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대한제국기

러일 전쟁과 일본의 내정 간섭

러일 전쟁 중 일본은 한일 의정서와 제1차 한일 협약으로 내정에 손을 뻗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으로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습니다.

기간
1904.2.8 ~ 1905.9.5 · 1년 6개월
누가 다스렸나
황제 고종
담긴 것
사건 8 · 영상 40 · 영화·드라마 3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6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90분) — 고종의 충신이던 이완용은 왜 매국노가 되었나

디글 · 272.7만회 · 1: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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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행적을 따라 독립 협회부터 을사늑약까지 다룹니다.

1896.7.2 ~ 1910.8.29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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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KBS 히스토리 · 129.6만회 ·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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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시기를 인물 중심으로 봅니다.

1896.7.2 ~ 1910.8.29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 러일 전쟁이 조선에서 일어난 이유(최태성 강연)

tvN Joy · 123.4만회 · 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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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유를 다룬 최태성 강연입니다.

1904.2.8 ~ 1905.9.5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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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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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러일 전쟁 →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3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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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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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0· 공식 영상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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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5.4.10 ~ 1905

SBS.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의사가 된 백정 출신 청년 이야기

영화 · 2002· 제목만

「YMCA 야구단」

배경 1905 ~ 1905.11.17

을사늑약 무렵 조선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를 코미디로

사건 연표 8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광무개혁 (~1904),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1904)

  1. 1904

    2.8

    전쟁

    러일 전쟁

    1904.2.8 ~ 1905.9.5 · 1년 6개월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입니다. 대한제국은 전쟁 직전 국외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일본이 이겨 포츠머스 조약으로 끝났습니다.

    •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을 인정했습니다.

    배경

    청일 전쟁 뒤 러시아는 삼국 간섭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만주에 철도를 놓고 뤼순·다롄을 빌려 세력을 넓혔습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만주에 군대를 보낸 러시아는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았고, 1903년에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해 조차를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영일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했습니다. 한국과 만주를 두고 두 나라가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하지 못했고, 전쟁 위기가 커졌습니다.

    전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전쟁이 나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국외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8일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2월 9일 제물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공격했으며, 같은 날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일본은 2월 10일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일본은 2월 23일 한일 의정서를 강요해 한국 땅을 군사 기지로 쓸 수 있게 했고, 8월에는 제1차 한일 협약으로 고문을 두었습니다. 전쟁은 만주에서 이어져 1905년 1월 뤼순 요새가 함락됐고, 3월 펑톈(봉천) 전투에서도 일본이 이겼습니다.

    1905년 5월 27~28일 유럽에서 먼 길을 돌아온 러시아 발트 함대가 대한 해협(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 크게 졌습니다. 두 나라 모두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부족해지자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에 나섰고,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을 인정하고, 뤼순·다롄 조차권과 창춘 이남 철도,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전쟁 중 일본은 1905년 2월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고,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8월 제2차 영일 동맹으로 영국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견제가 사라지자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대국을 이긴 이 전쟁은 여러 식민지 민족에게 충격을 주었고, 러시아에서는 1905년 혁명의 한 원인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3년 5월러시아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했습니다.
    2. 1904년 1월 21일대한제국이 국외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3. 1904년 2월 8일 밤일본 해군이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했습니다.
    4. 1904년 2월 9일제물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두 척이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침몰했고,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5. 1904년 2월 10일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6. 1905년 1월 초뤼순 요새가 일본군에 함락됐습니다.
    7. 1905년 3월펑톈 전투에서 일본이 이겼습니다.
    8. 1905년 5월 27~28일대한 해협(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가 크게 졌습니다.
    9. 1905년 9월 5일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10. 1905년 11월 17일일본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 포츠머스 강화 조약 제2조(1905)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번역. 영문 원문은 ‘predominant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 interests in Korea’라고 적었습니다.

    인물

    • 고종1852~1919

      전쟁 직전 국외 중립을 선언해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중립 선언이 무시된 뒤에도 러시아·미국 등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침략을 알리려 했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일본 정계 원로로서 전쟁 중 특파 대사로 한국에 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이끌었습니다.

      일본 초대 총리대신으로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고, 초대 한국 통감을 지냈으며,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숨졌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대한제국의 중립 외교는 의미가 있었나

    나름의 외교적 대응으로 보는 쪽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강대국 사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국제 사회에 중립을 알린 것은 합리적 선택이었고, 선언을 여러 나라에 알렸다는 점에서 외교적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봅니다.

    실효가 없었다고 보는 쪽

    중립을 지킬 군사력도, 이를 보장해 줄 강대국과의 약속도 없었기 때문에 선언은 일본군의 서울 진주 앞에서 바로 무너졌고, 오히려 준비 없는 외교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한반도 운명의 격전 2편 — 끝나지 않은 패권, 러일 전쟁

    KBS 히스토리 · 54.4만회 · 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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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러일 전쟁의 국제 배경과 한반도 전장을 다룬 KBS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하이라이트#] '러일전쟁이 일제강점기의 시작인 이유' 큰별쌤 최태성 강연 풀버전#벌거벗은세계사 | EP.11 | tvN 210320 방송

    tvN Joy · 38.4만회 · 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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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최태성이 러일전쟁을 강연한 풀버전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31회 무삭제 확장판]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ㅣ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 YTN2

    YTN 밀덕스 · 21.5만회 · 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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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러일전쟁이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을 다룬 YTN 뉴스멘터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스페셜 을사늑약 100년, 그때 일본이 탄생했다 : 1편 러일전쟁

    KBS 히스토리 · 15.8만회 · 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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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러일전쟁과 일본의 부상을 다룬 KBS 스페셜 1편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러시아 vs 일본(feat. 영국) — 러일 전쟁

    지식해적단 · 98.1만회 ·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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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8%추천 ★★★★★

    러일 전쟁의 국제 관계를 개인 채널이 재미 위주로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국권피탈과정(ft.러일전쟁, 가쓰라태프트밀약, 을사늑약, 정미7조약) 10분 끝내기 | 황현필

    황현필 한국사 · 13.3만회 ·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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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국권 피탈 과정을 정리하며 러일전쟁을 첫머리에 다루는 강의입니다.

  2. 2.23

    조약

    한일 의정서

    러일 전쟁 중 일본이 강요한 조약으로, 일본이 군사상 필요한 한국 땅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배경

    러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반도를 군대의 통로이자 보급 기지로 써야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서울에 군대를 들인 일본은, 이를 조약의 형식으로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일본군은 선전 포고 전날인 2월 9일 이미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고, 궁궐 주변에도 병력이 배치됐습니다. 대한제국 정부 안에는 러시아 쪽에 기대려는 관료와 일본과 손잡으려는 관료가 나뉘어 있었는데, 일본은 반대하는 관료를 제거하고 협조하는 관료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조약을 밀어붙였습니다.

    전개

    1904년 2월 23일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외부대신 임시 서리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한일 의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이를 반대하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의정서는 대한제국이 시정 개선에 관해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제1조), 제3국의 침해나 내란이 있으면 일본이 필요한 조치를 하며 이를 위해 군사상 필요한 곳을 수시로 쓸 수 있고(제4조), 대한제국은 이 의정서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제5조)고 정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제3조)고 적었습니다.

    의정서는 모두 6개 조로, 제6조는 이 의정서에 관련된 세부 사항은 두 나라 대표가 그때그때 정한다고 했습니다.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조약에 서명한 이지용 등을 규탄하는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일본군은 이를 근거로 서울 용산 등 곳곳의 땅을 군용지로 차지하고, 전쟁에 필요한 철도·통신 시설을 마음대로 놓았습니다. 대한제국은 그해 5월 러시아와 맺은 조약을 폐기해야 했습니다.

    국외 중립은 사실상 무너졌고, 이후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과 을사늑약(1905년 11월)으로 이어지는 국권 침탈의 첫 단계가 됐습니다.

    일본은 1904년 3월 한국 주차군을 편성해 군대를 상주시켰고, 5월 31일에는 각의에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방침(대한 방침·대한 시설 강령)을 정했습니다. 한일 의정서는 이 방침을 실행하는 법적 근거로 쓰였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4년 1월 21일대한제국이 국외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2. 1904년 2월 9일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3. 1904년 2월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4. 1904년 2월 23일이지용과 하야시 곤스케가 한일 의정서에 서명했습니다.
    5. 1904년 3월일본이 한국 주차군을 편성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 대사로 서울에 왔습니다.
    6. 1904년 5월 18일대한제국이 러시아와 맺은 조약과 협정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7. 1904년 5월 31일일본 각의가 대한제국 보호국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8. 1904년 8월 22일제1차 한일 협약이 맺어져 고문 정치가 시작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신속하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 대일본제국 정부는 앞 조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상황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
    — 한일 의정서 제4조(1904) — 국사편찬위원회 번역원문의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臨機收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절이 일본군이 한국 땅을 군용지로 차지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인물

    • 하야시 곤스케1860~1939

      주한 일본 공사로서 한일 의정서와 제1차 한일 협약 체결을 주도했습니다.

      1899년부터 주한 공사로 일했고, 1905년 을사늑약 때에도 일본 측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뒤에 여러 나라에서 공사·대사를 지냈습니다.

    • 이지용1870~1928

      외부대신 임시 서리로 한일 의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왕족 출신 관료로, 1905년 내부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찬성해 을사오적으로 불립니다. 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98 러일전쟁 발발과 한일의정서 체결

    KBS 히스토리 · 1.5만회 ·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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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 전쟁 발발과 한일 의정서 체결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분노 유발♨) 한일 의정서 ☞ 점령하려는 일본의 꼼수 조약 차이나는 클라스 118회

    교양 Voyage · 4,254회 ·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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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한일 의정서로 일본이 노린 것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각종 시험 단골 '한일의정서'와 일제강점기!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한국 근대사, 큰별쌤과 제대로 알기 | 러일전쟁 | #벌거벗은세계사 #사피엔스

    사피엔스 스튜디오 · 4.5만회 ·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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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 전쟁과 한일 의정서를 다룬 방송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을사오적 시리즈 #2] 을사오적보다 먼저 나라를 판 황실의 배신자, 이XX

    이로미즘 · 1.9만회 ·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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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의정서에 서명한 이지용의 행적을 다룬 개인 채널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1차시│한일의정서│을사늑약│한일병합조약

    워니비 · 5.9만회 ·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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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의정서부터 병합 조약까지 함께 다루는 수업입니다.

  3. 7월

    운동

    보안회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보안회가 반대 운동을 벌였고, 일본은 요구를 거둬들였습니다.

    배경

    러일 전쟁 중이던 1904년 6월, 일본은 나가모리 도키치로라는 사람을 내세워 대한제국 안의 황무지를 50년 동안 개간하고 이용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황무지라고 했지만 국유지·공유지까지 넓게 걸쳐 있어, 사실상 나라 땅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넘기는 요구였습니다.

    러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1904년 5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한국의 토지를 일본인이 이용할 길을 여는 것도 과제로 삼았습니다.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대한제국 정부에 내놓았고, 나가모리는 그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뒤에서 밀어준 요구였던 셈입니다.

    전개

    관료와 유생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는 가운데, 1904년 7월 13일 송수만·원세성 등이 서울 종로에서 보안회를 조직했습니다. 보안회는 연일 집회를 열어 개간권 요구를 규탄하고 정부에 거부를 촉구했습니다.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집회를 해산하고 송수만 등을 체포했지만 반대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민간에서는 한국인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겠다며 농광 회사를 세우는 대응도 나왔습니다.

    보안회 집회에는 전직 관리와 유생, 서울 상인과 일반 시민이 함께 참여했고, 집회 장소를 옮겨 가며 반대를 이어 갔습니다. 일본은 보안회를 ‘불온한 무리’로 보고 해산을 요구했으며, 한국 정부에 단속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부 안에서도 개간권을 내줄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일본은 결국 1904년 8월 요구를 거둬들였습니다. 러일 전쟁 중 일본의 요구를 민간 운동으로 막아 낸 드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보안회는 이후 협동회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은 이후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는 길을 다른 방식으로 찾았습니다. 1908년 설립된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대한제국 정부의 출자 땅 등을 바탕으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이 그 예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4년 5월 31일일본 각의가 대한제국 보호국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2. 1904년 6월일본이 나가모리 도키치로 명의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했습니다.
    3. 1904년 6~7월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이 반대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4. 1904년 7월 13일송수만·원세성 등이 서울 종로에서 보안회를 조직했습니다.
    5. 1904년 7월일본 헌병과 경찰이 보안회 집회를 해산하고 간부를 체포했습니다. 한국인이 직접 개간하겠다며 농광 회사가 세워졌습니다.
    6. 1904년 8월일본이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거둬들였습니다.
    7. 1908년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설립됐습니다.

    인물

    • 송수만

      보안회 결성을 주도하고 반대 운동을 이끌다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대한제국의 관리 출신으로, 보안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일본에 체포된 뒤에도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 원세성

      송수만 등과 함께 보안회를 조직해 반대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국기의 관리 출신 인사로, 보안회 창립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 나가모리 도키치로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명의인으로 내세워진 일본인입니다.

      일본 대장성 관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정부와 공사관이 그의 이름으로 개간권 계약을 추진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때 주변에서는
    같은 1904년 8월 송병준 등이 만든 유신회가 이름을 일진회로 바꾸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넓혔습니다. 보안회는 이런 친일 단체의 방해와 일본의 탄압 속에 활동을 이어 가기 어려워졌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보안회,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의 활동내용은?

    EBSi · 5,721회 ·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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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회와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를 함께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고1 한국사] 3단원 13차시│애국계몽운동│보안회│신민회

    워니비 · 4.5만회 ·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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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 계몽 운동을 넓게 다루고 보안회는 일부로 나옵니다.

  4. 7.18

    사회

    대한매일신보 창간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했습니다. 발행인이 영국인이라 일본의 검열을 덜 받아 항일 논조를 펼 수 있었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배경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한국 신문을 검열하며 언론을 통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이 발행인인 신문은 치외 법권 때문에 일본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개

    1904년 7월 18일 영국 신문 특파원으로 와 있던 베델과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냈고, 1905년부터 국한문판을, 1907년에는 한글판을 따로 냈습니다. 영문판 이름은 『The Korea Daily News』였습니다.

    신문은 일본의 침략 정책과 친일 관료를 강하게 비판했고, 을사늑약이 황제의 뜻과 무관하다는 고종의 친서를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신문사가 모금의 중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박은식·신채호 등이 논설을 썼습니다.

    일본은 영국에 압력을 넣어 베델을 영국 영사 재판에 두 차례 세웠고, 1908년에는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으나 양기탁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베델은 1909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07년 7월 통감부의 영향 아래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한국인 신문은 사전 검열과 발행 정지를 받게 됐지만, 영국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는 바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1908년 법을 고쳐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압수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08년 베델은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 법정에서 금고 3주를 선고받고 상하이에서 형을 살았고, 그 뒤 발행인 이름은 영국인 만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매일신보는 발행 부수가 당시 신문 가운데 가장 많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애국 계몽 운동의 대표 언론이 됐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뒤 조선 총독부가 신문을 사들여 제목에서 ‘대한’을 뺀 『매일신보』로 바꾸어 총독부 기관지로 삼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4년 7월 18일베델과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2. 1905년국한문판과 영문판을 나누어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3. 1907년 초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고종의 친서를 보도했습니다.
    4. 1907년 2월 이후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의 모금을 신문사가 이끌었습니다.
    5. 1907년 5월순한글판을 따로 냈습니다.
    6. 1907년 7월신문지법이 만들어져 한국인 신문에 검열이 시작됐습니다.
    7. 1908년베델이 영국 영사 재판에서 금고형을 받았고, 양기탁이 국채 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8. 1909년 5월 1일베델이 서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9. 1910년 8월 30일제목에서 ‘대한’이 빠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바뀌었습니다.

    인물

    •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 이름 배설)1872~1909

      발행인으로서 영국인의 신분을 이용해 일본의 검열을 피하며 신문을 냈습니다.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다 1904년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의 압력으로 재판을 받고 금고형을 살기도 했으며, 1909년 서울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건국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 양기탁1871~1938

      신문 창간을 함께하고 총무로 실무를 이끌었습니다.

      영어에 능했던 언론인으로, 1907년 비밀 결사 신민회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105인 사건 등으로 여러 번 옥고를 치렀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박은식1859~1925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논설을 쓰며 애국 계몽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유학자 출신 언론인·역사학자로 황성신문에서도 논설을 썼습니다. 망명 뒤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고, 192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0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 민족신문이 되다

    KBS 히스토리 · 8,261회 ·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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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72 베델의 치외법권 덕에 과감한 정론을 펼친 대한매일신보

    KBS 히스토리 · 1,617회 ·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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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델의 치외법권 덕에 항일 논조를 편 대한매일신보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영국인 기자, 그는 왜 일본에 맞서 싸웠나? [핫클립]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 538회 ·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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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의 활동을 소개한 방송 클립입니다.

  5. 8.22

    조약

    제1차 한일 협약

    일본이 추천한 재정 고문(메가타)과 외교 고문(스티븐스)을 두게 한 협약입니다. 이른바 고문 정치가 시작됐습니다.

    배경

    한일 의정서로 군사적 근거를 얻은 일본은 1904년 5월 대한제국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 첫 단계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과 외교를 일본이 보낸 고문의 손에 두려 했습니다.

    전개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두어 그 의견을 따라야 하고,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는 일본과 미리 협의하도록 했습니다.

    재정 고문에는 일본 대장성 관리 메가타 다네타로, 외교 고문에는 일본 외무성에서 일하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왔습니다. 일본은 협약에 없는 군부·경무(경찰)·학부·궁내부 등에도 일본인 고문을 두었습니다.

    협약 제3조는 대한제국 정부가 외국과 조약을 맺거나 외국인에게 특권을 넘기는 계약 같은 중요한 외교 안건을 처리할 때 미리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했습니다. 메가타는 1904년 10월, 스티븐스는 12월 무렵 부임했습니다. 협약에 없던 고문도 잇따라 들어와, 경무 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 학부 참여관 시데하라 다이라,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 등이 각 부처 일에 관여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고문들이 정부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고문 정치’가 시작됐습니다. 메가타는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을 벌여 대한제국의 백동화 등을 일본 제일 은행권으로 바꾸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상인과 은행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했고,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전명운·장인환에게 저격당해 숨졌습니다.

    외교 고문과 사전 협의 조항으로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 어려워졌고, 이는 1년 3개월 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자체를 빼앗기는 단계로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4년 5월 31일일본 각의가 대한제국에 고문을 두는 등 보호국화 방침을 정했습니다.
    2. 1904년 8월 22일윤치호와 하야시 곤스케가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3. 1904년 10월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부임했습니다.
    4. 1904년 12월 무렵외교 고문 스티븐스가 부임했습니다.
    5. 1905년경무·학부·궁내부·군부 등에도 일본인 고문이 들어왔습니다.
    6. 1905년 7월메가타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7.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겼습니다.
    8. 1908년 3월 23일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의 공격을 받고 이틀 뒤 숨졌습니다.

    사료로 읽기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고용하여, 재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그의 의견을 구하여 시행해야 한다.”
    — 제1차 한일 협약(협정서) 제1조(1904) —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인물

    •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

      재정 고문으로 부임해 대한제국의 재정과 화폐 제도를 일본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일본 대장성 관리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화폐 정리 사업으로 한국 경제를 일본에 묶는 기반을 만들었고, 귀국 뒤 귀족원 의원을 지냈습니다.

    • 윤치호1865~1945

      외부협판으로서 외부대신 서리 자격으로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개화 지식인입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친일로 돌아서 일제 말까지 친일 활동을 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화폐 정리 사업과 ‘돈 가뭄’
    상태가 나쁜 백동화는 제값을 쳐주지 않거나 교환해 주지 않아, 한국 상인들이 가진 돈의 가치가 갑자기 줄었습니다. 시중에 돈이 모자라는 ‘전황(錢荒)’이 일어나 문을 닫는 상점과 은행이 속출했습니다.
    이름 없는 협약
    ‘제1차 한일 협약’은 뒤에 붙인 이름입니다. 문서 원본에는 제목이 없고, 『고종실록』과 대한제국 『관보』에는 ‘협정서’로 적혀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127_제1차 한일 협약 조인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6,950회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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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한일 협약 조인을 정면으로 다룬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1차 한일협약이란?

    EBSi · 4,424회 ·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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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 EBS 강의로 제1차 한일 협약과 고문 정치를 설명합니다.

  6. 1905

    1.1

    경제

    경부선 개통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가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러일 전쟁을 치르려고 서둘러 놓았고, 공사에 한국인의 노동력과 토지가 강제로 동원됐습니다.

    배경

    일본은 일찍부터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를 한반도 지배와 대륙 진출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9월 대한제국 정부와 경부 철도 합동 조약을 맺어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일본은 부설권을 얻은 뒤에도 자금을 모으지 못해 한동안 공사를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1901년 6월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일본 재계 인사들이 경부 철도 주식회사를 세웠고, 일본 정부가 이자를 보증하고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사업을 떠받쳤습니다.

    전개

    1901년 8월 서울 영등포에서, 9월 부산 초량에서 각각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러일 전쟁이 다가오자 일본은 군대와 물자를 빨리 옮기려고 공사를 크게 서둘렀습니다.

    공사에는 많은 한국인이 헐값의 품삯이나 강제로 동원됐고, 철도가 지나는 땅과 역 부지는 싼값에 또는 거의 보상 없이 수용됐습니다. 이에 반발해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일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904년 12월 선로가 완공됐고, 1905년 1월 1일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5월 서울 남대문역에서 개통식이 열렸습니다.

    1903년 말 러시아와의 전쟁이 가까워지자 일본 정부는 경부선을 빨리 끝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금을 더 지원했습니다. 서둘러 놓은 탓에 급경사와 급커브가 많았고, 뒤에 여러 구간을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 경기도 시흥 등지에서는 철도 공사에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는 데 반발한 주민들이 들고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서울과 부산이 하루 안에 오갈 수 있게 연결됐고, 부산항을 통해 일본과 한반도가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러일 전쟁 중 급히 놓은 경의선(1906 개통)과 함께 한반도를 세로로 꿰는 철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철도가 지나는 대전·조치원 같은 곳은 역을 중심으로 새 도시가 생겼고, 철도에서 먼 옛 고을은 상대적으로 쇠퇴했습니다.

    1906년 통감부가 경부 철도 회사를 사들여 경부선은 국유 철도가 됐습니다. 1908년에는 부산~신의주를 잇는 급행열차가 다니기 시작해, 한반도 철도가 부산항과 만주를 잇는 길로 쓰이게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8년 9월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경부 철도 합동 조약을 맺어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2. 1901년 6월경부 철도 주식회사가 세워졌습니다.
    3. 1901년 8~9월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4. 1903년 말일본 정부가 러일 전쟁에 대비해 공사를 서두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5. 1904년 12월선로가 완공됐습니다.
    6. 1905년 1월 1일경부선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7. 1905년 5월서울 남대문역에서 개통식이 열렸습니다.
    8. 1906년통감부가 경부 철도 회사를 사들여 국유 철도로 만들었습니다.
    9. 1908년부산~신의주 사이 급행열차가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인물

    •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

      일본 재계 인사들을 모아 경부 철도 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일본 근대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로 은행과 회사 수백 곳의 설립에 관여했습니다. 일본 제일 은행의 우두머리로서 한국에서 제일 은행권 발행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철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 교통의 기반으로 보는 쪽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빨라져 시장이 넓어지고 새 도시가 생겼으며, 이때 놓인 철도가 광복 뒤에도 한국 교통과 경제의 기본 뼈대가 됐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침략과 수탈의 도구로 보는 쪽

    일본이 군사 목적과 대륙 진출을 위해 놓은 철도로, 한국인의 토지와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해 건설했고, 철도를 통해 쌀과 자원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철도의 혜택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따져야 한다고 봅니다.

    해설·교양 · 강의

    경부선이 바꾼 도시흥망

    김도운의 칼칼한 인문학 · 2,268회 · 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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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부설이 지역 도시의 흥망을 바꾼 과정을 강연합니다.

    해설·교양 · 해설

    [대한제국]경부철도가

    일장춘몽 · 1.4만회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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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개통 무렵 불린 창가를 들려주는 영상이라 개통 설명은 적습니다.

  7. 7월

    경제

    화폐 정리 사업

    1905.7 ~ 1909 · 4년

    재정 고문 메가타가 대한제국의 백동화를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교환 기준이 까다로워 많은 국내 상인과 은행이 큰 손해를 봤습니다.

    배경

    1890년대 후반부터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전환국에서 액면가보다 실제 가치가 훨씬 낮은 백동화를 대량으로 찍어 냈습니다. 여기에 민간의 위조 백동화까지 섞여 돌면서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지역마다 쓰는 돈도 달라서 한강 이남에서는 여전히 상평통보(엽전)가 널리 쓰였습니다.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들어온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는 이런 혼란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화폐 제도 개편을 주도했습니다. 이미 1902년부터 일본 제일은행 한국 지점은 은행권을 발행해 유통시키고 있었습니다.

    전개

    1905년 7월 1일부터 백동화와 엽전을 거둬들이고 일본 제일은행이 발행한 새 화폐로 바꿔 주는 교환이 시작됐습니다. 화폐를 찍던 전환국은 이미 1904년 11월 문을 닫았고, 제일은행이 사실상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습니다.

    교환은 백동화의 품질을 갑·을·병 세 등급으로 나눠 이뤄졌습니다. 갑종은 액면 2전 5리를 2전 5리로 쳐 주었지만 을종은 1전으로만 바꿔 주었고, 품질이 가장 나쁜 병종은 아예 교환해 주지 않았습니다. 교환 기간과 장소가 제한되고 절차가 까다로워, 사정을 잘 알지 못한 한국인들은 제때 바꾸지 못하거나 헐값에 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반면 미리 정보를 얻은 일본 상인들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봤습니다.

    시중의 돈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이른바 전황(錢荒,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이 심해졌습니다. 1905년 가을 무렵 서울 상인들이 파산하는 일이 잇따랐고, 한국인이 세운 은행들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환 사업은 1909년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교환 기한까지 거둬들인 백동화는 약 960만 환이었고, 상평통보(엽전)는 1910년까지 약 328만 환어치가 회수됐습니다. 정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제일은행에서 빌린 300만 원으로 마련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한제국의 화폐는 일본 화폐 제도와 같은 기준으로 묶였고, 금융의 중심은 일본 제일은행으로 넘어갔습니다. 1909년에는 한국은행(뒤의 조선은행)이 세워져 발권 업무를 넘겨받았습니다.

    이 사업으로 한국인 상인과 토착 자본이 큰 손실을 입은 반면, 일본 자본은 한국 금융을 장악하는 기반을 얻었습니다.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의 배경이 된 차관도 이 무렵 화폐 정리와 시설 개선 명목으로 들여온 것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92년액면 2전 5리의 백동화가 처음 발행됐습니다. 이후 재정난 속에 발행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2. 1904년 8월 22일제1차 한일 협약이 조인돼,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을 재정 고문으로 두게 됐습니다.
    3. 1904년 가을메가타 다네타로가 재정 고문으로 부임했습니다.
    4. 1904년 11월백동화 주조가 멈추고 화폐를 찍던 전환국이 폐지됐습니다.
    5. 1905년 1월 18일일본과 같은 화폐 제도를 따르는 ‘화폐 조례’를 그해 6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6. 1905년 6월 초탁지부령으로 옛 백동화 교환 방법과 절차를 공포했습니다.
    7. 1905년 7월 1일백동화를 일본 제일은행권 등 새 화폐로 바꾸는 교환이 시작됐습니다.
    8. 1905년 가을시중에 돈이 말라 서울 상인들이 잇따라 파산하는 금융 공황이 일어났습니다.
    9. 1909년백동화 교환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한국은행이 세워져 발권 업무를 넘겨받았습니다.

    사료로 읽기

    “대한(大韓) 정부는 대일본(大日本)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 첫째 항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번역메가타가 화폐 정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근거 조항입니다. ‘용빙’은 외국인을 고용해 맞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인물

    •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

      대한제국 재정 고문으로서 화폐 정리 사업을 설계하고 추진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일본 대장성 관료 출신입니다.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재정 고문으로 부임해 화폐·조세·재정 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을 맡았습니다. 귀국한 뒤 일본 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습니다.

    •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

      제일은행 은행장으로서 한국 지점의 은행권 발행을 이끌었습니다.

      일본 근대 금융과 기업을 일으킨 실업가로, 제일국립은행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1902년부터 한국에서 유통된 제일은행권에는 그의 얼굴이 인쇄돼 있어 한국인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화폐 정리 사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화폐 제도 정비의 측면을 보는 쪽

    백동화 남발과 위조로 물가와 화폐 가치가 크게 흔들리던 상황이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화폐를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고 봅니다. 통일된 화폐와 근대적 은행 제도가 자리 잡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제적 예속화의 수단으로 보는 쪽

    정리의 필요성과 별개로, 일본 은행이 발권을 쥐고 한국인에게 불리한 교환 기준을 적용한 것은 한국 경제를 일본에 묶으려는 의도였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상인과 은행이 몰락하고 일본 자본이 금융을 장악했으므로 피해가 성과보다 훨씬 컸다고 평가합니다.

    더 알아두기

    백동화란
    1892년부터 발행된 구리와 니켈 합금 동전으로, 액면은 2전 5리였습니다. 만드는 비용보다 액면가가 훨씬 높아 정부가 재정을 메우려고 많이 찍어 냈고, 민간에서 몰래 만든 위조품(사주전)도 많았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라이브질답 | 사회] 화폐 정리 사업이 무엇인가요? | 일본 | 고문정치 | 제1차 한일 협약

    밀크티타임 · 3,195회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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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 정리 사업과 고문 정치를 짧게 설명하는 중학 질답 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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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이후 경제,사회의 변화 | 화폐정리사업(1905) | 이명신

    티클 · 2,570회 ·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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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 정리 사업 하나만 다루는 고교 한국사 짧은 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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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꿈사 한국사] 2017 공무원 출제순위 103강 - 화폐 정리 사업과 국채보상운동 (출제 103위)

    9꿈사 · 4,720회 ·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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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 정리 사업과 국채 보상 운동을 함께 푸는 공무원 강의입니다.

  8. 7.29

    외교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가 만나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서로 인정하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어 2차 영일 동맹(8월)과 포츠머스 조약(9월)으로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습니다.

    배경

    1905년 여름 러일 전쟁은 일본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강화 협상을 중재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했고, 이를 위해 열강의 양해를 얻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차지한 필리핀의 안전에 관심이 컸습니다.

    전개

    필리핀으로 가던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일본 총리 겸 임시 외무대신 가쓰라 다로와 만나 극동 정세를 논의했습니다. 대화 내용은 7월 29일 자 기록(각서)으로 정리돼 본국에 보고됐고, 루스벨트는 이 내용을 승인한다는 뜻을 전보로 전했습니다.

    기록에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 공격적 의도가 없다는 점, 극동 평화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이 협력한다는 점, 일본이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을 미국도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가 담겼습니다.

    태프트는 필리핀 시찰단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는 길이었고, 이 일행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와 여러 의원도 함께했습니다. 회담은 7월 27일 오전 도쿄에서 비공개로 열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쓰라는 한국이 러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므로 전쟁의 결과로 한국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고, 태프트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세우는 것이 극동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루스벨트는 7월 말 태프트에게 보낸 전보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모든 점에서 인정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어 1905년 8월 제2차 영일 동맹으로 영국이,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도·보호·감리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열강의 반대 없이 11월 을사늑약을 강요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기록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4년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루스벨트 문서에서 찾아내 알려졌습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거중 조정 조항에 기대를 걸었던 대한제국은 미국의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05년 5월 27~28일쓰시마 앞바다(동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발트 함대를 크게 이겼습니다.
    2. 1905년 7월 27일 오전태프트와 가쓰라가 도쿄에서 비공개로 만나 필리핀·한국·극동 평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3. 1905년 7월 29일대화 내용이 각서 형태로 정리돼 미국 본국에 전보로 보고됐습니다.
    4. 1905년 7월 말루스벨트 대통령이 대화 내용을 인정한다는 답신을 보냈습니다.
    5. 1905년 8월 12일제2차 영일 동맹이 조인돼 영국이 일본의 한국 지도·감리·보호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6. 1905년 9월 5일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도 같은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7. 1905년 11월 17~18일일본이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했습니다.
    8. 1924년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루스벨트 문서에서 이 기록을 찾아내 세상에 알렸습니다.

    사료로 읽기

    “Korea being the direct cause of our war with Russia, it is a matter of absolute importance to Japan that a complete solution of the peninsula question should be made as the logical consequence of the war.”
    — 가쓰라·태프트 회담 기록(1905)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가쓰라는 한국이 러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므로 일본으로서는 전쟁의 결과로 한국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우리역사넷 번역)

    인물

    • 가쓰라 다로1848~1913

      일본 총리로서 태프트와 회담해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조슈 출신 군인·정치가로 세 차례 총리를 지냈습니다. 재임 중 영일 동맹, 러일 전쟁, 한국 병합을 모두 이끌었습니다.

    • 윌리엄 태프트1857~1930

      미국 육군 장관으로서 가쓰라와 회담했습니다.

      필리핀 총독을 지낸 미국 정치가로, 1909년 미국 제27대 대통령이 됐고 뒤에 연방 대법원장도 지냈습니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쓰라·태프트 회담 내용을 승인했습니다.

      미국 제26대 대통령입니다. 러일 전쟁의 강화를 중재해 포츠머스 조약을 이끌어 냈고, 그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밀약’이라 부를 만한 합의였나

    사실상의 합의로 보는 쪽

    필리핀과 한국을 서로 맞바꾸듯 인정한 내용이 기록되고 대통령이 승인했으므로, 형식이 조약이 아니더라도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용인한 외교적 합의였다고 봅니다. 한국 교과서가 ‘밀약’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법적 구속력 없는 대화 기록으로 보는 쪽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한 메모이고 미국 의회 승인도 없었으므로 구속력 있는 ‘밀약’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입니다. 미국 학계 일부는 미국이 이미 정해진 흐름을 확인했을 뿐 이 회담이 한국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같은 때 주변에서는
    같은 1905년 여름 미국 포츠머스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 회담이 루스벨트의 중재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8월 제2차 영일 동맹으로 동맹 범위를 인도까지 넓혔고, 그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습니다. 미국·영국·러시아가 몇 주 사이에 차례로 같은 결론에 이른 셈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01 고종이 의지한 미국,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다

    KBS 히스토리 · 9,422회 ·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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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00 을사늑약을 둘러싼 국제정세 - 가쓰라․태프트밀약과 영일동맹조약의 수정

    KBS 히스토리 · 3,626회 ·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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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 수정을 다룬 영상한국사입니다.

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