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축소·폐지와 의정부 기능 회복
세도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던 비변사의 권한을 줄이고(1864) 이듬해 의정부에 합쳐 없앴습니다. 군사는 따로 삼군부를 되살려(1868) 맡겼습니다.
배경
비변사는 원래 16세기 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만든 임시 회의 기구였습니다.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됐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군사뿐 아니라 인사·재정·외교까지 나랏일 대부분을 다루게 됐습니다. 그 결과 원래 최고 정무 기관인 의정부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19세기 세도 정치 시기에는 세도 가문 사람들이 비변사의 주요 자리를 차지해 이곳을 권력의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 때 국경 문제를 의논하려고 임시로 처음 설치됐습니다. 정승들이 도제조를 겸하고 병조·호조·이조 판서와 군영 대장 등 주요 관리가 함께 참여하는 회의 기구였기 때문에, 여기서 정한 일이 곧 나라의 결정이 됐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묘당’이라고 부를 만큼 최고 기관으로 굳어졌습니다.
전개
흥선대원군은 집권 직후인 1864년 비변사가 맡던 일 가운데 일반 행정은 의정부로 돌리고 비변사에는 국방과 치안 관련 업무만 남겼습니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비변사를 의정부에 합쳐 아예 없앴습니다.
군사 업무는 1868년 삼군부를 되살려 따로 맡겼습니다. 그래서 의정부는 행정, 삼군부는 군사를 나눠 맡는 조선 초기의 체제가 다시 갖춰졌습니다.
이 개편은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때라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내려졌지만, 실제로는 흥선대원군의 구상이었습니다. 비변사가 쓰던 청사와 기록, 관원도 의정부로 넘어갔습니다.
결과와 의미
300년 가까이 이어진 비변사 중심의 정치 구조가 끝나고 의정부가 최고 기관의 기능을 되찾았습니다. 세도 가문이 모여 권력을 행사하던 통로가 사라지면서 왕실, 곧 대원군 쪽으로 권력이 모였습니다.
비변사가 사라진 뒤에도 비변사의 회의 기록인 『비변사등록』은 남아 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200년 넘는 기간의 국정 논의가 날짜별로 담겨 있어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와 함께 조선 후기 정치사를 연구하는 핵심 사료로 쓰이며,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신정왕후 조씨(조대비)1808~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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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