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경제와 삼백 산업
미국의 원조 물자인 밀·설탕 원료·면화를 가공하는 제분·제당·면방직의 '삼백 산업'이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무상 원조가 줄면서 경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현대›전후 복구와 4·19 혁명
1953.7.27
현대
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는 동안 이승만 정부는 개헌으로 장기 집권을 이어 갔습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맞선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습니다.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밀정」
「대호」
「암살」
「여명의 눈동자」
「태극기 휘날리며」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인천상륙작전」
「국제시장」
「고지전」
「효자동 이발사」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주 4·3 사건 (~1954.9.21), 고지 쟁탈전 (~1953.7), 휴전 회담 (~1953.7.27)
1953
미국의 원조 물자인 밀·설탕 원료·면화를 가공하는 제분·제당·면방직의 '삼백 산업'이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무상 원조가 줄면서 경기가 어려워졌습니다.
10.1
한국과 미국이 외부 공격을 받으면 함께 대응하기로 한 조약으로, 1954년 11월 발효됐습니다. 미군의 한국 주둔 근거가 됐습니다.
1954
11.27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이 찬성 135표로 정족수(136표)에 한 표 모자라 부결이 선포됐습니다. 이틀 뒤 정부·여당은 재적 203명의 3분의 2가 135.33명이니 반올림하면 135명이라며 가결로 번복했습니다.
1956
5.15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이 3선했습니다. 진보당 조봉암이 200만 표 넘게 얻었고, 부통령에는 야당 장면이 당선됐습니다.
1958
1월
평화 통일론을 내건 진보당의 조봉암 등이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사형됐습니다.
12.24
여당이 경호권을 발동해 농성하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낸 뒤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신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60
2.28
일요일인데도 야당 유세장에 못 가게 등교를 시키자 대구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어진 첫 학생 시위입니다.
3.15
여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났습니다.
4.11
3·15 마산 시위 뒤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습니다.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4.19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경무대 앞 등에서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시위는 이어졌습니다.
4.26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 달 뒤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