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신군부와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

7년 단임 간선제 헌법 아래 전두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언론 통폐합과 삼청 교육대 같은 강압 통치와 함께 통행금지 해제·프로 야구 출범 같은 유화책이 있었고, 3저 호황으로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기간
1980.9.1 ~ 1986.12.31 · 6년 3개월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전두환
담긴 것
사건 16 · 영상 77 · 영화·드라마 15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1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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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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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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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4· 공식 영상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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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0.12.15 ~ 1983.11.14

흥남 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까지 한 사람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황정민 주연 천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 비하인드 스토리, 옥에 티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50만회 ·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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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1· 제목만

「빛과 그림자」

배경 1960 ~ 1980

MBC. 1960~70년대 쇼 비즈니스와 정치 이야기

드라마 · 2008· 공식 영상

「에덴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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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60 ~ 1990

MBC. 탄광촌에서 시작해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형제의 운명

드라마 · 2010· 제목만

「자이언트」

배경 1970 ~ 1990

SBS. 강남 개발과 건설업을 배경으로 한 산업화 시대 이야기

드라마 · 1995· 공식 영상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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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70 ~ 1995

SBS. 유신부터 5·18, 1990년대까지 세 친구의 엇갈린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시청률 64.5% 모래시계 최민수-고현정-이정재-박상원 주연! 전국민을 귀가하게 만든 역대급 신드롬 대작 #명작리뷰

SBS 옛날 드라마 - 빽드 · 54.1만회 · 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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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0· 제목만

「박하사탕」

배경 1979 ~ 1999

한 남자의 20년을 거꾸로 따라가며 5·18부터 외환 위기까지를 비춘다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영화리뷰/결말포함] 인생이 꼬여버린 한 남자의 삶을 되감기 해보다.. 한국 영화의 보석 '박하사탕' 리뷰ㅣ설경구ㅣ문소리ㅣ

후니의 킬링타임 : 이불 속 영화관 · 24.7만회 · 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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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5· 공식 영상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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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79.10.26 ~ 1987.6.29

MBC 정치 드라마. 10·26부터 6·29 선언까지

영화 · 2013· 공식 영상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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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81 ~ 1981.9

1981년 부림 사건 변론을 바탕으로 한 영화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현직 재심 전문 변호사가 말아주는 실화 기반 법정영화 리뷰‍️ <변호인> & <부러진 화살> 몰아보기 | 방구석1열 | JTBC 210606 방송 외

교양 Voyage · 9.8만회 · 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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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2· 제목만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배경 1982 ~ 1990.10

1980년대 부산,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선포까지(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흑자명화] 범죄와의 전쟁 (나르시시스트) (결말포함)

흑자.지껄 SurplusTalk · 58.7만회 · 1: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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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22· 공식 영상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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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83 ~ 1983.10.9

1983년 안기부 안의 간첩을 쫓는 첩보 영화. 아웅산 테러를 모티프로 한 창작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오.겜 상금으로 영화 뽑았습니다?!" 이정재+정우성의 첩보 액션 드라마 ≪헌트≫ 보기전 분석 총정리!

기묘한 케이지 · 63.2만회 ·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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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2· 제목만

「남영동1985」

배경 1985.9

민주화 운동가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 실화

영화 · 2003· 제목만

「살인의 추억」

배경 1986 ~ 1991

1980년대 후반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당시 수사 현실

영화 · 2023· 공식 영상

「비공식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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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86 ~ 1988

1986년 레바논에서 납치된 외교관 구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사건 연표 1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81), 제2차 석유 파동 (~1980), 삼청 교육대 (~1981.1)

  1. 1980

    9.1

    정치

    전두환 대통령 취임과 제8차 개헌

    1980.9.1 ~ 10.27 · 57일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난 뒤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10월 대통령 선거인단 간선제와 7년 단임제를 담은 헌법이 확정됐습니다.

    배경

    국보위를 통해 국정을 장악한 신군부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고,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새 대통령을 뽑게 됐습니다.

    전두환은 8월 22일 육군 대장으로 전역했고, 민주 공화당 등 기존 정당이 활동을 멈춘 상황에서 단독 후보로 나섰습니다. 선거인인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 2,540명은 1978년에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전개

    1980년 8월 27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는 단독 후보인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뽑았고, 전두환은 9월 1일 취임했습니다. 곧이어 정부는 새 헌법안을 만들어 10월 22일 국민 투표에 부쳤고, 헌법은 10월 27일 공포됐습니다(제8차 개헌, 제5공화국 헌법).

    새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정하고 중임을 금지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뽑은 5천 명 이상의 대통령 선거인단이 간접 선거로 선출했습니다. 헌법 공포와 함께 기존 국회와 정당은 해산됐고, 국가 보위 입법 회의가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입법을 맡았습니다.

    8월 27일 장충 체육관 투표에는 대의원 2,525명이 참여해 2,524명이 찬성했고 1표가 무효였습니다. 새 헌법은 행복 추구권, 환경권, 연좌제 금지 같은 조항을 새로 넣었고, 대통령의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개헌은 그 개헌을 제안할 때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도 두었습니다.

    1981년 2월 11일 대통령 선거인 5,278명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고, 2월 25일 선거에서 전두환(민정당)이 4,755표를 얻어 유치송(민한당, 404표), 김종철(국민당, 85표), 김의택(민권당, 26표)을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1981년 1월 민주 정의당(민정당)이 창당됐고,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뽑혀 3월 3일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제5공화국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유신 헌법의 긴급 조치권은 비상 조치권으로 바뀌고 대통령 연임 제한이 생겼지만, 간접 선거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자는 요구는 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핵심 구호가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 8월 16일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습니다.
    2. 1980년 8월 22일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전역했습니다.
    3. 1980년 8월 27일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4. 1980년 9월 1일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5. 1980년 10월 22일새 헌법안이 국민 투표에서 확정됐습니다.
    6. 1980년 10월 27일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없어졌습니다.
    7. 1981년 1월민주 정의당이 창당됐습니다.
    8. 1981년 2월 11일대통령 선거인단 5,278명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9. 1981년 2월 25일선거인단 선거에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뽑혔습니다.
    10. 1981년 3월 3일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인물

    • 전두환1931~2021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뽑힌 뒤 새 헌법으로 제12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재임 중 물가 안정과 3저 호황 속 경제 성장,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같은 성과가 있었으나, 집권 과정의 반란·내란과 언론 통제, 인권 탄압으로 1997년 무기 징역이 확정됐습니다. 추징금 상당액을 내지 않은 채 2021년 숨졌습니다.

    • 유치송1924~2007

      민주 한국당 후보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나가 404표를 얻었습니다.

      신민당 출신 정치인으로 1981년 창당한 민주 한국당의 총재를 맡았습니다. 민한당은 제5공화국 초기 제1야당이었지만, 신군부가 정계 개편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당이라 ‘관제 야당’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전두환 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경제 운영의 성과를 따로 평가하는 쪽

    1970년대 말 두 자릿수 물가를 안정시키고 무역 흑자를 처음 이뤘으며, 7년 단임을 지켜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례를 남겼다는 점을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 올림픽 유치도 국가 위상을 높였다고 봅니다.

    집권의 불법성을 먼저 봐야 한다는 쪽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로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이 법원 판결로 확정됐고, 언론 통폐합·삼청 교육대·고문 같은 인권 침해가 이어졌다는 점을 앞세웁니다. 경제 안정도 국제 환경의 덕이 컸으며 정권의 정당성을 대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296호-제 7차 통일주체국민회의 제 11대 전두환 대통령 선출

    KTV 아카이브 · 9.8만회 ·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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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0년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뽑는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297호-특보 : 제11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

    KTV 아카이브 · 26.3만회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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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0년 9월 전두환 취임식을 찍은 대한뉴스 원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305호-새 헌법 공포

    KTV 아카이브 · 1.1만회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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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80년 제8차 개헌 헌법 공포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295호-최규하 대통령 사임

    KTV 아카이브 · 11.6만회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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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 성명을 발표하는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301호-새헌법안 공고

    KTV 아카이브 · 1,427회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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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980년 새 헌법안 공고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1980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순간들 5.18, 전두환 대통령 취임, 삼청교육대... (KBS 방송)

    KBS 다큐 · 2만회 ·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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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1980년 한 해를 당시 영상으로 정리하며 취임 장면을 담았습니다.

  2. 11월

    정치

    언론 통폐합

    신문사·방송사를 강제로 합치거나 없애고 언론인을 대거 해직시켰습니다(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보안사 해직 명단만 933명). 이어 언론 기본법으로 보도를 통제했습니다.

    배경

    신군부는 집권 과정에서 언론을 통제할 계획을 일찍부터 세웠습니다. 1980년 5·17 뒤 계엄 아래 사전 검열이 이뤄지는 가운데 기자들은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1980년 여름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명단에 따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자율 정화’ 형식으로 언론인 해직을 결의했고, 900명이 넘는 언론인이 일터에서 쫓겨났습니다.

    전개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언론사 통폐합을 ‘자율 결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보안사가 짠 계획이었습니다. 동양 방송(TBC)과 동아 방송(DBS) 등 민영 방송이 KBS로 흡수됐고, 문화 방송(MBC)은 주식 대부분이 KBS로 넘어갔습니다. 기독교 방송(CBS)은 보도 기능을 잃었습니다.

    신문은 중앙지 일부가 다른 신문에 흡수되고, 지방지는 도마다 하나씩만 남기는 ‘1도 1사’ 원칙으로 정리됐습니다. 여러 통신사는 연합 통신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많은 언론인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1980년 12월 제정된 언론 기본법은 정부가 정기 간행물 등록을 취소할 수 있게 했고, 정부는 매일 ‘보도 지침’을 내려 기사의 크기와 방향까지 통제했습니다. 보도 지침의 존재는 1986년 월간 『말』이 폭로하며 알려졌습니다. 언론 기본법은 1987년 폐지됐습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이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공권력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사건이라고 결론 내리고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 5월계엄 아래 기자들이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2. 1980년 7~8월보안사가 작성한 명단에 따라 900명 넘는 언론인이 해직됐습니다.
    3. 1980년 7월 31일국보위가 정기 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4. 1980년 11월 14일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사 통폐합을 ‘자율 결의’했습니다.
    5. 1980년 11월 30일동양 방송(TBC)이 마지막 방송을 내보냈고, 다음 날 KBS로 흡수됐습니다.
    6. 1980년 12월국가 보위 입법 회의가 언론 기본법을 만들었습니다.
    7. 1986년 9월월간 『말』이 정부의 보도 지침을 폭로했습니다.
    8. 1987년 11월언론 기본법이 폐지됐습니다.
    9. 2010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인물

    • 허문도1940~2016

      국보위 문화공보 분과 위원 등으로 언론 통폐합을 기획·추진했습니다.

      기자 출신으로 신군부에 참여해 대통령 정무 비서관, 문화공보부 차관, 통일원 장관 등을 지냈습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언론 통폐합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 이상재

      보안사령부 언론 담당 책임자로 언론 대책을 실무에서 이끌었습니다.

      보안사 준위 출신으로 1980년 보안사 언론 대책반을 맡아 언론인 해직과 언론 통제 계획에 관여했다는 것이 진실·화해 위원회 조사에서 드러났습니다. 뒤에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더 알아두기

    해직 언론인 수
    진실·화해 위원회 조사에서 보안사가 작성한 해직 대상 명단은 933명이었습니다. 통폐합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까지 합치면 규모가 더 커서, 언론 단체들은 실제 해직자가 이보다 훨씬 많다고 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언론통폐합에 따른 1980년 동양방송 허가취소에 따른 동양방송 TBC 고별 방송

    빛나는 길 (김형진TV) · 16.6만회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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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닫은 동양방송의 1980년 고별 방송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신군부의 등장! 그리고 장악당한 언론들... 20200426

    MBCentertainment · 7.1만회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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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신군부의 언론 장악을 짚는 선을 넘는 녀석들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신군부의 야망... 언론통폐합 사건 (11월14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49회] / YTN2

    YTN 밀덕스 · 1,943회 ·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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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을 다룬 회차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2편(언론통폐합의 내용과 슬픔의 고별방송)

    낭천 · 1,905회 ·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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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언론 통폐합 내용과 고별 방송을 정리한 개인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기업비사 56회 신군부의 기업통폐합, 정주영과 김우중의 선택

    잡플러스TV · 17.5만회 · 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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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15% · 간접 관련추천 ★★★★★

    언론이 아니라 신군부의 기업 통폐합을 다룹니다.

  3. 12월

    경제

    노동관계법 개정과 노사협의회법 제정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노동조합법·노동 쟁의 조정법을 고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노동조합을 기업별로 강제하고 상급 단체 등 제3자의 노동 쟁의 개입을 금지했습니다.

    • 산업별로 뭉친 노동조합의 힘을 개별 사업장 단위로 흩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은 1997년 노동법 개정 때 삭제됐습니다.

    배경

    12·12 군사 반란과 5·17 계엄 확대로 실권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봄 전국적으로 번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민주 노조 요구 투쟁을 지켜보며, 산업별로 연대하는 노동조합의 힘을 사전에 흩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국회는 5·17 계엄 확대와 함께 사실상 기능이 정지됐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이어받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를 대신해 법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전개

    1980년 12월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노동조합법과 노동 쟁의 조정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국회의 정상적인 심의 절차 없이 짧은 기간에 통과된 법이었습니다.

    개정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을 산업별이 아닌 기업별로 강제해 개별 노동조합이 상급 단체와 맺는 관계를 사실상 끊어 놓았고, 노동 쟁의에 노동 관계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새로 넣었습니다. 새로 만든 노사협의회법은 노사 협의 기구를 의무적으로 두게 했지만, 단체 교섭과는 성격이 다른 협의 기구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개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은 개별 사업장 단위로 좁혀졌고, 산업별 연대는 크게 위축됐습니다.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은 1986년 한국노총 등 상급 단체를 제3자에서 제외하는 예외가 더해졌다가, 1997년 노동법 전면 개정 때 삭제됐습니다. 이 시기 기업별 노조 체제는 이후 오랫동안 한국 노동 운동의 기본 틀로 남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 5월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2. 1980년 10월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를 대신하는 입법 기구로 출범했습니다.
    3. 1980년 12월노동조합법·노동 쟁의 조정법 개정과 노사협의회법 제정이 이뤄졌습니다.
    4. 1986년 12월한국노총과 산업별 연맹을 제3자에서 제외하는 예외 조항이 더해졌습니다.
    5. 1997년 3월노동법 전면 개정으로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이 삭제됐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80년 노동법 개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노사 관계 안정을 위한 조치로 보는 쪽

    무분별한 쟁의를 줄이고 기업 단위의 안정적인 노사 협의 체계를 만들려는 목적이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노동권 위축으로 보는 쪽

    노동조합의 산업별 연대를 인위적으로 끊어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 행동권을 크게 제한한 통제 입법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4. 1981

    1.15

    정치

    민주정의당 창당

    신군부가 기존 정당을 강제 해산하고 구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전두환을 총재로 하는 민주정의당을 창당했습니다. 창당 대회에서 전두환을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 그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흡수됐습니다.

    배경

    신군부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기존 정당을 사실상 무력화한 뒤, 정치 풍토 쇄신을 명분으로 옛 정치인 상당수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제8차 개헌으로 대통령 선거인단이 간접 선출하는 7년 단임 대통령제가 확정되면서, 이 새로운 헌법 체제에 맞는 여당 조직이 필요해졌습니다.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에 따라 옛 정치인 상당수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에서 창당 작업이 진행됐기 때문에, 신군부가 원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당을 짤 수 있었습니다.

    전개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 대회가 열려 민족·민주·정의·복지·평화통일을 창당 이념으로 내걸었습니다. 초대 총재는 전두환이 맡았습니다.

    같은 대회에서 민정당은 전두환을 당의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전두환은 이 창당 대회를 통해 군인에서 정당 지도자로서의 모습도 갖추게 됐고, 이듬해 2월 대통령 선거인단 간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민정당은 그해 3월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해 제5공화국의 안정적인 집권 여당이 됐습니다. 같은 선거에서 정부가 사실상 만든 관제 야당 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이 각각 제1·2야당이 되면서, 초기 민정당 체제는 견제 세력이 약한 여대야소 구도로 출발했습니다. 1990년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흡수되며 사라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옛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2. 1981년 1월 15일민주정의당이 창당되며 전두환을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3. 1981년 2월선거인단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이 당선됐습니다.
    4. 1981년 3월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5. 1990년 1월 22일3당 합당으로 민정당이 민주자유당에 흡수됐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311호-새 정당들의 창당 움직임

    KTV 아카이브 · 1,008회 ·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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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82

    경제

    제5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

    1982 ~ 1986 · 4년

    계획 이름에서 '개발' 대신 '발전'을 쓰고 안정·능률·균형을 원칙으로 삼아 물가 안정과 개방, 시장 경쟁 활성화를 주요 정책 목표로 세웠습니다. 물가 상승률을 10% 안으로 묶는 것을 우선 과제로 뒀습니다.

    • 연 7~8%의 지속 성장으로 고용을 늘리고 국민 소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 이 계획 기간에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이 크게 잡혔고 1986년부터 3저 호황과 맞물려 경상 수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배경

    제2차 석유 파동과 10·26 사건,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정치적 격변을 거치며 1980년 한국 경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역성장을 기록하고 물가는 30%에 가깝게 뛰었습니다. 새로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그동안의 성장 위주 정책이 만성적인 고물가와 산업 간 불균형을 낳았다고 보고, 정책 중심을 물가 안정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전개

    제5차 계획은 이름에서부터 '경제 개발' 대신 '경제 사회 발전'을 쓰며 정책 기조의 변화를 드러냈습니다. 성장 대신 안정·능률·균형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물가 안정과 대외 개방, 시장 경쟁 활성화, 낙후 부문 개발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가 상승률을 10% 안으로 묶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연 7~8%의 지속 성장으로 고용을 늘리고 국민 소득을 높이며, 소득 계층과 지역 사이의 균형 발전으로 국민 복지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이전 계획과 달리 한국개발연구원(KDI) 등과의 정책 협의를 계획 수립 초기 단계부터 진행했고, 조정 단계에서도 민간 부문의 의견을 폭넓게 모았습니다. 관 주도로 목표부터 정하던 이전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계획 기간 동안 만성적이던 인플레이션이 크게 잡혔고, 이를 바탕으로 1986년부터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호황과 맞물려 사상 처음으로 경상 수지 흑자를 냈습니다. 이는 이후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안정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제2차 석유 파동과 정치적 격변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 5.2%를 기록했습니다.
    2. 1981~1982년제5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이 수립됐습니다.
    3. 1982년계획이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4. 1986년3저 호황과 맞물려 사상 처음으로 경상 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5. 1987년계획이 끝나고 제6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1987~1991)으로 이어졌습니다.
  6. 1.5

    사회

    야간 통행 금지 해제·프로 야구 출범

    1982.1.5 ~ 3.27 · 2개월

    1945년부터 이어진 야간 통행 금지가 풀리고 프로 야구가 출범했습니다. 교복·두발 자율화도 이 무렵 시행됐습니다.

    배경

    야간 통행 금지는 1945년 9월 미군정이 서울과 인천에 내린 포고에서 시작됐습니다. 한국 전쟁 뒤 치안과 간첩 침투 방지를 이유로 전국으로 넓혀져 대부분 지역에서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거리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제주도와 충청북도 등 일부 지역은 먼저 풀렸습니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1년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국제 행사를 열 나라에 걸맞은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통행 금지 시간에 돌아다니다 걸리면 경찰서 보호실에 머물다 이튿날 즉결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심야 영업이 불가능해 도시의 밤이 일찍 끝났고, 통금 해제는 관광·유통 업계가 오래 요구해 온 일이기도 했습니다.

    전개

    1982년 1월 5일 휴전선 근처 접적 지역과 일부 해안 지역을 뺀 전국에서 야간 통행 금지가 풀렸습니다. 36년여 만의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3월 27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프로 야구가 출범했습니다. 첫해에는 OB 베어스·해태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삼미 슈퍼스타즈까지 6개 구단이 참가했습니다. 1983년에는 프로 축구(슈퍼리그)와 민속 씨름도 출범했습니다. 중·고등학생의 두발 자율화가 1982년, 교복 자율화가 1983년부터 시행됐고, 1980년 12월에는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습니다.

    프로 야구 개막전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했고, 연장 10회 말 MBC 청룡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첫 시즌 우승은 OB 베어스가 차지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15승 65패로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 구단들은 연고 지역을 나눠 가져 지역 대항전 성격이 강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와 심야 교통이 생기며 도시의 생활 방식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프로 스포츠는 빠르게 인기를 얻어 오늘날 대중문화의 큰 부분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45년 9월미군정이 서울과 인천에 야간 통행 금지를 내렸습니다.
    2. 1980년 12월KBS와 MBC가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3. 1981년 9월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됐습니다.
    4. 1982년 1월 5일접적 지역과 일부 해안 지역을 뺀 전국에서 야간 통행 금지가 풀렸습니다.
    5. 1982년 3월 27일동대문 운동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프로 야구가 출범했습니다.
    6. 1982년중·고등학생의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습니다.
    7. 1983년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고 프로 축구 슈퍼리그와 민속 씨름이 출범했습니다.

    인물

    • 서종철

      한국 야구 위원회(KBO) 초대 총재로 프로 야구 출범을 맡았습니다.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군 출신입니다.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위원회 초대 총재가 돼 6개 구단 체제의 리그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80년대 초 자율화 조치의 성격

    정치적 관심을 돌리려는 정책으로 보는 쪽

    집권 과정의 정당성이 약한 정부가 스포츠(Sports)·영화(Screen)·성(Sex) 산업을 키워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려 했다는 ‘3S 정책’으로 봅니다. 같은 시기 언론 통제와 민주화 운동 탄압이 이어졌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사회 변화에 맞춘 조치로 보는 쪽

    경제 성장과 도시화로 여가 수요가 커졌고 올림픽 유치로 개방이 필요해진 흐름에 맞춘 조치였다고 봅니다. 통금 해제와 교복 자율화는 이전부터 요구가 있던 일이며, 결과적으로 시민 생활의 자유를 넓혔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통금 시절의 풍경
    통행 금지 시간이 다가오면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고, 시간을 넘기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12월 31일 밤처럼 특별한 날에는 통금이 잠시 풀리기도 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146_야간 통행금지 해제 발표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2,184회 ·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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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최태성 강사가 야간 통행 금지 해제 발표를 짧게 정리합니다.

    사실 기록 · 기록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 1982년 야간 통행금지 마지막 날 | 백투더투데이

    대구MBC뉴스 · 1,724회 ·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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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2년 1월 4일 야간 통행금지 마지막 날 대구 거리를 담은 당시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밤 12시에는 동네 앞에도 못 나갔던 야간통금 시절 [그땐그랬지 : 야간 통행금지 80's]

    옛날티비 : KBS Archive · 69.3만회 ·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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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야간 통행 금지 시절을 KBS 옛 영상으로 보여 줍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오래된TV] 잃어버린 4시간, 통행금지 | 20060410 KBS방송

    옛날티비 : KBS Archive · 7,548회 ·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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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통행 금지 시대의 생활을 돌아본 KBS 오래된TV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에에엥~자정이 되면 전국을 '꼼짝 마' 시켰던 그 소리!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생기는 일!!

    KTV 아카이브 · 1,867회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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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82년 대한뉴스로 통행금지 해제 뒤 밤거리를 보여 주는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은] 밤 12시~새벽 4시 야간통행금지, 37년 만에 해제 (1982.1.5.) / KBS 2022.01.05.

    KBS News · 7,538회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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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82년 1월 5일 야간 통행금지가 37년 만에 풀린 일을 되짚은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라떼말이야] ⏰12시 통금을 지키지 못하면 철창행?!|우당탕탕 귀가 대소동 #라떼말이야 #MSG

    MSG · 10만회 ·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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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1982년 통금 철폐 전후 풍경을 재연한 교양 예능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옛날의 야간 통행금지 진풍경

    가족의 힘 · 1만회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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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대한뉴스로 통금 시절 풍경을 짧게 보여 줍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역대급 흥행’ 프로야구, 그 첫 경기 보셨나요? / KBS 2025.07.16.

    KBS News · 3.4만회 ·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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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1982년 프로야구 첫 경기를 되짚은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 탄생(1982) (2018.10.12/뉴스투데이/MBC)

    MBCNEWS · 2,550회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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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이 나온 날을 되짚은 보도입니다.

  7. 3.18

    사회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고신대생 문부식 등이 신군부의 5·18 진압을 미국이 묵인·지원했다고 항의하며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화재로 동아대생 1명이 숨졌습니다.

    • 주모자 문부식·김은숙은 사건 14일 만인 4월 1일 자수했습니다.
    • 재판에서 문부식·김현장은 1심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됐습니다.

    배경

    5·18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한미 연합사 소속 부대의 이동을 승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대학생과 재야 세력 사이에서 미국이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방조했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미국은 대체로 우호적인 우방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런 인식의 확산은 이전에 없던 흐름이었습니다.

    전개

    1982년 3월 18일 고신대생 문부식의 주도로 김은숙·김화석·박정미 등이 부산 대청동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화재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습니다.

    주모자 문부식과 김은숙은 범행 14일 만인 4월 1일 자수했고, 경찰은 방화 가담자와 전단 살포자, 의식화 학습을 함께한 사람 등 11명을 검거했습니다.

    재판에서 문부식과 김현장(강원도 탄광 노동자 사건 관련자로 배후로 지목됨)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김은숙 등은 무기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상급심에서 형량이 낮아지고 감형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미 운동의 상징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이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1985년) 등 반미를 내건 학생 운동이 잇달아 일어나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편으로 무고한 학생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였다는 점에서 폭력적 방법에 대한 비판도 함께 있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0년 5월5·18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한미 연합사 소속 부대 이동을 승인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2. 1982년 3월 18일문부식 등이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러 동아대생 1명이 숨졌습니다.
    3. 1982년 4월 1일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했습니다.
    4. 1982년재판에서 문부식·김현장이 1심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5. 이후상급심에서 감형이 이어졌고,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미 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물

    • 문부식

      방화를 주도한 고신대생으로 사건 뒤 자수했습니다.

      사건 당시 대학생이었으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돼 복역했고, 출소 뒤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미 운동의 정당한 문제 제기로 보는 쪽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론화한 사건으로, 이후 학생 운동의 반미 흐름에 큰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무고한 희생을 낸 폭력으로 보는 쪽

    목적이 무엇이든 무고한 학생의 목숨을 앗아간 방화라는 방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 책임을 물은 반미 운동의 출발점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 무고한 희생자를 낸 폭력적 방화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105_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9,982회 ·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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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교양 · 다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5회 - 어둠속의 외침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2000.09.24)

    INN Docu · 1,074회 · 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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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5월

    경제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대출액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아 사채 시장에 유통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습니다. 유통된 어음 규모는 7,111억 원에 달했습니다.

    • 일신제강·공영토건 등 관련 기업이 부도를 냈고 은행장 등 30여 명이 함께 구속됐습니다.
    • 정권 실세와의 인맥이 드러나며 전두환 정부에 대한 신뢰에 타격을 줬습니다.

    배경

    1980년대 초 기업들은 은행 대출 한도가 제한돼 있어 정상적인 금융만으로는 필요한 자금을 다 조달하기 어려웠고, 사채 시장에서 급전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철희는 육군 소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인물이었고, 부인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의 처제였습니다.

    이런 정권 실세와의 인맥 덕분에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은행권에서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존재로 통했고, 이를 발판 삼아 대규모 자금 조달 사업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전개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서 대출액의 2~9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어음을 다시 사채 시장에 유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기간 유통된 어음 규모는 7,111억 원,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은 6,404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1982년 5월 4일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구속되며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업계 2위였던 일신제강과 8위였던 공영토건이 부도를 냈고, 은행장을 포함해 약 30명이 함께 구속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사건은 정권 실세 인맥이 금융 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전두환 정부에 대한 신뢰에 큰 타격을 줬습니다. 이후 정부는 금융 거래 투명성을 높이려는 논의를 시작했지만, 실제 금융 실명제 도입은 1993년에야 이뤄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1년 2월이철희·장영자 부부가 자금난에 몰린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고액 어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 1982년 4월일신제강·공영토건 등이 부도를 내며 자금 흐름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3. 1982년 5월 4일이철희·장영자 부부가 어음 사기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4. 1982년은행장 등 약 30명이 함께 구속되며 금융권 전체로 파장이 번졌습니다.
    5. 1993년 8월이 사건 이후 논의되던 금융 실명제가 실제로 도입됐습니다.

    인물

    • 이철희1923~2014

      장영자와 함께 어음을 사채 시장에 유통해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해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고, 이 사건으로 구속돼 복역한 뒤 1992년 가석방됐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단군이래 최대 사기사건, 장영자-이철희 사건 (KBS_2004.07.16.방송)

    KBS 히스토리 · 15.1만회 · 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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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983

    6.30

    사회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1983.6.30 ~ 11.14 · 4개월

    138일 동안 453시간 넘게 이어진 생방송으로 1만 189명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났습니다. 방송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이 됐습니다.

    배경

    한국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가족은 1천만 명에 이른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많았습니다. 남한 안에서도 피란과 혼란 속에 가족의 행방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30년이 지나도록 서로를 찾을 체계적인 방법이 없었습니다.

    1971년부터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려 이산가족 문제를 다뤘지만 1973년 대화가 끊기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남한 안에서도 전쟁 중 피란이나 고아원 입소로 헤어진 가족이 많았는데, 이름이 바뀌거나 고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의 힘으로 찾기 어려웠습니다.

    전개

    1983년 6월 30일 밤 KBS는 한국 전쟁 33주년 특별 기획으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생방송했습니다. 원래 1시간 반 남짓 편성된 방송이었지만 신청자가 몰려들어 방송이 계속 연장됐고,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연속 생방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주변 벽과 광장은 가족을 찾는 사연을 적은 종이로 뒤덮였습니다. 출연자들이 헤어질 때의 상황과 이름, 고향, 몸의 특징을 말하면 전국의 시청자가 전화로 연락해 오는 방식이었고, 그 자리에서 가족이 확인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됐습니다.

    첫날 방송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KBS는 7월 초부터 정규 프로그램을 줄이고 이 방송을 연속으로 내보냈습니다. 유철종·이지연·김동건 등 여러 진행자가 교대로 방송을 이끌었습니다. 시청률이 최고 78%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결과와 의미

    방송은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453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10만 건 넘는 신청이 들어왔고 5만 건 넘는 사연이 방송됐으며, 1만 189명이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해외 방송사들도 이 장면을 전 세계에 전했습니다.

    이 방송은 남북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였고, 1985년 분단 이후 첫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방송 녹화 원본과 신청서 등 관련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올랐습니다.

    KBS 집계로 신청은 100,952건, 방송된 사연은 53,536건, 상봉은 10,189건이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3년 6월 30일 밤KBS가 한국 전쟁 33주년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시작했습니다.
    2. 1983년 7월 1일신청자가 몰려 방송이 새벽까지 이어졌고, 이후 정규 편성을 바꿔 연속 생방송이 됐습니다.
    3. 1983년 7월여의도 KBS 주변이 가족을 찾는 벽보로 뒤덮였고, 외국 방송사들이 현장을 전했습니다.
    4. 1983년 11월 14일138일, 453시간 45분 동안 이어진 방송이 끝났습니다.
    5. 1985년 9월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습니다.
    6. 2015년 10월방송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올랐습니다.

    인물

    • 설운도1958~

      방송 기간에 「잃어버린 30년」을 불러 널리 알려졌습니다.

      트로트 가수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잃어버린 30년」이 방송과 함께 큰 인기를 얻으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더 알아두기

    방송과 함께 기억되는 노래
    방송 중 배경 음악으로 자주 쓰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패티김)와 「잃어버린 30년」(설운도)이 크게 사랑받았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30년」은 이산가족의 사연을 담은 노래로 이 방송을 대표하는 곡이 됐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이산가족 Eng c.c] 너의 이름은 Your real name is | KBS 19830827 방송

    KOREAN DIASPORA KBS · 681.1만회 ·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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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한 장면 원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이산가족 Eng c.c] 전국민을 울린 이산가족 남매 The siblings who brought the entire nation to tears

    KOREAN DIASPORA KBS · 385.5만회 ·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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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3년 생방송에서 남매가 다시 만난 장면 원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이산가족 Eng c.c]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엄마!" (오리지널 버전) Mother (Original Version)

    KOREAN DIASPORA KBS · 171.6만회 ·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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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3년 생방송의 모자 상봉 장면 원본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44호-통한의 33년

    KTV 아카이브 · 2,487회 ·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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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3년 7월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과 거리 풍경을 담은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연속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0주년 기념 | [그땐그랬지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옛날티비 : KBS Archive · 82.8만회 ·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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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돌아본 KBS 아카이브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47호-피맺힌 사연들

    KTV 아카이브 · 1,222회 ·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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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이뤄진 상봉 사연을 담은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에이팅]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총 10189명 가족이 재회💧 전국적인 신드롬 일으킨 방송의 대반전 뒷이야기 전격 공개💥 | #이만갑 691회

    채널에이드: 채널A Drama & Enjoy · 42.2만회 · 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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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뒷이야기를 다룬 이만갑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453시간 생방송이 일궈낸 기적 [이산가족 40주년] / KBS 2023.06.30.

    KBS News · 2,357회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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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453시간 생방송 이산가족 찾기 40주년을 되짚은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궁금해요! 후앤후]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허현철 · 허현옥 남매 38년이 지난 지금은?

    KBS 교양 · 89.4만회 ·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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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방송으로 만난 남매의 이후 삶을 찾아간 KBS 교양 클립입니다.

    창작 · 영화

    [#국제시장] "왜 날 버리고 갔어요?" 잃어버렸던 동생의 한 마디에 무너진 황정민😭 눈물 없이 못 보는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 | #웅장한순간 #샾잉

    샾잉 #ing · 67.7만회 ·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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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5%추천 ★★★★★

    영화 국제시장 속 이산가족 찾기 방송 장면이라 창작이 섞여 있습니다.

  10. 9.1

    사회

    대한항공 007편 격추

    뉴욕을 떠나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에 격추돼 269명 전원이 숨졌습니다.

    배경

    1980년대 초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다시 거세진 이른바 ‘신냉전’ 시기였습니다. 소련 극동의 캄차카반도와 사할린섬 일대에는 핵잠수함 기지 같은 군사 시설이 몰려 있어 소련군은 이 지역 영공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대한항공 007편은 미국 뉴욕을 떠나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김포로 오는 보잉 747 여객기였습니다. 앵커리지에서 출발한 뒤 정해진 항로에서 점점 북쪽으로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전개

    여객기는 캄차카반도 상공을 지나 사할린 쪽으로 날아갔고, 소련 방공군은 전투기를 띄워 뒤를 쫓았습니다. 1983년 9월 1일 새벽(한국 시각) 사할린 서쪽 모네론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여객기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모두 숨졌고, 그 가운데에는 한국인과 미국인, 일본인 등이 있었으며 미국 하원 의원 한 명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소련은 처음에 격추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며칠 뒤 이 비행기가 첩보 임무를 띠고 영공을 침범했다며 격추를 정당한 조치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는 민간 여객기를 공격한 행위를 강하게 비난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규탄 결의안이 논의됐으나 소련의 거부권으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조사를 맡았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뒤인 1992년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비행 기록 장치(블랙박스)를 넘겨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1993년 보고서는 승무원이 자동 항법 장치를 잘못 설정해 항로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첩보 비행이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는 반공 여론이 크게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민간 항공기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을 국제 민간 항공 협약에 넣는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3년 8월 31일대한항공 007편이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을 떠나 중간 기착지인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내렸고, 급유와 승무원 교대를 마친 뒤 김포로 출발했습니다.
    2. 앵커리지 출발 뒤여객기가 예정 항로에서 조금씩 북쪽으로 벗어나기 시작했고, 몇 시간 뒤 캄차카반도 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련 전투기가 출격했지만 이때는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3. 1983년 9월 1일 새벽 3시 26분 무렵(한국 시각)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방공군 Su-15 전투기가 미사일 두 발을 쏘았고, 여객기는 모네론섬 부근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4. 1983년 9월 6일며칠 동안 격추 사실을 밝히지 않던 소련 정부가 전투기가 비행기를 멈추게 했다며 사실상 격추를 인정했습니다.
    5. 1983년 9월 9일소련군 총참모장 오가르코프가 기자 회견을 열어 여객기가 첩보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6. 1983년 9월 12일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격추를 규탄하는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소련의 거부권으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7. 1984년 5월국제민간항공기구 총회가 민간 항공기에 무기를 써서는 안 된다는 조항(제3조의2)을 국제 민간 항공 협약에 넣기로 의결했습니다.
    8. 1992년 11월한국을 방문한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사건 관련 자료와 비행 기록 장치를 넘겼고, 이듬해 국제민간항공기구가 이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인물

    • 래리 맥도널드1935~1983

      여객기에 타고 있다가 숨진 미국 하원 의원입니다.

      미국 조지아주 출신 하원 의원으로, 한미 상호 방위 조약 30주년 행사에 참석하려고 한국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현직 미국 의원이 숨지면서 이 사건은 미국 안에서도 큰 정치 문제가 됐습니다.

    더 알아두기

    GPS 가 민간에 열린 계기
    사건 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당시 군사용으로 개발하던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을 완성되면 민간 항공기도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쓰는 GPS 가 민간에 개방된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아웅산 테러와 같은 해
    대한항공 007편 격추 한 달여 뒤인 10월 9일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1983년 가을 두 사건이 잇따르면서 국내의 안보 불안과 반공 분위기가 한층 커졌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냉전과 북방 외교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52호-대한항공 여객기 피격 참사

    KTV 아카이브 · 13만회 ·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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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3년 9월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기에 격추된 참사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269명의 승객은 어디로 사라졌나? KAL 007기 격추사건 미스터리|짧은 그알

    그것이 알고싶다 · 105.3만회 ·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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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KAL 007 격추 경위와 의혹을 추적한 그것이 알고싶다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냉전이 747 추락 사고에 미친 영향 | 대한항공 #007 | 메이데이: 항공 참사

    Mayday: Air Disaster · 9.8만회 ·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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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항로 이탈과 격추 과정을 재구성한 항공 사고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53호-대한항공 여객기 피격 참사 특보

    KTV 아카이브 · 3.6만회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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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대한항공 007편 피격 참사를 전한 1983년 특보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소련 만행 분쇄하자" 1983년 대한항공 격추 사건 | 백투더투데이

    대구MBC뉴스 · 1,716회 ·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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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대한항공기 격추 규탄 분위기를 담은 당시 지역 방송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최악의 참사.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사건현대사 · 29.5만회 ·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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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대한항공 007편 격추 경과를 정리한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러시아가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시켰다고?? [지식스토리]

    지식스토리 Knowledge Story · 22.5만회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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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대한항공 007편 격추를 짧게 요약한 개인 채널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소련 영공에 무단 침범한 대한항공 여객기?!, MBC 210516 방송

    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 8만회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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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영공 침범과 격추를 다룬 서프라이즈 클립입니다.

  11. 10.9

    사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미얀마(당시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노린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로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인 17명이 숨졌습니다.

    배경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버마(지금의 미얀마)를 시작으로 서남아시아·대양주 여러 나라를 도는 순방에 나섰습니다. 비동맹 국가들과 관계를 넓혀 외교 무대에서 북한과 경쟁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버마는 남북한 모두와 수교한 나라였습니다.

    북한은 이 순방 일정을 노려 공작원을 보냈습니다. 공작원들은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예정이던 수도 랑군(지금의 양곤)의 아웅산 묘소 지붕에 미리 폭탄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아웅산은 버마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전개

    1983년 10월 9일 오전, 수행원들이 묘소에 먼저 도착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이동이 늦어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때 폭탄이 터졌습니다. 예행연습으로 울린 음악을 대통령 도착으로 착각해 범인이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폭발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재익 경제수석 등 한국인 17명이 숨지고 14명이 다쳤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화를 피해 곧바로 귀국했습니다.

    버마 당국은 북한 군 정찰국 소속 공작원 세 명을 쫓아 한 명을 사살하고 두 명을 붙잡았습니다. 붙잡힌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 가운데 김진수는 1985년 처형됐으며 범행을 자백한 강민철은 형이 무기로 바뀌어 수감 중 2008년 숨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버마 정부는 조사 끝에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 1983년 11월 북한과 국교를 끊고 국가 승인까지 취소했습니다. 두 나라는 2007년에야 국교를 다시 맺었습니다.

    경제 정책을 이끌던 핵심 관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정부 운영에 큰 공백이 생겼습니다. 사건 직후 국내에서는 보복을 요구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정부는 군사 대응에 나서지 않았고, 북한은 오늘날까지 관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3년 9월북한 공작원 세 명이 북한 화물선을 타고 버마 랑군(지금의 양곤)에 들어가 대통령 일행의 일정을 기다렸습니다.
    2. 1983년 10월 초공작원들이 아웅산 묘소 지붕 안쪽에 원격으로 터뜨릴 수 있는 폭탄을 몰래 설치했습니다.
    3. 1983년 10월 8일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서남아시아·대양주 6개국 순방의 첫 방문지인 랑군에 도착했습니다.
    4. 1983년 10월 9일 오전(현지 시각)먼저 묘소에 와 있던 수행원들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이 숨지고 14명이 다쳤습니다. 버마 사람도 여러 명 목숨을 잃었습니다.
    5. 1983년 10월 9일~11일버마 경찰과 군이 달아나던 공작원을 쫓아 한 명을 사살하고 두 명을 붙잡았습니다. 붙잡히는 과정에서 공작원들이 수류탄을 터뜨려 버마 쪽 사람도 다쳤습니다.
    6. 1983년 10월 10일전두환 대통령이 남은 순방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7. 1983년 11월 4일버마 정부가 수사 결과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 북한과 국교를 끊었습니다.
    8. 1983년 12월버마 법원이 붙잡힌 공작원 두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9. 2007년 4월미얀마와 북한이 24년 만에 국교를 다시 맺었습니다.

    인물

    • 김재익1938~1983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순방을 수행하다 숨졌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 관료로, 1980년대 초 물가 안정과 시장 개방·금융 자율화 정책을 설계한 인물로 꼽힙니다. 두 자릿수를 넘던 물가 상승률을 한 자릿수로 낮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 이범석1925~1983

      외무부 장관으로 순방을 수행하다 숨졌습니다.

      적십자 회담 대표 등으로 남북 대화에 참여했고 통일원 장관을 거쳐 외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광복군 출신의 철기 이범석(1900~1972)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 강민철1955~2008

      붙잡힌 북한 공작원으로, 범행을 자백했습니다.

      북한군 정찰국 소속 공작원으로 체포 과정에서 크게 다쳤습니다. 수사에서 범행 과정을 털어놓아 사형이 무기 징역으로 바뀌었고, 미얀마 교도소에서 25년 가까이 갇혀 지내다 2008년 숨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지금 남은 흔적
    2014년 아웅산 묘역 근처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국내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에 희생자들이 안장돼 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58호-버마 아웅산 폭발테러

    KTV 아카이브 · 7.3만회 ·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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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꼬꼬무2 18회 요약] 대한민국 핵심 장관들을 몰살시킨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 그 진실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달리 [SBS DALI] - SBS 공식 교양 채널 · 291.7만회 ·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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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경위를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요약] 대한민국 장관 17명이 동시에 사망한 전세계 유례없는 사건!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꼬꼬무2 | SBS NOW

    SBS · 35.7만회 ·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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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다룬 꼬꼬무 요약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그날이 알고싶다 - 드러난 테러의 전모ㅣ KBS 210309 방송

    KBS 히스토리 · 2.3만회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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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테러의 전모를 짚는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북한테러 처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이기백장군 정복 I 국방홍보원

    KFN · 15.5만회 ·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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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국방홍보원이 테러 당시 제복과 증언으로 현장을 전합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462호-버마정부 북괴응징

    KTV 아카이브 · 2.1만회 ·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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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테러 뒤 버마 정부의 북한 제재를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아웅산 테러 北 보복 작전 '늑대사냥' / YTN

    YTN · 876회 ·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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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아웅산 테러 직후 검토된 대북 보복 작전 문서를 전한 보도입니다.

  12. 1985

    1.18

    정치

    신한민주당 창당과 2·12 총선

    1985.1.18 ~ 2.12 · 26일

    신한민주당이 창당 25일 만에 치른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전국구를 합쳐 6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떠올랐습니다.

    • 옛 신민당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당명을 지었습니다.
    • 선거 직전 사면·복권된 김영삼·김대중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배경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유일한 원내 견제 세력이던 민주한국당은 신군부의 정치 구도 아래 만들어진 '관제 야당'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존재감이 약했습니다. 1985년 2월로 예정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84년 말 정치 규제에서 풀려난 옛 정치인들이 실질적인 야당 구실을 할 새 정당 창당에 나섰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새 야당이 조직을 다질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계산에서 선거를 서둘러 치르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유권자들의 관심을 새 야당에 쏠리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전개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이 창당됐습니다. 옛 신민당의 정신을 잇는다는 뜻에서 당명을 지었고, 이민우가 총재를 맡았습니다. 정치 규제에서 갓 풀려난 김영삼·김대중계 인사들이 직접 출마하지는 못했지만 배후에서 선거 운동을 이끌며 대거 참여했습니다.

    창당 25일 만인 2월 12일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은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합쳐 67석을 얻었습니다. 특히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신한민주당은 관제 야당으로 여겨지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단숨에 제1야당으로 떠올라 '2·12 돌풍'이라 불렸습니다. 이 결과는 옛 정치인들의 정치 규제가 조기에 풀리는 계기가 됐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에 힘을 실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4년 말정치 규제에서 풀려난 옛 정치인들이 새 야당 창당을 준비했습니다.
    2. 1985년 1월 18일신한민주당이 창당되고 이민우가 총재를 맡았습니다.
    3. 1985년 2월 12일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떠올랐습니다.
    4. 1985년 이후신한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5. 1987년'이민우 구상'을 둘러싼 내분으로 통일민주당이 갈라져 나갔습니다.

    인물

    • 이민우1915~2004

      신한민주당 창당을 이끌고 초대 총재를 맡았습니다.

      오랜 야당 정치인으로 신한민주당 총재를 지냈으며, 이후 '이민우 구상'을 내놓아 당내 갈등을 겪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552호-신한민주당 전당대회

    KTV 아카이브 · 2,078회 ·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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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7

    경제

    국제그룹 해체

    1985.2.7 ~ 2.21 · 15일

    전두환 대통령의 비공개 지시로 재무부와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의 자금 관리에 나섰고, 2월 21일 제일은행장이 그룹의 전면 해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계열사 21개는 그해 7월부터 다른 기업에 팔리거나 합쳐졌습니다.

    • 부실기업 정리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다는 배경이 거론됩니다.
    • 1993년 헌법재판소는 이 해체가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배경

    국제그룹은 신발 제조업체 국제상사를 모태로 성장해 1980년대 초 재계 순위 상위권에 오른 기업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전국경제인연합회 활동이나 정치 자금 지원에 다른 대기업만큼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뒤에 여러 차례 거론됐습니다.

    전개

    1985년 2월 7일부터 11일 사이 전두환 대통령은 재무부 장관에게 국제그룹 해체를 비공개로 지시했습니다. 2월 12일 재무부 장관의 지시로 제일은행과 은행 감독원이 국제그룹의 자금 관리에 나서 자산 처분 위임장을 걷었습니다.

    2월 20일 재무부 장관이 제일은행에 기업 정상화 금융 지원 계획을 무효화하고 국제그룹의 강제 해체와 전 자산 위임장의 강제 징수를 지시했습니다. 2월 21일 제일은행장이 국제그룹의 전면 해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계열사 21개는 그해 7월부터 한일그룹 등 다른 기업에 팔리거나 합쳐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1993년 헌법재판소는 이 해체 과정이 재무부 장관의 권한을 벗어난 공권력 행사로 재산권과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위헌이라고 결정했지만, 1996년 대법원은 계열사를 되찾으려는 국제그룹 쪽의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최종 판결했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특정 기업 집단을 강제 해체한 대표 사례로 남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5년 2월 7~11일전두환 대통령이 재무부 장관에게 국제그룹 해체를 비공개로 지시했습니다.
    2. 1985년 2월 12일제일은행과 은행 감독원이 국제그룹의 자금 관리에 들어갔습니다.
    3. 1985년 2월 20일재무부 장관이 제일은행에 국제그룹의 강제 해체를 지시했습니다.
    4. 1985년 2월 21일제일은행장이 국제그룹의 전면 해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5. 1985년 7월부터계열사 21개가 다른 기업에 팔리거나 합쳐졌습니다.
    6. 1993년헌법재판소가 이 해체 과정을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7. 1996년대법원이 계열사 반환 소송에서 국제그룹 쪽의 패소를 확정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국제그룹 해체의 배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실기업 정리로 보는 쪽

    국제그룹이 무리한 차입 확장으로 재무 구조가 부실했고,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체가 이뤄졌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정치 보복으로 보는 쪽

    정권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기업을 정부가 자금 관리를 앞세워 강제로 해체한 것으로, 1993년 헌법재판소도 이 조치를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다큐멘터리극장 – 국제그룹 해체의 진상/ KBS 19930829 방송

    KBS 히스토리 · 69.5만회 · 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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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9.20

    외교

    남북 이산가족 첫 고향 방문

    1985.9.20 ~ 9.23 · 4일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습니다.

    배경

    6·25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은 수백만 명으로 추산됐지만 30년이 넘도록 서로 생사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이 시작됐으나 몇 년 만에 중단됐습니다.

    1983년 KBS 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 생방송이 남한 안의 이산가족 1만여 명을 다시 만나게 하면서 남북 사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1984년 가을 남한에 큰 수해가 나자 북한이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안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북 대화가 다시 열렸습니다. 이어 적십자 회담이 재개됐습니다.

    북한이 보낸 수재 구호품은 쌀과 옷감, 시멘트, 의약품이었고, 1984년 9월 말부터 판문점과 인천항, 동해안 북평항을 거쳐 남쪽으로 들어왔습니다. 분단 뒤 남북 사이에 물자가 오간 첫 사례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1월 남북 경제 회담이 처음 열렸고, 1985년 5월에는 서울에서 12년 만에 남북 적십자 본회담이 다시 열렸습니다.

    전개

    적십자 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을 서로 보내기로 합의했습니다.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남북은 각각 151명 규모의 방문단(고향 방문단 50명, 예술 공연단 50여 명, 기자·지원 인원)을 서울과 평양에 동시에 보냈습니다.

    고향 방문단 100명 가운데 65명이 북과 남에 사는 가족·친척 92명을 만났습니다. 예술 공연단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공연을 했습니다.

    양쪽 방문단은 9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동시에 상대 지역으로 넘어갔습니다. 북쪽 방문단은 서울 워커힐 호텔에, 남쪽 방문단은 평양 고려 호텔에 머물렀고, 가족 상봉은 주로 이 숙소에서 이뤄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분단 뒤 처음으로 이산가족이 공식적으로 상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두 번째 상봉은 15년 뒤인 2000년 8월 남북 정상 회담 뒤에야 이뤄졌습니다.

    남북 적십자는 두 번째 교환 방문을 논의했지만, 1986년 1월 북한이 한미 연합 훈련인 팀스피릿 훈련을 이유로 모든 남북 회담을 중단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3년 6월 30일~11월 14일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38일 동안 이어져 남한 안의 이산가족 1만여 명이 다시 만났습니다.
    2. 1984년 9월 8일남한의 수해 소식을 들은 북한 적십자회가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3. 1984년 9월 말~10월 초북한의 쌀·옷감·시멘트·의약품이 판문점과 인천항, 북평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4. 1985년 5월서울에서 12년 만에 남북 적십자 본회담이 열려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 교환에 합의했습니다.
    5. 1985년 9월 20일남북 방문단이 판문점을 거쳐 동시에 서울과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6. 1985년 9월 21일~22일호텔에서 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예술 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했습니다.
    7. 1985년 9월 23일방문단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8. 1986년 1월북한이 팀스피릿 훈련을 이유로 남북 대화를 중단해 후속 방문이 무산됐습니다.
    9. 2000년 8월 15일~18일6·15 남북 공동 선언 뒤 15년 만에 두 번째 이산가족 교환 방문이 이뤄졌습니다.

    더 알아두기

    이산가족 상봉의 흐름
    1985년 첫 상봉 뒤 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을 계기로 대면 상봉이 정례화됐고, 화상 상봉도 열렸습니다. 2018년 8월 금강산 상봉 이후로는 대면 상봉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그사이 상봉 신청자 가운데 많은 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1985년 이산가족 상봉 및 예술단 교환방문

    KTV 국민방송 · 9,426회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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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5년 고향 방문단 상봉 장면을 담은 당시 기록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1985년 제작 : 19분]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 '혈육 찾아 육백리'

    K-팩트체커 · 2.9만회 ·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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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5년 첫 고향 방문단 상봉을 담은 당시 문화영화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1985 사상 첫 평양 공연! 비하인드 스토리ㅣKBS 230730 방송

    KBS 히스토리 · 1.1만회 ·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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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985년 교환 방문 때 평양 공연의 뒷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 다시보기] 이산가족 첫 상봉 (1985) (2018.09.21/뉴스투데이/MBC)

    MBCNEWS · 4,725회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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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을 다시 보여 주는 보도입니다.

  15. 1986

    경제

    3저 호황

    1986 ~ 1988 · 2년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덕분에 수출이 크게 늘어 처음으로 경상 수지 흑자를 냈습니다.

    배경

    1970년대 말 한국 경제는 중화학 공업 과잉 투자와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80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1980년대 전반 정부는 물가 안정과 긴축에 힘을 쏟았지만 외채가 많아 ‘외채 위기’ 걱정이 컸습니다.

    1985년 9월 미국·일본·서독·영국·프랑스 다섯 나라가 달러 가치를 낮추기로 합의한 ‘플라자 합의’ 뒤 일본 엔화 가치가 크게 올랐습니다. 1986년에는 국제 유가가 급락했고 국제 금리도 떨어졌습니다.

    1985년 말 한국의 외채는 460억 달러를 넘어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게 많은 편이었습니다. 멕시코·브라질 같은 중남미 나라들이 1980년대 초 외채를 갚지 못해 위기에 빠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도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습니다.

    전개

    저유가는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한국의 생산 비용을 줄였고, 저금리는 외채 이자 부담을 덜어 주었습니다. 달러 약세, 정확히는 엔화 강세 덕분에 해외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하던 한국 자동차·전자·철강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그 결과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세 해 연속 경제 성장률이 10%를 넘었고, 1986년 한국은 처음으로 연간 경상 수지 흑자를 냈습니다. 흑자는 이후 몇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엔화는 플라자 합의 전 달러당 240엔 안팎에서 1987년 말 120엔대까지 올랐습니다. 국제 유가는 1986년 초 산유국들이 생산을 늘리면서 배럴당 30달러 가까이에서 한때 10달러 남짓으로 떨어졌습니다. 경상 수지 흑자는 1986년 40억 달러대에서 1988년 140억 달러대까지 불어났습니다.

    결과와 의미

    늘어난 흑자로 외채를 줄일 수 있었고, 한국은 만성적 적자국에서 벗어났습니다. 한편 돈이 많이 풀리면서 부동산과 주식 값이 크게 올랐고, 1989년 이후 원화 가치 상승과 임금 상승이 겹치며 호황은 식었습니다.

    흑자가 쌓이자 미국은 한국에 원화 가치를 올리고 시장을 열라고 요구했습니다. 원화 가치는 1985년 말 달러당 890원 안팎에서 1989년 670원 안팎까지 올랐고, 1988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이 돼 경상 거래에 대한 외환 제한을 풀었습니다. 주가 지수는 1989년 3월 처음으로 1,000을 넘었으나, 1990년 경상 수지는 다시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5년 9월 22일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선진 5개국 재무 장관들이 달러 가치를 낮추기로 합의했습니다.
    2. 1986년 초산유국들이 생산을 늘리면서 국제 유가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3. 1986년한국이 처음으로 연간 경상 수지 흑자를 냈습니다.
    4. 1987년~1988년흑자가 해마다 커졌고 정부는 이를 외채를 앞당겨 갚는 데 썼습니다.
    5. 1988년 11월한국이 IMF 8조국이 돼 무역 등 경상 거래의 외환 제한을 없앴습니다.
    6. 1989년 3월 31일종합 주가 지수가 처음으로 1,000을 넘었습니다.
    7. 1990년원화 가치 상승과 임금 상승으로 수출 증가세가 꺾이며 경상 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인물

    • 김만제1934~2019

      3저 호황기인 1986~1987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경제 정책을 이끌었습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냈습니다. 재무부 장관을 거쳐 경제 부총리가 됐고, 뒤에 포항제철 회장과 국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3저 호황의 성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산업 구조의 성과를 강조하는 쪽

    외부 여건이 좋았더라도 그것을 수출로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부터 쌓은 중화학 공업 기반과 1980년대 초 물가 안정 정책 덕분이라고 봅니다. 이 시기의 흑자와 외채 감축이 1988년 올림픽과 이후 개방의 밑바탕이 됐다고 평가합니다.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보는 쪽

    성장의 상당 부분이 외부 행운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흑자로 생긴 돈이 기술 개발과 산업 고도화보다 부동산·주식 투기로 흘러 자산 격차를 키웠고, 호황이 끝난 뒤 구조 조정이 늦어진 것이 1990년대 문제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3저’ 란
    저유가(낮은 기름값)·저금리(낮은 국제 이자율)·저달러(달러 약세)의 세 가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저달러’는 달러에 대해 엔화 가치가 크게 오른 것을 뜻하며, 원화는 엔화만큼 오르지 않아 한국 수출에 유리했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588호-3저시대

    KTV 아카이브 · 5,122회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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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86년 4월 저유가·저금리·저달러 속 수출 호황을 전한 당시 영상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달콤했던 호황 뒤 찾아온 위기… 왜 우리는 힘들어졌을까… 불황에서 찾아야 하는 탈출구 | KBS 20240507 방송

    KBS 다큐 · 25.9만회 ·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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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3저 호황의 배경과 이후 위기를 분석한 KBS 시사기획 창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전두환 정권 세계 1위의 경제 성장 이야기 (feat. 3저호황)

    역사비디오 · 2.7만회 ·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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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3저 호황기 경제 성장을 다루며 관점이 강하게 들어간 해설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3저호황기 80년대~IMF이전 90년대초 한국 리즈시절 HD 영상

    Peter Thornton · 111.8만회 ·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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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0% · 간접 관련추천 ★★★★★

    1980~90년대 서울 풍경 모음이라 3저 호황 설명은 없습니다.

  16. 9.20

    사회

    서울 아시안 게임

    1986.9.20 ~ 10.5 · 16일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열렸습니다. 2년 뒤 서울 올림픽의 예행연습이 됐습니다.

    배경

    서울은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뽑혔고, 두 달 뒤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권도 얻었습니다. 정부는 두 대회를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보고 경기장과 도로, 한강 정비 사업 등을 추진했습니다.

    대회를 앞두고 1982년부터 한강 종합 개발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강바닥을 파내고 둔치를 고르게 다듬어 공원을 만들었으며, 강 남쪽을 따라 올림픽 대로를 놓았습니다. 사업은 아시안 게임 직전인 1986년 9월 마무리됐고, 잠실에는 1984년 올림픽 주경기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전개

    제10회 아시안 게임은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북한과 일부 나라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한국과 수교하지 않았던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보냈습니다.

    개막 1주일 전인 9월 14일 김포 공항 국제선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져 5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습니다. 정부는 북한과 관련된 테러로 보았으나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93개로 94개를 딴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를 했습니다. 육상 중장거리에서 금메달 세 개를 딴 임춘애 선수가 큰 화제가 됐습니다.

    대회에는 27개 나라가 참가했습니다. 개막식과 폐막식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은 복싱에서 12체급 금메달을 모두 따는 등 격투기 종목에서 강했고, 양궁·사격 등에서도 금메달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일본은 금메달 58개로 3위를 해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을 앞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대회 운영 경험과 경기장 시설이 2년 뒤 서울 올림픽으로 이어졌습니다. 중국 선수단의 참가는 한중 사이 민간 접촉이 늘어나는 흐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81년 9월 30일서독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뽑혔습니다.
    2. 1981년 11월 26일아시아 경기 연맹 총회에서 서울이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권을 얻었습니다.
    3. 1984년 9월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이 준공됐습니다.
    4. 1986년 9월한강 종합 개발 사업이 마무리됐습니다.
    5. 1986년 9월 14일김포 공항 국제선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져 5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습니다.
    6. 1986년 9월 20일제10회 아시안 게임이 잠실에서 개막했습니다.
    7. 1986년 10월 5일대회가 끝났고, 한국은 금메달 93개로 중국(94개)에 이어 종합 2위를 했습니다.

    인물

    • 임춘애1969~

      육상 800m·1500m·3000m 에서 금메달 세 개를 땄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중장거리 선수로, 대회 뒤 가장 널리 알려진 스타가 됐습니다. 2년 뒤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손기정에게서 성화를 넘겨받아 주경기장 트랙을 달렸습니다.

    더 알아두기

    김포 공항 폭탄 테러의 의문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뒤에 과거사 조사 과정에서 북한의 청부를 받은 외국 테러 조직이 저질렀다는 판단이 나오기도 했지만, 당시 폭발물 감식 보고서가 조작됐다는 증언도 나와 사건의 전모는 지금도 논란이 있습니다.
    ‘라면 소녀’ 이야기의 진실
    임춘애가 가난해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이야기가 오래 퍼졌지만, 본인은 뒤에 여러 인터뷰에서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고 말한 적은 없으며 이야기가 과장됐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611호-아시안 게임 개막

    KTV 아카이브 · 4.6만회 ·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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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1986년 9월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식 당시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613호-폐회식 특집

    KTV 아카이브 · 1.4만회 ·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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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1986년 10월 서울 아시안게임 폐회식 특집 영상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1986년 아시안게임 뒤집어 놓은 '라면 소녀' 3분 요약 / SBS / AG 그때 그 장면

    SBS 뉴스 · 3.1만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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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서울 아시안 게임 중 임춘애 선수 이야기에 집중한 보도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1595호-아시안게임 시설 준공

    KTV 아카이브 · 2.2만회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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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1986년 5월 아시안게임 경기장과 선수촌 준공 영상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1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냉전과 북방 외교

2차 대전 뒤 미국 중심 진영과 소련 중심 진영이 맞선 대립, 그리고 그 끝 무렵 한국이 사회주의 나라들과 관계를 연 외교입니다.

냉전은 한반도 분단과 6·25 전쟁의 배경이 됐습니다. 1980년대 말 냉전이 풀리자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소련·중국과 차례로 수교했고,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습니다.

예능

[#킬링타임 75분] 전쟁 없는 무한 대립 과정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 | #벌거벗은세계사

tvN D ENT · 13.1만회 · 1: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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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퀸스겜빗]으로 보는 냉전시대 역사배경설명ㅣ넷플릭스 추천

조승연의 탐구생활 · 41.5만회 ·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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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