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정변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인들이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장면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사흘 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 반공, 부정부패 일소, 경제 재건, 과업이 끝나면 민정 이양을 내건 '혁명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사회단체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배경
1950년대 후반 한국군 안에서는 진급 적체와 고위 장성의 부패, 부정 선거 개입에 대한 불만이 쌓였습니다. 1960년 4·19 뒤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 영관 장교들은 고위 장성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 운동’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 등이 중심이 된 모임이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정변 세력은 장면 정부의 혼란, 잇따른 시위와 급진 통일 운동, 경제난을 거사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대 제1여단, 공수 부대, 일부 포병 부대 등 약 3,600명의 병력이 한강을 건넜습니다. 한강 인도교에서 헌병대와 짧은 총격전이 있었지만 병력은 곧 중앙청, 방송국, 육군 본부 등을 장악했습니다. 오전 5시 무렵 라디오로 군사 혁명 위원회 이름의 ‘혁명 공약’이 발표됐고,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혁명 공약은 반공을 국시의 첫째로 삼고, 부패와 구악을 없애며, 경제를 재건하고, 과업이 끝나면 정권을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넘기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육군 참모 총장 장도영이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합법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지만,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동의하지 않았고, 제1군 사령관 이한림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5월 18일 장면 내각이 총사퇴했고, 5월 19일 군사 혁명 위원회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7월에는 장도영이 물러나고 박정희가 의장이 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회와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정당·사회단체 활동이 금지됐습니다. 군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부정 축재자 처리, 깡패 소탕, 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을 벌였으며,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약 2년 7개월의 군정 끝에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1979년까지 18년 동안 집권했습니다.
이 정변은 한국 현대사에서 군이 무력으로 헌정 질서를 중단시킨 첫 사례가 됐습니다. 정부와 교과서의 공식 명칭은 시기에 따라 ‘5·16 혁명’, ‘5·16 군사 혁명’에서 지금의 ‘5·16 군사 정변’으로 바뀌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사료로 읽기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인물
박정희1917~1979
김종필1926~2018
장도영1923~2012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더 알아두기
- 명칭의 변화
- 당시 주도 세력은 '혁명'이라 불렀고, 경제 성장의 출발점이 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 선거로 들어선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헌정 중단이라는 평가가 있으며, 현행 교과서는 '군사 정변'으로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