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현대›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전후 복구와 장기 집권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원조로 전후 복구를 진행했습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길을 연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과 2·4 파동으로 반대 세력을 억눌렀습니다.

기간
1953.7.28 ~ 1959.12.31 · 6년 5개월
누가 다스렸나
대통령 이승만
담긴 것
사건 6 · 영상 45 · 영화·드라마 5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2022· 공식 영상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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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5 ~ 1989

애플TV+. 부산 영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4대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파친코》1~3부 몰아보기 | OTT 전체 1위 고품격 감동대작 | Pachinko 1~3 summary

카랑Karang · 379만회 ·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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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02· 공식 영상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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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20 ~ 1972

SBS.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극화(각색 많음)

드라마 · 2004· 공식 영상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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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40 ~ 1987

MBC. 일제강점기 말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두 기업가의 삶(실존 인물 모티프)

영화 · 2014· 공식 영상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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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0.12.15 ~ 1983.11.14

흥남 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까지 한 사람의 삶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정주행] 황정민 주연 천만 관객 영화 국제시장, 비하인드 스토리, 옥에 티 대방출

줌인센타 zOOm in Center · 150만회 ·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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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24· 공식 영상

「정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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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6 ~ 1960

tvN. 1950년대 여성 국극 배우를 꿈꾸는 소녀

사건 연표 6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제주 4·3 사건 (~1954.9.21), 고지 쟁탈전 (~1953.7)

  1. 1953

    경제

    원조 경제와 삼백 산업

    1953 ~ 1960 · 7년

    미국의 원조 물자인 밀·설탕 원료·면화를 가공하는 제분·제당·면방직의 '삼백 산업'이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무상 원조가 줄면서 경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배경

    6·25 전쟁으로 공장과 도로, 다리, 주택 상당수가 부서졌고, 정부는 세금만으로 나라 살림과 복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냉전 속에서 한국을 반공의 최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해방 뒤부터 1960년 무렵까지 미국의 원조는 모두 수십억 달러에 이르렀고, 1950년대 중반에는 나라 전체 수입의 대부분을 원조로 들여왔습니다.

    전개

    원조는 대부분 돈이 아니라 밀가루·원면(목화)·원당(설탕 원료) 같은 소비재와 원료로 들어왔습니다. 정부는 이를 팔아 생긴 돈을 ‘대충 자금’이라는 계정에 쌓아 국방비와 재정에 썼습니다.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제분·면방직·제당 공업이 크게 자랐고, 밀가루·면직물·설탕이 모두 흰색이어서 이를 ‘삼백(三白) 산업’이라고 불렀습니다.

    1956년 무렵부터는 미국의 남는 농산물을 들여오는 원조가 늘었습니다. 원조 물자와 달러를 누구에게 나눠 주느냐, 적산(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누구에게 싸게 넘기느냐가 기업 성장에 결정적이어서, 이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의 유착 논란이 일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원조 덕분에 전후 복구가 이뤄지고 소비재 공업이 자리를 잡았으며, 오늘날 대기업 가운데 일부가 이 시기 제당·제분·방직으로 성장의 기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값싼 원조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국내 밀과 목화 재배가 크게 줄고 곡물값이 낮아져 농촌 경제가 어려워졌습니다.

    미국이 국제 수지 문제 등으로 1957년 무렵부터 무상 원조를 줄이고 유상 차관 쪽으로 바꾸자, 원조에 의존하던 산업이 어려워지고 1950년대 말 경기가 크게 나빠졌습니다. 이 경제 불안은 4·19 혁명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48년 12월한국과 미국이 원조에 관한 협정을 맺었습니다.
    2. 1952년 5월 24일전쟁 중 원조와 유엔군 경비 문제를 조정하는 한미 경제 조정 협정(마이어 협정)을 맺었습니다.
    3. 1953년 12월한국 측 백두진과 미국 측 대표 우드가 원조 운영 방식을 정한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4. 1950년대 중반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제분·제당·면방직 공장이 잇달아 세워지며 삼백 산업이 커졌습니다.
    5. 1956년 무렵미국 공법 480호(PL480)에 따른 잉여 농산물 도입이 본격화했습니다.
    6. 1957년미국의 무상 원조액이 가장 많았고, 이후 해마다 줄었습니다.
    7. 1958년~1959년원조가 줄자 원조 물자에 기대던 공장들이 어려워지고 경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인물

    • 백두진1908~1993

      정부의 경제 책임자로 1953년 12월 미국과 원조 운영 방식을 정한 협약(백·우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은행가 출신 관료로, 전쟁 중과 전쟁 뒤 재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원조 자금과 환율, 물가 문제를 다뤘습니다. 뒤에 국회 의장을 지냈습니다.

    • 이병철1910~1987

      원조 경제 시기 제당(1953)과 모직(1954) 공장을 세워 사업을 키웠습니다.

      삼성의 창업자입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삼백 산업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자란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됩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자 산업으로 사업을 넓혔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1950년대 원조 경제의 의미

    복구와 성장의 기반이 됐다는 쪽

    원조가 없었다면 전쟁 직후의 굶주림과 물가 폭등을 막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원조로 들여온 물자와 기계로 공업이 다시 돌아갔고, 교육·보건 지원도 이어져 1960년대 이후 고도 성장에 필요한 기업·인력·기반 시설이 이 시기에 준비됐다고 평가합니다.

    의존과 불균형을 남겼다는 쪽

    원조가 소비재 중심이어서 기계·중화학 같은 생산재 공업은 자라지 못했고, 원조 농산물 때문에 농업 기반이 약해졌다고 봅니다. 원조 배분을 둘러싼 특혜로 정경 유착이 굳어졌고, 원조가 줄자 곧바로 경제가 흔들린 것이 자립하지 못한 구조를 보여 준다고 지적합니다.

    더 알아두기

    PL480
    미국의 ‘농업 수출 진흥 및 원조법’(공법 480호)을 흔히 PL480이라 부릅니다. 미국 안에서 남는 농산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지원하는 근거가 된 법으로, 한국에는 1956년 무렵부터 이 법에 따른 농산물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때 주변에서는
    원조를 받던 1950년대 한국과 달리, 일본은 6·25 전쟁의 군수 주문을 계기로 1955년 무렵부터 빠른 성장기에 들어섰습니다. 미국은 1950년대 후반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줄이면서 한국과 일본의 경제 협력을 바라는 뜻을 여러 번 내비쳤고, 이는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 논의로 이어지는 배경이 됐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115 1950년대 삼백산업(제당, 제분, 방직)의 발전

    KBS 히스토리 · 3.4만회 ·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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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영상한국사에서 삼백 산업의 성장을 직접 다룹니다.

    해설·교양 · 해설

    [심용환×토스] 광복 후, 우리나라에는 어떤 산업이 흥했을까? | [무묻사] #심용환 #현재사는심용환

    현재사는 심용환 · 2.4만회 ·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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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심용환이 1950년대 설탕·밀가루·면직 산업을 풀어 줍니다.

    해설·교양 · 강의

    [주제100-97강]-[☆현대의 경제-농지개혁과 미국의 원조]

    황현필 한능검 · 2.2만회 ·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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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황현필이 농지 개혁과 미국 원조 경제를 함께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밀가루가 귀했던 1950년대 국수는 어떻게 대중화 되었나?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 2,037회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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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원조 밀가루로 국수가 대중화된 1950년대 사정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원조수혜국에서 세계 최초로 원조지원국이 된 한국.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은 신의 선택이었다! |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제1편 “운명을 바꾼 선

    KBS 다큐 · 63.5만회 · 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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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45% · 간접 관련추천 ★★★★★

    한국 경제 100년 중 수출 주도 전략이 중심이라 원조 경제는 짧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먹을 것조차 부족했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은 어떻게 제조업 강국이 되었을까?|한국 경제 성장 60년의 중심에는 산업단지가 있었다!|특집 다큐|#골라듄다큐

    EBSDocumentary (EBS 다큐) · 14만회 · 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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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산업단지 60년을 다룬 다큐로 원조 경제 시기는 배경 정도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한국경제 70년, 게임 체인저는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었다" |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제3편 “산업전사들” (KBS 150820 방송)

    KBS 다큐 · 54.5만회 · 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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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25% · 간접 관련추천 ★★★★★

    중화학 공업 전환을 다뤄 1950년대 원조 경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2. 10.1

    조약

    한미 상호 방위 조약

    한국과 미국이 외부 공격을 받으면 함께 대응하기로 한 조약으로, 1954년 11월 발효됐습니다. 미군의 한국 주둔 근거가 됐습니다.

    배경

    휴전으로 전투는 멈췄지만, 한국 정부는 미군이 떠난 뒤 북한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1949년 미군 철수 뒤 1년 만에 전쟁이 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미국과의 방위 조약을 요구했고, 반공 포로 석방 뒤 협상에서 미국의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이승만은 유럽의 북대서양 조약처럼 한쪽이 공격받으면 자동으로 함께 싸우는 조약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의회의 전쟁 선포 권한과 한국이 단독 북진에 나설 가능성을 걱정해 자동 개입 조항을 넣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약은 미국이 필리핀·호주 등과 맺은 조약과 비슷한 형태로 정해졌습니다.

    전개

    1953년 8월 미국 국무 장관 덜레스가 서울에 와서 조약 문안에 합의했습니다.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 외무부 장관 변영태와 덜레스가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두 나라 의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 효력이 생겼습니다.

    미국 상원은 1954년 1월 조약을 비준하면서,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은 경우에만 미국이 도울 의무가 있다는 양해 사항을 붙였습니다. 한국이 먼저 북쪽으로 공격하는 경우까지 미국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조약은 1954년 11월 17일 두 나라가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부에 두고 미국이 군사·경제 원조를 계속한다는 ‘한미 합의 의사록’을 맺은 이튿날 효력이 생겼습니다.

    결과와 의미

    조약은 한쪽이 태평양 지역에서 무력 공격을 받으면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공동의 위험에 대처한다고 정했습니다. 또 미국이 한국 땅과 그 주변에 육해공군을 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이 조항이 오늘날까지 주한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입니다. 조약에는 기한이 없고, 한쪽이 끝내겠다고 통고하면 1년 뒤에 효력이 없어집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은 미국과 한국군 작전 지휘권 문제, 경제 원조에 관한 합의 의사록도 맺었습니다. 1966년에는 주한 미군의 법적 지위를 정한 협정(SOFA)이 체결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3년 7월 12일반공 포로 석방 뒤 협상 끝에 한미 양국이 방위 조약을 맺기로 한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 1953년 8월 8일서울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국무 장관이 조약 문안에 가서명했습니다.
    3. 1953년 10월 1일워싱턴에서 두 사람이 정식으로 서명했습니다.
    4. 1954년 1월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이 각각 조약을 비준했습니다. 미국 상원은 양해 사항을 붙였습니다.
    5. 1954년 11월 17일한국군 작전 지휘권과 원조 문제를 정한 한미 합의 의사록이 맺어졌습니다.
    6. 1954년 11월 18일비준서를 교환해 조약의 효력이 생겼습니다.
    7. 1966년 7월주한 미군의 법적 지위를 정한 협정(SOFA)이 서명됐습니다.

    사료로 읽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제3조(1953)‘헌법상의 수속에 따라’라는 말 때문에 미국의 자동 개입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비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제4조(1953)주한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되는 조항입니다. ‘배비’는 배치해 두는 것, ‘허여’는 허락해 준다는 뜻입니다.

    인물

    • 변영태1892~1969

      외무부 장관으로 한국을 대표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영문학자 출신 외교관으로, 1951년부터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1954년에는 국무총리를 겸했습니다. 1954년 제네바 회담 한국 대표였습니다.

    • 존 포스터 덜레스1888~1959

      미국 국무 장관으로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아이젠하워 정부의 국무 장관으로, 공산권 봉쇄를 위한 동맹 조약망을 넓힌 인물입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한미 동맹의 의미

    안보와 번영의 바탕으로 보는 쪽

    조약 이후 70년 넘게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안보 부담을 덜어 경제 성장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북한의 위협과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 안보의 핵심 장치라고 평가합니다.

    한계와 불평등을 지적하는 쪽

    조약에 ‘헌법 절차에 따라’라는 문구가 있어 미국의 자동 개입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또 주한 미군 관련 협정의 불평등 조항, 전시 작전 통제권 문제 등으로 한국의 자주적 판단이 제약받아 왔다고 보며, 더 대등한 관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지식채널e - 정전협정 70주년 특집 미니 다큐 [6.25 전쟁] - 제20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EBSCulture (EBS 교양) · 7만회 ·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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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다룬 EBS 지식채널e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24호 - 한·미 공수동맹 서명식 (1953년 8월 17일)

    KTV 아카이브 · 1.3만회 ·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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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1953년 8월 한미 방위 조약 가서명 장면을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둘러싼 한미의 치열한 외교전 [6·25전쟁 정전 70주년 특집] 메이드 인 코리아 2부

    현재사는 심용환 · 2.6만회 ·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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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심용환이 조약 체결까지 한미 외교전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정전협정 70주년 미니다큐 시리즈 E20] #국가보훈부 #한미동맹 #70년

    국가보훈부 · 2,233회 ·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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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5%추천 ★★★★★

    국가보훈부가 만든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미니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미국이 한국으로 와라! 이승만의 한미상호 방위조약 비하인드 스토리.

    전쟁의 신 [만물상자TV] · 4만회 ·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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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0%추천 ★★★★★

    포로 석방부터 조약 체결까지 이승만과 미국의 줄다리기를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70년 지기 외국 친구 있니?! 오래된 약속 미래를 위한 동맹 한미동맹_70주년 새로보는 리버티뉴스 3회

    KTV 아카이브 · 1,061회 ·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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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5%추천 ★★★★★

    한미 동맹 70년을 돌아보며 조약 체결을 다룹니다

  3. 1954

    11.27

    정치

    사사오입 개헌

    1954.11.27 ~ 11.29 · 3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이 찬성 135표로 정족수(136표)에 한 표 모자라 부결이 선포됐습니다. 이틀 뒤 정부·여당은 재적 203명의 3분의 2가 135.33명이니 반올림하면 135명이라며 가결로 번복했습니다.

    배경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재선한 이승만의 임기는 1956년까지였고,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한 번만 더 할 수 있게(중임) 제한했습니다. 1954년 5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과반 의석을 얻자,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개헌안에는 이 밖에 국무총리제 폐지, 주권 제약이나 영토 변경 같은 중대 사항에 대한 국민 투표제, 대통령이 궐위되면 부통령이 자리를 잇는다는 조항 등이 담겼습니다.

    전개

    1954년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 의원 203명 가운데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습니다. 개헌에는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했고, 203의 3분의 2는 135.33…이어서 136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사회를 보던 국회 부의장 최순주가 부결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자유당과 정부는 135.33…명은 사람을 쪼갤 수 없으니 반올림하면(사사오입) 135명이 되고, 따라서 가결 정족수를 채웠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11월 29일 국회에서 최순주 부의장이 부결 선포를 취소하고 가결을 선포했습니다. 야당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퇴장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개헌으로 이승만은 1956년 선거에 다시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방식에 반발해 자유당 안에서도 탈당하는 의원이 나왔는데, 젊은 의원이던 김영삼도 이때 자유당을 떠났습니다.

    야당 세력은 개헌 반대 투쟁을 계기로 모여 1955년 9월 민주당을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자유당과 민주당이 맞서는 구도가 자리 잡았습니다. 사사오입 개헌은 헌법 개정 절차를 억지 해석으로 뒤집은 사례로 헌정사에 남았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4년 5월 20일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2. 1954년 9월자유당이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냈습니다.
    3. 1954년 11월 27일표결에서 찬성 135표가 나와 최순주 부의장이 부결을 선포했습니다.
    4. 1954년 11월 28일자유당이 203의 3분의 2는 반올림하면 135라는 논리를 내세워 결과를 뒤집기로 했습니다.
    5. 1954년 11월 29일국회에서 부결 선포를 취소하고 가결을 선포했으며, 개정 헌법이 공포됐습니다. 야당 의원들은 퇴장했습니다.
    6. 1954년 12월이 처리에 반발한 자유당 의원 일부가 탈당했습니다.
    7. 1955년 9월개헌 반대 세력이 모여 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이 헌법공포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 1954년 개정 헌법 부칙제55조 제1항 단서는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이 부칙으로 당시 대통령 이승만만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됐습니다.

    인물

    • 이승만1875~1965

      개헌으로 중임 제한에서 벗어나 세 번째 출마의 길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입니다. 1956년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습니다.

    • 이기붕1896~1960

      국회 의장이자 자유당 실력자로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이승만의 비서를 거쳐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국회 의장을 지냈고 자유당의 2인자가 됐습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4·19 혁명 뒤 가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 알아두기

    사사오입이란
    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 이상은 올리는 반올림을 한자어로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고 합니다. 반올림은 사람 수처럼 나눌 수 없는 것에서 기준을 ‘넘어야’ 하는 정족수 계산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개헌, 알고 나면 더 황당하다?! | 설민석 한국사 강사 [어쩌다어른]

    tvN Joy · 18.5만회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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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민석이 사사오입 개헌의 경위를 짧게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강의

    [4.19특집1] - 사사오입합시다

    황현필 한국사 · 17.1만회 ·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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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필이 사사오입 개헌 번복 과정을 설명하는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반올림의 역습! 사사오입 개헌ㅣ KBS 200623 방송

    KBS 히스토리 · 5.8만회 ·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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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오입 개헌 표결을 다룬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오늘037_[이벤트종료] "나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사사오입 개헌' | 큰별쌤의 오늘

    최태성 2TV · 1.9만회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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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오입 개헌을 다룬 최태성 강사의 짧은 강의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사사오입' 헌법개정안 투표 실시 (11월27일)ㅣ뉴튜브 - 영상실록, 오늘N [51회] / YTN2

    YTN 밀덕스 · 544회 ·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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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오입 개헌안 표결을 당시 영상으로 되짚은 영상실록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45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신당 창당

    KBS 히스토리 · 1,810회 ·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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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한국사에서 사사오입 개헌과 뒤이은 신당 창당을 다룹니다.

    사실 기록 · 뉴스

    [오늘은] 사사오입 개헌 (1954.11.29.) / KBS 2022.11.29.

    KBS News · 1,453회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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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되짚은 오늘의 역사입니다

  4. 1956

    5.15

    정치

    제3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이 3선했습니다. 진보당 조봉암이 200만 표 넘게 얻었고, 부통령에는 야당 장면이 당선됐습니다.

    배경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은 세 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국회 의장을 지낸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습니다. 진보 세력을 대표해서는 조봉암이 출마했습니다.

    민주당의 구호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전쟁 뒤 어려운 살림에 지친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자유당은 ‘갈아 봤자 더 못 산다’로 맞섰습니다.

    전개

    1956년 5월 3일 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의 유세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지방 유세를 가던 열차 안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봉암 쪽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5월 15일 선거에서 이승만은 약 504만 표를 얻어 3선에 성공했습니다. 조봉암은 약 216만 표를 얻었고, 신익희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쓴 표 등 무효표도 180만 표 넘게 나왔습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장면이 자유당 이기붕을 이겼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승만은 당선됐지만 득표율은 이전 선거보다 크게 떨어졌습니다. 특히 대도시에서 야당 지지가 높았습니다. 여당은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온 상황에서, 81세의 이승만이 임기 중 궐위되면 야당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잇게 된다는 점을 크게 걱정했습니다.

    이 걱정은 1960년 선거에서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에 당선시키려는 3·15 부정 선거로 이어졌습니다. 또 조봉암의 선전은 여당에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진보당 사건의 배경이 됐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6년 3월이승만이 한때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집회와 탄원이 이어지자 뜻을 바꿨습니다.
    2. 1956년 3월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정했습니다.
    3. 1956년 5월 3일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신익희의 유세가 열려 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4. 1956년 5월 5일신익희가 호남 유세를 가던 열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5. 1956년 5월 15일선거에서 이승만이 3선에 성공하고, 부통령에는 장면이 당선됐습니다.
    6. 1956년 9월 28일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 대회장에서 저격을 받아 다쳤습니다.
    7. 1956년 11월 10일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못 살겠다 갈아 보자”
    — 민주당 선거 구호(1956)자유당은 이에 맞서 ‘갈아 봤자 더 못 산다’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인물

    • 신익희1894~1956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선거 열흘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입니다. 해방 뒤 귀국해 제헌 국회 부의장, 국회 의장을 지냈고, 민주당 창당을 이끌었습니다.

    • 조봉암1898~1959

      무소속(진보 세력) 후보로 200만 표 넘게 얻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 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으나 해방 뒤 공산당과 결별했습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을 이끌었고, 국회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 장면1899~1966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교육자이자 가톨릭 신자로, 초대 주미 대사와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부통령 재임 중인 1956년 9월 저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4·19 혁명 뒤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해설·교양 ·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3대 대통령 선거의 민낯! 민주당 후보의 급사?! 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20200419

    MBCentertainment · 6.5만회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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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을 넘는 녀석들이 신익희 급서와 3대 대선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못살겠다 갈아보자! -3대 대통령 선거ㅣ KBS 200623 방송

    KBS 히스토리 · 2만회 ·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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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를 다룬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사실 기록 · 기록

    대한뉴스 제 84호 - 故 해공 선생 국민장 운구 (1956년 5월)

    KTV 아카이브 · 3,263회 ·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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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선거 중 급서한 신익희 후보의 국민장을 담은 대한뉴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슬로건으로 보는 그때 그 시대 | 대선 슬로건 모음집 #탑골정치

    KBS 선거방송 · 4.8만회 ·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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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대선 구호를 훑고 3대 대선은 한 대목만 나옵니다.

  5. 1958

    1월

    정치

    진보당 사건

    1958.1 ~ 1959.7.31 · 1년 6개월

    평화 통일론을 내건 진보당의 조봉암 등이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사형됐습니다.

    • 2011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배경

    1956년 선거에서 선전한 조봉암은 그해 11월 진보당을 만들었습니다. 진보당은 무력 북진 통일 대신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을 주장했고, 경제적으로는 수탈 없는 복지 사회를 내걸었습니다. 1958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은 여당과 정부에 경계의 대상이 됐습니다.

    전개

    1958년 1월 경찰은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평화 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고,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였습니다. 2월에는 정부가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1958년 7월 1심 재판부는 간첩 혐의를 무죄로 보고 불법 무기 소지 등 일부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판결 직후 반공 청년을 자처하는 무리가 법원에 몰려가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2심과 대법원은 간첩 혐의까지 유죄로 보고 사형을 선고했고, 1959년 2월 형이 확정됐습니다. 재심 청구가 기각된 바로 다음 날인 7월 31일 조봉암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됐습니다.

    결과와 의미

    진보당은 해체됐고, 1950년대 말 제도권의 진보 정치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평화 통일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이 사건을 정권이 정치적 경쟁자를 없애려 한 반인권적 사건으로 판단하고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재심에서 간첩과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처형된 지 52년 만이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6년 11월 10일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됐습니다.
    2. 1958년 1월 12일~13일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고, 이어 조봉암도 검거됐습니다.
    3. 1958년 2월정부가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4. 1958년 7월1심이 간첩 혐의를 무죄로 보고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5. 1958년 10월2심이 간첩 혐의까지 유죄로 보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6. 1959년 2월 27일대법원이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7. 1959년 7월 30일~31일재심 청구가 기각된 이튿날 조봉암이 처형됐습니다.
    8. 2007년 9월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9. 2011년 1월 20일대법원 전원 합의체가 재심에서 조봉암의 간첩·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인물

    • 조봉암1898~1959

      진보당 위원장으로 체포돼 사형됐고,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경기도 강화 출신으로 3·1 운동 참여 뒤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조선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뒤 박헌영과 결별하고 제헌 국회 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유병진

      1심 재판장으로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사로서 정치적 압력 속에서도 증거에 따라 판결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판결 뒤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 양이섭

      북한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로 함께 기소돼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남북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사람으로, 양명산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심 법정에서 특무대의 강요로 거짓 진술을 했다고 말했지만, 2심에서는 다시 수사 기관 진술을 인정했습니다. 재심에서 대법원은 그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더 알아두기

    사법 살인이라는 말
    법원의 재판을 거쳤지만 조작되거나 부당한 판결로 사람을 처형한 경우를 ‘사법 살인’이라고 부릅니다. 진보당 사건은 재심 무죄 판결 이후 1975년 인민 혁명당 재건위 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I 046 조봉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다

    KBS 히스토리 · 3.7만회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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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형을 다룬 KBS 영상한국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역사스페셜 – 반세기 만의 무죄판결, 조봉암 죽음의 진실 / KBS 20110421 방송

    KBS 히스토리 · 49.7만회 · 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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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 사형과 52년 만의 재심 무죄를 다룬 역사스페셜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인물현대사 – 진보 사형당하다, 조봉암 / KBS 20040213 방송

    KBS 히스토리 · 7.7만회 · 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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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의 생애와 진보당 사건을 다룬 KBS 인물현대사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진실 그리고 화해 시즌5_7회] 반세기만에 밝혀진 무죄의 진실 -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Full Ver

    KTV 다큐 · 1,936회 · 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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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의 재심 무죄까지 다룬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예능

    [KBS 역사저널 그날] 헌정 사상 최초의 사법살인, 진보당 사건ㅣ KBS 200714 방송

    KBS 히스토리 · 2만회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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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형을 다룬 역사저널 그날 클립입니다.

    해설·교양 · 다큐

    국가보안법 파동과 진보당 사건 (우리가 잘 몰랐던 국회史 - 14회)

    NATV 국회방송 · 5,635회 · 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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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방송이 국가보안법 파동과 진보당 사건을 함께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PART Ⅱ.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 한홍구의 '통'역사 | 한홍구TV

    한홍구 TV · 1,094회 ·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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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한홍구가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을 강의합니다.

  6. 12.24

    정치

    2·4 파동(보안법 파동)

    여당이 경호권을 발동해 농성하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낸 뒤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신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 이듬해 4월 정부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이 폐간됐습니다.

    배경

    1958년 5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습니다. 1960년 선거를 앞둔 자유당은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과 야당의 활동을 막을 법적 장치를 원했습니다. 그해 가을 정부는 국가 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는데, 여기에는 사실을 왜곡해 ‘인심을 혼란하게 하는’ 보도를 처벌하는 조항 등이 들어 있어 언론 통제에 쓰일 수 있다는 비판이 컸습니다.

    개정안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인심 혹란’ 조항이었습니다. 공공연히 사실을 왜곡하거나 퍼뜨려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있게 한 것인데, 무엇이 ‘왜곡’인지를 수사 기관이 판단하게 돼 있어 정부 비판 기사를 막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국가 기밀과 반국가 단체의 범위도 넓어졌고, 대통령 등 헌법 기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도 논란이 됐습니다.

    언론계 등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지만, 자유당은 공산 세력의 침투를 막으려면 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전개

    민주당 의원들은 개정안 통과를 막으려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했습니다. 1958년 12월 24일 국회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자, 이를 위해 특별히 모은 무술 경위 수백 명이 야당 의원들을 회의장 밖 지하실 등으로 끌어냈습니다.

    야당 의원이 없는 가운데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국가 보안법 개정안과, 읍·면장을 선거가 아니라 임명으로 뽑도록 한 지방 자치법 개정안 등이 한꺼번에 통과됐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끌려 나간 사이 본회의는 짧은 시간에 여러 법안과 안건을 한꺼번에 처리했습니다. 풀려난 야당 의원들은 이날의 표결이 무효라며 원외 투쟁에 나섰습니다.

    결과와 의미

    개정 국가 보안법으로 정부 비판 보도와 발언을 처벌할 근거가 넓어졌고, 지방 자치 단체장 임명제로 선거 때 행정 조직을 동원하기 쉬워졌습니다. 1959년 4월 정부는 정부 비판에 앞장서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4·19 혁명 뒤 복간).

    이 사건으로 여야 대립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여론은 자유당 정권에 더욱 등을 돌렸습니다. 이는 3·15 부정 선거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인 사건으로 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958년 5월 2일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습니다.
    2. 1958년 8월자유당 정부가 국가 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습니다.
    3. 1958년 12월민주당 의원들이 개정안 처리를 막으려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4. 1958년 12월 24일무술 경위들이 야당 의원들을 끌어낸 가운데 국가 보안법 개정안과 지방 자치법 개정안 등이 한꺼번에 통과됐습니다.
    5. 1959년 초야당이 개정 법률의 무효를 주장하며 전국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6. 1959년 4월 30일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했습니다.
    7. 1960년 4월4·19 혁명 뒤 경향신문이 다시 발행됐습니다.

    인물

    • 이기붕1896~1960

      국회 의장이자 자유당 실력자로 국가 보안법 개정을 추진한 여당을 이끌었습니다.

      사사오입 개헌 항목에도 나옵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부통령 당선이 발표됐으나 4·19 혁명 뒤 가족과 함께 숨졌습니다.

    • 조병옥1894~1960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으로 개정 반대 농성과 이후 무효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미군정기 경무부장을 지낸 뒤 야당 정치인이 됐습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선거 한 달 전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이름에 관하여
    ‘2·4 파동’은 12월 24일에 일어났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국가 보안법 개정을 둘러싼 사건이어서 ‘보안법 파동’이라고도 부릅니다.
    경향신문 폐간
    정부는 미군정 시기의 법령을 근거로 들어 경향신문을 폐간했습니다. 경향신문 쪽은 행정 소송을 냈고, 4·19 혁명 뒤인 1960년 4월 말 다시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