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학생들이 서울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측의 준비는 사전에 발각됐지만 학생 조직이 시위를 이어 갔습니다.
-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힘을 합칠 필요를 느끼게 해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배경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26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3·1 운동이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어났던 것처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인 6월 10일에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은 조선 공산당을 중심으로 대중 운동을 넓히려 했고, 천도교 안에서는 최린 중심의 신파와 거리를 두던 구파가 비타협적인 민족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두 세력은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손을 잡았습니다.
전개
조선 공산당의 권오설 등은 천도교 구파의 박래원 등과 손잡고 격문을 인쇄해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6월 초 다른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인쇄물이 발각돼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조선 공산당 2차 검거).
학생 조직은 따로 준비를 이어 갔습니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등 서울의 전문학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지나는 종로와 동대문 등지에서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제는 3·1 운동의 경험 때문에 군경을 대규모로 배치해 두었고 많은 학생이 붙잡혔습니다.
계획 쪽은 격문을 수만 장, 많게는 10만 장 가까이 찍어 두었다고 전해집니다(수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6월 10일 오전 8시 30분 무렵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학생들이 먼저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렸고, 이어 관수교·을지로·훈련원·동대문 등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 잇따라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서울 밖 몇몇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뒤따랐습니다.
결과와 의미
시위 규모는 3·1 운동에 비해 작았지만, 학생이 민족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준비한 경험은 두 세력이 연대해야 한다는 인식을 키워 이듬해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시위 뒤 학생 관련자들이 재판에 넘겨졌고, 권오설 등 조선 공산당 관련자들은 2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함께 처벌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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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기
“우리의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는 자본제국주의(資本帝國主義) 일본이다.”
인물
권오설1897~1930
박래원
이병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