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제 실시
관청이 곡식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던 환곡이 수탈 수단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직접 곡식 창고(사창)를 운영하게 했습니다.
배경
환곡은 원래 봄에 굶주린 농민에게 관청이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구휼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나라 재정을 메우는 수단이 되면서, 필요 없는 사람에게도 억지로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거나 장부만 꾸며 곡식을 빼돌리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전정·군정과 함께 ‘삼정의 문란’으로 불렸고,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1862년 임술 농민 봉기 뒤 조정은 삼정이정청을 두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한때 환곡을 없애고 그 부족분을 토지세로 옮기는 안을 내놓았지만, 재정 손실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밀려 몇 달 만에 이전 방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환곡을 어떻게 고칠지는 대원군 정권에 그대로 넘어온 과제였습니다.
전개
흥선대원군은 1867년 사창 운영 규정(사창절목)을 마련해 환곡을 사창 방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면이나 마을 단위로 곡식 창고를 두고, 관리 대신 그 지역에서 신망 있는 사람(사수)을 뽑아 곡식을 빌려주고 거둬들이게 했습니다.
사창의 곡식은 관청 창고 대신 마을 가까운 창고에 두어 농민이 먼 길을 오가는 부담을 덜었습니다. 빌려준 곡식의 이자 일부는 사창을 운영하는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나라 재정에 보탰습니다.
결과와 의미
관리와 아전이 끼어들 여지가 줄어 환곡의 폐단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시행되지는 않았고, 곡식의 이자는 여전히 재정 수입으로 쓰였습니다. 운영을 맡은 지역 유력자가 새로 이익을 챙기는 문제도 생겼습니다.
사창제는 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이어졌지만 지역에 따라 운영이 흐트러졌고, 환곡의 폐단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에도 농민들이 고쳐 달라고 요구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기
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박규수1807~1877
더 알아두기
- 사창제는 새로운 제도였나