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안보 위기와 3선 개헌

1·21 사태와 울진·삼척 침투로 안보 위기가 커졌고, 3선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길이 열렸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경부 고속 도로 개통, 전태일 분신이 이 시기의 일이며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습니다.

기간
1968.1 ~ 1972.10.16 · 4년 9개월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박정희
담긴 것
사건 16 · 영상 116 · 영화·드라마 12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2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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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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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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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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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4· 공식 영상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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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0.12.15 ~ 1983.11.14

흥남 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까지 한 사람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황정민 주연 천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 비하인드 스토리, 옥에 티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50만회 ·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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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1· 제목만

「빛과 그림자」

배경 1960 ~ 1980

MBC. 1960~70년대 쇼 비즈니스와 정치 이야기

드라마 · 2008· 공식 영상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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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0 ~ 1990

MBC. 탄광촌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형제의 운명

영화 · 2004· 제목만

「효자동 이발사」

배경 1960 ~ 1979.10.26

청와대 이발사의 눈으로 본 권위주의 시대를 풍자

영화 · 2015· 공식 영상

「쎄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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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7 ~ 1972

1960~70년대 음악 감상실 쎄시봉과 포크 음악 청춘

영화 · 2003· 공식 영상

「실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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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8.4 ~ 1971.8.23

1·21 사태 뒤 만든 북파 부대와 실미도 사건

영화 · 2015· 공식 영상

「강남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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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70 ~ 1972

1970년대 강남 개발을 배경으로 한 느와르(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영화 '강남1970' 감독의 의도와 온갖 비하인드 스토리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1.5만회 ·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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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0· 제목만

「자이언트」

배경 1970 ~ 1990

SBS. 강남 개발과 건설업을 배경으로 한 산업화 시대 이야기

드라마 · 1995· 공식 영상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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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70 ~ 1995

SBS. 유신부터 5·18, 1990년대까지 세 친구의 엇갈린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시청률 64.5% 모래시계 최민수-고현정-이정재-박상원 주연! 전국민을 귀가하게 만든 역대급 신드롬 대작 #명작리뷰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54.1만회 · 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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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연표 1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1977), 베트남 파병 (~1973.3),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1)

  1. 1968

    1.21

    사회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1968.1.21 ~ 1.23 · 3일

    북한 특수 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서울 세검정 부근에서 저지됐습니다. 이틀 뒤에는 북한이 동해에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습니다.

    • 이후 향토 예비군(1968.4)이 창설되고 주민 등록증이 발급되기 시작했습니다(1968.11).

    배경

    1960년대 후반 북한은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관심이 분산된 틈을 타 남한에 대한 무력 도발을 크게 늘렸습니다. 비무장 지대 일대에서의 교전과 무장 간첩 침투가 잇따랐고, 특수 부대를 이용한 공작도 강화했습니다.

    전개

    1968년 1월 북한 민족 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원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목표는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1월 21일 밤 9시 30분 무렵 이들은 청와대에서 멀지 않은 세검정 고개 부근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고,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등이 숨졌습니다.

    이후 소탕 작전으로 29명이 사살되고 1명(김신조)이 생포됐으며 1명은 북으로 달아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쪽은 군인·경찰·민간인을 합쳐 30명가량이 숨졌습니다.

    이틀 뒤인 1월 23일 북한은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습니다. 승조원 1명이 숨지고 82명이 억류됐다가,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한 뒤 12월 23일 풀려났습니다. 선체는 지금도 북한에 있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부는 안보 체제를 크게 강화했습니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고, 11월부터 주민 등록증이 발급됐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군사 훈련인 교련이 실시됐습니다. 북한에 보복하기 위한 비밀 부대(684부대)도 만들어졌습니다.

    한편 미국이 푸에블로호 문제를 북한과 직접 협상하고 청와대 습격에는 강하게 대응하지 않자, 한국 정부는 미국에 불만을 드러냈고 자주 국방을 강조하게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 1월 중순124군 부대원 31명이 북쪽 기지를 떠나 휴전선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2. 1968년 1월 17~18일 무렵휴전선 철책을 뚫고 남쪽으로 넘어왔습니다.
    3. 1968년 1월 19일경기 파주 일대 산에서 나무꾼 형제와 마주쳤고, 풀려난 형제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4. 1968년 1월 21일 밤국군 복장으로 청와대 가까이 접근하다 세검정 부근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고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5. 1968년 1월 22일숨어 있던 김신조가 붙잡혀 기자 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밝혔습니다.
    6. 1968년 1월 23일북한이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습니다.
    7. 1968년 1월 말대규모 소탕 작전이 마무리됐습니다.
    8. 1968년 4월 1일향토 예비군이 창설됐습니다.
    9. 1968년 11월주민 등록증 발급이 시작됐습니다.
    10. 1968년 12월 23일푸에블로호 승조원 82명과 숨진 1명의 유해가 판문점을 거쳐 풀려났습니다.

    인물

    • 김신조1942~2025

      124군 부대원으로 침투했다가 유일하게 생포됐습니다.

      생포 직후 기자 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밝혀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전향해 한국에서 살았고 목사가 돼 강연 활동을 했습니다.

    • 최규식1932~1968

      종로 경찰서장으로 현장에서 무장 공비를 막다 숨졌습니다.

      순직 뒤 경무관으로 추서됐고,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날 남은 흔적
    사건 이후 폐쇄됐던 북악산 일대는 2000년대 들어 차례로 개방돼 탐방로가 됐습니다. 당시 교전 흔적이 남은 소나무(‘1·21 사태 소나무’)가 탐방로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659호-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

    KTV 아카이브 · 5,363회 ·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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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68년 1월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소식을 전한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07호-푸에블로호 승무원 돌아오다

    KTV 아카이브 · 5,105회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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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68년 12월 나포됐던 푸에블로호 승무원이 귀환하는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150년만에 최초! 북한에 나포된 美 군함 '푸에블로호' |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페이스:北] | 국방홍보원

    KFN · 1.2만회 · 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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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국방홍보원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다룬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북한군 31명의 청와대 기습사건, 121 사태

    궁금소 · 140.6만회 ·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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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을 정리한 조회수 높은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미국이 사과문에 굴욕적으로 서명한 사건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퍄퍄킴 역사 · 19.6만회 ·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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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푸에블로호 나포를 자세히 다루고 1·21 사태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美 법원 "北 '푸에블로호 나포' 2조5천억 원 배상하라" / YTN

    YTN · 13.2만회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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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푸에블로호 나포 피해에 대한 2021년 미국 법원 배상 판결 보도입니다.

  2. 10.30

    사회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1968.10.30 ~ 1968.12 · 2개월

    북한 무장 공비 120명이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해안으로 침투해 두 달 가까이 민간인과 군경이 희생됐습니다.

    배경

    1·21 사태가 실패한 뒤에도 북한은 남한 후방에 게릴라 거점을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 마을이 목표였습니다.

    전개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124군 부대원 120명이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해안으로 상륙했습니다. 이들은 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아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 가입을 강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민의 신고로 침투 사실이 알려지자 군과 경찰, 예비군이 대규모 소탕 작전을 벌였습니다.

    12월 9일에는 강원 평창의 산간 마을에서 무장 공비들이 이승복 어린이의 가족을 살해했습니다. 작전은 12월 28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이어졌습니다.

    침투조는 15명씩 8개 조로 나뉘어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 등으로 올라왔고, 울진에서 경북 봉화, 강원 삼척·명주·정선 일대의 산악 지대로 흩어졌습니다. 이들은 국군이나 경찰 복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11월 3일 새벽 한 산간 마을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북한 체제를 선전하던 중, 몰래 빠져나간 주민의 신고로 침투가 알려졌습니다.

    정부는 군·경·예비군을 동원한 대간첩 작전 본부를 세워 태백산맥 일대를 수색했습니다. 눈 덮인 산악 지대라 작전이 길어졌고, 공비들이 산간 외딴집을 찾아가 식량을 빼앗거나 주민을 해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무장 공비 113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됐습니다. 한국 쪽에서도 민간인을 포함해 40명 넘게 숨지고 30명 넘게 다쳤습니다.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향토 예비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이후 정부는 산간 오지 주민을 한곳으로 모아 사는 ‘독가촌 정리’와 해안 경비 강화에 나섰습니다.

    이 사건은 휴전 이후 북한이 벌인 가장 큰 규모의 무장 침투로 꼽힙니다. 1·21 사태와 이 사건을 겪으며 남북 사이 긴장은 1960년대 후반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124군 부대원 120명이 세 차례에 걸쳐 경북 울진·강원 삼척 해안으로 상륙했습니다.
    2. 1968년 11월 3일산간 마을 주민의 신고로 침투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3. 1968년 11월 초군·경·예비군이 대규모 소탕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4. 1968년 12월 9일강원 평창의 산간 마을에서 이승복 어린이와 가족이 무장 공비에게 살해됐습니다.
    5. 1968년 12월 28일약 두 달에 걸친 소탕 작전이 끝났습니다.
    6. 1969년 이후산간 외딴집 주민을 한곳으로 모으는 독가촌 정리와 해안 경비 강화가 진행됐습니다.

    인물

    • 이승복1959~1968

      평창군 진부면의 산간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무장 공비에게 살해됐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도 함께 숨졌고 형은 크게 다쳤습니다. 평창에 이승복 기념관이 있습니다.

    더 알아두기

    이승복 보도를 둘러싼 논쟁
    조선일보는 이승복이 숨지기 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보도했고,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반공 교육에 쓰였습니다. 1990년대 일부 인사가 이 보도가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해 소송이 벌어졌고, 2006년 대법원은 보도가 조작이라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주장한 인사 가운데 한 명에게 명예 훼손 유죄를 확정했습니다(다른 한 명은 무죄). 다만 현장 취재 여부 등을 두고는 지금도 서로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01호-무장공비를 무찌른다(제 1 선)

    KTV 아카이브 · 17.1만회 ·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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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 작전 현장을 담은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 6.25 이후 최대 규모 도발

    KTV 아카이브 · 14만회 ·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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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68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를 담은 KTV 기록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02호-무장공비를 무찌른다(제 2 신)

    KTV 아카이브 · 7.4만회 ·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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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 작전 두 번째 소식을 전한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북한의 인간병기급 특수부대가 한국에서 맥도 못 추리고 당한 이유 (최정예 군인에서 거지로..) | 그날을 보다 EP.44

    보다 BODA · 211.4만회 · 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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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를 전문가 대담으로 길게 풀어 줍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03호-북괴의 흉계는 이렇다

    KTV 아카이브 · 8,358회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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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생포된 공비들의 기자회견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05호-남침공비를 무찌른다-제3신-

    KTV 아카이브 · 12.9만회 ·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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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1968년 남침 공비 소탕 작전을 전한 대한뉴스 제3신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이만갑모아보기] 120명의 북한군이 남한 민간인을 공격한 만행!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비밀 | 이제 만나러 갑니다 513 회

    play 채널A · 84만회 ·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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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울진·삼척 침투 경위와 민간인 희생을 정면으로 다룬 교양 예능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무기박물관 Arms Museum · 44만회 ·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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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전 과정을 설명합니다.

  3. 12.5

    사회

    국민 교육 헌장 선포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하는 헌장을 선포하고 학교에서 외우게 했습니다. 1994년 이후 기념식이 폐지됐습니다.

    배경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과 함께 국민의 정신과 가치관도 국가가 이끌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학자와 교육계 인사들이 교육의 기본 이념을 담은 헌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은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로 안보 위기감이 높았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경제 개발과 반공을 뒷받침할 정신 교육의 기준을 문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개

    철학자 박종홍 등이 초안을 쓰고 여러 차례 다듬은 뒤, 국회의 동의를 거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이 선포했습니다. 헌장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해 개인의 능력 계발, 반공 민주 정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봉사를 강조했습니다.

    헌장은 모든 교과서 첫머리에 실렸고, 학생들은 이를 외워야 했으며 공무원 시험과 각종 행사에서도 낭독됐습니다. 매년 12월 5일에는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968년 여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학계·교육계·언론계 인사로 기초 위원 26명과 심의 위원 48명이 꾸려졌습니다. 초안 작성은 철학자 박종홍과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등이 주도했습니다. 국회는 1968년 11월 만장일치로 헌장 선포에 동의했습니다.

    헌장은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 공익과 질서, 협동 정신을 강조하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을 삶의 길로 제시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헌장의 이념을 교육 과정 전반에 반영하도록 했고, 교사 연수와 각종 백일장·웅변 대회의 주제로도 쓰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주화 이후 헌장의 국가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커졌고, 1994년부터 기념식이 열리지 않게 됐습니다. 이후 교과서에서도 빠져 지금은 사실상 쓰이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 6월박정희 대통령이 교육의 기본 이념을 담은 헌장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2. 1968년 7월기초 위원 26명과 심의 위원 48명이 꾸려져 초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3. 1968년 11월국회가 만장일치로 헌장 선포에 동의했습니다.
    4. 1968년 12월 5일대통령이 국민 교육 헌장을 선포했습니다.
    5. 1970년대헌장이 교과서 첫머리에 실리고 학생들이 외우게 됐으며, 매년 12월 5일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6. 1994년헌장 선포 기념식이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 국민 교육 헌장 첫머리(1968)

    인물

    • 박종홍1903~1976

      헌장 초안 작성을 주도했습니다.

      한국 철학을 연구한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1970년대 대통령 교육 문화 담당 특별 보좌관을 지냈습니다. 유신 체제의 이념을 뒷받침했다는 비판과 한국 현대 철학의 기틀을 놓았다는 평가를 함께 받습니다.

    • 안호상1902~1999

      헌장 기초에 참여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정부 수립 후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일민주의’와 민족 교육을 내세웠습니다. 뒤에 대종교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국민 교육 헌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근면과 공동체 가치를 강조한 문서로 보는 쪽

    성실, 협동, 전통의 계승, 공익 같은 보편적 덕목을 담았고 가난을 벗어나려던 시대에 국민에게 공동의 목표를 제시했다고 봅니다.

    국가주의 교육의 상징으로 보는 쪽

    개인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강요했고, 암기와 낭독을 통해 정권이 원하는 가치관을 주입하는 수단이었으며 이후 유신 체제의 이념적 바탕이 됐다고 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국민교육헌장 선포(1968) (2018.12.05/뉴스투데이/MBC)

    MBCNEWS · 1.5만회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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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68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당시를 다시 보여 주는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국민교육헌장 박정희대통령의 카랑카랑한 육성낭독

    타우린 · 5.1만회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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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박정희 대통령이 헌장을 직접 읽는 육성 녹음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박정희서체]■박정희 대통령 육성-국민교육헌장

    좋은생각 · 3.8만회 ·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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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박정희 대통령의 헌장 낭독 육성을 정리한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그 시대의 교육목표... 국민교육헌장 선포 (12월5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52회] / YTN2

    YTN 밀덕스 · 1,017회 ·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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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국민교육헌장 선포 배경과 강제 암기를 다룬 회차입니다(다른 사건 포함).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55호-국민교육헌장 선포 한돌 맞이

    KTV 아카이브 · 899회 ·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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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1969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1주년 기념식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LIVE] 국민교육헌장의 역사적 의미

    Korea Narrative Live · 3.3만회 · 1: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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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헌장 선포의 의미를 다룬 긴 대담으로,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4. 1969

    1월

    경제

    구미 전자 공업 단지 조성

    1969.1 ~ 1973.12 · 4년 11개월

    정부가 전자 공업 진흥법을 제정하고 구미에 국가 산업 단지 1단지를 조성해 전자 산업을 수출 전략 산업으로 키웠습니다.

    • 섬유 단지로 출발한 일반 단지와 전자 단지로 나뉘어 조성됐습니다.

    배경

    정부는 산업을 업종별로 특화한 공업 기지에 나눠 배치하는 방식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전자 산업을 수출 전략 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자리로 낙동강을 낀 경북 구미가 선택됐습니다. 내륙에 있어 안보상 안전하고, 대구·부산 등 배후 노동력 확보가 쉽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지역이라는 점도 입지 선정에서 함께 거론되는 배경입니다.

    전개

    1969년 1월 전자 공업 진흥법이 제정된 뒤, 정부는 같은 해 구미에 공업 단지 조성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1969년 3월 착수해 1971년부터 1973년 사이 1단지 조성을 마쳤습니다.

    구미 1단지는 섬유 단지로 출발한 일반 단지와 전자 단지로 나뉘어 조성됐으며, 면적은 1,000만㎡가 넘었습니다. 정부는 입주 기업에 세제 혜택과 저리 자금을 지원해 국내외 전자 업체의 입주를 유도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구미 국가 산업 단지는 이후 국내 전자 산업의 핵심 생산 기지로 성장해 텔레비전·전화기 등 가전과 통신 기기를 대량으로 생산·수출하는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2·3단지가 잇달아 조성되며 반도체·휴대전화 부품까지 아우르는 전자 산업 도시로 커졌고, 인구도 빠르게 늘어 1978년 구미읍에서 구미시로 승격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9년 1월 28일정부가 전자 공업 진흥법을 제정했습니다.
    2. 1969년구미 공업 단지 조성 계획이 확정됐습니다.
    3. 1969년 3월1단지 조성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4. 1973년 12월구미 1단지 조성이 마무리됐습니다.
    5. 1970~80년대삼성전자·금성사(LG전자) 등이 구미에 생산 공장을 세워 전자 산업 수출 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173호-구미공업단지

    KTV 아카이브 · 1,461회 ·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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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13

    경제

    삼성전자공업 설립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전자 산업 진출을 선언한 뒤 삼성전자공업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로 바꿨습니다.

    배경

    1960년대 후반 전자 제품은 세계적으로 빠르게 커지는 산업이었고, 정부도 노동 집약적이면서 부가 가치가 높은 전자 산업을 새로운 수출 전략 산업으로 점찍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금성사(지금의 LG전자)가 1958년부터 라디오·텔레비전을 만들며 이미 전자 산업에 발을 들인 상태였습니다.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1968년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 산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후발 주자로 뛰어드는 만큼 해외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기술을 빠르게 들여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전개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됐습니다. 정부도 같은 해 1월 28일 전자 공업 진흥법을 제정해 전자 산업을 수출 전략 산업으로 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설립 초기 삼성전자공업은 일본 산요·NEC 등과 합작해 흑백텔레비전·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조립·생산하는 수준에서 출발했습니다.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하청·조립 생산으로 시작해 점차 자체 기술력을 쌓아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삼성전자공업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고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로 바꾸며 성장해, 훗날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커졌습니다. 전자 산업 후발 주자였던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서는 출발점이 된 회사로 꼽히며, 이후 금성사(LG전자)와 함께 국내 가전 산업을 이끄는 두 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신문 칼럼을 통해 전자 산업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2. 1969년 1월 13일삼성전자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됐습니다.
    3. 1969년 1월 28일정부가 전자 공업 진흥법을 제정했습니다.
    4. 1970년대 초일본 기업과 합작으로 흑백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5. 1974년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발을 들였습니다.
    6. 1984년회사 이름을 삼성전자로 바꿨습니다.

    인물

    • 이병철1910~1987

      전자 산업 진출을 선언하고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습니다.

      삼성상회에서 출발해 제일제당·제일모직을 거쳐 삼성그룹을 한국 최대 기업 집단으로 키운 창업주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1960년대 삼성, 전자 산업에 도전한 이유는?

    경제오락실 · 86회 ·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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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9.14

    정치

    3선 개헌

    1969.9.14 ~ 10.17 · 34일

    대통령이 세 번까지 연임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쳤습니다. 여당은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한 사이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기습 처리했고, 국민 투표로 확정됐습니다.

    배경

    1962년 헌법은 대통령이 한 번만 연임할 수 있게 해, 1967년 재선된 박정희는 1971년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야 했습니다. 1967년 총선에서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얻은 공화당 안에서 ‘경제 개발과 안보를 위해 지도자가 계속 필요하다’는 개헌론이 나왔습니다.

    공화당 안에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김종필 계열 인사 일부가 반대했고, 1969년 4월 공화당 일부 의원이 야당의 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에 찬성하자(4·8 항명 파동) 당 지도부는 이들을 제명했습니다.

    전개

    1969년 6월부터 대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고, 신민당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신민당은 소속 의원 가운데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의원들의 의원직을 잃게 하려고 당을 스스로 해산했다가 다시 만드는 방법까지 썼습니다.

    공화당은 8월 개헌안을 발의했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자, 여당 의원들은 9월 14일 일요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 모여 야당 몰래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 투표에서 약 65%의 찬성으로 확정됐습니다.

    1969년 7월 하순 신민당 의원 3명이 개헌 지지를 선언하자,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117표를 넘는 122명의 찬성 서명이 모였습니다. 신민당은 9월 7일 임시 전당 대회에서 이 세 명을 뺀 소속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했습니다. 당시 법에서는 당이 해산되면 소속 의원이 의원직을 잃었기 때문에, 개헌 지지 의원 세 명의 의원직을 없애려는 방법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7월 25일 특별 담화에서 개헌안 국민 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로 삼겠다며 부결되면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무렵 여당 의원 122명은 본회의장 대신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개헌안과 국민 투표 법안을 처리했습니다. 10월 17일 국민 투표에는 유권자의 77.1%가 참여했고, 65.1%가 찬성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통령이 세 번까지 연임할 수 있게 됐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 다시 당선됐습니다. 이 개헌은 1972년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 연임 제한이 아예 사라지는 과정의 중간 단계가 됐습니다. 국회에서 절차를 무시한 ‘날치기 통과’의 대표 사례로도 꼽힙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9년 1월공화당 지도부에서 개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2. 1969년 4월 8일공화당 일부 의원이 야당의 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에 찬성해 가결됐고, 이들이 당에서 제명됐습니다.
    3. 1969년 6월대학생들의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시작됐고,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초산 테러를 당했습니다.
    4. 1969년 7월 25일박정희 대통령이 개헌 국민 투표를 신임 투표로 삼겠다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5. 1969년 8월공화당 등 122명이 서명한 개헌안이 발의됐습니다.
    6. 1969년 9월 7일신민당이 개헌 지지 의원 3명의 의원직을 없애려 당을 스스로 해산했습니다.
    7. 1969년 9월 14일 새벽여당 의원 122명이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처리했습니다.
    8. 1969년 10월 17일국민 투표에서 투표율 77.1%, 찬성 65.1%로 개헌이 확정됐습니다.
    9. 1971년 4월 27일박정희가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습니다.

    인물

    • 김영삼1927~2015

      신민당 원내 총무로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1969년 6월 개헌 반대 발언 뒤 괴한에게 초산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해 11월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고, 뒤에 제14대 대통령(1993~1998)이 됐습니다.

    • 박정희1917~1979

      개헌 국민 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로 삼겠다고 밝히며 개헌을 밀어붙였습니다.

      1963년과 1967년에 당선된 대통령으로, 개헌이 없었다면 1971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 유진오1906~1987

      신민당 총재로 당 해산이라는 방법까지 쓰며 개헌 저지에 나섰습니다.

      제헌 헌법 초안을 쓴 헌법학자로, 고려대 총장을 거쳐 야당 지도자가 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3선 개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도력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쪽

    경제 개발이 한창이고 북한의 무력 도발이 거세던 시기에 검증된 지도자가 계속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판단이었고, 국민 투표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 국민의 뜻을 확인했다고 봅니다.

    장기 집권의 길을 연 것으로 보는 쪽

    집권자 한 사람을 위해 헌법을 고쳤고, 그 과정도 야당을 배제한 기습 처리였다고 봅니다.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처럼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이 다시 반복돼 유신 체제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단 9표가 부족했다! 1969년 3선개헌 막전막후 스토리 (KBS_1993.07.11.방송)

    KBS 히스토리 · 6만회 · 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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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3선 개헌 추진과 여당 내 반발을 깊이 다룬 KBS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48호-10.17 국민투표

    KTV 아카이브 · 1,384회 ·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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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69년 3선 개헌 10·17 국민 투표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김종필, 3선개헌을 지지하다!ㅣ KBS 200908 방송

    KBS 히스토리 · 2.1만회 ·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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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김종필이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서는 과정을 다룬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김대중의 역사적연설20. 1969년 3선개헌 반대 효창운동장 연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3,335회 ·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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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69년 효창운동장 3선 개헌 반대 연설의 당시 녹음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김영삼 의원 육성연설 [3선개헌과 국제정세] (1969.8.16)

    김영삼민주센터 · 2.8만회 ·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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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개헌 추진 무렵 김영삼 의원의 반대 연설 육성 녹음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1969년 10월 17일 오늘 #3선 #개헌안 #국민투표

    KTV 국민방송 · 2,913회 ·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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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짧게 되짚은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국사 한번에 끝내기#박정희 정부 2탄#3선 개헌부터~10.26사태까지

    역사길잡이최재원샘 · 7.1만회 ·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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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3선 개헌부터 10·26까지 박정희 정부 후반을 넓게 다룹니다.

  7. 1970

    4.22

    사회

    새마을 운동

    1970.4.22 ~ 1979 · 9년

    '근면·자조·협동'을 내건 농촌 근대화 운동으로 시작해 도시·공장으로 넓어졌습니다. 마을 길을 넓히고 초가지붕을 바꾸는 등 농촌 환경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 새마을 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이 됐습니다.

    배경

    1960년대 수출 중심 공업화로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농촌은 뒤처졌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났으며, 1967년과 1971년 선거에서는 농촌 표가 정권에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전개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 장관 회의에서 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1970년 겨울 정부는 전국 약 3만 3천여 개 마을에 시멘트를 300여 포대씩 나눠 주고 마을 스스로 쓰임새를 정해 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이듬해 성과가 좋았던 약 1만 6천 개 마을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더 지원했습니다.

    정부는 마을을 기초·자조·자립 마을로 나누어 성과에 따라 지원을 달리했습니다. 마을 길 넓히기,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꾸기, 다리·우물·공동 빨래터 만들기, 전기 보급 등이 진행됐고,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이 세워졌습니다. 운동은 1970년대 중반 도시·공장·직장으로 넓어졌습니다.

    1972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은 「새마을 노래」가 발표돼 마을 방송과 학교에서 널리 불렸고,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에서는 농민 지도자와 공무원, 뒤에는 기업인과 사회 지도층까지 합숙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수 마을과 지도자 사례는 월간 경제 동향 보고 등에서 소개됐습니다.

    1980년 12월 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가 사단 법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이 단체를 이끌며 공금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1988년 구속됐고, 새마을 운동의 이미지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결과와 의미

    농촌의 생활 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통일벼 보급과 쌀값 정책 등이 겹치며 1970년대 중반에는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 가구 소득과 비슷해졌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새마을 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고, 오늘날 여러 개발 도상국에 농촌 개발 모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2011년에는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4월 22일이 ‘새마을의 날’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70년 4월 22일박정희 대통령이 지방 장관 회의에서 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2. 1970년 겨울전국 3만 3천여 개 마을에 시멘트를 나눠 주고 마을마다 쓰임새를 정하게 했습니다.
    3. 1971년성과가 좋은 약 1만 6천 개 마을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더 지원했습니다.
    4. 1972년「새마을 노래」가 발표되고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5. 1970년대 중반운동이 도시·공장·직장으로 넓어졌습니다.
    6. 1980년 12월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가 사단 법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7. 1988년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를 이끌던 전경환이 공금 횡령 등으로 구속됐습니다.
    8. 2011년4월 22일이 ‘새마을의 날’로 지정됐습니다.
    9. 2013년새마을 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힘으로 만드세”
    — 「새마을 노래」 1절(1972, 박정희 작사·작곡)

    인물

    • 박정희1917~1979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고 직접 챙겼습니다.

      제5~9대 대통령입니다. 월간 경제 동향 보고와 함께 새마을 운동 성과를 자주 점검했고, 「새마을 노래」를 직접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전경환1942~2021

      1980년대 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를 이끌다 공금 횡령 등으로 1988년 구속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으로 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 사무총장과 회장을 지냈습니다. 제5공화국 비리 수사 과정에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성격

    주민 참여형 개발로 보는 쪽

    정부가 자재를 대고 주민이 스스로 사업을 정해 노동을 보태는 방식으로 적은 돈으로 큰 성과를 냈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마을 공동체의 협동을 끌어냈다고 봅니다.

    위로부터의 동원으로 보는 쪽

    공무원 실적 경쟁 속에서 주민의 뜻과 무관한 사업이 강요되기도 했고, 농가 부채가 늘었으며, 유신 체제를 떠받치는 정치 동원과 이념 교육의 수단으로 쓰였다고 봅니다. 농가 소득 향상도 정부 수매가 정책의 효과가 컸다고 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농촌의 생활 환경과 소득을 높이고 주민 참여를 끌어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정부 주도의 동원 성격이 강했고 유신 체제의 지지 기반으로 쓰였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새마을 운동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것' [KBS 20130817 방송]

    KBS 다큐 · 150.5만회 · 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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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배경을 다룬 KBS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83호-새벽종이 울렸네

    KTV 아카이브 · 7.6만회 ·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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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72년 새마을 노래와 농촌 새마을 사업 현장을 담은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70호-거국적인 새마을 운동을

    KTV 아카이브 · 4,161회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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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72년 새마을 운동을 도시까지 넓히라는 지시를 전한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282호-새마을 운동 열돌

    KTV 아카이브 · 3만회 ·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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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1980년 새마을 운동 10년의 성과를 정리한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새마을운동의 재미있는 사실들

    오분사색 · 32.5만회 ·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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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내용을 짧게 정리한 해설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에티오피아에 새마을 운동을! |포항MBC 특집다큐 "새마을 운동"

    포항MBC · 424.7만회 ·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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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해외 새마을 봉사단 이야기라 1970년대 운동 자체는 적습니다.

  8. 7.7

    경제

    경부 고속 도로 개통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km 고속 도로가 착공 2년 5개월 만에 개통돼 전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묶었습니다. 빠른 공사로 7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배경

    1960년대 중반 경제 개발로 화물과 사람의 이동이 크게 늘었지만,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교통은 경부선 철도와 좁은 국도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서독 방문 때 아우토반을 보고 고속 도로 건설 구상을 굳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68년 2월 먼저 경인 고속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전개

    경부 고속 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했습니다. 야당은 ‘부유층의 유람 도로’가 될 것이라며 농업 투자 등 다른 곳에 돈을 써야 한다고 반대했고, 세계은행 등도 경제성에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정부는 공사를 강행했고 여러 건설사와 군 공병대가 투입됐습니다.

    공사는 구간별로 차례로 개통했습니다. 소백산맥을 지나는 대전~대구 구간, 특히 당재 터널(지금의 옥천 부근) 공사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1970년 7월 7일 서울~부산 428km 전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착공부터 2년 5개월이 걸렸고, 공사비는 약 429억 원이었습니다.

    공사에는 16개 건설 회사와 군 공병단 3개가 참여했습니다. 먼저 1968년 12월 21일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됐고, 1969년에 오산~천안, 천안~대전, 부산~대구 구간이 차례로 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대전~대구 구간은 산이 많고 암반이 약해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당재 터널에서는 약한 암반이 무너지는 사고가 여러 번 일어나 인명 피해가 컸습니다. 공사 기간을 맞추려고 밤낮으로 공사를 이어 갔고, 속도를 높이려 조강 시멘트(빨리 굳는 시멘트)를 쓰기도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리는 시간이 크게 줄어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묶였고, 고속 도로를 따라 공업 지대와 물류 체계가 발달했습니다. 반면 짧은 공사 기간 탓에 공사 중 77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실 공사로 개통 뒤 보수에 큰 비용이 들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7년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국가 기간 고속 도로 건설을 내세웠습니다.
    2. 1968년 2월 1일경부 고속 도로가 착공됐습니다.
    3. 1968년 12월 21일서울~수원 구간과 경인 고속 도로가 개통됐습니다.
    4. 1969년 9월 29일오산~천안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5. 1969년 12월천안~대전 구간과 부산~대구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6. 1970년 7월 7일대전~대구 구간이 개통되며 서울~부산 428km 전 구간이 이어졌습니다.

    인물

    • 정주영1915~2001

      현대건설 사장으로 전체 구간 가운데 큰 몫을 맡아 공사를 이끌었습니다.

      강원 통천 출신으로 자동차 수리 공장으로 시작해 현대건설을 키웠습니다. 뒤에 현대 그룹을 이끌며 조선·자동차 산업을 일으켰고, 1998년에는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 박정희1917~1979

      고속 도로 건설을 결정하고 반대 속에서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공사 현장을 자주 찾아 노선과 공정을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경부 고속 도로 건설 결정

    선견지명으로 보는 쪽

    당시의 반대와 달리 고속 도로는 곧 교통량이 넘쳤고, 수출 산업과 물류의 대동맥이 되어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다고 봅니다.

    속도전의 비용을 짚는 쪽

    무리한 공기 단축으로 많은 노동자가 숨지고 부실 공사가 생겼으며, 서울~부산 축 중심의 개발이 지역 불균형을 키웠다고 봅니다. 당시 반대론도 한정된 재원을 어디에 쓸지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였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날 남은 흔적
    충북 옥천 금강 휴게소 부근에는 공사 중 숨진 77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습니다. 처음 세운 탑은 도로 선형 개량 공사 때문에 2003년 가까운 언덕 위로 옮겨졌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784호-경부고속도로 준공

    KTV 아카이브 · 64.1만회 ·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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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8%추천 ★★★★★

    1970년 준공식을 찍은 대한뉴스 원본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박정희 대통령은 현대건설 정주영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경부고속도로 비하인드 스토리 대공개 | KBS 20130713 방송

    KBS 다큐 · 427만회 · 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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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경부 고속 도로 건설과 개통 과정을 다룬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광복 80년 특별기획 “기적의 도로, 경부고속도로의 시작과 완공” | 대한민국 영광의 20장면 3부

    KTV 아카이브 · 3.4만회 · 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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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경부 고속 도로 착공부터 완공까지를 다룬 KTV 특별 기획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더라이브 현대사특강①] 16년 걸릴 공사를 2년만에?_박정희의 명과 암 '경부고속도로' [KBS 200707 방송]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 54.2만회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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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 강사가 경부 고속 도로 건설의 빛과 그늘을 짚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서울–부산 428km, 불가능을 달린 '1번 고속도로' 이야기① / 소비더머니

    소비더머니 · 17.4만회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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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428km 공사 과정과 예산·인력 동원을 풀어 설명합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289호-경부고속도로 개통 10주년

    KTV 아카이브 · 15.1만회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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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198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10주년 전시와 건설 과정을 전한 영상입니다.

  9. 11.13

    운동

    전태일 분신

    서울 평화 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고 노동 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배경

    1960년대 수출 산업의 중심은 섬유·봉제 같은 노동 집약적 경공업이었습니다.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 일대의 봉제 공장에서는 10대 여성 노동자(시다·미싱사)들이 다락방처럼 낮은 작업장에서 하루 14시간 넘게 일하면서도 적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근로 기준법은 있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전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처지를 보며 근로 기준법을 독학했습니다. 1969년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노동청에 개선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70년에는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다시 실태 조사서를 내고 언론에 알렸지만, 사업주와 당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 시장 앞에서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겸한 시위를 하려다 경찰에 막히자, 전태일은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인 채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날 밤 스물두 살로 숨졌습니다.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이 평화 시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사회면에 크게 보도했습니다. 전태일과 동료들은 이를 계기로 노동청과 사업주에게 다락방 철거, 노동 시간 단축, 건강 진단 같은 요구를 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무렵 전태일은 한 손에 근로 기준법 책을 들고 불길에 휩싸인 채 구호를 외치다 쓰러졌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밤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에 묻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11월 27일 평화 시장 노동자들이 청계 피복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대학생과 종교계가 노동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1970년대 민주 노동 운동과 학생·노동 연대 흐름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5년 무렵전태일이 평화 시장 봉제 공장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2. 1969년 6월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3. 1970년 가을‘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다시 실태 조사서를 모아 노동청에 냈습니다.
    4. 1970년 10월 7일경향신문이 평화 시장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 조건을 보도했습니다.
    5. 1970년 11월 13일 오후평화 시장 앞에서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하려다 막히자 전태일이 분신했고, 그날 밤 숨졌습니다.
    6. 1970년 11월 27일평화 시장 노동자들이 청계 피복 노동조합을 결성했습니다.
    7. 1983년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이 저자 이름 없이 처음 출간됐습니다.
    8. 2020년전태일에게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 전태일이 분신하며 외친 구호(1970년 11월 13일)

    인물

    • 전태일1948~1970

      노동 조건 개선을 호소하며 분신했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평화 시장에서 시다, 미싱사, 재단사로 일했습니다. 남긴 일기에서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0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습니다.

    • 이소선1929~2011

      아들의 뜻을 이어 청계 피복 노조 결성과 노동 운동을 도왔습니다.

      전태일의 어머니로 이후 40년 가까이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 현장을 지켜 ‘노동자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전태일 평전』
    인권 변호사 조영래가 전태일의 일기와 수기를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1983년 저자 이름 없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나왔고, 뒤에 『전태일 평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1995년에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남은 흔적
    서울 청계천 버들다리(전태일 다리)에 전태일 동상이 있고, 종로구에 전태일 기념관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KBS 인물현대사 –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 KBS 20030704 방송

    KBS 히스토리 · 8.8만회 ·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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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평화 시장의 노동 현실과 분신을 다룬 KBS 인물현대사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꼬무 9회 요약]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그날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190.8만회 ·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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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전태일 분신을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34_[이벤트 종료] 노동자의 이름으로! '전태일 분신'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3만회 ·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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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 강사가 전태일 분신의 배경과 의미를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청년 전태일, 그가 분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설민석 한국사 강사 [어쩌다어른]

    tvN Joy · 12.5만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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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설민석 강사가 전태일이 분신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하는 강연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인물을말하다_전태일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_Kdemocracy · 12.2만회 ·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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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짧게 정리한 기념사업회 영상입니다.

    창작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 A Single Spark(Aleumda-un cheongnyeon Jeon Taeil)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 38.4만회 · 1:3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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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전태일의 삶을 그린 1995년 영화 전편이라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전태일 열사 분신(1970) (2018.11.13/뉴스투데이/MBC)

    MBCNEWS · 3.5만회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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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70년 전태일 분신 당시를 다시 보여 주는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세상을 향한 절규... 전태일 열사 분신 (11월13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49회] / YTN2

    YTN 밀덕스 · 1,276회 ·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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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전태일 분신의 배경과 그날의 경과를 정리한 회차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전태일 분신 항거, 그 이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 꼬꼬멘터리 EP.01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9.8만회 ·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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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분신 이후 노동 현실의 변화를 짚는 꼬꼬무 후속 해설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50년 간의 '외침'…전태일이 꿈꾸던 세상, 지금은? (2020.11.12/뉴스데스크/MBC)

    MBCNEWS · 18.6만회 ·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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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전태일 분신 50년에 그가 바란 노동 현실을 되짚은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전태일 일기' 실물 공개…"절망은 없다" (2021.04.30/뉴스투데이/MBC)

    MBCNEWS · 1,662회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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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전태일이 남긴 일기 실물이 공개된 소식을 전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태일이〉메인 예고편

    뭅뭅 · 6.7만회 ·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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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전태일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의 예고편입니다.

  10. 1971

    4.27

    정치

    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약 95만 표 차로 누르고 3선에 성공했습니다.

    배경

    3선 개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 출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1969년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웠고, 1970년 9월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이 1차 투표에서 앞섰으나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역전해 후보가 됐습니다.

    전개

    김대중 후보는 향토 예비군 폐지,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 보장, 남북 교류, 대중 경제론 등을 공약하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번에 정권을 바꾸지 못하면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고 경고했습니다. 박정희 후보는 경제 성장과 안보를 강조했고 선거 막바지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호소했습니다.

    4월 27일 선거에서 박정희는 약 634만 표, 김대중은 약 540만 표를 얻어 박정희가 약 95만 표 차로 당선됐습니다. 영남에서는 박정희, 호남에서는 김대중에게 표가 크게 몰려 지역별 투표 차이가 뚜렷해졌습니다. 야당은 관권·금권 선거라며 반발했습니다.

    선거전은 뜨거웠습니다. 4월 18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의 유세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고, 박정희 후보도 4월 25일 같은 곳에서 대규모 유세를 열었습니다. 여당은 조직과 자금에서 크게 앞섰고, 야당은 공무원 동원과 돈 봉투 등 관권·금권 선거를 비판했습니다.

    투표율은 약 80%였고 득표율은 박정희 53.2%, 김대중 45.3%였습니다. 서울에서는 김대중이 앞섰지만, 영남에서 박정희가 큰 차이로 이겨 전체 승부를 갈랐습니다.

    결과와 의미

    5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89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 헌법을 만들어 대통령 직접 선거를 없앴고, 1971년 선거는 1987년까지 마지막 대통령 직선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9년 11월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2. 1970년 9월신민당 후보 경선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을 역전해 후보가 됐습니다.
    3. 1971년 4월 18일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김대중 후보의 대규모 유세가 열렸습니다.
    4. 1971년 4월 25일박정희 후보가 같은 곳에서 유세를 열고 ‘마지막 출마’라고 호소했습니다.
    5. 1971년 4월 27일박정희가 약 95만 표 차로 당선됐습니다.
    6. 1971년 5월 25일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89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습니다.
    7. 1971년 12월 6일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8. 1972년 10월 17일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10월 유신이 단행됐습니다.

    인물

    • 김대중1924~2009

      신민당 후보로 나서 박정희와 겨뤘습니다.

      전남 신안 하의도 출신으로 목포에서 사업을 하다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선거 뒤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됐고, 여러 차례 투옥과 사형 선고를 겪었습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돼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했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 박정희1917~1979

      공화당 후보로 세 번째 당선됐습니다.

      이 선거 이듬해 유신을 선포해 간접 선거로 두 차례 더 대통령이 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71년 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경제 성과에 대한 지지로 보는 쪽

    고도성장과 안보 불안 속에서 유권자 다수가 국정 경험이 있는 현직 대통령을 선택했으며, 서울 등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은 결과라고 봅니다.

    불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쪽

    공무원 조직 동원과 막대한 선거 자금, 언론 환경의 불균형 속에서 치러진 선거였고, 그런 조건에서도 야당이 45%를 얻은 것은 장기 집권에 대한 반대가 컸음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지역 투표의 시작?
    이 선거를 영호남 지역 대립 투표가 뚜렷해진 첫 선거로 보는 연구가 많습니다. 다만 선거 당시 지역 감정을 누가 얼마나 부추겼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25호-4.27 대통령 선거

    KTV 아카이브 · 1.3만회 ·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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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71년 4·27 대통령 선거 유세·투표·개표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유신시대를 내다봤던 신민당 김대중 후보 vs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박정희 후보 | 영구집권 반대 vs 마무리를 위해 한번 더 | 1971년 대선

    광주MBC · 3.9만회 ·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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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선 유세 공방을 다룬 광주MBC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34호-제7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KTV 아카이브 · 11.1만회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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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선거 뒤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 취임식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25호 -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TV · 1,392회 ·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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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71년 7대 대선을 전한 대한뉴스로, 기념재단 채널 업로드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50주년_7대 대선 관련 김대중 대통령의 구술 동영상 최초 공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5,907회 ·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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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 1971년 대선을 직접 회고한 구술 영상입니다.

    창작 ·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영삼 의원ㅣ#풀버전 #13회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9.9만회 · 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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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회차라 1971년 대선 전후를 창작으로 그립니다.

  11. 8.10

    사회

    광주 대단지 사건

    서울 철거민을 이주시킨 경기도 광주 대단지(지금의 성남)에서 기반 시설 없이 땅값만 요구받은 주민 수만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일로 성남시가 생겼습니다.

    배경

    1960년대 서울로 사람이 몰리면서 청계천 변 등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이 생겼습니다. 서울시는 도시 정비를 위해 이들을 철거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중원구)에 대규모 이주 단지를 만들어 옮기기로 했습니다.

    서울시는 1968년 무렵 이 계획을 세웠고, 김현옥 시장 시절 판자촌 철거와 시민 아파트 건설과 함께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주민에게 땅을 평당 2,000원에 넘기고 대금을 여러 해에 나눠 갚게 한다고 알렸습니다.

    전개

    1969년부터 철거민 이주가 시작돼 1971년 8월까지 약 2만 5천 가구, 12만여 명이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도로·상하수도·전기·화장실 같은 기반 시설이 거의 없었고, 서울까지 오가기 어려워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서울시가 약속과 달리 높은 땅값을 한꺼번에 내라고 하고 각종 세금을 매기자 주민 불만이 커졌습니다.

    1971년 8월 10일 주민 수만 명이 성남 출장소 앞에 모였습니다. 약속한 서울시장이 제시간에 오지 않자 분노한 주민들은 출장소 건물에 불을 지르고 차량을 빼앗아 거리로 나섰습니다. 서울시장이 주민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위는 6시간 만인 그날 오후 가라앉았습니다.

    1970년 서울시는 분양 받을 권리가 사고팔리며 투기가 번지자 전매 입주자에게 시가에 가까운 값을 한꺼번에 내게 하는 조치를 내놓았고, 주민들에게 청구된 땅값은 평당 8천~1만 6천 원에 이르렀습니다. 전매 입주자까지 더하면 1971년 여름 이곳 인구는 15만 명을 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8월 10일 모인 주민은 자료에 따라 3만~6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오전에 약속한 면담이 이뤄지지 않자 주민들은 출장소와 관용차에 불을 지르고 트럭 등을 빼앗아 거리로 몰려나갔습니다. 결국 양택식 서울 시장이 현장에 와 땅값 인하, 구호 양곡 확보, 생활 보조금 지급, 도로 확장 등을 약속하면서 사태가 가라앉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부는 땅값 인하와 세금 면제, 구호 대책을 약속했고, 시위 참여자 다수가 구속됐습니다. 이 지역은 1973년 성남시로 승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이 대규모로 집단 행동에 나선 첫 사건으로 꼽힙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다쳤고 주민 22명이 구속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기소된 21명은 1972년 1월 재판에서 2명이 실형, 18명이 집행 유예, 1명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 무렵서울시가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이주 단지를 만드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 1969년 9월철거민 이주가 시작됐습니다.
    3. 1970년 4월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로 김현옥 서울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이 뒤를 이었습니다.
    4. 1970년 7월서울시가 분양권 전매를 막으려 전매 입주자에게 땅값 일시 상환을 요구하는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5. 1971년 7월높은 땅값 일시 납부와 세금 고지서가 날아들면서 주민들이 투쟁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6. 1971년 8월 10일 오전주민 수만 명이 성남 출장소 앞에 모였고, 시장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자 시위가 격해졌습니다.
    7. 1971년 8월 10일 오후양택식 시장이 주민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며 시위가 가라앉았습니다.
    8. 1972년 1월기소된 주민 21명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9. 1973년 7월이 지역이 성남시로 승격했습니다.
    10. 2021년성남시가 조례로 사건 이름을 ‘8·10 성남(광주 대단지) 민권 운동’으로 정했습니다.

    인물

    • 김현옥1926~1997

      1966~1970년 서울 시장으로 판자촌 철거와 광주 대단지 이주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군 출신으로 부산 시장을 거쳐 서울 시장이 돼 도로·고가 도로·시민 아파트 건설을 빠르게 밀어붙여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습니다. 1970년 4월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 양택식1924~2012

      사건 당시 서울 시장으로, 주민과의 약속 시간에 늦었다가 현장에서 요구 사항을 받아들였습니다.

      경남 남해 출신 관료로 1970~1974년 서울 시장을 지냈습니다. 재임 중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을 이끈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사건의 성격과 이름

    생존권 운동으로 보는 쪽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기반 시설 없이 사람들을 옮겨 놓은 데 맞서 주민들이 생존권을 요구한 운동이었다고 봅니다. 성남시는 2021년 조례로 이 사건을 ‘8·10 성남(광주 대단지) 민권 운동’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폭력 사태의 측면도 함께 보는 쪽

    주민의 요구가 정당했더라도 관공서 방화와 차량 탈취 등 폭력이 있었으므로, 당시 ‘난동’으로만 부른 것도, 오늘날 ‘민권 운동’으로 부르는 것도 한쪽 면만 본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3년 동안 12만 명이 서울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이유. 8·10 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 읽어드립니다. [역사읽어드립니다 시즌3 EP.3] | 최태성 역사 강

    사피엔스 스튜디오 · 21.9만회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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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 강사가 광주 대단지 사건을 처음부터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20평대 땅을 준다?! 그러나 받은 곳은 천막촌? 1971 광주대단지 사건 [꼬꼬무 238회 요약#1] #꼬꼬무 #달리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28.2만회 ·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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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대단지 사건 전 과정을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74_광주 대단지 사건 l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6만회 ·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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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 강사가 8월 10일 광주 대단지 사건을 짧게 정리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경기문화재단-7]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성남, 광주 대단지 사건 | 황현필

    황현필 한국사 · 12.7만회 ·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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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필 강사가 성남 형성과 광주 대단지 사건을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도시빈민투쟁 광주대단지 사건 (2018.08.10/뉴스투데이/MBC)

    MBCNEWS · 1.1만회 ·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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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을 다시 보여 주는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서울시의 부족한 월동대책에 더욱더 퍼져버린 ‘광주대단지 인육 괴담’

    SBS STORY · 2,508회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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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꼬무에서 광주 대단지 주민의 생존권 투쟁을 다룬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성남시, '광주대단지 사건' 50주년 맞아 재조명 / SBS

    SBS 뉴스 · 1,473회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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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대단지 사건 50주년을 맞아 사건을 재조명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122회 광주대단지 사건 특집

    이이제이생활역사협동조합 · 1.5만회 · 2: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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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대단지 사건 특집 팟캐스트로,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12. 8.23

    사회

    실미도 사건

    1·21 사태 뒤 북파 목적으로 비밀리에 훈련받던 684부대 대원들이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향하다 교전 끝에 대부분 숨졌습니다.

    배경

    1968년 1·21 사태 뒤 정부는 북한에 보복하기 위해 평양에 침투해 김일성을 제거한다는 목표로 비밀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1968년 4월 공군 소속으로 창설되고 중앙정보부가 관리한 684부대로, 북한 124군 부대원 수와 같은 31명을 모아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시켰습니다. 대원 가운데에는 민간인과 교도소 수감자 출신이 포함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개

    대원들은 극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았고 훈련 중 사고와 처형 등으로 7명이 숨졌습니다. 그러다 남북 관계가 대화 쪽으로 바뀌면서 침투 작전은 취소됐고, 대원들은 기약 없이 섬에 남겨졌습니다. 처우도 나빠졌습니다.

    1971년 8월 23일 대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했습니다. 인천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고,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 대부분이 수류탄으로 자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민간인도 숨졌습니다. 살아남은 대원 4명은 군사 재판을 거쳐 1972년 3월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대는 1968년 4월 1일 창설됐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무렵 대원 24명은 섬에 있던 기간병을 공격해 24명 가운데 18명을 살해하고 배로 섬을 빠져나왔습니다. 인천에 올라온 뒤에는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고, 도중에 버스가 멈추자 다른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서울 대방동에서 군경의 저지에 막힌 대원들은 교전 끝에 대부분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기간병 18명, 대원 20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 등 46명이 숨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부는 처음에 ‘무장 공비의 서울 침투’로 발표했다가 곧 ‘군 특수범’의 난동으로 바꿨고, 부대의 실체는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2003년 영화 「실미도」가 큰 흥행을 거두며 관심이 커졌고, 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부대 창설과 사건 경위를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사형된 대원들의 유해를 찾는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22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불법 모집과 사형 뒤 유해 암매장 등을 인권 침해로 보고 국가 사과와 유해 발굴을 권고했습니다. 국방부는 2024년 10월 유해 발굴을 시작하며 장관 명의로 사과했고, 2026년 5월에도 경기 고양 벽제 시립 묘지 등에서 발굴을 이어 갔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68년 1월 21일북한 124군 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습니다.
    2. 1968년 4월 1일북한 침투를 목표로 한 684부대가 창설돼 실미도에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3. 1968~1971년가혹한 훈련 속에 대원 7명이 숨졌고, 남북 대화 분위기 속에 작전은 취소됐습니다.
    4.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무렵대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했습니다.
    5. 1971년 8월 23일 오후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던 대원들이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하다 대부분 자폭했습니다.
    6. 1972년 3월 10일살아남은 대원 4명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7. 2006년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부대 창설과 사건 경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8. 2022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 사과와 유해 발굴을 권고했습니다.
    9. 2024년 10월국방부가 유해 발굴을 시작하며 공식 사과했습니다.

    인물

    • 김형욱1925~1979

      684부대 창설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부대를 만들고 관리한 기관의 책임자였습니다.

      5·16에 참여한 군인으로 1963~1969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습니다.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증언을 했고,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영화와 사실의 차이
    영화 「실미도」는 대원들을 모두 사형수 출신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민간인 모집으로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영화의 장면 상당수는 극적 재구성이므로 조사 보고서와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우리 애들 무장공비 아닙니다" 영화와는 달랐던 실미도 사건의 진실 | 그알로 보는 '실미도 사건'

    그것이 알고싶다 · 286.1만회 ·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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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알고싶다의 실미도 탐사 보도를 묶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꼬무2] 요약 '임무는 김일성 암살' 1968년 실미도에 끌려가 버림받은 청년들 | SBS NOW

    SBS · 740.2만회 ·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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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부대의 창설부터 최후까지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만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 / 실미도 사건

    퍄퍄킴 역사 · 56.5만회 ·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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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사건 경위를 그림으로 재구성하고 참고 문헌을 밝혔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실미도 사건. 김일성암살조는 왜 청와대로 가려했을까?

    황현필 한국사 · 28.1만회 ·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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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필 강사가 684부대 창설부터 탈출까지 실미도 사건을 강의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그때 그 다큐] '끝나지 않은 비극, 실미도' (2004.11.23)

    MBC충북NEWS · 44.6만회 · 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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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MBC충북이 만든 실미도 사건 추적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3년간의 지옥, 군인들은 탈출을 감행한다.. 실미도 사건

    궁금소 · 198만회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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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사건을 요약했고 영화 장면을 자료로 씁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깃꼬깃] '인간 병기'로 길러졌지만 결국엔 버림받은 31명의 청년들ㅣ영화 '실미도'의 실화 오소리 작전! #꼬꼬무 #달리 #DALI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8.3만회 ·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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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소리 작전과 684부대원의 최후를 다룬 꼬꼬무 편집본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나를 쏘고 가라ㅣ영화 [실미도] 실화 체크!

    청년재단 · 16.5만회 · 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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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실미도와 실제 사건을 비교해 사실 여부를 짚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서울 한복판 총격전... 실미도 사건 (8월23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37회] / YTN2

    YTN 밀덕스 · 3,537회 ·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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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실미도 부대원의 서울 총격전 경과를 정리한 회차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그때 그 뉴스] 실미도 부대 실체 공식인정

    KBS News · 4,439회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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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가 실미도 부대의 실체를 공식 인정한 당시 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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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공작원' 46년 만에 안식 찾았다 / SBS

    SBS 뉴스 · 4만회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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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공작원 유해가 46년 만에 안장된 소식을 전한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단독] 컨테이너에 영면한 실미도 훈련병 첫 공개 / YTN

    YTN · 7,200회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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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테이너에 보관된 실미도 훈련병 유해를 처음 공개한 보도입니다.

  13. 12.6

    정치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1971.12.6 ~ 12.27 · 22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뒤 국회는 대통령에게 경제 규제·언론 통제·단체 교섭권 제한 등 포괄적 권한을 주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습니다.

    •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을 제한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 이듬해 유신 체제로 이어지는 비상 대권 행사의 선례가 됐습니다.

    배경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눌렀고,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이 크게 약진했습니다. 여기에 광주 대단지 사건(8월), 실미도 사건(8월) 등 사회 불안까지 겹치며 박정희 정부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주한 미군 7사단이 철수했고, 미국과 중국의 화해 움직임 등 냉전 데탕트 분위기가 한반도 안보 지형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전개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북한의 남침 위협과 국제 정세 불안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12월 27일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변칙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국가 동원령 선포, 옥외 집회·시위 규제, 언론·출판에 대한 특별 조치, 근로자의 단체 교섭권·단체 행동권 제한 등 폭넓은 비상 대권을 줬습니다. 신민당은 법안 처리에 반대해 표결에 불참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법은 노동자의 노동 3권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됐고,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비상 대권 행사의 선례가 됐습니다. 야당과 재야에서는 헌법이 정한 국민 기본권을 지나치게 위축시키는 위헌적 입법이라는 반발이 거셌지만, 여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법안은 그대로 통과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71년 4월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근소한 차이로 눌렀습니다.
    2. 1971년 12월 6일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3. 1971년 12월 27일국회가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습니다.
    4. 1972년 10월 17일10월 유신이 선포되며 이 법에서 예고된 비상 대권 행사가 훨씬 더 큰 규모로 이어졌습니다.
    5. 1981년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이 법은 폐지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국가 비상사태 선언의 정당성

    안보 위협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보는 쪽

    주한 미군 감축과 남북 긴장 속에서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권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보는 쪽

    실제 안보 위기보다 국내 정치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이듬해 유신 체제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한 조치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56호-국가 비상사태 선언

    KTV 아카이브 · 2,500회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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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972

    경제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2 ~ 1976 · 4년

    중화학 공업화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고 국제 수지를 개선하며 주곡 자급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철강·기계·조선·전자·석유 화학 공업 육성에 무게를 뒀습니다.

    • 제조업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을 1970년 35.9%에서 1976년 40.5%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 4대강 유역 개발과 도로망 확충으로 지역 개발 균형도 함께 추구했습니다.

    배경

    제2차 계획으로 수출 중심 성장의 기반을 다진 정부는, 산업 구조 자체를 가벼운 공업에서 무거운 공업으로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안보 측면에서도 1968년 1·21 사태 등을 겪으며 방위 산업의 밑바탕이 될 중화학 공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 미군 감축 움직임도 자주국방 역량을 뒷받침할 중화학 공업 육성을 서두르게 한 배경이 됐습니다.

    전개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해 안정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장·안정·균형의 조화'를 기본 정신으로 내걸고, 산업 구조 고도화와 국제 수지 개선, 주곡 자급을 통한 자립적 경제 구조를 추구했습니다.

    철강·일반 기계·전기 기계·자동차·조선·전자·석유 화학 공업을 중점 육성 대상으로 삼아, 제조업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을 1970년 35.9%에서 1976년 40.5%로, 공산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14%에서 33%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4대강 유역 개발과 도로망 확충 등 국토의 종합적 개발로 지역 개발의 균형을 이루는 것도 함께 추구했습니다. 목표 성장률은 제2차 계획 때보다 낮은 8.6%로 잡아 안정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계획 기간 동안 포항종합제철 준공, 현대조선 울산조선소 준공, 창원·여천 등 중화학 공업 기지 조성이 잇달아 이뤄지며 한국 산업 구조가 실제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72년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확정됐습니다.
    2. 1973년 1월 12일정부가 중화학 공업화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3. 1973년포항종합제철이 첫 쇳물을 뽑아냈습니다.
    4. 1974년현대조선 울산조선소가 준공됐습니다.
    5. 1976년계획이 끝나며 중화학 공업 비중이 목표에 가깝게 늘어났습니다.
    6. 1977년성장, 능률, 형평을 내건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뒤를 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실 기록 · 기록

    "정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NATV 국회방송 · 506회 ·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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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7.4

    외교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이 분단 뒤 처음으로 통일의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밝히고 남북 조절 위원회를 두기로 했습니다.

    • 석 달 뒤 남쪽은 유신 헌법을, 북쪽은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두 체제 모두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배경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나라가 스스로 맡아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내놓았습니다. 1971년 주한 미군 제7사단이 철수했고, 같은 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데 이어 1972년 2월 닉슨이 직접 베이징을 찾았습니다. 냉전의 두 진영이 서로 손을 내밀자 남북한도 대화 없이 맞서기만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가 북한에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적십자회가 받아들이면서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당국이 공식적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이 적십자 접촉을 통로로 더 높은 차원의 비밀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전개

    1972년 5월 초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났고, 5월 말에는 북한의 제2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두 차례 오간 비밀 협상 끝에 7월 4일 오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 성명이 발표됐습니다.

    성명은 이후락과 김영주(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서명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사상·이념·제도의 차이를 넘어 민족적 대단결을 이루는 방향으로 한다는 3대 원칙을 밝혔습니다. 이 밖에 서로 비방하지 않고 무장 도발을 하지 않을 것,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 전화를 놓을 것, 남북 조절 위원회를 만들어 합의 사항을 추진할 것 등을 담았습니다.

    결과와 의미

    남북 조절 위원회가 꾸려져 몇 차례 회의가 열렸고 남북 적십자 본회담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렸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고,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북한이 대화 중단을 선언하면서 공동 성명의 흐름은 멈췄습니다.

    성명 발표 석 달 뒤 남쪽에서는 10월 유신이 선포됐고, 북쪽에서는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만들어져 김일성이 국가 주석에 올랐습니다. 남북 모두 대화 국면을 지나며 권력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다만 성명의 자주·평화·민족 대단결 원칙은 이후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등 남북 합의 문서에 거듭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71년 8월 12일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적십자 회담을 북한에 제의했습니다.
    2. 1971년 9월 20일판문점에서 남북 적십자 예비 회담이 처음 열렸습니다. 분단 뒤 남북 당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마주 앉은 첫 회담입니다.
    3. 1972년 5월 2일~5일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영주, 김일성과 만났습니다.
    4. 1972년 5월 29일~6월 1일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에 와 이후락과 회담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5. 1972년 7월 4일 오전서울과 평양에서 같은 시각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습니다. 이후락이 서울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평양 방문 사실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6. 1972년 8월 30일평양에서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이 열렸습니다. 이어 9월에는 서울에서 제2차 본회담이 열렸습니다.
    7. 1972년 11월 30일서울에서 남북 조절 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려 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8. 1973년 8월 28일북한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이유로 김영주 명의 성명을 내 남북 대화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7·4 남북 공동 성명 제1항(1972)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흔히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이라 부르는 대목입니다.

    인물

    • 이후락1924~2009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평양을 비밀 방문해 김일성과 만나고 공동 성명에 서명했습니다.

      군인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1963~1969), 주일 대사를 거쳐 1970년 중앙정보부장이 됐습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드러난 뒤 부장에서 물러났습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 축재자로 지목돼 정계를 떠났습니다.

    • 김영주1920~2021

      북한 쪽 서명자로 남북 조절 위원회 북측 공동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김일성의 동생으로 1960년대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지내며 한때 후계자로 거론됐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정일이 후계자로 자리를 굳히면서 권력 중심에서 멀어졌고, 뒤에 국가 부주석 등 명예직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일 논의의 출발점으로 보는 쪽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당국이 통일의 원칙에 합의했고, 그 3대 원칙이 뒤의 남북 기본 합의서와 정상 회담 합의로 이어졌다는 점을 중시합니다. 냉전이 누그러지는 국제 환경을 활용해 대화 통로를 연 첫 시도였다고 평가합니다.

    양쪽 정권의 권력 강화에 쓰였다고 보는 쪽

    성명 직후 남쪽은 유신 체제, 북쪽은 주석제를 도입했다는 점을 듭니다. 통일 논의가 국민의 참여 없이 정보기관끼리의 비밀 접촉으로 이뤄졌고, 오히려 ‘통일에 대비한 체제 정비’라는 명분으로 독재를 굳히는 데 이용됐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자주’라는 말의 해석 차이
    성명의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두고 북한은 주한 미군 철수를 뜻한다고 해석했고, 남한은 유엔 등 국제 협력을 배제하는 뜻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같은 문장을 서로 다르게 읽은 것이 이후 대화가 진전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미중 화해의 흐름은 동아시아 전체로 번졌습니다. 1972년 9월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과 국교를 맺었고, 일본은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었습니다. 1970년대 초 서독이 동독과 관계 정상화에 나선 ‘동방 정책’도 분단국 사이의 대화라는 점에서 자주 비교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사회주의 운동

    해설·교양 · 다큐

    박정희와 김일성의 긴박한 왕래! 7.4남북공동성명 막후의 밀사 비하인드스토리 (KBS 20130810 방송)

    KBS 다큐 · 10.6만회 · 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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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7·4 공동 성명 뒤 밀사 왕래를 다룬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다큐멘터리극장 – 7.4 남북공동성명 / KBS 19940703 방송

    KBS 히스토리 · 5.2만회 · 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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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성명 기초에 참여한 인물 증언을 담은 1994년 KBS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87호-남북 공동성명

    KTV 아카이브 · 1,086회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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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61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KBS 히스토리 · 9,537회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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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를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15_[이벤트 종료] 7.4 남북 공동 성명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7만회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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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최태성 강사가 7·4 공동 성명을 짧게 설명합니다.

    사실 기록 · 기록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KTV 국민방송 · 1.7만회 ·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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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72년 이후락 부장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한국정책방송KTV] 다시보는 대한늬우스(12.07.08)

    KTV 국민방송 · 3,731회 ·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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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7·4 남북 공동 성명을 보도한 1972년 대한뉴스를 다시 소개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7·4 남북공동성명은 유신헌법을 위해 만들어졌다? 남북공동성명 후 독재를 시작한 박정희와 김일성 | 이제 만나러 갑니다 547 회

    play 채널A · 3,996회 ·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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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공동 성명과 유신 헌법의 관계를 증언으로 짚는 이만갑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은] 7.4 남북공동성명 (1972.7.4.) / KBS 2022.07.04.

    KBS News · 1,922회 ·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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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짧게 되짚은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北, 집요한 정상회담 요구...7·4 남북공동성명 협의 과정 공개 / YTN

    YTN · 1,486회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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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공개된 외교문서로 7·4 공동 성명 협의 과정을 전한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7·4 공동성명 비밀협상 막전막후…남북 첫 당국회담 문서 공개 / 연합뉴스TV (YonhapnewsTV)

    연합뉴스TV · 779회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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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7·4 남북 공동 성명 비밀 협상 문서 공개를 다룬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통일교육 클립영상] 큰 별★최태성 쌤의 한반도 통일 역사(7.4남북공동성명에서 판문점선언까지)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 8,017회 ·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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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최태성 강사가 7·4 성명부터 판문점 선언까지 통일 역사를 훑습니다.

  16. 8.3

    경제

    8·3 조치(사채 동결)

    정부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을 선포해 기업이 진 모든 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강제 조정했습니다. 신고된 사채는 4만여 건, 3,456억 원에 달했습니다.

    • 대출 금리를 연 15.5%, 예금 금리를 12%로 내리고 200억 원의 특별 융자를 지원했습니다.
    • 채권 금액이 적을수록 동결 기간을 짧게 둬 소액 채권자를 먼저 풀어줬습니다.

    배경

    1960년대 후반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 아래 기업들은 은행 대출만으로는 부족한 자금을 고금리 사채 시장에서 끌어다 썼습니다. 1971년 무렵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사채 이자 부담에 짓눌린 기업들이 잇달아 도산 위기에 몰렸습니다.

    전개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정부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을 선포했습니다. 국회 동의 없이 대통령 긴급 명령권으로 시행된 조치였습니다.

    기업과 사채권자 사이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이날짜로 무효가 되고, 월리 1.35%(연리 16.2%),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이라는 새 조건으로 강제 전환됐습니다. 8월 3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동안 신고를 받았는데, 신고된 사채는 4만 677건, 3,456억 원에 달해 당시 통화량의 약 80%, 여신 잔액의 34% 수준이었습니다.

    정부는 동시에 200억 원의 특별 저리 융자를 풀고 대출 금리를 연 15.5%, 예금 금리를 12%로 내렸습니다. 소액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채권 금액이 적을수록 동결 기간을 짧게 둬, 30만 원 미만은 즉시, 300만 원 미만은 4년 안에 동결에서 풀리도록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조치로 많은 기업이 급한 불을 끄고 재무 구조를 추스를 시간을 벌었습니다. 정부는 이렇게 확보한 여력을 바탕으로 이듬해 중화학 공업화 선언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만 개인의 재산인 사채 채권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재조정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71년경기 침체 속에 기업들의 사채 이자 부담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2. 1972년 8월 3일 0시'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이 시행되며 모든 사채가 동결됐습니다.
    3. 1972년 8월 3~7일닷새 동안 사채 신고를 받아 4만 677건, 3,456억 원이 신고됐습니다.
    4. 1972년 8월정부가 200억 원의 특별 융자를 방출하고 대출·예금 금리를 낮췄습니다.
    5. 1973년 1월정부가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며 8·3 조치로 확보한 기업 여력을 산업 고도화에 투입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8·3 조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산업 정책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쪽

    부실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살려 중화학 공업화의 재무적 발판을 마련한 과감한 정책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사유 재산권 침해로 보는 쪽

    국회 동의 없이 대통령 긴급 명령만으로 개인의 채권·채무 관계를 일방적으로 바꾼 초법적 조치였고, 사채를 빌려준 서민보다 큰 기업을 우선 구제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부실 위기에 몰린 기업을 살려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사채권자의 재산권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제한한 초법적 조치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8·3 사채 동결 조치, 위기를 넘긴 현대ㅣKBS 230305 방송

    KBS 히스토리 · 8,077회 ·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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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

1972년 만들어진 헌법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을 크게 몰아준 체제의 바탕이 됐습니다.

대통령을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뽑게 하고 임기를 6년으로 늘리며 연임 제한을 없앴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 추천, 국회 해산, 긴급 조치권을 가졌습니다.

긴급 조치는 법률 없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명령으로, 유신 헌법 비판 자체를 처벌했습니다. 대법원은 2013년 긴급 조치 1·4·9호가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능

[꼬꼬무 166회 요약] 절대 권력의 시작과 끝,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43.6만회 ·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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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삼권]이 오로지 대통령에게 집중된 '유신헌법' 등장 차이나는 클라스(jtbclecture) 206회 | JTBC 210506 방송

교양 Voyage · 5.4만회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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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상한국사 I 066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KBS 히스토리 · 4만회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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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정부가 5년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자원을 몰아준 경제 성장 계획입니다(1962~1996).

1960년대에는 섬유·가발 같은 경공업과 수출,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화학 같은 중화학 공업에 집중했습니다. 수출 주도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성장의 그늘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정경 유착,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지적됩니다.

다큐

영상한국사 I 117 1961년 국토건설사업,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추진

KBS 히스토리 · 1.9만회 ·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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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강의기적, 세계가 경악한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진짜 비밀

비밀의경제학 · 1.7만회 ·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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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퍼진,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내건 운동입니다.

노동·농민·청년 운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 됐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에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치안 유지법으로 강하게 탄압했고, 광복 뒤 좌우 대립의 한 축이 됐습니다.

강의

[5.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통합운동 한 눈에 정리! (20년대, 30년대, 40년대) (20분컷 정리)

원유철한국사TV · 1만회 ·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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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뭐가 다른 걸까??? | 정치 외교

지식한잔 · 207.1만회 ·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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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