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연표

근대› 개항기

청의 간섭과 개화의 확산

위안스카이가 10년 가까이 내정에 간섭하는 동안 배재·이화 학당이 문을 열고 경복궁에 전등이 켜졌습니다. 방곡령 분쟁이 일어났고, 동학은 교조 신원 운동으로 세를 드러냈습니다.

기간
1885.7 ~ 1894.2.14 · 8년 7개월
누가 다스렸나
임금 고종 · 위안스카이의 간섭
담긴 것
사건 7 · 영상 32 · 영화·드라마 5

이 시기를 한 번에 보는 영상 6편

여러 사건을 이어서 다루는 영상입니다. 옆으로 넘겨 보세요.

해설·교양 · 강의

역사 읽어드립니다 — 암군인가 개혁 군주인가, 고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9.3만회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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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고종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재위 기간을 훑는 강연입니다.

1864.1.21 ~ 1907.7.20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해설·교양 · 해설

흥선대원군부터 한일 병합까지 근대 한국사 한번에(지도 애니메이션)

로빈의 역사 기록 · 97만회 · 1: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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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90%추천 ★★★★★

흥선대원군부터 병합까지 근대사를 90분에 훑는 통합 영상입니다.

1864.1.21 ~ 1910.8.29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KBS 히스토리 · 95.5만회 ·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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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75%추천 ★★★★★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을 축으로 집권부터 을미사변 무렵까지 다룹니다.

1864.1.21 ~ 1895.10.8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해설·교양 · 다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EBS 다큐 · 70.5만회 · 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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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고종의 외교 선택을 다룬 EBS 다큐프라임 일부입니다.

1864.1.21 ~ 1907.7.20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해설·교양 · 다큐

KBS 한국사전 — 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KBS 히스토리 · 48.6만회 · 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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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0%추천 ★★★★★

김옥균을 쏜 홍종우의 삶을 추적한 KBS 한국사전입니다.

1884.12.4 ~ 1894.3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비극적 결말

사피엔스 스튜디오 · 16.3만회 ·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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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정변 실패 뒤 김옥균의 망명과 상하이 암살까지 다룹니다.

1884.12.6 ~ 1894.3 ·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 동학 교조 신원 운동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드라마 5편

공식 영상이 있는 작품은 바로 재생됩니다.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드라마 · 1982· 제목만

「풍운」

배경 1863 ~ 1898

KBS 대하드라마(51부작).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이 원작으로, 흥선대원군(이순재)의 집권과 쇄국을 그렸습니다

드라마 · 2001· 공식 영상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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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66 ~ 1895.10.8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의 일생을 따라 대원군과의 갈등부터 을미사변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드라맛집]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 몰아보기

KBS Drama Classic · 12.3만회 ·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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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2018· 공식 영상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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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71.6.1 ~ 1907.8

tvN.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의병 운동까지

요약 영상 · 결말 포함(스포일러 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최유진♥고애신 명장면 하이라이트

TVING 티빙 · 159.3만회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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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 제목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배경 1873 ~ 1895.10.8

명성황후와 호위 무사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엮은 영화

드라마 · 2010· 공식 영상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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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85.4.10 ~ 1905

SBS.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의사가 된 백정 출신 청년 이야기

사건 연표 7건

AI 분석 — 영상마다 제목·설명문·채널을 붙은 사건과 대조해 일치도(그 사건을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나)와 추천도(일치도·출처·설명의 충실함·조회수)를 매겼습니다. 영상을 끝까지 본 결과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2026-09-25 기준). 영상은 사실 기록(그때 찍은 기록·방송 뉴스), 해설·교양(다큐·강의·교양 예능), 창작(드라마·영화 — 허구가 섞임)으로 나눴습니다.

앞 시기에서 이어지는 일: 거문도 사건 (~1887.2.27)

  1. 1885

    8월

    사회

    배재 학당·이화 학당·육영 공원

    1885.8 ~ 1886.9 · 1년 1개월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 학당(1885)을, 스크랜튼 부인이 여성 교육 기관 이화 학당(1886)을 세웠습니다. 정부는 미국인 교사를 초빙해 관립 학교 육영 공원(1886)을 열었습니다.

    배경

    개항 뒤 외국어와 새 학문을 아는 인재가 필요해졌습니다. 1883년 원산 주민들이 원산학사를, 정부가 통역관을 기르는 동문학을 세웠습니다. 1880년대 중반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오며 교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공개적인 선교는 아직 허용되지 않아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통해 활동했습니다.

    전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서울 정동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1887년 무렵 고종이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같은 교단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 학생 한 명으로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리던 때라 처음에는 가난한 집 아이나 고아가 많았습니다. 1887년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정부는 1886년 9월 미국인 교사 헐버트·길모어·벙커를 초빙해 관립 학교 육영 공원을 열었습니다. 현직 관리(좌원)와 양반 자제(우원)를 뽑아 영어와 수학·지리·정치 등을 가르쳤습니다.

    결과와 의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서양식 교과와 한글·영어를 가르치며 근대 교육을 퍼뜨렸고,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두 학교는 오늘날 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집니다.

    육영 공원은 양반 자제만 받아 폭이 좁았고, 학생들의 의욕 부족과 재정난 속에 1894년 문을 닫았습니다. 근대 교육이 전국에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895년 교육 입국 조서 이후였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3년원산 주민들이 원산학사를, 정부가 통역관을 기르는 동문학을 세웠습니다.
    2. 1885년 4월 5일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3. 1885년 8월아펜젤러가 서울 정동에서 학생 두 명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4. 1886년 5월 31일메리 스크랜튼이 학생 한 명으로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5. 1886년 9월미국인 교사 헐버트·길모어·벙커를 초빙해 관립 학교 육영 공원을 열었습니다.
    6. 1887년고종이 배재학당,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7. 1894년육영 공원이 문을 닫았습니다.
    8. 1895년 2월고종이 교육 입국 조서를 내려 근대 교육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물

    •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1858~1902

      배재학당을 세우고 운영했습니다.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들어왔습니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고 성경 번역에 참여했으며, 1902년 성경 번역 회의에 가던 중 배 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1832~1909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쉰이 넘은 나이에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에 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입니다. 교육과 여성 선교에 힘쓰다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

      육영 공원 교사로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한글로 된 세계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썼습니다. 뒤에 고종의 밀사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애썼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더 알아두기

    첫 근대 학교는 어디인가
    1883년 세워진 원산학사가 주민이 스스로 세운 첫 근대 학교로 꼽힙니다. 배재학당은 첫 근대 사립 중등 교육 기관, 이화학당은 첫 여성 교육 기관, 육영 공원은 첫 관립 근대 학교로 각각 불립니다.

    해설·교양 · 다큐

    영상한국사 — 배재 학당·이화 학당, 신식 교육의 문을 열다

    KBS 히스토리 · 8,424회 ·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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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92%추천 ★★★★★

    배재 학당과 이화 학당의 설립 과정을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슬기로운 배재생활 EP.185]-[PCU-ABOUT] 역사는~~~최태성! 큰별샘과 함께하는 아띠들의 배재학당 Class~

    배재대학교 - Paichaiuniv · 10.9만회 ·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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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최태성 강사가 배재 학당의 설립과 의미를 강의합니다.

    해설·교양 · 다큐

    아펜젤러 (2) - 근대 교육의 개척자 (배재 학당, 정동감리교회 설립) @ 1907 믿음의 사람들

    CGN 내가 사랑한 조선 · 1.1만회 ·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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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5%추천 ★★★★★

    아펜젤러의 배재 학당 설립을 다룬 기독교 방송 다큐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외국인 선교사가 만들었다? 역사 속을 걷는다, 교보문고 역사여행 : 서울 배재학당, 덕수궁 중명전

    교보문고 · 4.2만회 ·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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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60%추천 ★★★★★

    배재 학당 터를 답사하며 근대 교육의 시작을 설명합니다.

    해설·교양 · 예능

    [#벌거벗은한국사] 16세 소녀들이 굳게 닫힌 이화학당의 교문을 열었다 16세가 주도한 만세 운동? 독립투사 유관순이 독립운동을 결심한 이유 | #갓구운클립

    tvN D ENT · 10.1만회 ·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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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5% · 간접 관련추천 ★★★★★

    유관순과 이화학당 이야기라 근대 학교 설립은 배경입니다.

  2. 11월

    정치

    위안스카이의 내정 간섭

    1885.11 ~ 1894.7 · 8년 8개월

    청은 갑신정변 진압을 이끈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상주시켰습니다. 그는 청일 전쟁 직전까지 약 10년 동안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깊이 간섭했습니다.

    배경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 때 우창칭의 부하로 조선에 와서 군대를 훈련시켰고, 갑신정변 때 청군을 이끌고 정변을 진압했습니다. 톈진 조약으로 청군이 물러난 뒤에도 청은 조선을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해 그를 서울에 상주시켰습니다.

    청은 거문도 사건과 조러 밀약설로 조선이 러시아 쪽으로 기울까 걱정했습니다. 리훙장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사정을 잘 알고, 갑신정변 진압으로 공을 세운 젊은 군인 위안스카이를 그 역할에 맞는 사람으로 골랐습니다. 그가 조선에 부임할 때 나이는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전개

    1885년 10월(음력 8월) 위안스카이는 청에 잡혀 있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조선에 돌아왔고,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으로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나라 공사보다 윗자리에 서려 했고, 궁궐에 가마를 탄 채 들어가는 등 조선 국왕 위에 선 감독관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던 묄렌도르프를 물러나게 했고, 조러 밀약설이 돌자 고종을 폐위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받았습니다. 1887년 조선이 박정양을 주미 공사로 보내자, 현지에서 먼저 청 공사를 찾아가 그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등의 세 가지 조건(영약삼단)을 붙여 조선의 독자 외교를 막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청 상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조선이 다른 나라에서 차관을 들이는 것을 막고 청의 차관을 쓰게 했습니다. 전신선을 청이 관리하게 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따르지 않고 1888년 1월 청 공사를 거치지 않은 채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국서를 전했습니다. 청이 이를 문제 삼자 조선은 박정양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85년에는 청의 자금으로 인천~서울~의주를 잇는 전신선(서로 전선)이 가설돼 조선의 통신이 청의 관리 아래 놓였습니다.

    결과와 의미

    약 10년 동안 조선의 외교와 내정은 청의 강한 통제를 받았고, 조선 상권에서 청 상인의 비중이 크게 늘었습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청일 두 나라가 파병하고 청일 전쟁이 벌어지자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떠났고, 청의 패배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도 끝났습니다.

    이 시기 조선은 청의 간섭을 줄이려고 미국인 데니 같은 외국인 고문을 두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넓혔지만, 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82년 8월위안스카이가 우창칭의 부하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2. 1884년 12월청군을 이끌고 갑신정변을 진압했습니다.
    3. 1885년 가을청에 잡혀 있던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4. 1885년 11월‘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으로 서울에 상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청이 서로 전선을 가설했습니다.
    5. 1886년2차 조러 밀약설이 돌자 고종 폐위를 꾀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6. 1887년조선이 박정양을 주미 공사로 보내자 청은 영약삼단을 붙였습니다.
    7. 1888년 1월박정양이 청 공사를 거치지 않고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했고, 청의 항의로 뒤에 소환됐습니다.
    8. 1894년 7월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위안스카이가 조선을 떠났습니다.

    인물

    •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

      청의 대표로 서울에 머물며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청 말기 군인이자 정치가입니다. 청일 전쟁 뒤 신식 군대를 길러 실력자가 됐고, 1912년 청이 무너진 뒤 중화민국 대총통이 됐습니다. 1915년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물러났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고종1852~1919

      러시아·미국 등과 관계를 넓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입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으며,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됐습니다.

    • 박정양1841~1905

      초대 주미 공사로 영약삼단을 따르지 않고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국서를 전했습니다.

      온건 개화파 관료로 조사 시찰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미속습유』를 남겼고,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시기 내각의 요직을 지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이 시기 고종의 외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주 외교의 노력으로 보는 쪽

    청의 강한 간섭 속에서도 러시아와 수교하고 주미 공사를 파견하는 등 여러 나라와 관계를 넓혀 독자적인 외교를 펴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일관성과 실력 부족을 지적하는 쪽

    강대국 하나에 기대어 다른 강대국을 막으려는 방식이 되풀이됐고, 그 과정에서 군사력과 재정을 키우는 근본적인 대책은 부족해 오히려 열강의 개입을 부추겼다고 봅니다.

    더 알아두기

    속방이란
    청은 오랜 조공 관계를 근거로 조선을 자신에게 딸린 나라(속방)라고 주장했습니다. 전통적인 조공 관계에서는 내정 간섭이 거의 없었지만, 이 시기 청은 이를 근대적인 지배 관계처럼 바꾸려 해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직접 손을 댔습니다.

    창작 · 드라마

    명성황후 — 3년 만에 돌아온 흥선대원군

    KBS Drama Classic · 8.7만회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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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70%추천 ★★★★★

    1885년 대원군이 청에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1885.11 ~ 1894.7 · 청에 붙잡혀 갔던 흥선대원군이 1885년 위안스카이와 함께 돌아오는 장면 모음입니다.드라마 「명성황후」(2001) — 극에는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

    해설·교양 · 해설

    구한말 임오군란, 갑신정변부터 동학농민운동까지 조선 근대화의 골든타임을 파괴한 위안스카이(원세개)의 조선 내 활동과 역사적 평가.

    한국사 최전선 · 93회 ·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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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85%추천 ★★★★★

    위안스카이의 조선 내 활동과 간섭의 결과를 정리한 개인 해설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권력에 미친 중국사 최악의 배신의 아이콘 위안스카이는 중국에 무슨 짓을 했을까? 신해혁명 4부

    역사돋보기 이영 · 17.2만회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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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30% · 간접 관련추천 ★★★★★

    신해혁명 시기 위안스카이를 다루어 조선 내정 간섭은 거의 없습니다.

  3. 1886

    사회

    노비 세습제 폐지

    노비의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노비 제도 자체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없어졌습니다.

    배경

    조선의 노비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노비가 도망하거나 돈을 내고 양인이 되는 일이 늘었고, 국가도 군역과 세금을 낼 양인을 늘리려 했습니다. 1801년(순조 1년)에는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해방했고, 궁방에 속한 노비도 차례로 풀어 주었습니다.

    개항 뒤 개화 정책을 펴던 정부는 사람을 대대로 묶어 두는 제도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남은 것은 개인 집에 속한 사노비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부모 가운데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는 원칙(일천즉천)에 따라 노비가 대를 이어 늘어났고, 노비는 사고팔거나 물려주는 재산으로 다뤄졌습니다. 영조 때인 1731년에는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을 양인으로 삼는 노비종모법을 확정해 노비가 늘어나는 흐름을 줄였습니다.

    전개

    1886년(고종 23년) 정부는 ‘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을 정해 노비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노비는 당사자 한 사람에 그치고, 그 자녀는 양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또 빚 때문에 스스로 몸을 판 경우에도 그 몸값이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등 매매와 세습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절목은 흉년에 거두어 기른 노비, 스스로 몸을 판 노비처럼 노비가 된 사정을 나누어 살폈지만, 어느 경우든 노비 신분을 당사자 한 몸에 그치게 한다는 원칙은 같았습니다. 주인이 노비의 자녀를 노비로 삼거나 사고파는 일은 이때부터 법으로 막혔습니다.

    결과와 의미

    이 조치로 노비 제도는 한 세대 안에 저절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미 노비인 사람의 신분은 그대로였고, 노비 제도 자체를 법으로 없앤 것은 8년 뒤인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였습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주인과 옛 노비의 관계가 관습으로 한동안 남은 곳이 있었습니다.

    노비 해방은 1894년 동학 농민군의 요구에도 들어 있었습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전하는 폐정 개혁안에는 ‘종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이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같은 해 군국기무처는 공사 노비에 관한 법을 모두 없애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하는 의안을 의결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731년영조가 노비종모법을 확정해,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을 양인으로 삼게 했습니다.
    2. 1801년 (음력 1월)순조가 내수사와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6만 6천여 명의 노비 문서를 불태우게 해 이들을 양인으로 풀어 주었습니다.
    3. 1886년 초고종 23년, 사가노비절목이 마련되어 사노비의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4. 1894년 여름동학 농민군이 집강소 시기에 노비 문서를 불태우는 일이 여러 고을에서 벌어졌다고 전합니다.
    5. 1894년 7월 30일 (음력 6월 28일)군국기무처가 공사 노비 제도를 모두 없애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하는 의안을 의결했습니다.

    인물

    • 고종1852~1919

      사가노비절목을 시행하게 해 사노비 세습을 끊었습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첫 황제입니다. 1873년 친정을 시작한 뒤 개항과 개화 정책을 폈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이유로 일본의 압력을 받아 물러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공노비와 사노비
    공노비는 관청이나 궁방에 속한 노비, 사노비는 양반 등 개인이 소유한 노비입니다. 1801년 해방은 중앙 관청의 공노비가 대상이었고, 1886년 조치는 사노비의 세습을 끊은 것입니다. 노비 해방은 한 번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쳤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조선의 신분제

    해설·교양 · 해설

    조선시대 양반과 노비는 한끗차이? 조선후기 신분제 붕괴과정 7분 정리! | 쉽고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

    조선에 이런일이 · 11만회 ·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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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분석일치도 50%추천 ★★★★★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 과정을 정리하며 노비 해방 흐름을 함께 다룹니다.

    해설·교양 · 다큐

    KBS 조선왕조실록 – 조선의 절반은 노비였다 / KBS 1998.2.3 방송

    KBS 히스토리 · 99만회 · 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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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노비제 전반을 다룬 KBS 다큐로 1886년 세습제 폐지는 거의 안 나옵니다.

  4. 6.4

    조약

    조불 수호 통상 조약

    프랑스와 수교했습니다. 조약에 '가르친다'는 문구가 들어가 천주교 선교가 사실상 허용됐습니다.

    배경

    프랑스와 조선의 관계는 1866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로 크게 틀어졌습니다.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되고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뒤 두 나라는 20년 가까이 공식 관계가 없었습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조선은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와 차례로 수교했습니다. 프랑스도 수교를 원했지만 선교 자유를 조약에 넣으려는 프랑스와 이를 꺼리는 조선의 입장 차이로 교섭이 늦어졌습니다.

    프랑스는 1884~1885년 베트남 문제로 청과 전쟁(청불 전쟁)을 벌이는 등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조선에는 병인박해 뒤에도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선교하고 있었고, 이들의 안전을 조약으로 보장받는 것이 프랑스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1882년에도 프랑스가 수교를 타진했지만 선교 문제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전개

    1886년 6월 4일 서울에서 조선 전권대신 김만식과 프랑스 전권대사 코고르당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조약에는 선교를 직접 허용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프랑스인이 조선에서 언어·학문을 ‘가르치는(敎誨)’ 일을 할 수 있다는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조약은 이듬해 비준을 거쳐 효력을 가졌습니다.

    협상에서 조선 측은 ‘선교’라는 말이 조약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두 나라는 제9관에 ‘교회(敎誨, 가르치고 깨우침)’라는 두 글자와, 프랑스인이 학자·통역·일꾼 등으로 조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는 선에서 합의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에는 없던 문구였습니다. 비준서는 1887년 5월 30일 서울에서 조선의 김윤식과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가 교환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프랑스는 이 ‘가르친다’는 문구를 근거로 선교 활동을 폈고, 천주교 선교는 사실상 공인되었습니다. 박해 시기 숨어서 활동하던 천주교는 이후 명동 성당(1898년 완공) 건립처럼 드러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약의 다른 내용은 앞서 맺은 영국과의 조약처럼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담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천주교는 1890년대 들어 교세를 빠르게 늘렸지만, 지방에서는 선교사·신자와 주민 사이의 충돌(교안)이 잇따랐고 1901년 제주에서는 큰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6년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과 많은 신자가 처형되고,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병인양요).
    2. 1882년프랑스가 수교를 타진했지만 선교 자유 문제로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3. 1886년 6월 4일 (음력 5월 3일)서울에서 김만식과 코고르당이 조불 수호 통상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4. 1887년 5월 30일김윤식과 콜랭 드 플랑시가 비준서를 교환해 두 나라가 정식으로 수교했습니다.
    5. 1888년콜랭 드 플랑시가 프랑스의 첫 대표로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6. 1898년서울 명동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7. 1901년제주에서 천주교 측과 주민이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물

    • 김만식1834~1901

      조선 측 전권대신으로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온건 개화파 관료로, 1882년 임오군란 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김윤식의 사촌 형으로, 개항기 여러 외교 실무를 맡았습니다.

    • 코고르당

      프랑스 전권대사로 서울에 와서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프랑스 외무부 관리로, 청불 전쟁 뒤 청과의 조약 실무에도 관여한 외교관입니다. 선교 보장 문구를 조약에 넣으려 했으나 조선의 반대로 ‘교회(敎誨)’라는 우회적 표현에 합의했습니다.

    • 콜랭 드 플랑시1853~1922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프랑스 대표로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중국어에 밝은 프랑스 외교관으로, 1888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조선의 책과 도자기 등을 수집했는데, 그가 모은 『직지심체요절』 하권은 뒤에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더 알아두기

    병인양요와 외규장각 도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외규장각 의궤는 이 조약으로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책들은 2011년 ‘5년 단위 갱신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서학(천주교)

    해설·교양 · 다큐

    [Diplomat's Archives: Hidden Stories] Ep.60 In Search of 140 Years of Korea-France Friendship

    Arirang TV · 612회 · 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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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6년 조불 수교와 양국 교류의 기록을 추적한 아리랑TV 다큐입니다.

    사실 기록 · 뉴스

    되살아난 고종의 선물…한·프 우정 140년의 기록 / 연합뉴스TV (YonhapnewsTV)

    연합뉴스TV · 369회 ·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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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교 140년 전시에 나온 조약 문서를 소개한 보도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한국사] 기본서 2권 48쪽 / 1880년대 근대 조약 해설 / 강화도조약 ~ 조불수호통상조약

    이명호 TV - 관세법, 무역학, 한국사 · 4,171회 ·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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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대 조약을 차례로 설명하고 조불 조약은 마지막 일부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한불수교 140주년] 프랑스 속의 한국

    Ambassade de Corée en France · 1,967회 ·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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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프랑스 대사관의 수교 140주년 홍보 영상이라 조약 자체는 짧습니다.

  5. 1887

    사회

    경복궁 전등 점등

    미국 에디슨 회사의 발전 설비로 경복궁 건청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켜졌습니다.

    배경

    1883년 미국에 간 사절단 보빙사는 에디슨의 전등을 직접 보고 돌아왔습니다. 고종은 궁궐에 전등을 들이기로 하고 에디슨 전기 회사와 설비 도입을 추진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이 늦어졌습니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실용화한 것은 1879년, 뉴욕에 첫 상업용 발전소를 세운 것은 1882년이었습니다. 1883년 민영익·홍영식·유길준 등이 속한 보빙사는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전기·우편·학교 같은 새 시설을 둘러봤습니다.

    전개

    1887년 경복궁 안 고종의 거처 건청궁에 발전기와 전등이 설치되어 불이 켜졌습니다. 발전기를 돌리고 식히는 데 궁 안 향원정 연못의 물을 썼습니다. 미국인 기술자가 설비를 맡았으며,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동아시아에서도 이른 시기에 전등이 켜진 사례로 꼽힙니다.

    1887년 초 발전기와 전등 기구, 그리고 에디슨 회사가 보낸 기술자 윌리엄 매케이가 도착해 설치를 진행했습니다. 점등한 날은 1887년 3월 6일 저녁으로 전합니다. 증기 기관으로 발전기를 돌렸고, 증기를 만들고 기계를 식히는 데 향원정 연못물을 끌어 썼습니다. 그런데 점등 직후 매케이가 한국인 조수가 다루던 권총이 잘못 발사되어 목숨을 잃었고, 설비를 제대로 다룰 사람이 없어 고장이 더 잦아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초기 발전 설비는 자주 고장 나 불이 켜졌다 꺼졌다 했고,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등을 ‘건달불’ ‘물불’이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전기가 궁 밖 일반에 쓰이게 된 것은 1898년 한성 전기 회사가 세워지고 1899년 전차가 다니면서부터입니다.

    1900년 4월에는 종로에 민간용 가로등이 처음 켜졌습니다. 궁궐의 전등이 켜진 뒤 10여 년이 지나서야 일반 사람들도 거리에서 전깃불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9년에디슨이 오래 켜지는 백열전구를 실용화했습니다.
    2. 1883년 가을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해 전기 시설 등을 둘러봤습니다.
    3. 1884년고종이 에디슨 전기 회사와 전등 설비 도입을 추진했으나, 12월 갑신정변으로 일이 멈췄습니다.
    4. 1887년 초발전 설비와 기술자 윌리엄 매케이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5. 1887년 3월 6일 저녁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이 켜졌다고 전합니다.
    6. 1887년 3월매케이가 권총 오발 사고로 숨졌습니다.
    7. 1898년황실이 미국인과 함께 한성 전기 회사를 세웠습니다.
    8. 1899년 5월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9. 1900년 4월종로에 민간용 가로등이 켜졌습니다.

    인물

    • 윌리엄 매케이?~1887

      에디슨 회사가 보낸 기술자로 건청궁 전등 설비를 설치했습니다.

      미국인 전기 기술자로, 조선의 전기 설비 관리 책임을 맡아 1887년 초 조선에 왔습니다. 점등 직후 권총 오발 사고로 숨져 설비 운영에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 민영익1860~1914

      보빙사 전권대신으로 미국의 전기 시설을 직접 보고 돌아왔습니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뻘로 1880년대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공격으로 크게 다쳤다가 선교 의사 알렌의 치료로 살아났습니다. 뒤에 홍콩·상하이 등지에서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알아두기

    오늘날 남은 흔적
    경복궁 향원정 주변에 ‘전기 발상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발굴 조사에서 당시 발전 설비와 관련된 유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해설·교양 · 다큐

    139년 전 한성에 켜진 전등, 고종이 불을 밝힌 진짜 이유

    KBS 다큐 · 16.5만회 · 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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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사진 자료를 따라가며 경복궁 전등을 함께 다룹니다.

  6. 1889

    경제

    방곡령

    1889 ~ 1890 · 1년

    일본으로 곡물이 대량 빠져나가 식량이 모자라자 함경도와 황해도 관찰사가 곡물 수출을 막는 방곡령을 내렸습니다. 일본은 한 달 전 통보 규정을 어겼다며 항의했고, 조선은 배상금을 물었습니다.

    배경

    개항 뒤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쌀과 콩을 대량으로 사 갔습니다. 일본은 공업화로 도시 인구가 늘어 곡물이 필요했고, 조선의 곡물은 값이 쌌습니다. 곡물이 빠져나가자 조선 안에서는 곡물 값이 오르고, 흉년이 든 지역에서는 먹을 것이 모자랐습니다.

    1883년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는 조선이 식량 부족 등을 이유로 곡물 수출을 막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다만 막기 한 달 전에 일본 영사관에 알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개항 초 조선이 일본으로 내보낸 수출품은 쌀·콩 같은 곡물과 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일본 상인은 봄에 돈을 미리 빌려주고 가을에 곡물로 받는 방식(입도선매)으로 곡물을 싸게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1876년 맺은 조일 무역 규칙은 곡물 수출입을 허용하면서 관세도 매기지 않았고, 1883년 통상 장정에 와서야 관세와 함께 방곡 조항(제37관)이 들어갔습니다.

    전개

    1889년 가을 흉년이 든 함경도에서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한 콩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습니다. 일본은 통보가 규정보다 늦었다며 항의했고, 조선 정부가 해제를 명령했는데도 조병식은 한동안 따르지 않았습니다. 1890년에는 황해도에서도 방곡령이 내려졌습니다.

    일본은 자국 상인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협상은 여러 해 이어졌고, 1893년 청의 중재를 거쳐 조선이 일본에 11만 환을 배상하기로 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조병식이 방곡령을 알린 것은 1889년 음력 9월이었습니다. 일본은 통보가 ‘1개월 전’이라는 기한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했고, 조선 정부는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옮기고 함경도 방곡령을 풀었습니다. 배상 협상은 1893년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은 새로 부임한 공사 오이시 마사미를 통해 처음에 14만 원이 넘는 금액을 요구하며 기한을 정한 최후통첩까지 보냈고, 조선의 요청을 받은 청의 리훙장이 일본에 타협을 권하면서 금액이 줄었습니다.

    결과와 의미

    방곡령은 규정에 따른 조치였지만 절차 문제를 빌미로 오히려 배상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조선 정부의 재정은 더 어려워졌고, 곡물 유출로 인한 농민의 고통은 이어졌습니다. 이런 경제적 불만은 이듬해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방곡령 사건은 불평등한 통상 조약 아래서 조선 정부가 자기 나라의 식량 문제에 대해서도 외국의 동의 없이는 조치를 이어 가기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76년조일 무역 규칙으로 곡물의 수출입이 허용되고 관세도 매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2. 1883년 7월 25일조일 통상 장정이 맺어져, 1개월 전에 알리면 곡물 수출을 막을 수 있다는 제37관이 들어갔습니다.
    3. 1889년 가을 (음력 9월)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한 곡물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4. 1890년 초일본의 항의로 조선 정부가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옮기고 함경도 방곡령을 풀었습니다.
    5. 1890년황해도에서도 방곡령이 내려져 일본이 다시 항의했습니다.
    6. 1893년 봄일본 공사 오이시 마사미가 배상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7. 1893년리훙장의 중재로 조선이 일본에 11만 환을 배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료로 읽기

    “如朝鮮國, 因有旱潦兵戎等事, 恐國內缺乏糧食, 欲暫禁糧米出口, 須先期一箇月, 由地方官知照日本領事官”
    — 조일 통상 장정 제37관(1883)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의 일로 인해 국내에 양식이 결핍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게 통지하여야 합니다.

    인물

    • 조병식1823~1907

      함경도 관찰사로 방곡령을 내렸습니다.

      여러 지방관과 대신을 지낸 관료입니다. 방곡령 사건 때 강경하게 버텼다는 평가와 함께, 지방관 시절 탐학으로 비판받은 일도 전합니다. 뒷날 독립협회와 대립한 수구파 인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오이시 마사미1855~1935

      일본 공사로 부임해 방곡령 배상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일본 자유민권 운동 출신 정치가입니다. 1892년 말 조선 주재 공사가 되어 방곡령 배상 문제로 최후통첩을 보내는 등 강경하게 나섰고, 이듬해 물러났습니다. 뒤에 일본에서 농상무대신 등을 지냈습니다.

    더 알아두기

    방곡(防穀)의 뜻
    ‘곡식이 나가는 것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흉년에 곡물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는 조치가 있었는데, 개항 뒤에는 외국으로의 수출을 막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해설·교양 · 강의

    매일 아침 떠먹는 한국사 용어_ 방곡령 | 사회탐구 용어사전-한국사 | EBSi 고교강의

    EBSi · 6,138회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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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곡령 용어를 짧게 설명하는 EBSi 강의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중학교 역사] 거문도 사건과 방곡령

    Gongbu Navi · 7,613회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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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문도 사건과 방곡령을 함께 다루는 중학 수업입니다.

    해설·교양 · 강의

    21강 〔근대3〕 방곡령 ~ 광무개혁 고1,고2 초급 YouTube 360p

    Kunsoo 김근수 Kim Kevin · 1.1만회 · 4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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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곡령부터 광무개혁까지 넓게 다루고 화질이 낮습니다.

  7. 1892

    11월

    운동

    동학 교조 신원 운동

    1892.11 ~ 1893.4 · 5개월

    동학교도들이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며 삼례·서울·보은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보은 집회에서는 '왜와 서양을 물리치자(척왜양창의)'는 구호가 나오며 정치 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배경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세운 종교입니다. 조정은 동학을 서학(천주교)과 비슷한 사교로 보아 1864년 최제우를 처형했습니다. 이후 동학은 금지된 종교였고, 교도들은 지방 관리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잡혀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숨어 다니며 교단을 다시 키웠습니다. 1880년대에 경전을 펴내고 조직(포·접)을 갖추면서 동학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교세가 커지자 교도들은 교조의 억울함을 풀고(신원) 포교의 자유를 얻자고 나섰습니다.

    전개

    1892년 가을 교도들이 공주에 모여 충청 감사에게 청원했고, 이어 음력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수천 명이 모여 전라 감사에게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감사들은 지방관의 탄압을 금지하겠다고 했지만 교조 신원은 조정의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893년 봄 교도 대표 40여 명이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했습니다(복합 상소). 고종은 돌아가 생업에 힘쓰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이 무렵 서울의 외국 공사관과 교회에 서양인과 일본인을 물러가라는 글이 붙기도 했습니다.

    1893년 음력 3월 충청도 보은에 2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척왜양창의(왜와 서양을 물리치고 의를 일으킨다)’를 내걸었습니다. 같은 무렵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도 집회가 열렸습니다. 정부는 어윤중을 선무사로 보내 해산을 설득하는 한편 군대를 보냈고, 모인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

    교조 신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동학교도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는 경험을 쌓았고, 요구가 종교 문제에서 외세 배척과 탐관오리 처벌 같은 정치·사회 문제로 넓어졌습니다. 1년 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지도자로 나선 인물 상당수가 이 집회들에 참여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1. 1864년 봄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2. 1880~1881년최시형이 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냈습니다.
    3. 1892년 음력 10월동학교도들이 충청도 공주에 모여 충청 감사에게 교조 신원과 탄압 중지를 청원했습니다.
    4. 1892년 음력 11월전라도 삼례에 수천 명이 모여 전라 감사 이경직에게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5. 1893년 음력 2월 11일박광호 등 교도 대표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사흘 동안 상소했습니다.
    6. 1893년 음력 3월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2만여 명이 모여 ‘척왜양창의’를 내걸었습니다.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도 따로 집회가 열렸습니다.
    7. 1893년 음력 4월 초선무사 어윤중의 설득과 관군 파견 속에 보은 집회가 해산했습니다.
    8. 1894년 2월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곧 동학 조직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인물

    • 최시형1827~1898

      동학 2대 교주로 교단 조직을 이끌며 신원 운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30여 년 동안 숨어 다니며 교단을 재건했습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를 펴내 경전을 정리했습니다. 1898년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 어윤중1848~1896

      양호 선무사로 보은 집회에 가서 해산을 설득했습니다.

      온건 개화파 관료로 재정에 밝았습니다. 보은에서 모인 사람들을 무조건 비적으로 몰지 않고 ‘민회’로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갑오개혁 때 탁지부 대신을 지냈고, 1896년 아관파천 직후 피살되었습니다.

    평가가 갈리는 부분 — 입장을 나란히 적습니다

    보은 집회의 성격

    정치 운동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쪽

    ‘척왜양창의’를 내건 보은 집회는 종교 청원을 넘어 외세 배척을 요구한 정치 운동이었고, 1894년 농민 운동으로 곧장 이어졌다고 봅니다. 서양 근대 의회에 빗대 ‘민회’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종교 운동의 성격을 강조하는 쪽

    최시형을 비롯한 교단 지도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교조 신원과 포교 자유였고, 정치적 구호는 일부 세력이 주도한 것이라고 봅니다. 교단 지도부와 전라도의 강경 세력 사이의 입장 차이는 1894년 봉기 때도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알고 보면 쉬운 개념동학

    해설·교양 · 강의

    EBS(사회탐구)한국사-동학의 창시와 교조신원운동에 대해 알려주세요.

    EBSi · 4,289회 ·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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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성의 EBS 강의로 동학 창시와 교조 신원 운동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해설·교양 · 강의

    [도올김용옥] 보은민회와 동학혁명 - '교조신원운동'에서 '척왜양창의'로 - "보수나 진보나 국가미래에 대한 핵이 없다. 그런거 생각하면 저는 슬프죠"

    도올TV · 4.3만회 · 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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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집회를 중심으로 교조 신원 운동의 성격을 짚는 도올의 강연입니다.

    해설·교양 · 해설

    동학의 창시와 교조 신원 운동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12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 3.2만회 ·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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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의 창시와 교조 신원 운동을 한 편에 정리한 해설입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 3개

사건 설명에 나오는 말을 풀었습니다. 사건 밑의 개념 이름을 누르면 여기로 옵니다.

조선의 신분제

조선 사회를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눈 신분 질서입니다.

법으로는 양인과 천인 두 신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양반·중인·상민·천민 네 층으로 나뉘었습니다. 노비와 백정 등 천민은 가장 큰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선 후기 납속과 공명첩, 족보 매매 등으로 양반 수가 크게 늘며 신분제가 흔들렸고,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 폐지됐습니다. 그 뒤에도 차별은 이어져 1923년 형평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능

[#어쩌다어른] 상상초월 조선시대 노비의 가격은? 신분 상승을 노리고 주인을 겁탈한 노비의 최후 | #지금꼭볼동영상

디글 :Diggle · 27.7만회 ·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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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4K풀] 신분제에 도전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 영화같은 일대기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조선의 신분제 2부 "노비, 사또가 되다" (KBS_2

KBS 히스토리 · 42.6만회 · 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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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3역사②[5-2~1]사회 변화와 농민의 봉기(1)(feat.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빡공시대 람보쌤 4시간의 기적

빡공시대TV · 29.8만회 · 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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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천주교)

조선 후기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과 천주교를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17세기 청에 간 사신들이 서양 학문 서적을 들여오면서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됐고, 18세기 후반 일부 남인 학자들이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사를 거부하고 신분 차별을 부정하는 교리가 유교 질서와 충돌해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습니다(신유박해 1801, 기해박해 1839, 병인박해 1866).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이후 사실상 선교가 허용됐습니다.

다큐

KBS 한국사전 – 닫힌 시대의 젊은 열정,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이벽 / KBS 2007.12.22 방송

KBS 히스토리 · 39.5만회 · 4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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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신을 믿는 자에겐 죽음뿐이었다.. 정약용 3형제가 동시에 천주교에 빠진 이유 | KBS 20120126 방송

KBS 다큐 · 54.4만회 ·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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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조선이 수만 명의 천주교인을 박해한 진짜 이유 | 성기헌 바오로 신부 [더 릴리전]

삼프로TV 3PROTV · 28.1만회 ·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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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뒤에 천도교가 됐습니다.

서양의 종교·학문인 서학(천주교)에 맞선다는 뜻에서 '동학'이라 했습니다. 유교·불교·도교와 민간 신앙을 아우르고,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며 모든 사람의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꾼다는 '후천개벽'을 내세워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 사이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정부는 이를 위험하게 여겨 1864년 최제우를 처형했지만, 2대 교주 최시형이 조직을 넓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바탕이 됐습니다.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가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습니다.

해설

[종교] 동학농민운동의 뿌리, 동학이란 무엇인가? : 도올 김용옥의 역주, 동경대전-최제우 1부

일당백 : 일생동안 읽어야 할 백권의 책 · 15.4만회 · 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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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역사만화 72화) [공부왕찐천재]

공부방찐천재 · 4.9만회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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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동학의 창시와 교조 신원 운동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12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 3.2만회 ·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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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교과서와 공적 기관 서술을 기준으로 적었고, 평가가 갈리는 부분은 양쪽 견해를 함께 적었습니다. 1895년 이전 날짜는 양력이며 원래 음력 날짜를 따로 적었습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재생되며 조회수는 2026-09-24 기준입니다. 영화·드라마는 공식 예고편이고, 극에는 사실에 창작이 더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