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가 지휘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반격과 맞물려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배경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쟁 초기부터 북한군 뒤쪽 깊숙이 상륙해 보급로를 끊는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북한군 주력이 낙동강 전선에 몰려 있는 동안 서울 가까운 곳을 치면 적 전체를 포위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상륙 지점으로 인천을 고르자 미 해군과 해병대 지휘부는 크게 반대했습니다. 인천은 밀물과 썰물 차이가 매우 커서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두 차례, 몇 시간뿐이었고, 수로가 좁고 앞바다에 월미도가 버티고 있었으며, 해안에는 높은 방파제가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쪽은 군산 등 다른 곳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적도 인천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계획을 밀어붙였습니다.
전개
상륙 전 한국 해군 첩보대와 미군 정보 요원이 인천 앞바다 영흥도 등에 들어가 해안 방어와 조수를 조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숨진 한국 해군 대원도 있었습니다. 9월 15일 새벽에는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함대를 안내했습니다.
9월 15일 아침 미 해병대가 먼저 월미도를 점령했습니다. 물이 빠졌다가 다시 들어온 저녁 무렵 본대가 인천 시가지 쪽 해안(적색·청색 해안)에 올라 사다리로 방파제를 넘었습니다. 작전에는 미 제10군단을 중심으로 미 해병 제1사단, 미 제7사단, 한국 해병대와 국군 제17연대 등이 참여했고, 함정 260여 척이 동원됐습니다.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이 많지 않아 상륙 부대의 피해는 예상보다 적었습니다.
상륙군은 9월 17일 무렵 김포 비행장을 차지하고 서울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9월 16일부터는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미 제8군도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인천과 서울을 잇는 길이 막히자 남쪽에 있던 북한군은 보급이 끊기고 포위될 위험에 놓였습니다. 북한군은 무너지며 북쪽으로 후퇴했고,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거나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가 됐습니다. 석 달 가까이 밀리던 전세가 이 작전을 계기로 뒤집혔습니다.
작전 과정에서 인천 시가지와 월미도 일대는 상륙 전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크게 부서졌고 주민 피해도 컸습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상륙 직전 월미도 폭격으로 주민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하고 정부에 대책을 권고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에드워드 알몬드1892~1979
더 알아두기
- 크로마이트 작전
- 장사 상륙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