘볼 수 없는 귀족 아가씨를, 끝까지 지킨 남자의 사랑 (결말포함)

라라무비 · 34.9만회 ·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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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7· 제목만

「경성스캔들」

배경 1930 ~ 1938

KBS.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속 독립운동

드라마 · 2017· 공식 영상

「시카고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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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4

tvN. 현생과 1930년대 경성의 독립운동가 전생이 겹치는 판타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다시보는 여운작] 전생을 초월한 운명 시카고타자기 몰아보기 EP.1~16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 정주행 /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22.5만회 ·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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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8· 공식 영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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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30 ~ 1939

1930년대 만주 벌판의 보물 지도 쟁탈전을 그린 활극(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내부자들'에서 손 잘리기 전 손가락 먼저 잘렸던 병헌이 형 (feat. 손가락 귀신ㅋ)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온갖 TMI 썰 풀어 주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23.8만회 ·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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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연표 1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산미 증식 계획 (~1934)

  1. 1926

    6.10

    운동

    6·10 만세 운동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학생들이 서울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측의 준비는 사전에 발각됐지만 학생 조직이 시위를 이어 갔습니다.

    •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힘을 합칠 필요를 느끼게 해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배경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26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3·1 운동이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어났던 것처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인 6월 10일에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은 조선 공산당을 중심으로 대중 운동을 넓히려 했고, 천도교 안에서는 최린 중심의 신파와 거리를 두던 구파가 비타협적인 민족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두 세력은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손을 잡았습니다.

    전개

    조선 공산당의 권오설 등은 천도교 구파의 박래원 등과 손잡고 격문을 인쇄해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6월 초 다른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인쇄물이 발각돼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조선 공산당 2차 검거).

    학생 조직은 따로 준비를 이어 갔습니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등 서울의 전문학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지나는 종로와 동대문 등지에서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제는 3·1 운동의 경험 때문에 군경을 대규모로 배치해 두었고 많은 학생이 붙잡혔습니다.

    계획 쪽은 격문을 수만 장, 많게는 10만 장 가까이 찍어 두었다고 전해집니다(수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6월 10일 오전 8시 30분 무렵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학생들이 먼저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렸고, 이어 관수교·을지로·훈련원·동대문 등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 잇따라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서울 밖 몇몇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뒤따랐습니다.

    결과와 의미

    시위 규모는 3·1 운동에 비해 작았지만, 학생이 민족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준비한 경험은 두 세력이 연대해야 한다는 인식을 키워 이듬해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시위 뒤 학생 관련자들이 재판에 넘겨졌고, 권오설 등 조선 공산당 관련자들은 2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함께 처벌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 4월 25일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1926년 4월 28일송학선이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총독으로 잘못 알고 일본인을 찔렀습니다(금호문 사건).
    3. 1926년 5월조선 공산당의 권오설과 천도교 구파의 박래원 등이 격문을 찍으며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4. 1926년 6월 초다른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격문이 발각돼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5. 1926년 6월 10일 오전장례 행렬이 지나는 종로·관수교·동대문 등에서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6. 1927년 2월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신간회를 세웠습니다.

    사료로 읽기

    “우리의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는 자본제국주의(資本帝國主義) 일본이다.”
    — 6·10 만세 운동 격문(1926)하늘에 사무치는 원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주의 계열이 준비한 격문이라 ‘자본 제국주의’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에 실려 있습니다.

    인물

    • 권오설1897~1930

      조선 공산당 쪽에서 시위 준비를 이끌었습니다.

      경북 안동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로, 고려 공산 청년회 책임 비서를 맡았습니다. 6·10 만세 운동 준비로 체포돼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박래원

      천도교 구파 쪽에서 격문 인쇄를 맡았습니다.

      천도교 청년 운동가로, 권오설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인쇄한 격문이 거사 며칠 전 발각되면서 체포됐습니다.

    • 이병립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소속으로 학생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연희 전문학교 학생으로, 조선 공산당 쪽 계획이 발각된 뒤에도 학생들끼리 준비를 이어 가 6월 10일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 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해설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6.10 만세운동을 아시나요 【1분 보훈 EP.06】

    국가보훈부 · 2.6만회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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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순종 인산일의 6·10 만세 운동을 1분에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65_6·10 만세운동 l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9만회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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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이 6·10 만세 운동의 경과를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다! - 여기, 史(사)적인 여행 6·10만세운동 편

    TV나라사랑 · 1.3만회 ·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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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6·10 만세 운동의 현장을 찾아가는 보훈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함성이 하나로, 대한을 이루다 — 6·10 만세 운동

    국가보훈부 · 16.2만회 ·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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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6·10 만세 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가 만든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4단원 10차시│6·10만세 운동│광주 학생 항일 운동

    워니비 · 3.9만회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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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6·10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함께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7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3.4만회 ·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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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6·10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운동을 묶어 정리하는 교사 강의입니다.

  2. 10.1

    사회

    나운규 「아리랑」 개봉

    나운규가 감독·주연·각본을 맡은 무성 영화 「아리랑」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습니다. 한국인이 만들고 한국인이 주인공인 첫 영화로 꼽힙니다.

    • 1928년까지 2년 넘게 단성사에서 상영되며 15만 명 가까이 봤고, 이듬해 일본에서도 상영됐습니다.
    • 변사의 해설과 함께 상영되던 무성 영화 시대의 작품으로, 필름은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은 기록과 증언으로 전해집니다.

    배경

    1920년대 초 조선에서는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가 만든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만든 극영화는 드물었습니다.

    전개

    나운규는 부산의 조선키네마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주연을 맡아 무성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농촌을 배경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주인공이 마을 처녀를 괴롭히는 악덕 지주의 앞잡이를 낫으로 찌르고 끌려가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습니다. 개봉 첫날 관객이 몰려 경찰 기마대가 동원될 정도였고, 이후 2년 넘게 단성사에서 상영되며 15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아리랑」은 이듬해 일본에서도 상영됐고, 나운규는 이후에도 「풍운아」·「들쥐」 등 여러 작품을 만들며 1920~3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인물이 됐습니다. 다만 필름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신문 기사와 관객의 회고로만 전해집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나운규가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아리랑」을 만들었습니다.
    2. 1926년 10월 1일단성사에서 개봉했습니다.
    3. 1926~1928년2년 넘게 단성사에서 상영되며 15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습니다.
    4. 1927년일본에서도 상영됐습니다.
    5. 1937년나운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물

    • 나운규1902~1937

      「아리랑」의 감독·각본·주연을 모두 맡았습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영화계에 들어와 「아리랑」으로 이름을 알렸고, 짧은 생애 동안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더 알아두기

    제목이 뜻하는 것
    영화 제목이자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노래 「아리랑」은 이 영화를 계기로 더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민요 자체는 그전부터 있었고, 영화가 새로운 가락을 만들었다기보다 영화의 인기가 이 노래를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민족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아리랑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 6.2만회 · 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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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03 「아리랑」과 나운규

    KBS 히스토리 · 9,491회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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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1월

    운동

    정우회 선언

    사회주의 단체 정우회가 민족주의 세력과 손잡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듬해 신간회 결성의 계기가 됐습니다.

    배경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 계열 일부에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권을 얻자는 자치론이 나왔습니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쓴 「민족적 경륜」이 이런 흐름을 보여 준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서로 손잡자는 논의가 싹텄습니다.

    「민족적 경륜」은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로, 조선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의 정치 결사를 만들자고 제안해 일제 지배를 인정하는 자치 운동의 신호라는 반발을 샀습니다. 같은 무렵 일부 민족주의 인사들이 자치 운동 단체 ‘연정회’를 만들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반발 속에 흐지부지됐습니다.

    사회주의 쪽도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상 단체가 파벌로 나뉘어 다퉜고, 1925년 이후 조선 공산당이 거듭 검거되면서 운동의 방향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습니다.

    전개

    1926년 11월 사회주의 단체 정우회는 선언을 발표해, 사회주의 운동이 사상 단체 중심의 파벌 싸움을 그만두고 정치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 타협하지 않는 쪽과 적극적으로 제휴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정우회는 1926년 화요회·북풍회 계열 등이 모여 만든 사회주의 사상 단체였습니다. 선언은 1926년 11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렸는데, 파벌 투쟁을 청산하고 사상 단체를 통일할 것, 경제 투쟁에만 머물지 말고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것,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할 것 등을 내걸었습니다. 선언을 주도한 안광천 등은 뒤에 조선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우회 선언은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 협동 전선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신호였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조선 민흥회 논의와 맞물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족주의 쪽에서도 1926년 여름 조선 민흥회가 발기되며 협동 전선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우회는 신간회가 만들어진 뒤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4년 1월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동아일보에 연재돼 자치론 논란이 일었습니다.
    2. 1926년 6월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구파가 함께 6·10 만세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3. 1926년 여름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선 민흥회가 발기됐습니다.
    4. 1926년 11월 17일정우회 선언이 조선일보에 실렸습니다.
    5. 1927년 1월신간회 발기인들이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6. 1927년 2월 15일서울에서 신간회가 창립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한편, 우리와 과정적 동맹자가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것이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인 이익을 위해서도 이전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
    — 정우회 선언(『조선일보』 1926년 11월 17일)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의 번역문입니다. ‘타락한 형태’는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물

    • 안광천1897~?

      정우회 간부로 선언을 주도했습니다.

      경남 김해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로, 1926년 정우회 상무 집행 위원이 됐고 조선 공산당의 선전 책임자를 거쳐 당수를 맡았습니다. 1928년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고, 1929년 베이징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만들고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 뒤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더 알아두기

    자치론과 비타협 노선
    자치론은 독립 대신 식민지 의회 설치 같은 자치를 먼저 얻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독립 외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쪽을 비타협적 민족주의라고 부릅니다. 신간회 강령의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한다’는 이 자치론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조선민흥회와 정우회선언의 배경은?

    EBSi · 2,821회 ·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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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 강사가 정우회 선언의 배경을 설명하는 EBS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강쌤TV](한국사) 067. 신간회

    역사플레이 · 792회 ·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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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신간회 강의 안에서 정우회 선언을 한 항목으로 설명합니다.

  4. 11.30

    사회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방송 시작

    1926.11.30 ~ 1927.2.16 · 2개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설립 허가를 받고 시험 방송을 거쳐 1927년 2월 16일 한국 최초의 라디오 정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호출 부호는 JODK, 출력 1kW였습니다.

    • 초기에는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 비율이 3대 1로 일본어가 많았는데, 청취자 불만이 이어지자 한국어 방송과 판소리 등 우리 소리 프로그램을 늘려 갔습니다.
    • 일본 제국 안에서는 도쿄·오사카·나고야에 이은 네 번째 방송국이었습니다.

    배경

    1920년대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라디오 정규 방송이 시작됐습니다. 조선에서도 신문뿐 아니라 소리로 소식과 오락을 전하는 매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총독부도 통치에 방송을 활용하려 했습니다.

    전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1926년 11월 30일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1927년 1월 20일 시험 방송을 거쳐 2월 16일 본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호출 부호는 JODK, 출력은 1kW였습니다.

    초기 방송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3대 1 비율로 내보내 일본어 방송이 훨씬 많았습니다. 한국인 청취자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한국어 방송 시간을 늘리고 판소리·창 같은 우리 소리 프로그램도 편성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미국에서 1920년 세계 최초의 라디오 정규 방송이 시작된 지 7년 만이었고, 일본 제국 안에서는 도쿄·오사카·나고야에 이은 네 번째 방송국이었습니다. 1933년에는 한국어와 일본어 방송을 아예 채널로 나눈 이중 방송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 11월 30일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이 허가됐습니다.
    2. 1927년 1월 20일시험 방송이 시작됐습니다.
    3. 1927년 2월 16일본방송이 시작됐습니다.
    4. 1933년한국어·일본어 채널을 따로 둔 이중 방송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5. 1935년부산 등 지방에도 방송국이 늘어났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박광일의 걸어서 역사속으로] 경성방송국은 왜 만들어졌나? |KBS 200905 방송

    KBS KONG · 805회 ·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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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교양 · 해설

    [잼역사]한국 최초의 라디오 소리, 1927년 경성방송국 JODK의 첫 전파

    잼역사 · 223회 ·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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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2.28

    운동

    나석주 의거

    의열단원 나석주가 수탈의 상징인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순국했습니다.

    배경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세워진 국책 회사로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하고 일본인 이주를 도왔으며, 조선 식산 은행은 산업 자금을 통제하는 총독부 쪽 금융 기관이었습니다. 두 곳은 한국인에게 경제 수탈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국내에서 모은 자금으로 이들 기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중국에 있던 나석주가 이를 맡았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20년대에 조선에서 가장 큰 지주가 돼 소작인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받았고, 1918년 세워진 조선 식산 은행은 농공업 자금을 쥐고 일본인 기업에 돈을 댔습니다.

    김창숙은 1925년 몰래 국내로 들어와 유림들에게서 자금을 모았지만 목표에 크게 못 미쳤고, 모금 사실이 드러나 많은 유림이 검거됐습니다(제2차 유림단 사건). 그가 중국으로 가져간 자금이 이 거사에 쓰였습니다.

    전개

    나석주는 1926년 12월 중국인으로 꾸며 인천으로 들어온 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2월 28일 오후 먼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 이어 동양 척식 주식회사 경성 지점에 들어가 사원들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도 터지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나석주는 뒤쫓아 온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경찰관 등을 쓰러뜨렸고, 포위되자 스스로 총을 쏴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수탈 기관을 직접 공격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줬습니다. 김창숙은 이듬해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고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 의열단은 단원들을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보내는 등 개별 폭탄 투쟁에서 조직적인 무장 투쟁 준비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나석주의 거사는 그 전환기에 국내에서 벌어진 의열 투쟁이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8년 12월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세워졌습니다.
    2. 1918년조선 식산 은행이 세워졌습니다.
    3. 1925년김창숙이 국내에 들어와 거사 자금을 모았고, 뒤에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4. 1926년 12월 말나석주가 중국인으로 꾸미고 배편으로 인천에 들어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5. 1926년 12월 28일 오후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습니다.
    6. 같은 날동양 척식 주식회사 경성 지점에서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진 뒤, 거리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7. 1927년 6월김창숙이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습니다.
    8. 1962년나석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인물

    • 나석주1892~1926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3·1 운동 뒤 국내에서 무장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 군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임시 정부 경무국에서 일하다 의열단에 들어갔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 김창숙1879~1962

      거사 자금을 마련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경북 성주 출신 유학자로,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낸 파리 장서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광복 뒤 성균관 대학교를 세우고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반대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 나석주 편

    국가보훈부 · 2.1만회 ·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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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나석주의 동척·식산은행 의거를 소개한 국가보훈부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나의 독립영웅 ㅣ 85 나석주 (김영철)

    KBS 히스토리 · 1만회 ·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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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나석주 의거를 소개한 KBS 짧은 인물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41_[이벤트종료] '나석주 의사의 동척, 식산은행 투탄 의거'의 날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6,234회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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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 강사가 나석주의 동척·식산은행 의거를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나석주

    국가보훈부 · 7,949회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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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국가보훈부가 만든 짧은 영상으로 동척 투탄 과정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일본의 식민지배에 경종을 울린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 폭탄 의거

    독립기념관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 678회 ·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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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독립기념관이 나석주 의사의 폭탄 의거를 소개한 공식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은] 나석주 의사 폭탄 투척 의거 (1926.12.28.) / KBS 2021.12.28.

    KBS News · 1,538회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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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의거 날짜에 맞춰 사건을 짧게 정리한 KBS 뉴스 꼭지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tvndongne 식민지 수탈 은행에 폭탄을 던진 영웅, 나석주. 170221 EP.11

    tvN Joy · 1,503회 ·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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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tvN 교양 예능에서 나석주의 동척·식산은행 투탄을 다룬 짧은 클립입니다.

    창작 · 드라마

    [야인시대]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열단 나석주요"│Ep.5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38.1만회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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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드라마 장면이라 김두한 이야기와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6. 1927

    2.15

    운동

    신간회

    1927.2.15 ~ 1931.5 · 4년 3개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만든 일제강점기 최대의 합법 민족 운동 단체입니다. 회장은 이상재였고 전국에 지회를 뒀습니다.

    • 같은 해 여성 단체들도 힘을 합쳐 근우회를 만들었습니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진상 조사단을 보내고 민중 대회를 열려다 간부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이후 노선 갈등 끝에 1931년 해소됐습니다.

    배경

    1920년대 중반 민족 운동은 자치론을 둘러싸고 흔들렸고, 사회주의 계열은 파벌 다툼과 검거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6·10 만세 운동을 함께 준비한 경험과 1926년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하나의 조직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은 제1차 국공 합작도 영향을 줬습니다.

    전개

    1927년 2월 15일 서울 YMCA 회관에서 신간회 창립 대회가 열렸습니다.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권동진이 뽑혔고 홍명희·안재홍·신석우 등이 참여했습니다.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며, 기회주의를 모두 부인한다는 세 가지였습니다.

    신간회는 전국과 일본에 지회를 세워 1930년 무렵 지회 120~140여 곳, 회원 3만~4만 명 규모로 커졌습니다. 강연회를 열고 한국인 본위의 교육, 착취 기관 철폐, 언론·집회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원산 총파업과 소작 쟁의를 지원했습니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보내고, 12월 서울에서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 대회를 열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전에 알려져 허헌·홍명희·조병옥 등 간부 40여 명이 체포됐습니다(민중 대회 사건).

    결과와 의미

    민중 대회 사건 뒤 김병로 등 새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활동이 온건해졌고, 사회주의 계열은 이를 타협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1931년 5월 해소가 결의됐습니다. 4년 남짓 활동했지만 일제강점기 최대의 합법 민족 운동 단체로, 좌우가 힘을 합친 드문 사례로 평가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 11월정우회 선언으로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밝혔습니다.
    2. 1927년 1월신간회 발기인들이 세 가지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3. 1927년 2월 15일서울 YMCA 회관에서 창립 대회가 열려 이상재를 회장으로 뽑았습니다.
    4. 1927년 3월 29일초대 회장 이상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5. 1929년 6월전국 대회가 금지되자 여러 지회가 대표를 묶어 보내는 복대표 대회를 열고 허헌을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뽑았습니다.
    6. 1929년 11월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7. 1929년 12월민중 대회를 준비하다 허헌·홍명희 등 간부 40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8. 1930년김병로를 중심으로 새 지도부가 들어섰습니다.
    9. 1931년 5월 16일전체 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一. 우리는 政治的, 經濟的 覺醒을 促進함 一. 우리는 團結을 鞏固히 함 一. 우리는 機會主義를 一切 否認함”
    — 신간회 강령(1927년 1월 발표)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인물

    • 이상재1850~1927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민족 운동의 원로로 여러 세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창립 한 달여 뒤인 1927년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홍명희1888~1968

      창립을 주도했고 민중 대회 사건으로 투옥됐습니다.

      충북 괴산 출신 문인으로 소설 『임꺽정』을 썼습니다. 광복 뒤 1948년 남북 협상 때 북으로 가 북한 부수상 등을 지냈습니다.

    • 안재홍1891~1965

      총무간사 등으로 창립과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조선일보 주필·사장을 지낸 언론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아홉 차례 옥고를 치렀고, 광복 뒤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냈으며 한국 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신간회가 해소된 까닭

    사회주의 쪽의 노선 변화를 중시하는 쪽

    19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와 이후 민족주의 세력과 거리를 두라는 방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이 해소를 밀어붙였다고 봅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이 국내 협동 전선을 깼다는 해석입니다.

    지도부의 온건화와 탄압을 중시하는 쪽

    민중 대회 사건으로 비타협적 지도부가 투옥된 뒤 새 지도부가 합법 활동에 머물며 자치론 쪽과 가까워졌다는 비판이 커졌고, 일제의 감시로 집회도 어려워졌다고 봅니다. 지회 회원들 사이에서 해소 요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더 알아두기

    강령 문구가 누그러진 사연
    우리역사넷 해설에 따르면 강령 초안은 ‘조선 민족으로서 정치·경제의 구경적(궁극적) 해결을 도모한다’처럼 더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신문사가 총독부의 압수 처분을 걱정하자 발기인들은 ‘민족’이라는 말을 빼고 ‘구경적 해결’을 ‘각성 촉진’으로, ‘타협주의’를 ‘기회주의’로 바꿨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중국에서는 1924년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은 제1차 국공 합작이 이어지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깨졌습니다. 신간회가 창립된 1927년 초는 중국의 좌우 합작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강의

    [#한국사능력검정] 설민석 - ㄹㅇ 10분이면 가능! 신간회 편

    설민석 Seol Min Seok · 20.4만회 ·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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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설민석이 신간회 결성 배경과 활동, 해소를 한 편으로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큰별쌤의 오늘 — 신간회 창립

    최태성 2TV · 2.2만회 ·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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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6·10 만세 운동 이후 신간회 창립 과정을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만화

    신간회 | 핵심 in 한국사

    EBSi · 1.4만회 ·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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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EBSi 애니메이션으로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을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능검대비#시험에 무조건 나오는 단체 신간회에 대한 모든것(7분 순삭ver.)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5.1만회 ·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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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을 7분에 정리한 교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중3역사②[6-2~2]국민 국가의 수립(2)(feat.실력 양성운동,학생 운동,신간회,무장 독립 투쟁)-빡공시대 람보쌤 4시간의 기적

    빡공시대TV · 14.1만회 · 4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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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1920년대 민족 운동 전체를 훑는 긴 강의라 신간회는 일부입니다.

  7. 5월

    경제

    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

    일본의 신흥 재벌 일본 질소 비료 주식회사가 함경남도 흥남에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부전강 수력 발전소의 전기로 황산암모늄 비료를 만드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화학 공장이었습니다.

    • 1930년대 함경도 일대에 발전소·제련소가 잇따라 들어서며 북부 지방이 중화학 공업 지대로 바뀌었습니다.
    • 노동자 다수는 한국인이었지만 관리직과 기술직은 일본인이 차지했고 임금 차별이 있었습니다.

    배경

    화학 비료 공업은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합니다. 일본의 신흥 재벌 노구치 시타가우가 이끌던 일본 질소 비료 주식회사는 일본 안에서 전력 공급원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수력 자원이 풍부한 식민지 조선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전개

    일질은 함경남도 부전강에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짓고, 1927년 5월 자본금 1,000만 엔으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를 세워 흥남에 공장을 지었습니다. 부전강 발전소의 전기는 흥남 공장으로 보내져 황산암모늄 비료를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흥남 공장은 완공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화학 공장으로 꼽혔고, 이후 장진강·허천강 등 인근에 발전소가 잇따라 들어서며 함경도 일대가 중화학 공업 지대로 바뀌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흥남 일대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공업화를 상징하는 곳이 됐지만, 노동자 다수는 한국인이면서도 관리직·기술직은 일본인이 차지했고 임금 차별이 뚜렷했습니다. 광복 뒤 이 시설들은 북한 지역에 남아 북한 화학 공업의 기반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일질이 부전강 수력 발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2. 1927년 5월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가 설립됐습니다.
    3. 1920년대 말흥남 공장이 완공돼 비료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4. 1930년대장진강·허천강 등 인근에 발전소가 잇따라 들어섰습니다.
    5. 1945년 광복 뒤흥남의 시설은 북한 지역에 남아 북한 화학 공업의 기반이 됐습니다.

    인물

    • 노구치 시타가우1873~1944

      일본 질소 비료 주식회사를 이끌며 흥남에 비료 공장을 세웠습니다.

      일본의 전기·화학 재벌 '일질 콘체른'의 창업자입니다. 수력 발전과 화학 공업을 결합한 사업 모델로 식민지 조선과 만주에 대규모 투자를 벌였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설·교양 · 해설

    일본인이 만든 공장이 한국 농업을 살렸다 - 노구치 시타가우 1편 [ 김용삼 대기자 | 기업가 열전: 영웅시대 ]

    펜앤경제TV · 1.3만회 · 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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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5.27

    운동

    근우회 결성

    1927.5.27 ~ 1931 · 4년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함께 만든 여성 운동 단체로, 신간회의 자매 단체 역할을 했습니다. 여성 차별 철폐와 교육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배경

    1920년대 여성 운동은 기독교계 여성 단체와 사회주의 계열 여성 단체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신간회 결성 논의가 진행되자 여성계에서도 두 흐름이 하나로 모이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1922년 김활란·유각경 등이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YWCA)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1924년 조선 여성 동우회가 생겨 여성 해방을 계급 해방과 함께 내세웠습니다.

    전개

    1927년 5월 27일 서울에서 근우회가 창립됐습니다. ‘무궁화 자매’라는 뜻의 이름으로, 김활란·유각경 같은 기독교계 인사와 정칠성·정종명·황신덕 같은 사회주의 계열 인사가 함께했습니다. 여성 차별 철폐, 조혼 폐지와 결혼의 자유, 여성 노동자 보호 등을 내걸었고 기관지 『근우』를 펴냈습니다.

    전국과 일본·만주 등에 지회를 두고 강연회와 야학을 열었으며,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 시위를 돕기도 했습니다.

    창립총회는 1927년 5월 27일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행동 강령으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와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와 공창 폐지, 농민 여성의 경제적 이익 옹호, 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위험한 노동과 야간 노동 폐지 등을 내걸었습니다.

    1930년 1월 서울의 여러 여학교 학생들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호응해 만세 시위를 벌이자, 일제는 근우회 간부 허정숙 등이 이를 뒤에서 이끌었다며 체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근우회는 신간회와 함께 좌우 협동의 상징이었지만, 신간회가 해소된 1931년 무렵 내부 노선 갈등과 탄압으로 활동을 멈췄습니다. 여성 문제를 민족 문제와 함께 다룬 최초의 전국적 여성 단체로 평가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2년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YWCA)가 만들어졌습니다.
    2. 1924년사회주의 계열 여성 단체인 조선 여성 동우회가 생겼습니다.
    3. 1927년 2월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신간회를 세웠습니다.
    4. 1927년 5월 27일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강당에서 근우회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5. 1929년 11월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여학생 시위를 지원했습니다.
    6. 1930년 1월서울 여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로 허정숙 등 근우회 간부가 체포됐습니다.
    7. 1931년신간회 해소와 내부 갈등 속에 근우회도 활동을 멈췄습니다.

    인물

    • 김활란1899~1970

      창립에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입니다.

      이화여전 교수·교장을 지낸 교육자로, 광복 뒤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냈습니다. 일제 말 여성 징병·학병을 권하는 강연과 글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습니다.

    • 정칠성1897~?

      사회주의 계열 여성 운동가로 근우회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대구 출신으로 기생 생활을 하다 3·1 운동 뒤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광복 뒤 월북했습니다.

    • 허정숙1902~1991

      근우회 간부로 1930년 서울 여학생 시위를 이끈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변호사 허헌의 딸로, 조선 여성 동우회를 만드는 등 사회주의 여성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30년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활동에 참여했고, 광복 뒤 북한에서 문화선전상 등을 지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해설

    [서울역사박물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단체 '근우회'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 3,618회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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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서울역사박물관이 근우회 본부 터와 활동을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근우회 -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이달의 독립운동가ibohun · 6,041회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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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근우회 창립과 활동을 소개한 국가보훈처 기자단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근현대사] 신간회, 근우회 (27) |한국사 암기법 | 공무원 단기 공부법|한능검

    단호박암기한국사V 한국사 암기법 · 1,168회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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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2%추천 ★★★★★

    신간회와 근우회를 묶어 암기용으로 짧게 정리한 강의입니다.

  9. 1928

    경제

    은행령 개정과 조선 은행 합병

    1928 ~ 1930 · 2년

    총독부가 은행령을 고쳐 자본금이 적은 은행의 합병을 밀어붙였습니다. 1920년 21개였던 일반 은행은 1930년 13개로 줄었습니다.

    • 경영이 어려워진 일본계 은행은 주로 조선상업은행에 합쳐졌고, 한국인이 세운 은행들도 이 시기 정리 대상이 됐습니다.
    • 1928년에는 저축은행령이 따로 제정돼 이듬해 조선저축은행이 세워졌습니다.

    배경

    1920년대 조선에는 일본계·한국계를 합쳐 스무 개 안팎의 일반 은행이 있었지만 대부분 자본금이 작았습니다. 1920년대 후반 불경기로 부실해진 은행이 늘어나자 총독부는 은행의 몸집을 키워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전개

    총독부는 1928년 저축은행령을 따로 만들어 이듬해 조선저축은행을 세웠고, 1929년에는 은행령을 고쳐 자본금이 적은 은행을 큰 은행에 합치도록 압박했습니다. 경영이 어려워진 일본계 지방 은행들은 주로 조선상업은행에 흡수됐습니다.

    한국인이 세운 은행들도 이 시기 정리 대상이 됐습니다. 1920년 21개였던 일반 은행 수는 1925년 16개, 1930년 13개로 줄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조선식산은행 같은 몇몇 큰 은행에 예금과 대출이 집중되는 구조가 굳어졌습니다. 이는 이후 전시 통제 경제에서 총독부가 금융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0년일반 은행이 21개에 이르렀습니다.
    2. 1928년저축은행령이 제정됐습니다.
    3. 1929년조선저축은행이 설립되고 은행령이 개정됐습니다.
    4. 1930년일반 은행이 13개로 줄었습니다.
  10. 1929

    1월

    운동

    원산 총파업

    1929.1 ~ 1929.4 · 3개월

    영국인이 운영하는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폭행한 일을 계기로 원산 노동자들이 석 달 넘게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국내외에서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배경

    원산은 함경남도의 항구 도시로 노동자가 많았고, 1920년대에 원산 노동 연합회가 조직돼 부두·운송·공장 노동자들을 묶고 있었습니다.

    1928년 9월 원산 근처 문평의 라이징 선 석유 회사 제유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동자들은 감독 해고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했고, 회사는 석 달 안에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원산 노동 연합회는 조합원을 위한 소비 조합과 노동 병원, 야학을 운영할 만큼 조직이 탄탄했습니다. 파업이 일어난 라이징 선 석유 회사는 영국계 석유 회사 셸의 자회사였고, 사건을 일으킨 감독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전개

    1929년 1월 문평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대체 인력을 들였습니다. 원산 노동 연합회는 산하 노조에 동조 파업을 지시했고, 부두·운송 노동자 등 2천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번졌습니다.

    회사와 원산 상업 회의소는 파업 노동자 고용을 막고, 일제 경찰은 간부를 체포하며 어용 단체를 만들어 파업을 흔들었습니다. 그래도 국내 각지 노동·농민 단체가 격려금과 식량을 보냈고, 일본·중국·프랑스·소련 등의 노동 단체도 격려 전보를 보냈습니다.

    1929년 1월 13~14일 문평 제유 공장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에 들어갔고, 22~23일 원산 노동 연합회는 산하 24개 노조 약 2,200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결의하고 실행했습니다. 2월 19일에는 원산 상업 회의소 쪽이 어용 노조인 함남 노동회를 세워 대체 인력을 공급했습니다.

    위원장 김경식이 체포된 뒤에는 김태영이 직무를 대신하며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4월 3일 경찰이 대규모 검거에 나서 지도부가 붙잡혔고, 파업은 4월 6일 끝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파업은 약 넉 달 만인 1929년 4월 초 요구를 이루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로 꼽히며, 이후 노동 운동이 합법 노조에서 비밀리에 조직되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으로 옮겨 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8년 9월문평 라이징 선 제유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때린 일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2. 1928년 가을회사가 석 달 안에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파업이 끝났습니다.
    3. 1929년 1월 13~14일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문평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했습니다.
    4. 1929년 1월 22~23일원산 노동 연합회 산하 24개 노조, 약 2,200명이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5. 1929년 2월 19일원산 상업 회의소 쪽이 어용 노조 함남 노동회를 세웠습니다.
    6. 1929년 4월 3일경찰의 대규모 검거로 파업 지도부가 체포됐습니다.
    7. 1929년 4월 6일약 넉 달 만에 총파업이 끝났습니다.

    인물

    • 김경식?~?

      원산 노동 연합회 위원장으로 총파업을 이끌었습니다.

      파업 도중 체포됐습니다. 생애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김태영

      위원장이 체포된 뒤 원산 노동 연합회 위원장 직무를 대신했습니다.

      변호사 출신으로, 파업이 길어지자 회사와 당국을 상대로 중재를 요청하며 파업을 이끌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96_원산 총파업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5만회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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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원산 총파업을 정면으로 설명하는 짧은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최태성의 365 한국사 일력] 매일을 바꾸는 역사의 힘_1월 13일, 원산 총파업

    최태성 2TV · 1,783회 ·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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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이 원산 총파업의 경과와 의미를 강연으로 풀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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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1 한국사] 4단원 12차시│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워니비 · 3.7만회 ·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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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노동·농민 운동 속에서 원산 총파업을 짚습니다.

  11. 11.3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11.3 ~ 1930.3 · 4개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로 충돌이 벌어졌고,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로 번졌습니다. 이듬해 봄까지 전국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꼽힙니다. 11월 3일은 지금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입니다.

    배경

    1920년대 후반 학생들은 식민지 차별 교육에 반대해 동맹 휴학을 자주 벌였고, 광주에서는 성진회 같은 학생 비밀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통학 열차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다툼도 잦았습니다.

    광주에서는 1926년 11월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비밀 독서 모임 성진회를 만들었고, 성진회가 해산한 뒤에도 학교별 독서회가 이어졌습니다. 이들이 뒤에 시위를 조직하는 중심이 됐습니다.

    전개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고보 한국인 여학생들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희롱했고, 이를 본 광주고보 학생 박준채 등과 일본인 학생들이 충돌했습니다.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든다는 불만이 커졌습니다.

    11월 3일 광주에서 두 나라 학생들이 다시 크게 충돌했고, 한국인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11월 12일에도 2차 시위가 이어졌고,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 대거 체포하자 소식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12월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학생들이 시위와 동맹 휴학에 나섰고, 이듬해 봄까지 만주·일본의 한인 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보내고 민중 대회를 계획했습니다.

    11월 3일은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일본의 명치절이었고, 음력으로는 10월 3일 개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광주역 부근에서 두 나라 학생들이 충돌한 뒤, 한국인 학생들은 광주 시내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흔히 전국 194개 학교,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꼽힙니다. 많은 학생이 퇴학·정학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렀습니다.

    당국의 처벌도 무거웠습니다. 흔히 퇴학 582명, 무기 정학 2,330명에 이르는 학생이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1930년 1월 여학생들이 벌인 만세 시위도 이 운동의 연장이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6년 11월광주 학생들이 비밀 독서 모임 성진회를 만들었습니다.
    2. 1929년 10월 30일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들을 희롱한 일로 두 나라 학생들이 충돌했습니다.
    3. 1929년 11월 3일광주에서 두 나라 학생들이 크게 충돌했고, 한국인 학생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습니다.
    4. 1929년 11월 12일광주에서 2차 시위가 벌어졌고, 일제는 한국인 학생들을 대거 체포했습니다.
    5. 1929년 12월서울의 학생들이 시위와 동맹 휴학에 나서며 운동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신간회의 민중 대회 계획이 발각됐습니다.
    6. 1930년 1월서울의 여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7. 1930년 봄만주·일본의 한인 학생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운동이 잦아들었습니다.

    사료로 읽기

    “장엄한 학생 대중아!!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자! 그리고 궐기하자, 싸우자, 강력하게 싸우자!!”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뿌려진 격문(1929년 11월)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에 실린 격문 첫머리입니다. 뒤이어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를 확립하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자’ 등의 구호가 이어집니다.

    인물

    • 박준채1914~2001

      나주역에서 누나 등을 희롱한 일본인 학생과 맞섰습니다.

      당시 광주고보 학생으로, 이 일로 퇴학당했습니다. 광복 뒤 교수로 일했습니다.

    • 장재성1908~1950

      광주 학생 독서회 중앙부를 이끌며 11월 3일 이후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광주고보를 다니며 성진회를 만든 학생 운동가로, 일본 유학 중 돌아와 독서회를 이끌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광복 뒤 좌익 활동으로 투옥됐다가 한국 전쟁 초기에 처형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
    11월 3일은 1953년 ‘학생의 날’로 정해졌다가 유신 시기 폐지됐고, 1984년 되살아났습니다. 2006년 이름이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로 바뀌었습니다. 광주에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별별 역사 기차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KBS Kids · 15.1만회 ·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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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과 확산을 어린이용으로 설명합니다.

    1929.11.3 ~ 1930.3 · 어린이 눈높이 강의

    해설·교양 · 해설

    당신이 몰랐던 '11월 3일' 그 날

    국가보훈부 · 7.6만회 ·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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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부가 통학 열차 충돌에서 전국 시위까지 과정을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동맹 휴교까지 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낸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이야기│#어쩌다어른 #Diggle

    tvN STORY 티비엔 스토리 · 16.2만회 ·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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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어른에서 최태성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강연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학생독립운동기념일 - 1929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있었던 일

    EBS · 13.6만회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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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다큐가 나주역 충돌 장면부터 운동의 시작을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예능

    최태성 강사 #08 | '학생의 날'이 만들어진 계기는? 큰별쌤이 말하는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항일운동 | #어쩌다어른 #사피엔스

    사피엔스 스튜디오 · 5.2만회 · 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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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어른에서 최태성이 학생 항일 운동과 학생의 날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통학 기차안 싸움에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킨 독립운동가 장재성

    광주MBC · 1.7만회 ·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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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MBC가 운동을 이끈 장재성과 성진회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해설·교양 · 만화

    광주학생독립운동 애니메이션 - 민국이와 외쳐요

    gsim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1.9만회 ·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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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만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학생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학생 항일 운동' (역사만화 95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7.4만회 ·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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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함께 그린 만화입니다.

  12. 1930

    경제

    세계 대공황과 쌀값 폭락

    1930 ~ 1931 · 1년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크게 떨어져,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수출에 기대던 조선 농촌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 1931년 총독부 조사로 농가 부채 총액이 약 5억 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조선 전체 경작지 가격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 쌀값이 떨어지자 지주들이 소작 조건을 더 불리하게 바꾸면서 1929~30년 한 해 동안 소작권을 잃거나 바뀐 사례가 24만 건 가까이 났습니다.

    배경

    1929년 10월 미국 뉴욕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곧 전 세계 농산물 가격을 끌어내렸습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쌀 수출에 크게 기대고 있던 조선 농촌 경제는 이 충격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전개

    1910년 물가를 100으로 볼 때 1920년대 250 안팎이던 물가 지수는 1931년 150까지 떨어졌습니다. 쌀값이 떨어지자 지주들은 손해를 줄이려 소작 조건을 더 불리하게 바꾸거나 소작인을 교체했고, 1929~30년 한 해 동안 소작권이 바뀐 사례가 24만 건 가까이 났습니다.

    1931년 총독부 조사로 농가 부채 총액은 약 5억 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조선 전체 경작지 가격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땅을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 도시 빈민이 되는 농민이 늘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농촌 경제가 파탄에 가까워지자 총독부는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벌여 민심을 달래려 했고, 소작 쟁의를 억누르기 위한 소작 조정령·농지령도 이 무렵 잇따라 마련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9년 10월미국에서 대공황이 시작됐습니다.
    2. 1930년쌀값 폭락이 조선 농촌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3. 1929~1930년소작권이 바뀐 사례가 24만 건 가까이 났습니다.
    4. 1931년총독부 조사로 농가 부채가 약 5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 1932년총독부가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29년 미국 대공황과 조선 쌀값

    JHL · 51회 ·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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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931

    5.16

    운동

    신간회 해소

    민중 대회 사건으로 지도부가 체포된 뒤 노선 갈등이 커졌고, 사회주의 계열의 해소론 속에 전체 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됐습니다.

    배경

    1929년 12월 민중 대회 사건으로 허헌·홍명희 등 비타협적 지도부가 투옥되자, 1930년 김병로를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가 들어섰습니다. 새 지도부는 합법 테두리 안의 활동을 중시했고, 사회주의 계열과 일부 지회는 이를 타협적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에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이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보다 노동자·농민을 직접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졌습니다.

    일제는 신간회가 전국 대회를 여는 것을 계속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29년에는 여러 지회를 묶어 대표를 뽑는 복대표 대회로 대회를 대신해야 했고, 창립 대회 뒤 처음 허가된 전체 대회가 바로 해소를 결의한 1931년 대회였습니다.

    전개

    1930년 말 부산 지회 등 여러 지회에서 해소론이 나왔습니다. 신간회가 소부르주아 중심 단체로 변해 노동자·농민의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반대하는 쪽은 해소하면 합법적인 민족 운동 공간 자체가 사라진다고 맞섰습니다.

    1931년 5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전체 대회에서 해소안이 가결됐습니다. 일제는 이 대회를 허가했는데, 신간회가 스스로 해체하도록 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해소를 주장한 쪽은 신간회를 그냥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조직 속으로 녹여 새롭게 발전시킨다는 뜻에서 ‘해소’라는 말을 썼습니다. 반대하는 쪽은 대신할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해소는 곧 해체이고,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만 잃게 된다고 봤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간회 해소 뒤 국내에는 좌우를 아우르는 합법적 민족 운동 단체가 다시 생기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은 비합법 노동조합·농민조합 운동으로, 민족주의 계열 일부는 문화 운동이나 타협 쪽으로 흩어졌습니다.

    해소 결의 뒤 이후 활동을 논의하려는 모임은 경찰이 막았고, 신간회는 사실상 해체로 끝났습니다. 자매 단체였던 근우회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멈췄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8년 12월코민테른이 12월 테제를 발표해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농민 조직을 우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2. 1929년 6월복대표 대회에서 허헌이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뽑혔습니다.
    3. 1929년 12월민중 대회 사건으로 허헌·홍명희 등 지도부가 체포됐습니다.
    4. 1930년김병로를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가 들어섰습니다.
    5. 1930년 말부산 지회 등에서 해소론이 나왔습니다.
    6. 1931년 5월 16일서울에서 열린 전체 대회에서 해소안이 가결됐습니다.
    7. 1931년자매 단체인 근우회도 활동을 멈췄습니다.

    인물

    • 김병로1887~1964

      민중 대회 사건 뒤 중앙 집행 위원장을 맡아 신간회를 이끌었습니다.

      전북 순창 출신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많이 맡았습니다. 광복 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습니다.

    • 허헌1885~1951

      1929년 중앙 집행 위원장이 됐고, 민중 대회를 준비하다 체포됐습니다.

      함경북도 출신 변호사로 독립운동가 변론에 앞장섰습니다. 광복 뒤 남조선 노동당 위원장을 지냈고, 월북해 북한 최고 인민 회의 의장 등을 지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강의

    (근현대사)신간회

    쮸아빠의역사수업 · 1,718회 ·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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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8%추천 ★★★★★

    신간회 활동과 함께 해소 원인을 따로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14. 5.29

    사회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 농성

    평양 평원 고무 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회사의 임금 삭감에 항의해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여덟 시간 동안 농성했습니다.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처음 기록된 고공 농성입니다.

    • 1930년 평양 고무 공장들이 임금을 10% 깎으려 하자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강주룡은 회사 측이 응하지 않자 을밀대에 올라 '누구든 사다리를 대면 뛰어내리겠다'며 버텼습니다.
    • 강제로 끌려 내려온 뒤에도 옥중 단식으로 저항했고, 이듬해 병으로 숨졌습니다.

    배경

    1920년대 후반 평양은 고무신 공장이 밀집한 곳이었습니다. 고무 공업은 다른 산업보다 여성 노동자 비율이 높았고, 임금은 남성 노동자보다도 낮았습니다.

    전개

    1930년 세계 대공황으로 불경기가 이어지자 평양의 고무 공장주들은 산업 합리화를 내세워 임금을 10% 깎으려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반발해 파업했지만 회사 측은 응하지 않았고, 1931년 5월 평원 고무 공장이 임금 삭감을 통보하자 여성 노동자 강주룡은 5월 29일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농성을 벌였습니다.

    강주룡은 지붕 위에서 회사의 부당함을 알리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덟 시간 만에 강제로 끌려 내려온 뒤에도 유치장과 옥중에서 단식으로 저항을 이어 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강주룡의 농성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회사는 임금 삭감 계획을 거둬들였지만, 강주룡은 거듭된 투옥과 고문으로 건강이 나빠져 이듬해인 193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0년 8월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반발해 파업했습니다.
    2. 1931년 5월평원 고무 공장이 임금 삭감을 통보했습니다.
    3. 1931년 5월 29일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올라 여덟 시간 동안 고공 농성을 벌였습니다.
    4. 1931년강주룡이 유치장과 옥중에서 단식으로 저항을 이어 갔습니다.
    5. 1932년 8월강주룡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료로 읽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다.”
    — 강주룡의 을밀대 농성 중 발언(1931)당시 언론 보도와 후대 연구에서 전해지는 발언입니다. 농성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

    • 강주룡1901~1932

      평원 고무 공장의 임금 삭감에 맞서 을밀대 고공 농성을 벌였습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지내다 귀국해 평양 고무 공장 노동자가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힙니다.

    해설·교양 · 다큐

    나의 독립 영웅 I 25 강주룡 (배우 박지영)

    KBS 히스토리 · 1.2만회 ·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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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교양 · 해설

    노동자 '고공농성' 투쟁 원조 강주룡 여사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CBS노컷뉴스 · 4,964회 ·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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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7월

    사회

    만보산 사건

    만주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 공사를 두고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이 충돌했습니다. 국내 신문의 과장 보도로 국내 화교를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 많은 중국인이 숨졌습니다.

    배경

    1920년대 후반 만주의 한인 농민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중국 당국은 한인 농민을 일본의 만주 침략을 돕는 앞잡이로 의심해 압박했고, 일본은 한인을 ‘일본 신민’이라며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했습니다. 한인 농민은 두 나라 사이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1931년 4월 중국인 중개인 하오융더는 창춘 서북쪽 만보산 지역 지주들에게서 황무지를 10년 기한으로 빌린 뒤, 현 정부의 승인 없이 이를 한인들에게 다시 빌려주었습니다. 이 땅에 한인 농민 180여 명이 옮겨 와 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전개

    1931년 봄 창춘 부근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들이 중국인 중개인에게 땅을 빌려 논을 만들려고 물길을 파자, 중국인 농민들이 자기 논밭이 망가진다며 반대했습니다. 7월 초 중국 농민들이 수로를 메우자 일본 영사관 경찰이 출동해 총을 쏘며 충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인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7월 2일 한인 농민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호외를 냈고, 이 과장된 소식이 퍼지면서 7월 3일부터 인천·서울·평양 등지에서 한국인들이 화교를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평양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7월 1~2일 중국 농민 약 400명이 수로 일부를 메웠고, 일본 영사관 무장 경찰과 중국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았습니다. 국내의 폭동은 인천에서 시작돼 서울·원산·평양·부산 등으로 번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폭동으로 많은 중국인이 숨지고 다쳤습니다. 사망자는 기록에 따라 100여 명에서 140여 명까지 차이가 납니다. 한중 관계가 크게 나빠졌고, 두 달 뒤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한국 신문들은 뒤늦게 오보를 바로잡고 자제를 호소했습니다.

    피해 집계는 조사한 쪽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중국 정부 쪽 조사(구웨이쥔 보고서)는 평양에서만 133명이 숨졌다고 적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31년 4월하오융더가 만보산 지역 황무지를 빌려 한인 농민들에게 다시 빌려주었습니다.
    2. 1931년 4~6월한인 농민 180여 명이 옮겨 와 이퉁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팠습니다.
    3. 1931년 7월 1~2일중국 농민들이 수로를 메우자 일본 영사관 경찰이 출동해 총을 쏘았습니다. 한인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4. 1931년 7월 2일조선일보가 한인 농민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호외를 냈습니다.
    5. 1931년 7월 3일인천에서 화교를 공격하는 폭동이 시작됐습니다.
    6. 1931년 7월 초폭동이 서울·평양 등으로 번졌고, 평양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7. 1931년 9월 18일일본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인물

    • 김이삼?~1931

      현지에서 조선일보 호외의 바탕이 된 기사를 보낸 기자입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일보 기자로, 한인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보냈습니다. 뒤에 정정 보도와 사과문을 낸 직후 한국인에게 피살됐습니다. 오보가 나온 경위는 지금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폭동 배후를 둘러싼 해석

    일제의 유도를 강조하는 쪽

    일본 영사관 쪽이 충돌을 키우고 과장된 정보를 흘렸으며, 경찰이 초기 폭동을 제대로 막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한중 이간과 만주 침략 명분 쌓기를 노린 공작이었다고 봅니다.

    국내 사회의 책임도 함께 봐야 한다는 쪽

    일제의 의도와 별개로,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그대로 믿고 이웃 화교를 공격한 한국 사회의 배타적 감정과 언론의 책임도 직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제의 유도를 입증하는 직접 증거는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31년 가짜뉴스가 불러온 중국 화교의 비극, 만보산 사건(전한길 강사에게!!!!)

    배기성 역사독립군 Brandteller4.0 · 1.4만회 ·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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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오보가 화교 공격으로 번진 과정을 사건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만보산 사건 90년 I 고조되는 반중감정 속에서 만보산 사건을 되돌아보다

    한홍구 TV · 2,690회 · 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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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역사학자 한홍구가 만보산 사건과 화교 배척 폭동을 길게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짧아도 시리즈] 가짜뉴스와 한국인들의 집단 살인(KOR) - OOO을 불태우자! #만보산사건

    찐국티비 - 임진석 한국사, 한능검 · 7,881회 ·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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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만보산 사건과 뒤이은 화교 습격을 2분에 짚는 강의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찾아가는NEAD라디오12] 제4강_대한민국 임시정부위 만보산 사건 대응 : 혐오와 차별의 공간적 팽창_김주용(HK 교수)

    원광대HKplus함성인문학TV · 51회 ·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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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학 연구소 강연으로 임시 정부의 만보산 사건 대응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만보산사건

    BTTLC · 3,832회 ·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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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만보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개인 채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전한길씨! 일본의 가짜뉴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만보산 사건’을 몰라?

    [팟빵] 최욱의 매불쇼 · 53.1만회 · 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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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박광일이 만보산 사건을 설명하지만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16. 7.16

    운동

    브나로드 운동

    1931.7.16 ~ 1934 · 3년

    동아일보가 '브나로드'(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를 내걸고 방학 중인 학생들을 농촌에 보내 한글을 가르치는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습니다.

    •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한글 공부』 등 교재 210만 부를 배포하고 학생 5,751명이 참여해 약 9만 7,600명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 조선일보도 비슷한 시기 문자 보급 운동을 따로 벌였습니다.

    배경

    1930년대 초 조선의 문맹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총독부는 초등 교육 기관을 충분히 늘리지 않았고, 한글 교육의 기회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개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을 내걸고 방학을 맞은 남녀 학생들을 총동원해 농촌에 보내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제정 러시아 말기 지식인들이 벌인 농촌 계몽 운동에서 따온 말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마을에 머물며 『한글 공부』·『신철자 편람』 같은 교재로 한글과 셈법을 가르쳤습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교재 210만 부가 배포됐고, 학생 5,751명이 참여해 약 9만 7,600명이 한글을 배웠습니다. 조선일보도 비슷한 시기 따로 문자 보급 운동을 벌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총독부는 1935년 이 운동을 조선어 사용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지했습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이후 소설 『상록수』(심훈, 1935~1936년 동아일보 연재)의 소재가 되는 등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남겼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29년조선일보가 문자 보급 운동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2. 1931년 7월 16일동아일보가 제1회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3. 1931~1934년네 차례에 걸쳐 학생들이 농촌에서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4. 1935년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연재됐습니다.
    5. 1935년총독부가 문맹 퇴치 운동을 금지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178_브나로드 운동 전개

    최태성 2TV · 6,699회 ·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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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핵심 개념 2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퍼진,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내건 운동입니다.

노동·농민·청년 운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 됐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에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치안 유지법으로 강하게 탄압했고, 광복 뒤 좌우 대립의 한 축이 됐습니다.

강의

[5.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통합운동 한 눈에 정리! (20년대, 30년대, 40년대) (20분컷 정리)

원유철한국사TV · 1만회 ·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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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뭐가 다른 걸까??? | 정치 외교

지식한잔 · 207.1만회 ·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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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정부가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자원을 몰아준 경제 성장 계획입니다(1962~1996).

1960년대에는 섬유·가발 같은 경공업과 수출,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화학 같은 중화학 공업에 집중했습니다. 수출 주도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성장의 그늘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경 유착,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지적됩니다.

다큐

영상한국사 I 117 1961년 국토건설사업,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

KBS 히스토리 · 1.9만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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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강의기적, 세계가 경악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짜 비밀

비밀의경제학 · 1.7만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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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