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틈타 정변을 일으켜 새 정부를 세웠습니다. 청군이 개입하고 일본군이 약속과 달리 물러나면서 사흘 만에 끝났습니다.
- 14개조 정강에는 청에 대한 사대 폐지,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지조법(토지세) 개혁, 재정의 호조 일원화가 담겼습니다.
-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홍영식은 현장에서 피살됐습니다.
배경
임오군란 뒤 개화파는 두 흐름으로 나뉘었습니다.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동양의 도덕과 제도는 지키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쪽(온건 개화파)이었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정치·사회 제도까지 바꾸자는 쪽(급진 개화파)이었습니다.
청의 간섭이 심해지고 민씨 정권이 청에 기울면서 급진 개화파의 입지는 좁아졌습니다. 김옥균이 추진한 일본 차관 도입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이끌던 신식 군대가 해체되는 등 개혁을 펼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1884년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조선에 주둔한 청군 절반을 빼내자, 급진 개화파는 기회가 왔다고 봤습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도 병력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전개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던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 잔치가 열렸습니다. 개화파는 근처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일으켰고, 이때 민영익이 칼에 맞아 크게 다쳤습니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으로 가서 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고종에게 알린 뒤, 방어하기 쉬운 경우궁으로 옮기게 하고 일본군에게 호위를 맡겼습니다.
그날 밤과 이튿날 새벽, 개화파는 입궐한 민태호·민영목·조영하 등 민씨 정권과 청에 가까운 대신들을 살해했습니다. 12월 5일 새 정부를 꾸리고, 12월 6일 개혁 방향을 담은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김옥균의 기록 『갑신일록』에 전하는 14개조 정강에는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의 귀국과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확립, 지조법 개혁, 재정의 호조 일원화, 내시부 폐지 등이 담겼습니다.
12월 6일 오후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 약 1,500명이 창덕궁을 공격했습니다. 수가 적은 일본군은 싸움을 피하고 물러났고, 개화파의 군대는 무너졌습니다. 고종을 모시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게 살해됐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정변은 사흘 만에 끝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정변 가담자의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큰 화를 입었습니다. 서재필의 가족도 이때 희생됐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사실상 무너졌고,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개혁의 흐름이 한동안 약해졌습니다.
청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후 위안스카이가 서울에 머물며 내정에 깊이 간섭했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한성 조약, 청과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어 사태를 마무리했습니다.
14개조 정강에 담긴 신분제 폐지·재정 일원화 같은 개혁 과제는 10년 뒤 갑오개혁에서 상당 부분 제도로 실현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사료로 읽기
“대원군을 며칠 안에 모셔 올 것([조공], 허례는 의론하여 폐지함)”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어려움을 펴게 하는 동시에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인물
김옥균1851~1894
홍영식1855~1884
서광범1859~1897
서재필1864~1951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갑신정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토지 개혁의 빠짐
더 알아두기
- 14개조 정강의 출처
- 오늘날 남은 흔적
- 근대 국가를 세우려 한 첫 정치 개혁 시도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 민중의 지지 없이 소수가 일본 군대에 기대어 추진했다는 한계도 함께 지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